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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의 분부(요20:19-23)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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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5-01 00:19 조회 19,893 댓글 0
 
이 세대 최고의 영성 신학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유진 피터슨의 책, <부활>에 보면 그는 부활을 하루 부활 주일에 기념하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부활이 신앙생활의 중심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부활 신앙은 일 년 내내 날마다 순간마다 기독교인 각 사람을 붙들어 주는 힘의 원천이요 능력의 바탕이요 활력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한다. 그렇다. 그 어느 누가 이 같은 부활 신앙에 대하여 반기를 들 것인가. 개인이든 가정이든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이든지 이 부활 신앙에 붙들려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매우 간단하다. 왜일까.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이니 장황할 이유가 전혀 없다. 사실이란 언제나 육하원칙에 의한 간략한 기록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허구나 만든 이야기라면 이러 저러한 설명이 장황하겠으나 사실의 기록은 군더더기가 필요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이 세상 어디에도 부활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란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단순한 종교 이상이다. 흔히 우리는 역사의 구분을 B. C와 A. D로 구분하는 것을 본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단기(檀紀)나 불기(佛紀)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서기(西紀)를 사용한다. 서기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BC 란 Before Christ 즉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를 말한다. A. D란 Anno Domini 즉 라틴 말로 ‘그리스도의 해 이후’라는 뜻이다. 그렇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역사의 구분이 서기에 근거하는 서기력을 달력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인이시다. 깨닫든지 못 깨듣지 그렇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고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가는 것은 복 중의 복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이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사망을 이긴 생명의 부활이요 영생의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 모든 의문과 모든 숙제의 대답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고 나중에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사도에게 보이셨다. 그 후로 수많은 성도들에게 보이시다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부활이시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 부활의 축복이다.(고전15:20-2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부활 신앙은 우리 믿음의 바탕이요 기초다. 이 부활 신앙에 붙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것의 열쇠요 대답이 부활인 것이다.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순교자의 길을 가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와 공의의 길을 갈수 있었던 힘은 바로 부활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 날의 성도들은 축복 신앙은 붙들고 살아가려하는 반면에 부활 신앙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저녁 시간에 열한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어는 곳에 모여서 문을 꼭꼭 닫아걸고 숨어 있었다. 그런 그 곳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 가신 것이다. 그 부활하신 그 밤에 제자들을 만나서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교훈을 오늘 다시 맞는 부활절 메시지로 가슴에 간직하자. 크게 세 가지 교훈을 분부하셨다.

평강(平康)의 선포(宣布)
“너희에게 평강(平康)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룩하신 것은 죄 사함과 영생의 축복이다. 그러나 그런 은총을 체험한 이들에게 경험되는 놀라운 삶의 질적 변화가 바로 평강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삶의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면 마음에 평강이 찾아  온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좌절 절망이 물거품처럼 다 사라지고 놀라운 평강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된다. 굶주린 사자 앞에 있어도 평강하고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활활 타는 풀무 불 앞에서도 평강하게 된다. 이것이 다니엘의 믿음이며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시작하면 마음에 평강이 임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영접하여 믿고 따르기 시작하면 마음에 강처럼 흐르는 평강과 평화와 임하게 된다. 병들어도 평강하고 가난해도 평강하고 삶이 얽혀도 평강하고 살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안되어도 평강하게 된다. 이것은 세상을 염세적으로 살고 포기하고 살기 때문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상태의 허무감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축복인 것이다.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배반하고 비겁하게 행동하던 예수의 제자들이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성령 받고 위대한 역사의 사도들이 된 힘은 바로 부활 신앙이다. 부활 신앙이 성령 충만으로 이어질때에 그 어떤 어려움과 환란과 핍박을 받는다고 하여도 평강을 빼앗기지 않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들이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난주에 <예수를 위한 바보>라는 책을 읽었다. 데이빗 케이프라는 목사님의 책이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열방 교회를 성공적으로 섬기던 담임 목사였다. 그런 그에게 14개월 동안 계속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이 있었다. 목회를 내려놓고 길거리에 나아가서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라는 부르심이었다.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14개월 동안 그러한 부르심이 마음과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순종하게 된 것이다. 이 단순한 사역에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순종하기 시작하였는데 길거리에 만나는 낯 설은 사람들의 발을 씻어 주는 이 사역을 통해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신비한 일들을 계속하여 경험하고 있다. 십자가 모양의 판 중앙에 세숫대야를 얹어서 등에 메고 물통과 수건을 준비하고 트레일러를 타고 이 곳 저 곳 이 도시 저 도시 이 마을 저 마을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과거에 영국의 잔 웨슬리 목사의 때에 일어났던 그런 기적처럼 이 데이비 케이프 목사를 통하여 조직 폭력배, 알코올 중독자, 한센 병자, 시장, 군대의 장군들과 나라의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와 회복과 변화가 일어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십자가가 달린 대야, 물통, 수건, 접 의자등 20kg의 무게를 잔등에 지고 오늘 날까지 무려 3,000km의 대 장정을 걷고 또  걸으며 그 누군가의 발을 씻어 주는데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바로 이런 것이다. 예수 안에서 평강을 마음에 선물로 받고 복음을 깨달은 이들은 그 마음의 평강을 누군가에게 계속하여 전하고 옮겨주는 평강의 전달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길을 가는데 타조가 자기를 따라 오면서 날개를 펴고 춤을 추고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배회하고 자기를 알아 봐 달라고 반기고 하더란다. 나중에 안 사실은 그 타조가 자기를 여자 타조로 알고 사귀자고 곁에 와서 프로 포즈 한 것이란다. 이사야의 환상처럼 복음 안에 살면 자연이라도 춤을 추고 들짐승인 타조와 시랑이라도 함께  춤을 추고 함께 노래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사야 11장 6절 이하 9절까지의 말씀처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런 평강의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데이빗 맥캐스랜드의 책, <순종의 길>에 보면 “최근에 저는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라는 느낌이 너무 좋고 놀랍습니다. 기도로 주께 나아가는 것이 이제는 말할 수 없이 즐겁고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제 영혼의 깊은 곳은 평강(平康)으로 넘쳐흐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온다. 이것이 예수 안에 살아가는 부활 신앙의 바탕이다. 예수 믿는 첫 증거는 마음에 평안과 고요와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강처럼 흐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 속의 결박으로부터 불러내시고 살려 주신 것처럼 부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 자신이 결박으로부터 풀려 날 때에 그런 평강이 임하게 된다. 죽었던 오라버니 나사로의 부활은 그의 두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의 엄청나 기쁨이요 간증이었다.

