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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예수님의 하루(눅4:37-44) 201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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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4-27 21:53 조회 19,119 댓글 0
 
예수님의 하루(눅4:37-44)               2015. 4. 26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그 누구나 하루를 하루씩 살아가므로 일생을 사는 것이다. 한해 365일도 하루씩 살다 보면 지나가는 날들이다. 사람이 100년을 살면 36500일을 사는 것이다. 그런 하루하루를 살면서 하는 말 중에 “왜 이렇게 하루가 기냐” 혹은 “왜 이렇게 하루가 빨리 가느냐”는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전쟁을 겪는 이나,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갇혀 있는 이나, 매몰된 갱도 안에 갇혀 있게 된 이들이 구출을 기다리며 보내는 하루나 교도소에 수감 되어 있는 이들의 하루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이들의 하루와 그 하루의 느낌이 다를 것이다.
 
그 ‘하루’라는 시간 중에는 특별한 하루의 그날이 있다. 가령 사천년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그 날의 하루, “하늘의 별, 땅의 모레 같이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어느 날 밤 다시 찾아 오셔서 똑 같은 말씀을 말씀해 주시던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던 그 날의 그 하루, 아브라함이 나이 백세가 되어서야 구십 살 된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을 낳고 기뻐하던 그 날의 그 하루,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하여 사흘 길을 갈 때의 그 하루하루 중의 하루, 아브라함이 모리아산 정상에 도착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던 그 날의 그 하루, 그 아들 이삭이 장성하여 나이 사십에 장가가던 날의 그 하루, 아들 이삭이 장가 가기 삼년 전에 아내 사라가 세상을 떠나던 날의 그 하루, 아들 이삭이 장가 간지 이십년 만에 며느리 리브가가 쌍둥이 아들을 낳아서 에서와 야곱을 손자로 보던 그 날의 하루 등 이처럼 한 사람의 생애에 하루라는 시간이 모이고 쌓여서 한 사람의 일생을 엮어 가게 된다.
 
나의 하루 일과는 어떠한가. 생각해 보라. 몇 시에 일어나서 대개 몇 시쯤 잠자리에 드는가. 요즘처럼 직업이 다양한 세상에서는 남들이 출근할 때 퇴근하기도 하고 남들이 퇴근할 때에 출근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24시간씩 근무하는 이들도 있다. 하루 일과의 교대 시간도 서로 다 다르다. 열 댓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갈 때에 나는 비행기 안에서 잠도 자고, 졸기도 하고, 영화도 감상하고, 신문이나 잡지를 보거나 책도 읽고, 음식을 먹기도 한다. 그러나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나 승무원들의 수고는 보통일이 아니다. 물론 조종사도 부 조종사와 함께 동승해서 교대로 근무한다지만 말이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서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한해가 가고 어린 시절이 가고, 청춘이 가고, 세월이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루 일과는 어떠하였을까. 성경,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그런 하루의 일과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들도 적지 않다.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들 중의 일부이다. 40절의 ‘해 질 무렵에’와 42절의 ‘날이 밝으매’라는 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하루 일과가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은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예수님은 그 삼년을 쉬실 틈이 없이 분주하게 사역하시다가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 예수님의 하루 일과는 깊은 밤 따로 한 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새벽이면 기도하시던 곳을 찾는 제자들의 방문과 함께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거나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시거나 그의 곁을 찾아오는 무리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시거나 회당과 마을마다 찾아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 하루하루의 일과이셨다. 요한복음 2장의 내용처럼 결혼식장에 방문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잔치집의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즐겁게 축하하고 기쁜 시간을 갖기도 하셨다. 그런 가운데 물로 포도주를 만드셔서 연회장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표적을 행하기도 하셨다. 그런 날들이 예수님께는 하루하루의 일과의 모습이셨다.
이 땅에 오셔서 33년의 생을 살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하루 일과는 우리들의 하루 일과처럼이나 날마다의 하루하루 일과로 이어졌다. 그런 예수님의 날마다 이어진 하루하루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는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 예수님의 소문.
사람은 소문이 중요하다. 사람의 하루하루는 어떤 내용으로든 소문을 만들어 가는 하루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두 가지의 소문의 주인공이 된다. 좋은 소문의 주인공으로 거론되든지 아니면 나쁜 소문의 주인공으로 거론되든지 하게 된다.
 
