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과 모세를 통한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이처럼 신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산상수훈의 핵심은 오늘 본문인 팔복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것이다. 마태복음 5-7장까지의 산상수훈의 말씀 중에서 오늘 본문은 서론에 가깝다. 천국백성의 기본 특성을 교훈한다. 이어서 천국 백성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교훈한다.(마5:13-7:12)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7장 13절 이하에서 좁은 문과 넓은 문, 거짓 선지자를 경계할 것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교훈을 통해서 산상수훈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어질 축복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오늘의 본문인 팔복에 관한 설교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인 천국 백성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교훈하는 말씀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행복이며 하나님의 자녀 된 행복이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의 비결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면 이런 내용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제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행복의 요인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섰다가 지쳐서 돌아오는 이야기처럼 행복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내가 살아가는 집 처마 끝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을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찾아 나서면 안 된다. 행복은 내 마음 속에 내 가슴 속에 심어 주시는 주님의 축복이요 은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행복의 조건이 만만치 않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는 복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온유한 자라든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든지 이런 표현의 말씀은 그런대로 마음에 와서 닿는 말씀들인데 시작하자마자 하시는 교훈은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다. 사람들은 가난 대신에 부요한 것을 추구하며 사는 법인데 “심령이 가난한 자”란 어떤 상태를 말씀하는 것일까? 여기서부터 주님의 말씀하시는 행복의 비결이 그리 쉽게 깨달아 지지를 않는다. 차례대로 묵상해 보자.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의 행복(행복의 시작).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서 말씀하는 가난한 자란 스스로의 힘으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 사람들이 좋고 귀한 것을 수탈해가고 나라 안에서도 가진 자들의 횡포에 의해서 최소한의 것조차 빼앗기며 가난한 상태에서 연명하는 자들이 많았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구약적인 히브리적 의미로는 ‘의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37:5) 이런 의미의 의존을 말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16:20) 이런 식의 의존을 말하는 것이다. 내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고 다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 속에서 실제 나의 생의 많은 부분은 스스로 자신감에 넘쳐서 척척 해결해 나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기도도 없고 감사도 없고 간구도 없이 내 안에 꽉 들어차 있는 나 스스로의 신념과 확신 속에서 생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주님은 별로 귀하게 여기기 아니하신단 말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존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열 가지 특징이 있다.
자신의 약한 참 모습을 똑 바로 볼 줄 안다.(고전1;26-31)
적은 것에 대하여서도 감사할 줄 안다.(요12:37-50)
자신이 죄인인 것을 늘 깨닫는다.(시51:17, 사64:6, 롬3:23)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전의식을 갖고 살아간다.(합2:4)
어린 아이처럼 심령이 순수하다.(마18:3)
하나님을 항상 찬양한다.(눅1:46-48, 고전10:3)
항상 자신을 부인하고 포기한다.(눅9:23)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시42:1)
천국을 사모하는 열정이 깊다.(골3:1-2)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행복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福)이란 ‘마카리오스’(makarios)라는 말은 외적인 것 보다는 내적인 것이고 현세적인 것보다는 내세적인 것이다. 이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자가 행복한 자이며 저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천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 마음에서부터 곧 천국이 시작되는 것이다.
애통(哀痛)하는 자의 행복(행복의 조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다. 공동번역에 보면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라고 했다. 어찌하여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것이 복이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애통해하고 무엇을 슬퍼하느냐는 질문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좋은 관계를 금가게 하고 갈라놓는 죄에 대하여 애통해 하고 슬퍼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죄에 대하여 애통해하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마음이 행복한 삶의 시작이며 그런 성도들이어야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를 체험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이사야 61장 3절에 보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사야 66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이것이 죄악에 대하여 애통해하고 슬퍼한 자들에게 주시는 기쁨이며 즐거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죄의 용서를 받고 나면 그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위로요 은총인 것이다. 이 같은 위로는 구원 받은 자의 기쁨이며 환희인 것이다. 이사야61장 1-2절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했다. 이 같은 위로가 죄 사함 받고 죄 용서 받은 자의 위로이며 행복이며 기쁨인 것이다.
