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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합당한 감사(합3:16-18, 엡4:1-6) 2015.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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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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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12-17 13:51 조회 19,051 댓글 0
 
                     합당한 감사(합3:16-18, 엡4:1-6)         2015. 11. 29
 
 
 
미국의 큰 부를 이룬 실업가 중에 스탠리 탠 이라는 박사가 있다. 그런 그가 1976년에 척추 암 3기 진단을 받았다. 당시 척추 암은 수술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약으로도 고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절망하며 죽어 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는 건강해 보였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스탠리. 병이 다 나았나요?” “네, 병이 다 나았습니다.” “어떻게 병이 나았습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늘 감사만 했습니다.” 그가 회복하게 된 것은 ‘감사’ 때문이라 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였다.
 
“하나님, 병들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병들어 죽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는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살려 주시면 살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는 매일매일,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랬더니 감사할 때마다 암세포가 물러가고 치료되어 갔다. 그래서 몇 달이 지난 후에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감사가 암을 이긴 것이다. 감사가 불행을 이긴 것이다.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면 감사해야 한다. 행복하니까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다 보니 행복해 지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애완동물들을 아무리 사랑해 주고 귀여워 해 주고 예뻐 해 주어도 본능적인 표현 이외의 감사 표현을 할 줄 아는 동물이란 없다. 물론 개의 충성됨을 추적해서 ‘충견’(忠犬)의 일화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어쩌면 개의 속성 중에 있는 본능적인 모습이지 감사의 차원은 아니지 않나. 감사는 인간관계의 윤활유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출발도 감사의 표현이 아닌가. 감사가 빠진 제사를 상상하여 보라. 양과 염소와 천천만만의 살진 송아지를 드려서 제사할 지라도 그 제사를 드리는 인간의 마음에 감사가 없다면 그 제사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다. 하나님의 자녀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 줄 알아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나. 예수님은 벧세다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을 바라보시며 자신 앞에 어린 아이가 가지고 나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놓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와 보리떡을 골고루 나누도록 하셨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이만여명이 배 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다. 감사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감사하면 몸 안에도 건강한 세포가 활성화 된다. 엔돌핀, 다이 돌핀의 생산이 활성화된다. 감사하면 몸도 강건해 지고 마음도 즐거워지고 행복해 지게 된다. 감사하다 보면 행복해 지는 것이다. 인생을 원망과 불평과 비교와 시기심과 남들의 성공이나 출세만을 부러워하며 상대적인 박탈감 가운데서 살면 스스로 점점 더 불행해지고 만다. 자족하며 감사하며 살 줄 알아야 한다. 
 
탈무드에는 이런 교훈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요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요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은 곧 행복의 분량이다.”는 말을 남겼다. 사도 바울은 감사의 사람이었다. 그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았다. 그리고 늘 주변의 성도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강조하였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하였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10자식 죽고 재산 다 날아가고 자신의 몸이 병들고 아내마저 남편을 오해하고 외면하는 상황에서도 절대 감사를 잃지 않았다. 하박국은 주전 610년경에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그의 감사 내용은 무엇인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을지라도 감사를 잃지 않겠다는 결연한 고백과 다짐을 하고 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지난 IMF때 얼마나 많은 가장들이 주저앉고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무너졌는가. 그런 중에서도 그 상황을 딛고 일어난 이들은 누구인가. 감사로 위기를 극복한 이들이 아닌가. 폐허 속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던 사람들이 재기의 소망을 붙잡고 일어나지 않았나.
 
교회 설립 제 6주년 기념 감사 주일을 맞고 추수 감사 주일을 맞고 대강절 첫째 주일을 맞은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 말씀을 감사의 눈으로 보고 묵상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4장 1절에 보면,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말씀했다. 주어진 모든 여건에 합당한 감사의 삶을 살아가라는 권면이다.
 