정치인들이 자신에 대한 지지율이 오르고 내리는 것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재선이 가능한 어느 나라의 선거 제도 아래 있는 집권당의 집권자뿐만 아니라 상대 정당의 제 1후보가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지지율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바짝 추격해 오는 다른 후보에 대하여 부담을 갖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누가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인가 이런 관심은 정치 일선에 있는 대권 주자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이 아닐 수 없다.
 
가령 최근인 2015년 4월 23일에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가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 69명을 상대로 설문을 조사하였다. “누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될 것으로 생각 하는가?”라는 질문에 63%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21%가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를 각각 꼽았다. 그 외의 후보들은 대개가 한 자리 숫자에 맴돌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소문은 대권에 관심을 가진 후보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연예인들은 특히 더 그러하다. 연예인들이 인터넷 악플에 시달리고 신경을 많이 쓰다가 혹은 극단적인 결정을 하기도 하는 것을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창세기 41장에 보면, 그 이전까지는 애굽의 그 어느 감옥 안에서 지내야 했던 요셉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요셉은 바로 임금 앞에 불려 나가서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었다. 바로 왕이 요셉을 애굽 온 땅의 총리로 임명 한 후에 임금이 타는 수레에 버금가는 수레에 타게 하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엎드리라.’하고 전국을 다스리게 하였다. 바로 왕은 요셉에게 인장 반지를 빼어 주고, 세마포 옷을 입게 하고 금 사슬을 목에 걸게 하였다. 그 때 이후로 애굽의 방방곡곡 백성들 가운데서 요셉 총리의 이름과 명성과 지혜와 지도력에 대하여 소문을 듣고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그와 같이 백성들에게 소문나기는 모세를 들어 쓰실 때의 모세도 마찬가지여고 모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고 사사 시대의 기드온도 마찬가지였다.
 
한나가 기도하여 낳은 아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대적인 선지자요 제사장이 되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들어 쓰시기 시작하자 사무엘의 이름과 그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자라난 사무엘에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자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삼상3:20)고 하였다. 사무엘에 대한 소문이 전국 각처로 퍼져 간 것이다.
 
하나님이 불러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의 소문은 하나님이 소문나게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사무엘하에 보면 사울왕의 집은 점점 약하여져 가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 가는 장면을 기록해 주고 있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고 하였다. 좋은 소문이 나려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5:10)고 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소문이 나라 안에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에까지 소문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다윗의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삼하8:6, 1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누리거나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회당에서 저 회당으로 그 근처 사방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 하루는 벳세다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에게 어린 아이가 가지도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기적을 행하셨다. 먹고 남은 것을 거두니 그 부스러기만도 열 두 광주리가 될 정도였다. 그날 그 광야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자고 서로 말하며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소문에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날마다의 하루 생활은 수 없이 많은 소문들을 몰고 다니셨다. 마가복음 21장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루는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놀라워하였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가르치심은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마침 그 안식일에 그 회당 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꾸짖으셨다. 그러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며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그 현장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 놀라 물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 즉 순종하는도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 이 기적 사건 이후에 예수님의 소문은 온 갈릴리의 사방으로 점점 퍼져 나갔다. 마가복음 1장 28절에 보면,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니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온 수리아 지역에 펴지자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각종 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번져 가기 시작했고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에 한 관리가 예수님께 찾아 와서 절하면서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의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를 따라 갔다. 그 가시던 길에서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뒤로 가까이 다가가서 예수님의 겉 옷 가를 만졌다. 예수님은 뒤를 돌아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는 중에 그 관리의 집에 도착하였다. 온 집안이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들로 소란스러웠다. 예수님이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신 후에 집안에 들어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죽었던 소녀가 일어났다. 죽은 자를 살리신 이와 같은 소문이 그 온 땅에 펴져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소문이 중요하다.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소문이고, 식당 운영도 소문이고, 학원 운영도 소문이고, 유치원 운영도 소문이고, 병원도 소문이고, 의사도 소문이고, 변호사도 소문이고, 목욕탕이나 온천도 물 좋다는 소문, 친절하다는 소문, 맛있다는 소문, 잘 고친다는 소문, 해결 잘한다는 소문, 잘 가르친다는 소문, 값이 싸고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그 하는 일이 잘 될 수밖에 없다. 개인 일과 가정사와 범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소문이 나고 잘 되길 바란다.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교회도 소문이 좋으면 점점 부흥하게 되어 있다. 누가복음 4장의 말씀을 대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5장 15절에 보면,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좋은 소문을 점점 내 가는 그런 교회로 섬겨 가자.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의 소문이 점점 좋아지는 그런 삶을 주 안에서 가꾸어 가자.
 

