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태어난 아기가 기기 시작하면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 한다. 무언가 잡고 일어서기만 해도 또 자랑한다. 한 발자국만 띄어 놓아도 자랑한다. 걷기 시작하면 자랑이 계속된다. 뛰기 시작하면 또 자랑한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의 손자손녀 자랑은 훨씬 더하다. 이처럼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랑거리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개 자랑거리가 넘쳐서 자랑하는 것은 남들에게 시기와 부러움을 사게 할 뿐 별로 덕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주 안에서 자랑하는 생활에 대하여 교훈한다. 바울 자신은 고린도 후서 12장 9절에서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약할 그 때에 오히려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라고 간증하였다.
<네 약함을 자랑하라>는 책이 있다. 이효진 자매의 간증집이다. 그녀는 3살 때에 아궁이 앞에서 끓고 있던 주전자가 넘어지면서 얼굴과 왼 손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친구들이 파충류 괴물 같다고 놀리는 아픔을 이겨 내며 성장기를 보내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주산과 암산을 잘해서 초등학교 때에 경시 대회에 나갔는데 앞자리에 있던 여학생이 너무나 무섭다며 우는 바람에 주산 경시장 분위기가 울음바다가 되고 경시대회가 지연되었다. 남학생들이 자기를 놀려 대던 때와는 또 다른 상황을 만나 당황스럽게 한 것이다. 그 많은 가슴 아픈 사연들 가운데 허우적대며 폭식증으로 혹은 일중독이나 드라마 중독 증세로 한심한 날들을 보내며 성장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꿈이 있던 그에게 가장 큰 의지였던 어머니마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자 그는 꿈이 무너지는 아픔을 다시 겪어야 했다. 황량하고 곤고한 날들을 지내던 그녀는 친구의 권유를 따라서 참석한 치유 집회에서 회복의 은혜를 받고 새 날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또래의 젊은 여성들처럼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사는 이 시대에 화상으로 일그러진 자신감 없는 외모의 연약함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천부적인 디자인 아이디어와 영감을 갖고 공부해서 이제는 숙명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중앙대학교 건설대학원도 마쳤다. 지금은 예인건축연구소의 대표로 있다. 대학교에 강의도 나간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인하여 성장기의 우울과 약함을 딛고 일어서서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진정한 미인은 ‘miss Heaven'이라는 성령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적 치유가 임하고 새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열매였다. 얼굴의 아름다움은 잃어버렸지만 성령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새 사람이 된 것이다.
복음을 알기 시작하면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고전1:18)과 하나님의 지혜(고전1:21)를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랑의 차원이 바뀌는 것이다, 이 전에는 세상 낙이 즐겁고 기뻤지만 이제는 오직 예수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삶의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바뀌는 순간을 체험해야만 한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같은 체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목사의 아들딸이냐 장로의 아들딸이냐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때로 거치는 돌이 되는 것이다. 복음 앞에 개인적인 변화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깨달아지는 순간이 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고 했다. 바울 사도 자신이 복음을 모를 때와 복음을 깨달은 후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지난날의 자랑거리를 모두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평생을 살아간 순교의 사람이었다.
부르심을 자랑하라.
성도의 자랑은 부르심에 대한 자랑이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고린도전서1장 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문안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것이다. 성도란 세상 중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을 이기며 사는 자들이다. 세상의 문화를 거역하고 하늘 백성답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자들이다.
오늘 본문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했다. 부르심이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불러서 쓰셨다. 사사 기드온도 삼손도 다 그렇게 부르신 것이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하나님이 직접 불러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므로 선지자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부르심의 시작은 평범하다. 그러나 그 나중은 창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엄숙하고 준엄한 것이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의 마을에 다른 사람이 아닌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향한 부르심의 시작이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이 같은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여 따라 나선 것이 오늘 날 지난 4,000년을 이어온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인인 것이다. 그 시작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순종한 것뿐이다. 부르심을 거룩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나라와 민족과 역사와 교회와 가정 가운데 지금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그 부르심의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될 것이다.
신구약 성경의 인물들과 이천년 기독교의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부르심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수님도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차례대로 부르셔서 제자 삼으셨다.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나다나엘을 부르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48절 이하에 보면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가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셨다. 주님이 나를 먼저 아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택(擇)하심을 자랑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동행하신다. 세상에는 지혜자, 능력자, 문별 좋은 자가 더러 있다. 많은 것 같아도 사실은 많지 않다. 나라마다 3-5%의 사람들이 나라의 부와 경제와 모든 분야의 80% 이상을 좌지 우지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서민들이고 중산층이다. 사도 바울 당시의 고린도라는 도시도 그러했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도 그러하였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저들을 부르셨고 택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인생을 택하여 쓰시는 선택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너무나도 다르다.
첫째,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다.
둘째,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해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다.
셋째, 세상의 천한 사람들과 멸시 받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있는 사람들을 폐하려 하셨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요 교훈인가.