우울, 낙담, 불안, 초조, 긴장, 두려움, 미움, 증오, 불평, 불만, 시기, 탄식, 수군수군, 비방, 악담, 게으름, 탐심, 탐욕, 정욕 등 이 모든 죄와 악과 죽음의 어두운 영으로부터 자유 해 지는 것이 평강의 선물이며 부활의 능력인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평강과 평안이 넘쳐나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사명자(使命者)의 파송(派送)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 각 사람을 이 세상을 향하여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사명자들로 파송하기를 원하신다. 파송이 무엇인가. 이곳에서 저 곳으로 가는 지리적인 파송이 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가는 그런 파송이 있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지명하여 불러서 보내시는 지목된 파송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부르셔서 사명자로 보내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부르시고 다윗을 부르시고 히스기야를 부리시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가도록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나중에 사도 바울을 부르시고 보내셔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한 시대마다 성 어거스틴을 부르시고 토마스 아켐피스를 부르시고 독일의 마틴 루터와 잔 칼뱅과 영국의 잔 웨슬리와 스코틀랜드의 잔 낙스와 영국의 윌리엄 부스와 미국의 D. L. 무디와 빌리 그래함을 부르셔서 보내시고 쓰시는 것이다.

한국 역사로 하면 주기철, 손양원, 길선주, 이기풍, 김익두, 전덕기, 한경직, 김구,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김활란, 유관순, 안중근, 이준, 서재필, 이승만 이런 인물들을 불러서 역사의 현장에 보내셔서 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뜻이 계시면 누구라도 제한 없이 부르시고 어디로라도 보내시고 어떻게 라고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땅 끝까지 지치지 않는 이런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사명자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그런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성령 충만((聖靈 充滿)
“성령을 받으라.”
성령이 대답이다. 부활이 대답인 것처럼 성령이 대답이다. 부활 하신 예수님 만나보고도 숨고 피하고 별 의욕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던 제자들을 보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도 여전히 한 곳에 모여 문을 닫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둘러 앉아 있던 제자들을 예수께서 친히 찾아 간 것이다.

닫힌 문이 열리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나 이천년 동안 여전히 문화적으로 닫고, 심리적으로 닫고, 자기 고집으로 억지로 닫아걸고 있는 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문들이 ‘에바다!’ 하고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그 닫힌 문은 가족의 마음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세상 친구나 그 누구 일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 받고 부활 복음이 받아 들여 지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리차드 범브란트(1909-2001) 목사는 루마니아 공산 치하에서 14년간이나 감옥 생활을 하며 복음의 변질되지 않게 믿고 담대하게 믿던 보수적인 복음주의 목사다. 저는 유대인이다. 태어난 지 채 한 살도 되기 전에 부모가 다 죽고 어려서부터 기쁨을 모르고 고아로 컸다. 14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아무 것도 없던 저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 청년 실업가가 되었다. 술집과 캬바레를 드나들며 돈을 물 쓰듯이 스고 사기치고 술 마시고 싸우고 청년의 쾌락을 즐기며 마음에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그런 그가 결핵에 걸렸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치는 악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마음에 불안과 초조를 떨칠 수가 없어서 어느 교회에 뛰어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아서 자기도 흐느껴 울면서 기도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 감동도 없고 아무 위로도 찾아오지 않았다. 어는 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존재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계시다면 당신을 믿는 것은 내 의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아무것도 믿어지지 않는 나에게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이런 논리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폐결핵 요양 차 루마니아의 어느 시골 마을에 들어섰는데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어느 시골 목수가 그에게 신약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성경을 읽을 때에 마르지 않는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옛날 중국 이야기에 어느 사람이 먼 광야 길을 터덜터덜 걷다가 큰 참나무 그늘을 만나서 그 아래서 쉬면서 땀을 식히며 “얘 내가 오늘 너를 찾아내다니 내가 참 운이 좋구나.” 이렇게 말하니까 그 참나무가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40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너를 기다렸단다.” 하더란다. 우리 주님은 나 한 사람의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이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다.

