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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히12:1-3)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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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4-10 00:14 조회 22,467 댓글 0
 
금번 달 추천도서,<레디컬>(RADICAL)의 저자인 데이빗 플랫(David Platt) 목사는 미국 앨라바마 버밍햄 브륵힐즈교회의 담임 목사다. 그의 책 첫 과에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따를 만한 분이 예수”라고 소개한다. 어떤가. 당신도 그렇게 감히 말할 만한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는 “하나님은 각 사람을 독특하게 지으셔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하셨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방을 뒤 흔드는 공동체”를 꿈 꾼 그의 교회 사역은 매년 큰 부흥을 이루어 몇 해 만에 4,000명이 넘는 성도들로 차고 넘친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사람은 보이는 것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과거에 중국의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맹자를 제대로 된 인물로 키워보려고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바로 그런 교훈이다. 처음에는 묘지 가까운 곳에서 살았더니 늘 상여 나가는 것만 자주 보고 장례하는 시늉만 내면서 크더란다. 그래서 시장 가까운 곳으로 이사 하였더니 이번에는 늘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하는 놀이만 하며 지내더란다. 그래서 서당 가까이 이사하였더니 서당에 드나들며 공부하기를 즐거워해서 시대적인 인물 맹자가 되었다는 일화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보이는 대로 그냥 보며 사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어떤 사람을 바라다보아야만 할 것을 선별해서 바라다보며 사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희망과 꿈과 믿음을 갖고 장래의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원주민 부족의 추장이 늙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 아들들을 저 먼 산꼭대기로 보내서 먼 산의 정상에까지 다녀온 증거물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큰 아들은 고산 식물을 채취해 왔다. 둘째 아들은 푸르른 이끼를 한 움큼 뜯어 가지고 왔다. 셋째 아들은 빈손으로 돌아 왔다. 사연을 물었더니 “아버지 저는 빈손으로 왔지만 저 산 꼭대기에서 보니 우리가 살지 않는 저 산 너머의 광활한 새로운 평원을 보고 돌아 왔습니다.”하고 보고 하였다. 그 부족의 추장은 어느 아들에게 다음 추장의 대를 넘겨주었을까. 물으나 마나다. 셋째 아들의 새로운 세계의 새 땅과 새로운 들판을 바라다보고 와서 흥분하는 말을 듣고 그에게 부족의 다음 추장의 권한을 인계하였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어느 시대에 살아가던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가 그의 앞날을 결정짓는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바라보자”고 선언하고 있다. 자, 그러면 예수의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말씀인가.

앞서 간 신앙의 허다한 증인(證人)들을 통해서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동방 박사들 중에는 별자리의 이동을 눈 여겨 바라다보던 중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는 곳 까지 큰 별을 바라보며 따라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경배한 주인공들이 되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언약의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살았던 신앙의 선조가 되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요단 지역의 소알 땅의 물이 풍성하고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았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는 아브라함의 말을 듣자마자 눈에 바라보기에 좋아 보이는 땅을 향해서 삼촌과 작별하고 나아갔다. 그 길이 롯에게 다가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불행과 심판의 출발이었다. 아브라함은 아직은 손에 잡히는 것은 없지만 언약의 세계를 바라보았고 조차 롯은 육신의 눈에 보기 좋은 곳만 당장 바라보았다.

광야 시대 사십년간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도하시는 말씀과 율례와 법도와 계명의 말씀을 바라다보았고 그의 형 아론과 시내 산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고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신이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말았다.

가나안 정복과 아이 성 전투를 시작한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새로운 땅의 새로운 날들을 바라도 보았고 아간은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덩어리와 금 덩어리를 바라보고 탐심에 빠져 그것들을 훔치는 범죄에 빠져 돌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의 온 가족은 불태워 죽임을 당하는 아골 골짜기 심판을 받고 말았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아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받는 신앙의 조상이 되었다.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은 별로 바라보는 것이 없이 꿈 많은 동생 요셉만 미워하던 때에 요셉은 꿈을 꾸며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이 될 자신의 장래를 바라다보았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여리고 왕국의 임금과 모든 고관대작들도 미처 보지 못하는 광야의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다보았고 나중에 정탐꾼 살몬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되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에스겔은 골짜기의 마른 뼈를 바라다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대언하는 믿음으로 마른 뼈가 군대가 되는 기적을 바라다보았다.

