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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유1:17-25) 2015.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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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6-01 14:51 조회 17,189 댓글 0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유1:17-25)        2015. 5. 31.


지난 주일은 성령 강림 주일이었다. 이천 년 전 초대 교회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던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이 오늘 날과 같은 세계 교회의 불처럼 번져 가는 시작이었다. 성령의 임재 현상을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소리가 성령 받은 그 현장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 성령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현상으로 신비하게 임하였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삶이 구체적으로 달라진다. 베드로를 보아라. 비겁하게 처신하고 예수님이 고난당하실 때에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오히려 저주하고 도망가서 숨어 지내던 그가 아니었나. 그런 그가 성령을 받고 나니까 담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 사실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성령 받으면 능력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면 땅 끝까지라도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게 되는 것이다.

가정의 달이 지나가고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가족들이 성령 받아야 한다. 그래야 가족 간에 사랑스러운 가정, 행복한 가정, 위로와 격려와 안식이 있는 가정, 소망이 넘치는 가정, 감사와 만족과 보람이 있는 가정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가정을 이루는 첫 구성원은 남편과 아내이다. 사탄은 그 남편과 아내를 공격해서 가정의 행복을 무너트리려고 한다. 넌센스 퀴즈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아내와 남편이 부부 싸움 하는 것을 무슨 전쟁이라고 하지” 그 대답은 ‘아편전쟁’이다. ‘결심을 단단히 하지 않으면 혼나는 것을 뭐라고 하지’ 그 대답은 ‘결혼’이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표현한 영어 표현 중에 이런 말이 있다.

“To be happy with a man, you must understand him a lot and love him little."
"To be happy with a woman, you must love her a lot and not try to understand her at all."

"남자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당신은 그 남자를 많이 이해하고 사랑은 조금만 해야 한다.”
“여자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당신은 그녀를 많이 사랑하고 절대로 그녀를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유다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남편 요셉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와도 형제이다. 야고보서의 분량도 짧지만 유다서는 더 짧다. 그러나 이 짧은 편지 속에 담긴 내용은 의미심장하다.유다는 우리가 성도로서 받은 구원과 주어진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면하였다. 그 이유는 이미 당시에도 ‘가만히 들어 온 자’(유1:4)라고 표현하는 이단으로 인한 어지럽힘이 심각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단에 물든 이들의 특징은,

경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방탕한 것으로 바꾸어 절제 없이 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유1:5)

오늘 말씀의 제목은 17절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는 본문에서 정하였다. 그 나중의 본문 내용에 보면 무슨 말을 기억하라는 편지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5절 말씀에도 보면 유다는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고 말씀하였다. 이처럼 유다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사도들이 전파하여 깨닫고 영접한 복음의 말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 다시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신앙생활인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생활의 경건(敬虔)에서 떠나가 버린 불쌍한 영혼의 특징은 무엇인가. 16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이며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는 자이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18절과 19절에 보면, 경건에서 떠난 자들은 제 정욕대로 행하며 산다.
또한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조롱하는 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조롱한다는 말씀이다. 저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도 부인하고 조롱하는 자들이다.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장 3절 이하에서 이 같은 영적 타락과 믿음에서 떠난 자들의 특징을 고발하였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3:3-4)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조롱한다고 지적하였다.


자, 그러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1절에 보면 유다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라고 하였다.

그러면 성도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을 살면서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초대 교회의 중심에 서서 말씀을 증거하며 전해 준 말씀들 가운데에서 무엇을 기억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기.
여기서 ‘세우며’라는 말은 곧 ‘건축하며’라는 뜻이다. 이전 성경에는 ‘건축하며’라고 번역되어 있었다. ‘에포이코도메오’라는 원 단어도 그런 뜻이다. 사도 바울도 서신서 마다에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교회를 세우는 것을 설명할 때에 주로 사용하였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지 신앙생활을 건축에 비유하여 자세하게 잘 설명하였다. 그 대표적인 곳이 에베소서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이처럼 유다는 신앙생활을 건축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유다는 이단의 심각성과 이단의 피해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비난한 후에 20절과 21절에서 네 가지의 중요한 신앙생활 지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 첫째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는 것이다.
유다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주를 믿는 성도로서 믿음을 잘 세워 나가야 하는 이유이다. 이 믿음은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잘 지켜 갈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 믿음이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어야 한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고 말하는 유다의 강조가 무엇일까.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상태여서는 안 된다. 요한 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의 믿음 상태를 그렇다고 지적하시고 책망하셨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내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5-16)