온유(溫柔)한 자의 행복(행복의 자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온유란 단순히 겸손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을 낮출 뿐만 아니라 온화하고 부드럽고 허세 부리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에게 악하게 대하는 이들에 대해서 까지도 오래 오래 잘 참아 주는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친히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온유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주님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사람에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다. 시편 37편 11절에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라고 했다. 불의하게 살면 풀처럼 베임을 당하고 채소처럼 쇠잔해질 것이지만 하나님을 잘 의지하고 인정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가면 그 나중이 점점 땅을 차지하는 자의 축복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땅이란 눈에 보이는 땅이라기보다는 선(善)한 영향력(影響力)을 말씀하는 것이다.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행복의 방향).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했다. 여기서 의란 공의와 정의를 일컫는바 ‘법을 준수하고 의무를 이행하는 미덕’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 52장에 근거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의를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의이시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인정하고 따를 때에 주어지는 만족과 영혼의 배부름 그 자체가 축복이요 행복인 것이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뜻은 아주 건강한 사람이 배고파하고 목이 말라하는 모습을 말한다. 시편 42편 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는 말씀처럼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자의 거듭난 신앙생활의 모습을 언급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로 살아가면 그의 영혼에 배부른 만족을 선물과 응답으로 주신다고 했다. 이것이 신자의 행복이요 성도의 행복인 것이다. 배고프고 목이 마른 상태에서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난 후에 갖는 배 부름과 포만감과 같은 그런 행복을 우리의 영혼에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이시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 성 여인이 경험한 것이 이런 은혜와 축복이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보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 주님은 요한복음 6장 48절에서 51절까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긍휼(矜恤)히 여기는 자의 행복(행복의 은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다. 이는 상대방을 자비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고 동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불쌍히 여기고 부드럽고 착하게 대해주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이 큰 죄를 지었더라도 용서해 주고 동정심을 갖고 불쌍하게 여기며 대해 주는 마음을 말한다. 주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고 자비하게 대하며 살아야 자신도 남들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고 자비롭게 여김을 다시 받게 되는 법이다.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교훈 하셨다. 이처럼 용서하며 살고 불쌍히 여기며 살고 긍휼히 여기며 살고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가.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의 행복(행복의 상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다. 여기서 마음이란 지정의(知情意)의 근본인 감정과 생각과 사고의 중심지를 말한다. 사람은 이 마음에 의하여 인간답게 살고 하나님을 찾아 나서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마음이 청결한 자 즉 깨끗하고 맑고 곱고 순수한 자로서 살아갈 때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축복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이런 생활을 위해서 짐승 제사를 드렸다. 선지자들은 제사 말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신앙 양심을 지키며 정의와 공의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했다. 예수님은 영과 혼과 육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게 되어 세상을 향하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성결하게 살아가는 순전한 마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듭난 자의 영혼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하심을 받은 용서(容恕)와 구속(救贖)을 체험한 자의 영혼의 상태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뵈옵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하셨다. 요한 1서 3장 2절에 보면 장차 때가 되면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19장이나 33장에 보면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장차 뵈올 날이 온다고 했다.(출19:21, 33:20) 이것이 장차 누릴 성도의 특권이요 영광이다. 장차 때가 되면 수건을 얼굴에서 벗은 것처럼 분명하게 주님을 뵈옵게 될 것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행복(행복의 나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하는 화평은 막연히 내 마음이 평화롭고 화평한 정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살롬과 같이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죄와 악이 해결된 상태에서의 화평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서 주어지는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인 것이다. 종말론적으로는 장차 이루실 화평의 세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낙원 회복이며 천국에 관한 말씀이다. 이는 이사야 9장 6절에서 예언된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지는 행복이며 축복인 것이다. 이는 궁극적인 구원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화평이며 영원한 화평인 것이다. 우리가 성탄절 때에 자주 묵상하는 누가복음 2장 14절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는 천사의 선언이 바로 이 같은 화평이요 평화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요 행복인가.
의(義)를 위하여 박해(迫害)를 받은 자의 행복(행복의 증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고난과 핍박을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피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이 있다. 이때에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과 환란과 핍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한 박해란 사냥꾼에게 들짐승이 쫓기는 것을 말한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적군에게 쫓기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생명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긴장되고 숨이 막히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9절에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신앙생활의역설이다. 구약의 축복은 대단히 현세적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대단히 내세적이고 영적이다. 박해가 어떻게 복이 되고 자기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얻게 된다는 말인가.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고 믿음생활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구원관이다. 잃음으로 얻고 빼앗김으로 취하는 것이 신앙의 나중 신비이다.
팔복의 말씀을 자세히 묵상해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천국이라고 했다. 그러나 앞의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천국의 복이 현세적인 것이라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게 주시는 천국의 상급은 지극히 내세적이요 종말적인 것이다. 나중 상급으로서의 천국인 것이다. 순교적인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태도라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태도라고 하겠다. 이처럼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나중 여덟 번째의 행복에 대해서는 설명이 길다. 예수님이 친히 긴 설명을 붙여 주셨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세상에 그 어느 누가 나를 욕하고 비난하고 욕설을 퍼 붓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악한 말을 하는데 좋아하고 기뻐할 자가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일을 당할 때가 복인 있는 때이고 행복해 해야 할 때라고 가르쳐 주셨다. 소화하기 어려운 수준의 말씀을 강론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신자의 행복의 비결인 것을 어찌하랴.
예수님은 의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 하셨다. ‘나로 말미암아’(because of me.) 가 무엇인가? 언제 예수님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 보신 적이 있는가? 그럴 때에 우울해 하거나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고 권면해 주셨다. 나중에 하늘에서 상급(賞給)이 클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온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 다음 구절의 말씀이 더욱 도전이 된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5:42)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인 성도의 모습이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고난과 박해와 핍박과 억울함과 모함과 시기와 질투와 조롱과 비웃음과 비난을 극복하여 나중에 놀라운 상급을 받는 성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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