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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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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생각하라(엡2:11-22) 2015.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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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11-12 20:35 조회 22,801 댓글 0
 
그러므로 생각하라(엡2:11-22)            2015. 11. 8



본문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이렇게 시작된다. 영어 성경에 보면, ‘Therefore, remember’ 라고 되어 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생각하란 말씀인가. 본문은 시제별로 말씀하고 있다. 11절에 “너희는 그 때에”라고 하였다. 12절에서도 “그 때에 너희는”이라고 반복하였다. 성도의 과거의 모습을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것이다. 13절에는 “이제는”이라고 하였다. “이제는”이란 말씀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이 살던 백성들 중에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을 말씀하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러면 그와 같은 놀라운 은총을 입은 성도들이라면 이 세상을 어떤 모습, 어떤 자세, 어떤 태도, 어떤 사명을 갖고 살아가야 할까.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이라는 말씀으로 성도들의 양 어깨에 지어져 있는 장래의 사명에 다하여 언급하고 있다. 성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때를 기억하며 생각하라.
육체로는 이방인이었다. 할례 받은 유대인으로부터 할례 받지 않은 무리라고 배척 받던 자들이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다. 
하나님도 없던 자들이었다.

사실은 사도 바울 자신도 늘 이런 착각 가운데 빠져 지내던 자였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에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는 체험을 갖기 이전에는 자기 신앙의 의에 붙잡혀서 지냈다.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 자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가 그 당시의 사도 바울 즉 사울 자신도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였다. 물론 당시에 사도  바울은 헬례 받은 자였고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율법의 의에 사로 잡혀 지내던 열심분자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이룩하신 언약의 완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 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가 믿는 하나님은 자신의 편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편견과 오해와 착각 가운데 엉터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언급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전에는 이방인이었던 것을 부인할 자란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다. 맞다.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과도 상관이 없던 자들이었다. 저들은 하나님도 모르는 하나님 밖에서 살던 자들이었으며 저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품고 지내던 그 소망이란 것이 아침 안개와 같아서 사실을 세상에서 소망이 없이 사는 자들이었다.

생각해 보라. 만약에 인생이 예수 모르고 살고 하나님 모르고 산다면 그 세상 소망의 끝이 무엇인가. 선거 준비, 대권 준비를 위하여 누가 어디로 이사를 했네 혹은 이사를 준비하고 있네 이런 뉴스들이 심심치 않다. 그런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사 가서 지내면 대권을 차지하는 데 유리한가. 저들은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고 누구의 안내를 받는 것인가. 누가 저들에게 어디로 이사 가야 앞으로 정치 생명이 길고 정치 운이 활짝 열려 질 것이라고 저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가. 

그런가. 성도들인 우리들도 그러고 사는가. 어디 가서 살아야 잘 되고 어디 가서 살면 잘 못 되는가.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에베소서 2장 5절의 내용인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구원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고, 다시 기억하라는 강조이다. 그러면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가 바로 나라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예수의 부르심을 체험하기 전에, 그 때에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그 때에’ 육체 가운데 갇혀 살던 그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아닌가. 11절의 “육체로는 이방인이요”라는 말씀의 그 ‘육체’라는 말씀은 ‘성령’에 대조되는 의미의 강조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육체 중심이냐 성령 중심이냐” 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세상적으로 성씨가 누구냐, 어디 사람이냐, 학벌이 무어냐, 어느 학교 나왔느냐, 전공이 뭐냐, 경제력이 어떠하냐, 직업이 뭐냐, 사회  생활 하는 지위, 직급, 명예, 권력, 힘, 능력, 역량 뭐 이런 것들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러나 성경은 두 가지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욱체 중심이냐 아니면 성령 중심이냐”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라 행하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라고 하였다. 육신의 생각에 사로 잡혀 사는 자의 끝은 사망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에 붙잡혀 살아가는 자들의 나중은 생명과 평안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만다. 육신의 생각에 붙잡혀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매 순간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아직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물론 주일 날 예배에 참석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안에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나를 다스리는 삶이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에만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하는 모습이라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삶으로 변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면 나는 더 이상 육신의 요구에 끌려 다니지 않고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교훈이다. 육체의 요구에 사로잡힌 사람은 성령의 요구에 대하여 대적하게 된다. 육체의 욕구의 붙잡혀 살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인 것이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고 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여전이 내 안에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의 그 때의 모습, 육체적인 욕망이 나를 어지럽히거나 주장하려고 고개를 들지는 않는가. 


그러나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라.
13절의 ‘이제는’은 영어 성경에 보면, ‘but now'로 시작된다. 과거에는 그랬으나 그리나 지금은 달라야 하고 달라졌고 다른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초청이며 권면이며 도전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 받은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라면 지금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의 죄와 악을 일 삼으로 우상 숭배와 육신의 탐심 가운데 살던 무리들 가운데서 성도들을 일일이 불러내신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진 자들이다. 
예수는 성도들의 화평이시다. 
예수는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
예수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둘로 예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예수는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셔서 먼데 있던 이방인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데 있는 자들인 유대인들에게도 평안을 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아기 예수의 메시아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별 자리의 이동을 따라 먼 길을 찾아 나섰던 동방 박사들 뿐만 아니라 베들레헴의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도 기쁨과 평강을 전하셨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엡2:18)고 하였다. 