요즘 당신의 믿음 상태는 어떠한가.
우리 교회가 올해 말이면 벌써 여섯 살이다. 새 성전 생활 시작한지도 두 달 반만 지나면 만 이년을 넘어 선다. 우리가 이 같은 새로운 공동체로 부르심을 체험하고  광야 길을 거쳐서 여기 까지 나아오도록 아직도 전혀 하나님의 섭리나 손길이나 계획하심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로 무덤덤하게 구경꾼의 상태에서 성전의 마당만 밟는 상태는 아닌가.


이사야서 1장에 보면 당시의 식어져 버린 신앙의 상태를 신랄하게 지적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세하게 언급된다. 열심히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끌고 와서 각을 뜨고 번제하며 제사를 드리는 것 같으나 제사하는 저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다는 것이다. 실망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정성과 간절함이 떠나버린 습관적인 제사의 행위를 지적하시면서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2)고 책망하셨다. 세상에 나가서 제 하고 싶은 것 다 하면 악을 행하며 살다가 제사할 때만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끌고 와서 마음에도 없는 제사를 드리는 그런 제사 행위를 기뻐 받지 않으시겠다는 책망이시다.


이사야서 1장 15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책망이 더 심각하게 계속된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겠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겠다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1: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마음에 드는 예배자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자세하게 안내하셨다.(사1:16-17)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라.
선행을 배우라
정의를 구하라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라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라.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본인이 자라나신 나사렛의 회당에 방문 하셨을 때에 이사야서 61장 1절 이하의 말씀을 펼쳐서 낭독하심으로 장차 행하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 사역의 범주를 언급하신 적이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일 뿐만 아니라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목사님도 평생 이런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사역하였다.

가난한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를 향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자유롭게 독립과 해방을 선물로 선사하며 앞 못 보는 자, 말 못하는 자, 듣지 못하는 자, 걷지 못하는 자, 손 마른 자, 허리가 굽은 자, 나병 즉 한센 병으로 고생하는 자,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 심지어는 죽은 자로 인하여 슬퍼하고 우는 자들 곁에 찾아가셔서 온갖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며 심지어는 죽은 자라도 살려 일으켜 주시는 회복과 치유와 다시 살리는 부활을 선물해 주셨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현장에서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서 가 버린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과 같이 살지 말고 그를 응급처치해서 제 짐승에 태우고 숙박 시설에 모셔다가 밤새워 간병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가라고 가르치셨다.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다음 날 급하게 제 볼일을 보기 위하여 떠나면서 그 여관의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건네었다. 그리고 이 환자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면서 돌아 올 때에 필요한 치료비를 책임지겠다고 까지 하였다.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느 날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 왔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셨다. 그 때 그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다시 질문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때 비유로 해 주신 말씀이 우리가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 그 비유의 말씀 끝에 예수님은 다시 율법 교사에게 질문하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자 그 율법교사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께서 그에게 분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이시고 부활하신 내 생명의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증거가 무엇인가. 내가 열심히 벌어서 나와 내 가족들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유다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아우인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하였다. 야고보는 도전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4-16) 그리고 하신 말씀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은 3절의 말씀처럼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인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믿음은 우물쭈물하는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 쓴 잔을 받아 마심으로 고난 받고 죽으셨다. 그 열매가 부활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은혜의 강에 발을 담을 생각을 하지 않고 강가에서 망설이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오히려 은혜 받을까봐 겁내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면 되겠나. 성령 강림 주일을 지낸 우리 모두의 마음에 지극히 거룩한 믿음에 굳건하게 든든하고 견고한 집으로 세움 받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성령으로 기도하기.
성도의 믿음이 성장하고 견고해 지는 길은 말씀과 기도이다. 성도 된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세움을 받기 위해서 날마다 순간마다 일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하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여야 하다. 유다의 강조처럼 성령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성령으로 기도하며”라는 강조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힙 입어’ 기도하라는 권면이다.  이와 같은 강조는 19절의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는 지적과 상반되는 강조의 말씀이 아닌가. 그렇다.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또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항상 기도하지 아나할 수가 없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가는 힘은 성령의 능력이며 기도의 능력이다.