부르심 받은 것을 감사.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 이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의 일화로 가득하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 한 사람 노아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셨다.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처럼 양과 염소와 소와 약대를 목축하는 족장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모세 시대에 애굽에서 살아가던 히브리 민족이 얼마나 많았는가.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이 백 만 명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강퍅한 학정으로부터 이끌어 낼만한 지도자로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는 나이 40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살기 시작한 후에 40년 세월이 흘렀다. 40년 전에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생활하던 왕족이었다. 바로의 딸이 그를 왕자로 입적한 것이다. 그런 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십년 세월이 흘러갔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늙어가던 모세를 부르셔서 출애굽의 역사적인 현장의 맨 앞장에 세우셨다. 하나님은 사사 기드온을 부르시고, 사사 드보라를 부르셨다. 임금 다윗을 부르시고 그의 여러 왕자들 중에서 솔로몬을 다윗의 대를 이을 왕으로 부르셨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자기 스스로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지 않나. 예수께서 저들 열 두 제자들을 일일이 한 사람씩 부르셔서 제자 삼으셨다. 이천년 교회 역사에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선교의 사람, 복음 전파의 사람, 거룩한 성자의 삶을 살아간 모든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감사의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도 감사하였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는 그 “부르심을 받은 일”이란 무엇이겠는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고생하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으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어야 할 이유가 없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의 부르심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율법 학자로 종교적인 신분이나 사회적인 위치나 경제적인 환경에서 매우 안정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 가면 에비슨, 세브란스 등의 청동상이 있다. 1860년 영국 요크셔 주에서 태어나 1866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로 이주한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은 24살에 온타리오약학대학을 졸업하고 27살에 토론토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토론토의과대학의 약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토론토에 병원을 개원하면서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때마침 토론토를 방문한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권유를 받아 들여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그는 교수직과 의사로서의 안정된 생활을 정리했다. 에비슨은 한국에 와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는데 당시 조선정부의 무관심과 불성실 등으로 제중원을 운영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1894년에 사직서를 주한 미국 공사를 통해 조선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때 알렌이 중재에 나섰고 조선정부는 제중원의 운영권을 선교부에 이관함으로써 조선정부와 미국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제중원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단독으로 책임 지고 운영하게 되었다. 그 다음 해에 조선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다. 그 1895년에 에비슨은 조선정부 방역책임자로 임명받았고 선교사와 개신교 신자들을 모아 방역 팀을 구성하어 체계적인 방역활동을 하였다.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에비슨은 김필순, 홍석후, 홍종은 등 의학생들과 함께 의학교육을 하면서 그레이 해부학 책을 비롯한 유기화학, 약물학, 위생학 등의 책을 한국말로 번역하였다. 에비슨은 1899년에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로 돌아갔는데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하던 중 후원자인 클리블랜드의 실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세브란스(L. H. Severance)씨가 기증한 선교 후원금으로 1904년에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건립했다. 에비슨은 허스트 선교사가 부임하게 되면서부터 더욱 의학교육에 정진하여 1908년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조선정부는 이들 7명에게 의술 개업 인허장을 부여하여 우리나라 의사면허의 효시가 되었다. 107년 전의 일이다. 오늘 날은 세계적인 수준과 규모의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에비슨은 예방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소아과의사인 아들 더글라스 에비슨(D. B. Avison)은 1926년에 토론토대학에서 보건학 박사를 받고 귀국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에서 소아과교수 및 위생학(현 예방의학)교수로 일했다. 언더우드와 함께 일하던 에비슨은 언더우드가 별세하자 1916년부터 18여년간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겸직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의학교육과 사학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에비슨은 한국인 후임자인 오긍선(吳兢善, 1877-1963)에게 교장 직을 물려주고 1935년인 75살 때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냈고 96살까지 장수하였다. 올리버 에비슨 박사! 그가 주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이 낯선 조선 땅에 와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고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그와 같은 큰 공로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연세전문학교 제 2대 교장을 지낸 오긍선(吳兢善,1877-1963)박사는 충청남도 공주군 사공면 운암리 시골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서울에 올라와서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미국에 유학해서 서재필의 대를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의사가 되었다. 피부과 전공을 한 의사요 이승만과 함께 감리교의 협성회 활동,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 운동도 하고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나중에는 YMCA 운동 등에 앞장서며 국민 계몽 운동에도 열심을 다 하였다. 1907년에 루이빌 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피부과인턴의 생활을 하였다. 그해 10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파견 선교사자격을 얻어 1908년 초에 귀국하였다. 그해 전라북도 군산에 야소병원을 세우고 원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의료봉사 겸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편 자신의 사재와 월급 등을 기부하여 1909년 옥구군의 구암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고 헌당하였다. 또한 교육 선교 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군산에 안락학교와 영명학교를 세웠다. 광주야소교병원장과 목포야소교병원장으로 부임하여 일하였다. 동시에 목포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교장직도 겸임하였다. 1912년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가 되었고 에비슨의 뒤를 이어 한국인 최초로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 오늘 날, 연세세브란스의 뜰에는 에비슨의 동상과 오긍선의 동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우리는 자신의 부르심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야 한다.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부르심이 있다. 한 가정의 아내요 어머니로의 부르심이 있다. 자녀로의 부르심, 부모로의 부르심을 비롯해서 한 직장, 한 일터, 한 사회, 한 교회 안에서 나를 향하신 주의 부르심이 누구에게나 있다. 거창하고 대단한 직임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향한 그 부르심을 소중하게 여기고 귀하게 감당하여야만 한다.
 