‘화평, 화목, 평안, 한 성령’이란 말씀을 주목해 보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십자가로 이룩하신 구원의 은총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화평케 하신 십자가요  화목을 이룩하신 십자가요 한 성령 안에서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구원의 십자가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 중간에 막혀 있던 담을 허신 구주이시다. 예수는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예수는 자기 안에서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신 구주이시다. 

15절을 주목하라.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하였다. 여기 “한 새 사람”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구원하신 성도의 거룩한 연합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교회, 너희 교회, 이 교회, 저 교회, 큰 교회, 작은 교회, 도시 교회, 농촌 교회 그런 구분을 뛰어 넘는 것이다. “한 새 사람”이란 우주적인 교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거룩한 공동체를 이룩한 모든 성도들의 연합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부가 손  잡고 개척한 상가 지하의 아주 작은 교회로부터 천명, 만 명, 아니 십만 명 거대하게 물결치듯 예배자들이 쏟아져 들어가고 쏟아져 나오는 그런 세계적인 대형 교회의 성도들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주신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우주적인 교회요 우주적인 성도들의 연합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례 받은 이들이나 할례 받지 못 한 이들이나 다 하나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그걸 선언하지 않았나. 

성도는 어느 시대 어디에서 살든지 상관없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6-27)고 하였다. 

우리는 사도 신경을 고백할 때 마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말씀하는 ‘거룩한 공교회’가 바로 15절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은 성도들의 연합이 이 땅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교회들을 통한 성도들의 연합인 것이다. “성도의 교제”라는 뜻도 마찬가지이다. 내 교회 네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이 땅에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모든 성도의 교제는 하나의 교제요 14절의 ‘둘로 하나를 만드신 성도의 연합’인 것이다. 

사랑의 띠라는 찬양이 있다. 작사자 작곡자 미상의 아름답고 은혜로운 영어 찬양이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하나 되고 사랑의 띠로 묶였네.
모두 다 함께 찬양해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We are one in the Bond of Love
We are one in the Bond of Love
We have joined our Spirit with the Spirit of God
We are one in the Bond of Love)

어제 지방 찬양제에 우리 교회 말고 또 다른 한 교회의 중등부, 교회학교 어린이 오케스트라가 출연하였다. 연주가 끝나자 그 교회의 담임 목사가 앞으로 나오더니 20대 중반의 여자 청년 지휘자를 두 팔로 꼭 감싸 안아 주는 것이었다. 앞자리에 앉아서 그 장면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몇 몇 목사님들이 오히려 당황하였다. 그 때 그 목사님은 “우리 둘째 딸입니다. 오해 하지 마십시오. 제 딸이 바이올린 전공입니다.”하며 다시 한 번 자기 딸을 꼭 안아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동성 간에든 이성 간에든 사랑의 표현, 격려의 표현, 인정의 표현, 축하의 표현에 마음을 담아 진심이 전달되는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서로 함부로 안아 주거나 손 붙잡아 주거나 등 두드려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사랑이 담긴 마음을 가지고 하나 됨을 진심으로 잘 지키고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그런 거룩한 공동체요 성도의 연합을 이룩하여야만 할 것이다. 이는 말 한 마디, 눈길 하나로도 격려가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라는 찬양의 후렴은 이렇다. 함께 불러 보자.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십자가의 능력은 화평과 화목과 평안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다. 대만과 중국의 정상이 66년 만에 화해의 악수를 하였다. 이 세상에 영원한 평화란 없다. 반대로 영원한 불화와 반목도 없는 것이다. 예수는 화평과 화목을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하였다. 이런 은혜로운 교회, 은혜로운 성도의 연합을 이루어 가자.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하라.
지금은 예수 믿는 성도라도 과거에는, 그 때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였다. 하나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모습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여야만 한다. 13절 이하에 보면 구절마다 반복되는 표현과 강조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성령 안에서, 그의 안에서, 주 안에서, 너희도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는 사도 바울 자신이 그런 인생이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교 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자였나. 사도행전 7장 끝과 8장 앞부분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던 자였다. 사도행전 8장 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9장 1절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을 향하여 갈 때에도 여전히 살기기 등등하였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고 하였다. 그는 대 제사장에게 권한을 받아가지고 예수 믿는 자들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변화된 것이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푯대를 정하고 달려 가는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빌립보서 3장의 선언을 보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그러면 바울 사도가 무엇을 위해서 달려간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앞부분에 보면 “부활의 권능, 부활에 이르려하는 신앙”이다. 그렇다.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대로 부활과 영생과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이 거짓이라면 바울 자신이 참으로 불쌍한 자가 아니냐고 했다. 그렇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이 거짓이라면 예수 믿으며 살고, 하나님, 하나님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불쌍한 믿음이겠는가. 성도는 예수 안에서 변화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 후에 부를 436장 찬송의 가사를 진심으로 부르고, 나의 고백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란 찬송은 감리교 대전 신학교의 교수와 학장을 지낸 이호운 목사의 작사요 박태준 목사의 작곡이다. 1967년에 가사가 쓰이고 곡이 붙여진 우리나라 찬송이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성자의 삶을 살아간 4세기의 성 어거스틴을 보라. 