엘리야는 손바닥만 한 구름만 바라다보고도 하나님께서 삼년 육 개월 만에 비를 보내시는 거룩한 기적의 역사를 바라다 볼 줄 알았다.

지금 고생스럽고 지금 당장 답답하고 지금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도 신앙의 증인들은 내일의 희망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붙들었던 주인공들이었다.
세계적인 유통업의 선봉에 선 국제적인 신속 배달 물류 업체인 FedEx의 대표인 마이클 더커(Michael Ducker)는 35년 전인 1975년에 22살 신입 사원 청년이었다. 당시에 고등학교 졸업자였던 그는 성실하게 시간당 2. 85 불의 적은 임금을 받아 가면서 배달 업무를 맡았다. 저들의 용어로 유리 천장(glass ceiling, 능력에도 불구하고 고위직 승진을 가로 막는 직장 내 차별)이 없는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던 창업자(프레드릭 스미스, 31살에 창업, 운수업 갑부의 아들, 예일대 졸업, 조시 부시 대통령과 함께 예일대학의 비밀 엘리트 조직인 해골단- the skull and Bones-의 멤버)의 덕분에 승진에 승진을 계속한 그는 오늘 날 전 세계 28만 명의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대표가 되었다. 그는 나중에 회사의 지원으로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아시아, 태평양, 남부 유럽의 회장을 거쳐 지금은 본사 경영의 대표가 되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 안에서 복음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신앙의 증인들답게 잘 되어 가는 신앙의 승리자가 되자.(히11:33-40)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忍耐)함으로 경주하며 예수를 바라보자.
인내 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인물은 역사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는 말씀을 잘 소화하고 내게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신앙생활은 죄를 벗어 버리는 생활의 연속이어야 한다.

가정을 살림하는 주부들이 날마다 청소하고 날마다 빨래하고 날마다 설거지하여도 또 무엇인가 치우고 정리하고 여전히 할 일이 또 있지 않는가. 예수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날마다 순간마다 내 안과 밖에서 태풍처럼 일어나는 무겁고 얽매이는 쓰레기와 같은 죄의 문제를 계속하여 해결해 나가야만 한다.

베드로도 예수의 제자였고 가롯 유다도 예수의 제자였지만 베드로는 자기의 약함과 실수와 실패를 딛고 죄의 옷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주님 품에 안겨서 존귀하게 쓰임 받는 성령 충만한 사도의 새 길을 갔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자기 앞에 닥친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예수를 팔아 버리고 사탄의 부림을 받아 불행한 길을 간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는 사도 바울 선교 일행의 선교를 위해서 풍성하고 풍족하게 선교를 후원했던 글레멘드(빌4;3)와 같은 남녀 동역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좋은 교회 안에도 빌립보서 4장 2절의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같은 골치 아픈 말썽꾸러기 여신도들도 있었다. 육신적인 유혹과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하고 참고 견디며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성도와 교회를 섬겨야만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그 모든 분야마다 벗어 버릴 것을 벗어 버리고 참고 인내하지 않고 성공하고 뛰어나게 된 예는 단 한 번도 없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하고 매사가 다 그런 법이다.

중국고사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중국의 어느 마을에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살았다. 그런데 우공의 논 앞에 큰 산이 가로 막고 있어서 햇볕이 들지 않아 농사가 잘 안되었다. 하루는 우공이 이 산을 바다로 옮겨 버리기로 결심을 했다. 우공은 삽으로 산의 흙을 파서 지게에 지고 바다에 버리고 다시 산에 가서 흙을 파서 바다에 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어리석은 노인이 망령이 들었다고 수군수군 대었다. 그러나 우공은, “내 당대에 산을 옮기지 못하면, 내 자식들이 이어서 산을 파서 옮길 것이고, 내 자식 대에 안 되면, 내 손자들이, 그리고 증손자들, 고손자들이 대대로 이어서 산의 흙을 퍼서 옮기면, 언젠가는 산을 바다로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하늘에서 신이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겨 산을 바다로 옮겨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중국의 모택동도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이 이야기를 좋아해서 중국통일을 이루는데 필요한 정신적인 힘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마라톤 성공 신화를 쓴 주인공이 이봉주 선수다. 황영조 선수도 뛰어나지만 이봉주 선수의 장점은 이런 대회 저런 대회를 가리지 않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참가 할 수 있는 모든 대회마다 계속하여 참여하면서 자기의 기량을 키워 왔다는 점이다. 스포츠 전문 해설가인 박찬원 씨는 이렇게 이봉주 선수를 평가한다.