앞으로는 운전자가 직접 운전하지 않고 자동차 자체가 목적지까지 승객을 안전하게 모셔다 주는 그런 자동차 시대가 열린다고 하지 않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29일 대전시 대덕연구단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열린 무인 이동체 및 엔지니어링 산업 발전전략 보고회에서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자율주행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움직이지 않고 시승하는 사진과 기사가 언론에 소개 되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들에게 그런 정확한 안내자가 되신다.


엊그제 금요일에 CTS의 개편 프로그램 중 첫 제작 프로그램인 ‘교회 행전’이란 50분짜리 교회 탐방 프로그램의 녹화가 있었다. 그들 제작 팀은 20여명이 그 날 오후 내내 준비하였다. 우리도 녹화에 참여하는데 거의 세 시간이 걸렸다. 끝나고 본당에서 기도회를 30분간 더 하고 돌아간다고 광고 하였다. 그 광고를 듣고 있던 녹화 팀의 두 사회자 중의 한 사람인 트로트 가수인 문희옥 집사가 나에게 말하였다. “목사님! 역시 부흥하는 교회는 다르시군요. 지금부터 다시 기도하고 돌아가신다고요.”하면서 우리의 기도 광고에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본당에 다시 모여서 찬송하고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였다.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의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하였다. 예수님은 기도의 소중함에 대하여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두리라 구하면 받을 것이여 찾으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마7:7-8)고 교훈하여 주셨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라고까지 강조하여 말하였다.(삼상12:23)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12:24)고 하였다. 예레미야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하였다. 아삽의 시편인 시편 50편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고 하였다. 다윗은 “나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55:16-17)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이 주 안에서 잘 되고 형통한 복의 비밀이 무엇인가. 질병과 고난과 시련과 아픔과 역경과 위기와 실패와 낙담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인생을 승리하며 활력이 넘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는 모든 것의 대답이다. 기도하면 막혔던 담이 무너진다. 기도하면 전쟁이라도 이긴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우고 있었다.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전황을 살피며 두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었다. 모세의 기도 손이 올라가 있는 동안에는 전쟁에서 이겼고 그 손이 내려오면 전쟁이 지는 것이었다. 모세가 힘이 들어 그 두 손이 내려오자 아론과 훌이 돌을 날라다가 모세 앞에 높고 모세는 그 돌 위에 앉아 두 손을 들고 기도하고 아론과 훌은 양편에서 함께 모세의 손을 잡아 높이 함께 들고 기도하였다. 해가 지도록 그 손들은 내려 오지 않았고 이스라엘 군대는 아말렉을 물리쳐서 이겼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 전쟁 역사를 자세하게 책에 기록할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에게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서 기도로 이긴 전쟁인 것을 후대에 전하라고 하였다. 모세는 전쟁에서 이긴 후에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는 나의 승리의 깃발’이란 뜻의 ‘여호와 닛시’라고 이름 지었다.


기도하면 지혜가 임하고 기도하면 평안이 임하고 기도하면 이기고 승리하게 되고 기도하면 왕성하게 된다. 기도하면 사랑하게 되고 기도하면 용서하게 되고 기도하면 인내하고 참고 견디게 되고 기도하면 자기 부족을 발견하고 깨닫게 된다. 기도하면 능력이 임하고 기도하면 충성하고 봉사하고 섬기고 헌신하게 되고 기도하면 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하고 놀라운 일들이 내 안에서 전개 되게 된다. 기도하면 내 안에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모든 것의 대답이다. 내일이면 벌써 6월 첫날이다. 기도로 새 달을 시작하자. 결코 기도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지 말고 살자. 기도의 부담감을 십자가를 지고 살듯이 지고 살자. 이것이 살길이다. 이것이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의 대답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성도의 삶은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유다의 강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이란 말이다. 여기서 ‘지키라’는 말은 ‘주의하다, 보호하다, 유지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매사에 삼가고 조심하고 주의하고 보호하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치를 잘 유지하며 살아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자동차는 네 바퀴 중에서 그 어느 한 바퀴만 펑크가 나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아니 차라리 자전거로 비유하자. 자전거 중에 연인끼리 함께 타는 이인승 자전거가 있다. 우리 부부도 타 본적이 있다. 연애할 때에는 그런 자전거를 타고 좋아하고 신이 나 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가정도 그런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자전거의 그 두 바퀴 중에서 어느 바퀴 하나라도 바람이 빠져 버리면 더 이상 그 자전거는 자전거의 제 기능을 할 수가 없다. 앞바퀴와 뒤 바퀴가 일정한 거리에서 일정한 체인에 의해서 연결되고 앞뒤 바퀴고 질서 정연하게 동력을 받아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앙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내 인생의  앞날이 앞바퀴만 튼튼하거나 뒤 바퀴만 안전하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다. 나만 잘 한다고 잘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 뒤 바퀴가 다 소중하고 핸들도 소중하고 체인도 소중하고 그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수고도 계속될 때에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지켜 가는 생활이란 평범한 것 같지만 이것처럼 소중한 것이 없다. 