․그 많은 부모의 유산을 정리해서 가난한 이웃과 나누고 수도자의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갔던 중세의 토마스 아켐피스

․자기 구원의 확신이 없이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에서 미국 선교사 생활 실패의 실의를 딛고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성령 체험 가운데 새로운 전도자의 삶을 살아간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1703-1791)의 올더 스케잇 경험은 그의 나이 35살 때의 일이다. 그 후에 그는 88세에 하나님 앞으로 가기 까지 53년을 지침이 없는 복음 전파자요 성령의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갔다. 

․김익두(1874-1950)는 16살 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여 한때 몹시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28살 때인 1900년 봄에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W.L.)의 ‘영생’이라는 설교에 감동하여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1월에 부인 및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재령교회 전도를 위해 헌신하라는 스왈렌의 지시를 받고 교역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왈렌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다시 신천의 개척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그 곳에서 전도하면서 조롱도 당하고 돌에 맞기도 하였지만 참고 견디면서 겸손하고 인자하게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결국 그 곳에 기도처가 마련되고 교회당도 건축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191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졸업 후 신천교회 위임목사가 되어 생애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목회하였으며 신천교회에서 11명의 목사를 배출하였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에서부터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설교내용은 예수의 십자가와 속죄, 회개에 따른 중생의 체험, 부활과 천국의 영생복락이었는데 그의 신비스런 능력과 매력에 청중들이 도취되었다. 1919년 10월 강동(江東) 염파교회의 사경회에서 신유(神癒)의 능력이 나타나서 그 뒤 많은 난치병을 고쳤다. 1920년 6월 평양의 연합부흥집회에는 그의 설교를 듣고자 3천 명을 수용하는 장대현교회당이 좁을 정도로 대중이 몰려들었고, 같은 해 10월 서울의 승동교회에서 열린 일곱 교회 연합집회에는 1만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1922년 5월 9일자의 <동아일보>는 김익두의 부흥회가 백성들을 미혹 시키는 말인 미설(迷說)이며 기적의 촉구가 지나치다는 취지의 사설을 실을 정도였다. 그러자 황해노회에서는 이적증명회를 구성하고 그가 행한 이적 사실을 모두 망라하여 <이적증명서>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주시한 그는 이후로 병 고치는 이적을 자제하였다. 1943년 신의주 제1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경찰이 강제로 연행하여 신사참배를 시켰다. 일본관헌은 이것을 선전자료로 삼는 한편, 그를 황해도 은율의 어느 과수원에 가두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광복 후 북한에서는 1946년 11월에 어용기구로 기독교도연맹을 만들고 그를 총회장에 임명하였다. 1950년 10월 14일 신천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난입한 공산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50여 년 동안 그는 국내와 일본 및 시베리아지방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150여 곳에 교회당을 세웠으며, 100여명의 목회자를 길러 냈다. 2만 8천여 회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1만 명을 넘는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병에서 고침 받는 치유를 체험하였다. 

문준경(文俊卿·1891∼1950) 전도사는 신안 암태도 출신인 그녀는 1908년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했다. 서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한 탓에 신혼 첫날부터 소박당한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다 목포로 건너간다. 그리고 북교동성결교회에서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당시 전도사)를 만나 크리스천이 된다. 신안군 섬 일대를 직접 발로 오가며 10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 영향으로 이 곳에서 159명의 목회자와 81명의 장로가 배출됐다. CCC를 설립한 김준곤 목사, 성결교 이만신 원로목사 등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이 그 열매들이다. 특히 문 전도사의 전도 거점이 됐던 증도는 중동리교회를 중심으로 11개 교회가 세워져 섬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현재 1,700여 명의 증도 주민 중 90%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한 해에 고무신이 9켤레나 닳을 정도로 전도에 앞장서면서, 가난한 집엔 음식과 의복을 가져다 주고, 임산부에겐 산파 역할을 자처했으며, 염병이 퍼진 동네에 들어가 몸을 아끼지 않고 섬겼던 그녀의 희생과 헌신은 주민들에게 복음과 함께 큰 영향을 끼쳤다. 6.25전쟁 시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인도했다는 죄로 총탄세례를 받으며 죽음을 맞은 문 전도사를 따라 수십 명의 성도들이 함께 순교를 당했는데, 그가 끼친 ‘순교신앙’의 뿌리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성도는 이제부터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다.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다.
하나님의 권속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서 나의 마음을 주께 비워 드리자. 주님을 온전히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순종하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다운 삶을 가꾸어 가자.
담쟁이가 아름답게 건물을 가리듯이 예수로 옷 입고 살자. 

이제는 더 이상 주저주저 하지 말고 복음의 사람답게 살자. 
시간, 재물, 재주, 역량, 사회적인 지위, 그 모든 것들을 총화(總和)하여 온 힘과 마음을 다 해 복음 전파에 매진하자.

복음을 위해서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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