“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 보다 넓고 넓어.”
(527장 찬송)

시골 목수는 평소에 “하나님 제가 죽기 전에 유대인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죽게 해 주세요. 저는 늙고 병들어서 멀리에 있는 유대인을 찾아 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유대인 한 사람을 저에게 보내 주셔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해 주세요.” 이 같은 중보 기도의 열매가 맺힐 날이 온 것이다. 리차드 범브란트는 그 시골 목수에게서 복음을 받고 성경책을 건네받은 후에 눈물과 감격과 변화와 회개와 통곡과 함께 그 동안 죄 가운데서 살아오던 자기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의 나이 26살에 체험한 거듭 남의 체험인 것이다. 그 후 그는 러시아 선교사를 꿈 꾸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러시아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100만명의 넘는 점령군들이 루마니아에 쳐 들어오게 하셨다. 그는 독학으로 공부하여 루터파 교회의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루마니아를 떠나 본 적이 없지만 그는 그 땅에 쳐 들어온 러시아 군대와 러시아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나중에 보수적인 신앙으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감옥에 투옥되고 장장 14년씩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평강과 사명감과 성령 충만한 자신의 모습을 늘 유지해 나갔다. 이것이 부활 신앙의 주인공의 모습인 것이다. 그의 책, <하나님의 지하운동>(In God's Underground)에 보면 그런 간증이 넘쳐 난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받았다. 허벅다리 뼈가 떨어져 나가는 고난도 겪었다. 때리고 또 때리고 기절하면 찬 물을 퍼 부었다. 칼끝으로 온 몸에 상처를 내서 피가 절절 흘렀다. 거꾸로 매달고 얼마나 많은 물을 호수로 부어 넣었던지 배가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공산당들이 그를 고문할 때에는 곁에 의사가 지키고 있었고 그의 맥박을 진단했다. 아직 죽일 마음은 없었다. 심문하고 고문하고 때리고 치고 죽일 것처럼 핍박해도 여전히 또 살아나고 또 다시 살아  남았다. 참 이상했다.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았다. 온 몸에 상처로 피를 흘리고 몹시 열이나고 견딜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고난을 생각했다. 그러나 별 효과는 없었다. 더 이상 며칠 살지 못할 것 같았다. 간수와 죄수들이 자기 독방을 지날 때에 십자가 성호를 그렸다. 그렇게 2년간을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누군가가 자기를 뒤척여 주지 않으면 어찌 할 수 없는 몸의 상처가 열군데도 넘었다. 하룻밤에 40번 이상 씩 누군가가 자기 몸을 뒤척여 주었다. 가슴과 척추에서 고름이 흘러 악취가 나고 마를 날이 없었다. 몸에 열은 높고 죽을 것 같은데 죽지도 않았다. 다시 재판이 열렸다. 간첩 행위, 제국주의 사상 유포 혐의 등을 들먹이며 재판은 10분 만에 끝났다. “ 더 할 말이 있는가?”하는 재판장의 말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자  강제 노동 20년 형이 다시 언도 되었다.

세월은 지났고 공산주의는 무너졌다. 1988년 미국 상원에서 증언했다. 1992년 광림교회에서도 간증하였다. 그는 지난 2001년 93세를 일기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성령을 받으면 이처럼 불길처럼 번져가는 파급력이 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사명이 끝나야 하나님이 불러 가신다.

매달 받아 보는 오늘의 양식(Our Daily Bread)에 보면, 2011년 3월 8일, 작은 일들(Small Things)라는 묵상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보스톤 주일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벌은 디엘 무디라는 구두 직공에게 전도한다. 19세기 빌리 그레함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디는 윌버 채프만에게 전도했다. 윌버 채프만은 빌리 선데이에게 함께 전도자 생활을 제안한다. 빌리 선데이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샤롯에서 복음 집회를 연다. 그곳에서 영향을 받은 모데카이 햄의  나중 복음 설교를 들은 빌리 그래함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다. 그는 훗날 여의도 광장에서 100만 인파에게 복음을 전하는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이 된 것이다.

평강과 사명과 성령 충만한 부활 신앙의 영원한 승자가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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