각색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고 선포하기 위하여 오셨다. 뿐만 아니라 각색 병자를 고치시기 위해서 오신 치유자이시다. 예수님은 못 고치는 병이 없으셨다. 예날 부흥사들은 “구약과 신약이면 못 고칠 병이 없다. 구약과 신약은 만병통치약이다”라고 선포하고는 하였다. 맞다. 하나님의 말씀에 치료의 권능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온갖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하여 열병을 꾸짖고 기도하셨을 때에 깨끗하게 나았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가 곧 힘을 얻고 원기를 회복하고 병석에서 일어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며 섬겼다. 해가 질 무렵이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각색 병자들을 예수님 계신 곳에 모시고 왔다. 예수님은 일일이 그 병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 기도를 하시고 병을 고쳐 주셨다. 귀신에 들렸던 이들에게서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하고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누가 뭘 잘 알아맞히면 “귀신같이 알아맞힌다."고 말하지 않나. 이처럼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귀신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귀신을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내어 쫓아 그 사람의 건강을 회복하게 해 주셨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는지를 잘 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이를 보게 해 주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이들이 듣기도하고 말하기도 하도록 치료해 주셨다. 걷지 못하던 이들이 걷게 되었고 손 마른 자의 손이 펴지게 해 주셨다. 한센 병으로 가족을 멀리 떠나 격리된 환경에서 외롭게 지내던 이들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고 가족에게로 돌아가도록 회복해 주셨다. 네 사람이 들것에 메어 온 중풍병자를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일어나 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누워 왔던 중풍병자가 제 자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베데스다 연 못 가의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려 내셨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라는 찬송 407장 3절에 보면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라는 가사의 찬송이 있다. 그 후렴에 보면,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 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아멘”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온갖 질병을 고쳐 주시고 강건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의 은총이 임하길 소망한다. 날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새 생명을 누리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나날이 되기를 소망하자.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스데반과 빌립을 비롯한 일곱 집사들에 이르기 까지 저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가 고침을 행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기적을 수도 없이 행하였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걷지 못하던 자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고 선포하였을 때에 그가 일어나 걷고 뛰며 성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6장 8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도 큰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 이는 베드로나 스데반이 행한 것이 아니라 저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하나님은 욥바 지역을 선교 여행 중이던 베드로를 통해서 죽은 다비다를 살리시는 기적도 보여 주셨다. 기독교는 치유의 종교요 회복의 종교이다. 예수님은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고 치료하시고 회복하시는 병든 자의 의원이셨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시던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병든 몸이 회복되는 것도 기적이지만 요즘처럼 질병이 많고 사고가 많은 세상에서 하루하루 이만한 건강으로 활동할 수 있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이며 감사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무력하게 겨우 겨우 연명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말라기 4장 2절과 3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시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덧입혀 주시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 놀며 살아가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악인을 상대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날에 그 악인의 나중이 발바닥 밑에 재와 같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선포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만나 뵈려고 찾아 온 무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42절에 보면 날이 밝기가 무섭게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한 마을이나 한 회당이나 그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게 매여 계실 수만은 없는 분이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역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란 표현이 43절에 나온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강조가 여기서 시작해서 누가복음에만도 32번이나 반복하여 나온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선지자이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안고 낯 설은 나라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수고하고 이 땅에서 죽기 까지 충성을 다한 선교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처처에 무성하다.
 