한 소망 안에 살게 된 것을 감사.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현재의 환경이나 여건으로 인하여 주저앉지 않는다. 앞날에 소망이 있고 내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 나에게 주어져 있는 환경을 극복하는 힘이 생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하나다. 지금 믿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소망 또한 품어야 한다. 믿음과 소망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면 사랑 또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기는 그런 신앙을 다시 확인하는 절기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나라고 하면 모든 일을 겸손하게 감당하여야 한다. 온유함으로 일하고 서로를 대하여야만 한다. 힘들어도 참고 견디기 어려워도 잘 참아 나가야 한다. 오래 오래 참고 견디고 이겨 나가야 한다. 고난과 역경과 고독과 각종 어려움과 시련을 오래 참고 견뎌 내야 한다.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용납하여야 한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성도는 가정과 직장과 일터와 세상과 교회의 안과 밖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4절에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우리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 몸이 제 각기 각자가 아니라 하나라는 의식, 하나라는 믿음, 하나라는 연대감, 하나라는 확신, 하나라는 일체감, 하나라는 이 하나 됨이 분명해야 한다. 지난 6년 동안 여기 까지 우리들이 나아 올 수 있었던 힘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한 몸”이라는 이 거룩한 부르심과 하나 됨의 거룩한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된 우리는 이 우주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이다.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져 살아가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 드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열방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주 예수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하나이다. 몸이 하나이고 성령이 한 분이시다. 이와 같은 하나 됨의 일체성은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에너지가 된다.
 
그래서 우리 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헌신하였다. 재물로 헌신하고 마음을 쏟아 헌신하고 사랑을 담아 헌신하였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던, 생각조차 해 보진 못한 일들이 우리 앞에 전개되었고 여기 까지 나아 올 수 있었다. 우리는 한 해 한 해 이와 같은 “한 몸, 한 성령”의식이 점점 분명해져 가야만 한다. 그래야 한다. 한 해 한해 이 “한 몸, 한 성령”의식이 점검 흐릿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분명해져 가고 점점 더 선명해져 가야만 한다. 그래야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이 나의 삶에 유효한 말씀이 되게 된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는 1926년생이니까 올해로 89세이다. 1952년, 26살 때에 여왕에 등극한 후에 오늘 날 까지 63년 째 대영제국의 여왕이다. 그의 남편, 그의 자녀, 그녀의 손자들은 어머니의 영화, 할머니의 그 영화를 누리는 여왕의 가족으로서의 삶을 완전히 보장 받는다. 그 화려함이나 풍요로움이나 존귀함이나 품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성도의 부르심이란 그런 것과 비교 하여 설명할 수조차 없는 그 무엇이다. 성도로서의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의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이란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고 복되고 기쁘고 감사하고 즐겁고 놀랍고 감격스러운 부르심이다.
 