하나님은 일찍이 헬렌 켈러나 J. C 크로스비 여사와 같은 분들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이 되게 하셨다. 오늘 날은 강영우 박사나 송명희 자매나 호주의 닉 부이치치 같은 형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은총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전해지게 하고 계시다.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는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보는 것도 불가능했던 소위 삼중고(三重苦)의 여인으로 성장해 가면서 7살 때부터 셜리번 선생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세워져 갔다. 그는 19개월 때에 열병을 앓아서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보는 기능도 모두 잃고 말았다. 20살 때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고 4년 뒤에는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미국 맹인협회에 관련하여 일하면서 미국 전역과 세계를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와 인간의 노력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있던 1937년에 우리나라에도 방문한 바가 있다. 그녀는 <나의 생애>( The Story of My Life,1902), <암흑 속에서 벗어나>( Out of the Dark, 1913), <나의 종교>( My Religion, 1927), <신앙의 권유>( Let Us Have Faith, 1940) 등과 같은 책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물론 세상에는 능력 있고 실력이 넘치고 돈도 잘 벌고 권력과 재력과 재주와 역량과 은사가 풍부한 자기 분야에서 뛰어나고 탁월한 인물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반면에 언제나 경쟁에서 밀리고 뒤져서 우울하게 지내는 이들도 많다. 우리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분야마다 뛰어난 인재들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고 다 성공하고 다 출세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게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깨우쳐 주어여 한다. 이것이 부르심과 택하심의 시작이다. 부모 된 우리가 먼저 이 길을 가야 한다. 그래야 할 말이 있다. 그래야 대답이 있는 것이다. 그냥 막연히 “공부해라, 성공해라, 출세해라, 경쟁에서 이겨라.”라고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공부도 예수 안에서, 노력도 예수 안에서, 성공과 명예와 출세와 부와 권력도 예수 안에서 얻고 누리되 자신 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남을 위해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전도요, 진정한 선교요, 진정한 성공이다. 공부해서 남 주고, 돈 벌어서 더불어 살고, 성공해서 남을 섬기는 그런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네 약함을 내세워라>(守弱學)는 책에 보면 중국의 고전역사 연구 전문가인 마수취안(馬樹全)은 “어리석음을 내세워라, 가난함을 드러내라, 스스로를 낮추라, 약자임을 인정하라, 부족함을 기뻐하라, 가진 게 없으면 참으라,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라.”고 충고한다. 그는 또 이렇게 교훈한다. “자신의 능력도 모른 채 허장성세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려 한다면, 허약한 말이 정신없이 달리는 격이라서 끝내는 쓰러지고 만다. 반대로 어느 누구도 자기비하를 하지 말아야 하며, 설령 지위가 아무리 낮더라도 스스로를 믿는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소위 큰 것은 큰 것 나름의 어려움이 있고 작은 것은 작은 것 나름의 장점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생활이 끝이 아니라 그러한 약함 속에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가 공급되어 지혜자와 강한 자와 있는 자들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역전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했다.
며칠 전에 운전 중에 이희아 자매의 피아노 연주와 몇 마디의 간증을 들을 기회가 이었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 시각 장애인들끼리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하는 자리에 특별 초대되어 협연도 하고 독주도 하는 순서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손 가락이 양쪽에 두 개씩 네 손 가락뿐이다. 그런 손으로 5년 7개월 동안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해서 쇼팽의 곡을 준비하여 무대에 서게 되었다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소개하였다. 그녀는 “없는 것에 대하여 아쉬워하지 말고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자”고 시각 장애인들을 격려해 주었다.
www.heeah.com 으로 그의 홈 페이지를 방문해 보라. 그녀는 실로 하나님 안에서 약함을 강함으로 승화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희망 전도사이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주님 안에서 행복자요 능력자요 영원한 복음의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부르시고 택하신 줄로 믿고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을 자랑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자들이다. 성도인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 밖에 있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원초적인 질문이다. 이름만 성도일 뿐 예수 밖에서 헤매고 방황하며 산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 곁에 계신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다. 이 얼마나 심오하고 아름다운 고백이며 교훈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In Christ Jesus)라는 선언은 바울의 편지마다에서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강조이다. 이는 가족들도 마찬가지고 성도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직장과 회사와 기관과 나라와 민족에 유익이 되는 그 안에 속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인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인가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 새벽마다 묵상하는 다니엘 서에 보면 세상의 권세와 적그리스도의 현상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환상의 기록 속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당시와 오늘 날 우리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있으시다.
사람들은 서로가 이마에 뿔을 달아 보려고 안간힘이다. 그러나 그 세상 뿔이라는 것이 숫양의 두 뿔이든 나중에 숫양을 해치고 이기는 중앙 이마에 현저한 한 뿔을 가진 숫염소이든 세상 권력자들은 계속하여 끊임없이 서로 분노하고 대적하고 성내고 해치고 짓밟으며 엎드러뜨리며 서로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고 드러낸다. 그러나 그 나중은 서로가 끝을 보고 마는 것이다. 시편 2편에 보면 그와 같은 세상 왕들의 헛된 꽤와 권세를 하늘에 계신 분이 비웃으신다고 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하시는 말씀이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2:12)라고 했다. 이것이 중요한 교훈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 어떤 무엇을 누리며 살아가든지 항상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피하는 자가 복된 자이다.
하나님 안에 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면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wisdom, righteousness, holiness and redemption)을 골고루 선물로 주신다. 그러므로 이것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거듭난 성도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완전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 안에서 이것을 자랑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복음 전파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자랑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전3:21)고 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1장 14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여러분이 우리를 이미 부분적으로는 이해했습니다마는,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여러분이 우리의 자랑거리이듯이, 우리가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새번역) 자기 잘 난 것만 자랑하지 말고 주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겸손한 모습을 드러내고 자랑하자는 권면이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서로에게 자랑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다.
우리 모두 거듭난 성도다운 자랑거리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