지난 목요일에 강화도로 어르신 나들이를 다녀왔다. 강화도에는 1893년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갔다. 인천에 나가서 술집을 경영하던 이승환에게 내리교회의 제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조지 존스(George H. Jones, 1867-1919)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인 청년 이승환은 두 가지 이유로 세례 받기를 미루었다. 그 첫째는 이렇게 좋은 복음과 세례이니 강화도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복음을 전하고 어머니가 먼저 세례를 받으시게 하여야 겠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지금 주막을 경영하고 있으니 술장사를 하면서 세례를 받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술 장사를 그만두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지 존스 선교사를 초청해서 강화도에 복음 전파의 길을 열고, 자신의 어머니와 자기도 세례 받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일대의 양반들과 지주들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존스 선교사는 조선 사람처럼 갓을 쓰고 두루미기를 입고 조선 사람인양 변장을 하고 강화도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승환은 어머니를 업고 달밤에 해변 가에 정박해 있는 존스 선교사가 타고 온 배에 까지 올라서 어머니가 먼저 세례를 받으시게 하고 자신도 세례를 받았다. 이후로 서 너명에 모여 성경 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에 대한 소문과 신중하게 배 위에서 세례를 베푼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과 한문 성경을 건네받아 읽고 성경 말씀의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 김상임이란 유학자 출신 양반인 서당을 경영하던 학자가 개종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인천에 나가서 제물포의 평양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감리교에서 세 번째로 목사 안수를 받을 대상자가 되었다. 그런 그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환자 교우들을 문병하다가 그 자신이 감염되어서 1902년 4월에 목사 안수 한 달을 남겨 놓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상임 전도사의 둘째 아들인 김우제가 17살에 배재 학당에 유학하여 공부하고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1903년, 24살 때에 목사 안수를 받고 당시 잠두교회인 오늘날의 강화중앙교회의 제 3대 담임 목사로 목회와 강화 지역 처처의 전도 사역에 앞장서서 사역하였다. 그는 웹윗 청년회를 결성하여 청년 운동에 앞장섰고 그의 전도를 받은 이동휘는 나중에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까지 지내었다. 이렇게 시작된 강화도의 복음 전파는 오늘 날 160곳이 넘는 감리교회가 강화도의 마을마다 세워지는 시작이 되었고 지난 122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나라 안팎에 배출하는 기독교의 못자리와 같은 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조지 존스 선교사는 인천 지역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영화학교를 시작하고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이 가능하도록 주선한 인물이며 인천, 강화, 남양 지역을 포함한 황해 지역 선교의 공로가 큰 선교사이다. 한국이름은 조원시이다.
 
씨를 뿌리는 계절 봄이 되었다. 씨앗을 뿌리면 자라나게 되어 있다. 이는 개인사와 가정사와 범사가 다 마찬가지 원리이다. 올해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답게 처처에서 성실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가는 복음 전파자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주에 칠레에 가서 원주민 선교를 하고 있는 이정관 선교사가 다녀갔다. 그는 40살에 신학을 시작해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남미의 남북으로 길게 생긴 나라 칠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30여명이 모여 예배드리는 원주민 교호가 탄생하였다.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의 힘과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나 세월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점점 담을 넘는 가지처럼 왕성해 질 것이다. 우리 예수사랑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왕성하게 열방으로 번져 가고 지역 사회에 깊에 뿌리 내리는 일을 위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복음의 사람답게 전도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마을과 마을, 회당과 회당을 오 가시면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다. “나는 이 일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노라”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분명하게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날마다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는 하루하루를 지내셨다. 그 하나님의 나라복음이 오늘 날 세계 열방의 처처에 전파 되었고 나도 믿는 복음을 이 땅에 뿌리 내리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고 분부하셨다. 좋은 계절, 하나님나라 복음 전파의 선봉에 서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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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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