어떻게 감히 죄 된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딸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단 말인가. 어느 신학자는 이런 비교를 “개미가 인간이 되는 것과 같은 영광”이라고 하였다. 반대로 설명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인간이 개미를 구원하기 위하여 개미가 된 것과 비교해도 다 설명 할 수 없는 엄청난 구원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주어진 소망이란 감격스러운 구원의 소망이며 영생의 소망이며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면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소망이다.
 
27년 동안 감옥의 독방에 갇혀 지냈던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를 붙든 힘은 그러한 소망이었다. 남아공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남아공의 감리교 신자였다. 그는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불평등하게 취급받는 흑인들의 인권의 회복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34살에 백인이 아닌 이들 중에서 최초의 변호사가 되어 법률상담소를 열었다. 넬슨 만델라는 46살에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갇힌 후에 27년을 지내고 1990년 72살에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74살에 그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노벨평화상도 탔다. 2년 전인 2013년에 95세를 일기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그 긴긴 감옥 생활 중에 붙들어 준 힘은 날마다 순간마다 내려놓지 않았던 내일에 대한 희망이었다. 분명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의 답답하고 불행한 환경을 뚫고 나아가는 힘과 용기가 생긴다.
 
얼마 전에 세계의 토막 뉴스를 소개하는 내용을 보았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똑같은 장애를 가졌다. 손자는 낳은 아이가 아니라 입양되었다. 캐나다에서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더그 페이시는 얼마 전 카자흐스탄의 한 고아원에 있는 4살 소년 키릴을 입양했다. 키릴은 오른손이 없는 장애를 갖고 있었다. 그를 아들로 입양한 더그의 아버지 크리스 페이시도 키릴과 같이 오른손이 없다. 더그는 어려서부터 오른 쪽 손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늘 날까지 대하며 살아 왔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오른 쪽 손이 없는 장애를 가졌지만 그의 영웅과 같은 존경 받는 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이 없었던 아버지는 장애인 올림픽에도 참가했고 오늘 날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는 성공한 사업가이다. 뿐만 아니라 더그에게는 언제나 자상하고 완벽한 아버지였다. 더그는 자신이 입양한 아들 키릴이 그와 똑 같은 장애 속에서 평생을 씩씩하게 살아오신 할아버지가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난 9월 할아버지와 키릴의 감동적인 만남이 이뤄졌고 둘은 서로의 오른손을 어루만지며 상처를 보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키릴도 할 수 있다, 키릴이 지켜보기 때문에 앞으로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할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입양된 손자를 보며 소감을 말했다.
 
요즘 당신의 소망은 무엇인가. 요즘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인가. 자신을 향한 소망, 가족을 향한 소망, 장래에 이루기를 원하는 소망, 앞으로 성취하기를 원하는 소망은 무엇인가. 여기서 말씀하는 성도의 하나 됨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의 부르심이란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을 뛰어 넘는 소망이며 부르심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떤 집에서 살까 어떤 자동차를 탈까 그런 정도의 소망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망과 부르심은 유대인과 헬리인과 종과 자유자와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한계를 뛰어 넘는 소망이며 부르심이다.
 
언제부터인가 새벽에 가끔씩 찾아 부르는 찬송이 있다. 484장 찬송이다.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라는 제목의 찬송이다.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1절)
 
“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만유의 주여 소망되소서”(4절)
이 찬송가의 가사는 1200년 전인 8세기에 영국 아이리쉬(Irish) 사람들이 찬송가의 가사로 지어 부르던 찬송이다. 그 곡도 아이리쉬 사람들의 전통 음악의 멜로디를 그대로 반영하여 편곡된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성도된 우리의 영원하고 참되신 소망이심을 찬송한 찬송이다.
 