우리 삼형제가 여름이면 어렸을 적에 시골 집 안채의 마루에다가 모기장을 치고 나란히 그 모기장 안에서 잠을 잤다. 그 모기장이라는 것이 이름은 모기장인데 모기장을 치고 나면  모기는 모기 장 밖에서 서성이며 날아다니고 사람은 그 모기 장 안에서 모기에 물리지 않고 잠을 청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하나. 하나님의 사랑처럼 귀한 사랑이란 없다.


우리가 결혼식장에 가 보면 그 결혼이란 것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든 예식장에서 이루어지든 기독교식의 결혼식이라면 결혼서약을 한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나 000는 그대 000를 남편(아내)으로 맞아 이제부터 평생토록 즐거우나 괴로우나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그대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오늘의 이 약속을 지키기로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굳게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한 사랑이 아니다. 내 주변, 내 가족, 내 이웃, 내 친구, 내 친척, 내 주변 직장과 일터와 사업장에서의 날마다의 일상생활 중에서 서로 간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서로를 대하는 신앙의 성숙함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영생에 이르도록 예수님의 긍휼을 기다리기.
주를 믿는 성도의 축복과 영광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덧입는 구원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유다의 말씀대로 영생과 구원에 이르기 까지 주님의 긍휼히 여겨 주시는 은총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아가야 만 할 것이다. 유다는 21절, 22절, 23절에서 “긍휼을 기다리라, 긍휼히 여기라,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 첫 표현인 ‘긍휼을 기다리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인 우리들은 당시나 오늘 날이나 하나님의 경건한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고 잘못되게 거짓으로 전하며 오히려 조롱하는 이단의 횡포 앞에서 저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경계하고 대적하고 미워하는 것으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오히려 저들의 변질되고 잘못되어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 버린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권면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관찰하고 묵상해야 할 말씀은 ‘긍휼’과 ‘기다림’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긍휼히 여겨 주심이 아니면 구원과 영생을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날 구원하실 주님의 긍휼을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장차 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날을 확신하며 소망하며 지혜롭고 슬기로운 다섯 신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등불과 기름을 예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듯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나날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비록 주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을 덧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여전히 죄와 악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죄 가운데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 주시는 그 긍휼하심이 아니면 감히 주님 안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가 그 누가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단에 빠졌거나 이단에 물들었거나 이단으로 인하여 그 영혼이 병들었거나 이단으로 인하여 그 신앙이 건전하지 못하고 진리에서 멀어진 자들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만 대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다. 22절에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절에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권면이다. 여기서 언급된 “어떤 의심하는 자들, 불에서 끌어 내야 할 어떤 자들, 육체로 더렵혀진 옷을 입고 있는 그 어떤 자들”이란 진리에서 벗어나서 이단에 빠져 버린 자들의 상태를 여러 모양으로 거론한 것이다. 그런 자들을 미워하지 말고 그 잘못은 미워하되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두려운 마음을 갖고 긍휼히 여겨 주라는 부탁의 말씀인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시험과 올무의 거치는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거침이 없게 하시며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유다의 편지의 첫 인사와 마지막 인사처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아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구주이시며 홀로 한분이신 하나님은 그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토록 계속될 사랑의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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