“그는 18년간 37번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여, 35번을 완주 했다.
유명한 황영조 선수도 5년 동안 8번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 했을 뿐이다.
마라톤을 한 번 완주하면 체중이 5kg 준다고 한다.
많은 선수들이 우승권에 들지 못하면 중간에 포기 한다.
그러나 이 봉주는 항상 자신과 싸운 것이다.
못 생겼다고 놀려대도, 봉달이라고 놀려대도, 조금도 싫은 내색을 안 한다.
이 봉주 선수는 마라톤의 승리자만이 아니라, 인생의 승리자다.
그는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내는 영원한 승자다.”

그는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아직 더 좋은 성적을 내진 못했지만 그 후에도 네 번이나 연속해서 올림픽에 도전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24위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14위였다. 2005년 헬싱키 세계 육상 대회에서는 50위권 밖으로 밀려 났다.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는 겨우 완주 했을 정도다. 그런 그가 지난해인 2010년 3월 18일 서울 국제 마라톤에서 2시간 8분 1초로 우승했다. 마라톤 선수 37살은 환갑과 같은 나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우승한 것이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는 요즘도 날마다 30km 이상씩을 달리고 또 달린다고 한다. 짝발에 거의 평발이고 오른 쪽 발이 왼쪽 발보다 5mm가 더 길다. 아니 왼쪽 발이 오른 쪽 발보다 5mm가 더 짧다고 해야 맞을까. 여하튼 그렇다. 남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도 성공하기 어려운데 그는 고등학교 때 학교를 세 번씩 옮겨 가면서 늦게 시작했지만 참고 견디며 인내로 승리한 것이다. 1999년 다음 해에 출전해야 하는 2000년의 시드니 올림픽이 다가 오지만 그는 소속팀이 해체되고 출전권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가난했던 그는 싸구려 여관방을 전전긍긍하며 싸구려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꿈을 접지 않았다. 뼈를 깎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또 달려서 출전권을 평가 하는 도쿄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2시간 7분 20초의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쉽게 포기 한다면, 옳지 않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봉달이 이봉주 선수의 말이다.

이것이 오늘 성경 말씀 그대로 인내하는 모습이 아닌가. 다시 성경 본문을 보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12:1)

죄를 멀리하고 복음과 성령을 가까이 하여 말씀 안에서 인내함으로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은 마치도 운동 경기와 같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5-27)고 했다. 
 
우리나라의 선수들 중에서 축구, 야구, 골프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는 선수들의 모든 특징을 보라. 그들의 공통점은 꾸준하게 참고 견디며 인내하는 자기 열심히 바탕이 된 것이다.

발레리나 강수진, 피겨 스케이팅의 여왕 김연아, 성악가 조수미, 설치 미술가 백남준과 같은 인물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자기 분야에서 인내하는 성품을 개발하고 붙들었던 것이다. 발레리나 강수진양이나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양, 축구 황제 박지성의 발 사진을 보라. 곰의 발보다도 더 험한 꼴이다. 인내 없이 되는 일이란 없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그렇다. 고난 없이 핍박 없이 역경 없이 모든 것이 황사 한 점 없이 해 맑은 날 벗 꽃 피는 화창한 봄날에 맛있는 도시락 싸들고 소풍 가는 것과 같이 순조롭고 편한 날들이 한해에 며칠이나 될까.

온갖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승리하는 믿음의 승자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신앙 생활해야 할까. 인간 중에 영원한 사표란 없다. 물론 성경과 기독교 이천년 역사 중에 뛰어난 믿음, 본받을 만한 믿음의 선진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슨 성품을 본 받아야 할까.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를 바라다보아야 한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보좌 우편은 흠모하면서도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당하고 참고 이겨내는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는 죄인들이 예수를 거역하는 그 온갖 거역을 잘 참으신 우리 주님이시다. 예수는 십자가도 참으셨고 거역도 참으셨다.(2, 3절)
예수 그리스도는 온갖 피곤한 일들과 낙심될 사건들을 일일이 소화하고 뛰어 넘고 이겨 내고 극복하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만들어 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만 바라보고 승리하는 신앙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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