말레이시아 페낭에는 뱀 사원(Snake Temple)이 있다. 뱀을 숭배하는 곳이다. 사람이 우상 숭배에 빠지면 뱀, 원숭이, 코끼리, 소, 개구리, 파리와 같은 것들을 신이라고 섬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올해도 시작된 대강절기와 함께 성탄절을 기다리며 새 해를 소망하며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다운 믿음을 담대하게 잘 지켜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한 분이신 만유의 아버지께 감사.
성도 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세례를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 한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 됨의 마지막 선언으로 하나님이 한 분이신 아버지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신명기 6장 4절에서 강조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최첨단 IT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날에도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에 붙잡혀 살아가는 어리석은 이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인생들을 향하여 “우리 하나님은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고 선포하고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거기 신명기 6장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믿음 생활의 출발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신6:18-19)고 하셨다.
 
그러므로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을 보라. 구라파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의 나라를 보라. 유럽의 그 많은 나라들을 보라.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런 나라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성탄절의 기쁨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사순절의 영성과 부활절의 소망과 감격과 부활 신앙의 능력과 성령 강림의 권능을 가슴에 품고 열방을 향하여 나아갔던 이들이 이 땅에서부터 복을 받았다. 만유의 아버지이신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은 축복되고 위대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를 버려야 한다. 미신을 떠나야 한다. 이단과 사이비의 미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믿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오늘 날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놀랍고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에 날아올라 보기를 꿈꾸어 온 수 많은 우주공학자들의 꿈과 그 꿈의 실현이 있다.
 
1986년 1월 28일, 미국의 왕복 우주선 챌린저(Challenger) 호는 발사대에 놓여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그 우주선에는 선장 딕 스코비(Dick Scobee)외에 6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그 중에 크리스타 맥올리프(Christa Mcaulliffe)라는 여선생님이 있었다. 이 선생님은 어린 학생들에게 우주여행의 세계를 열어주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우주여행의 위험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드디어 챌린저호는 요란한 폭음을 내며 발사대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72초 만에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꿈을 품은 채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위해 죽은 것이었다. 딕 스코비 선장의 부인인 준 스코비(June Scobee)는 남편을 잃은 후에 다른 우주 조종사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어린이들이 우주 탐사를 이해하고 흥미를 갖도록 하기위한 교육과 동기를 제공하는 우주센터를 설립했다. 지금 챌린저 우주센터(The Challenger Center for Space Science Education)는 자신들의 꿈을 추구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을 기념하는 사업뿐 아니라 수많은 어린이들의 가슴에 꿈을 품고 살아가며 그 꿈을 이룩하는 과정을 돕고 있다. 챌린저호의 승무원들이 가졌던 꿈은 죽지 않고 오늘도 살아있다. 챌린저 호 폭발 사고 후 29년 세월이 흘렀다. 최근에는 우주 정거장을 세우고 더 멀리 더 새롭게 우주로 향하는 나라들과 연구진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막대한 천문학적 경비를 쏟아 붓는다. 왜인가. 인간의 꿈을 하나님의 창조 공간에서 실현해 보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한 분이신 만유의 주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 안에 있다.
 
월트 캘러스태드 목사는 그의 책, <당신의 꿈을 키우라>에서 “우리는 가슴 속에 꿈을 품은 채 죽지 말고 꿈을 위해서 일하다 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늘 자주 묵상하는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다윗 같은 인물들이 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나, 모세가 광야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였나.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였나. 아니다. 만유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다. 만유가 무엇인가. 영어의 ‘all'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일 하시고 모든 것 가운데 충만하신 아버지이시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갈라서게 하였는가,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트렸는가. 여호수아가 해를 공중에 매어 달았는가. 아니다. 저들이 믿던 하나님께서 저들의 시대에 보여 주신 기적들이다. 그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이시다. 무엇이 부족한가. 무엇이 아쉬운가. 무엇이 불만인가. 감사하며 살자. 범사에 감사하자. 모든 것의 대답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자. 그분의 부르심 가운데 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모든 것 가운데 계신 만유의 아버지께서 다시 또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런 은혜가 충만한 나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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