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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마21:1-11) 2015. 3. 29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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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3-29 20:39 조회 19,604 댓글 0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마21:1-11)         2015. 3. 29 종려주일

나라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 왕은  위풍이 있는 백마를 타거나 여러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탄다. 시내 청계천을 복원하여 맑은 시내가 흐르는 담벼락에 보면 조선 제 22대 정조(1752-1800) 왕이 화성에 행차하는 장면을 그린 김홍도(1745-1806?)의 8폭 병풍 부조물이 있다. <화성 행차도>그 행차에 등장한 인물의 숫자 즉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자가 6,200명이고 동원된 말의 숫자가 1,400필이었다고 하니 상상해 보라. 왕의 위세를 세상에 드러내는 참으로 거대한 대 이동의 장면이다. 그림의 길이만도 46미터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왕이 행차할 때에 코끼리를 타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낙타 를 타기도 한다. 왕이 백마를 타거나 여러 마리가 끄는 화려하고 웅장한 수레를 타거나 해야 권위가 있어 보이고 위엄이 있어 보일 터인데 예수님은 달랐다. 왕이 예수님처럼 나귀를 타는 경우란 좀처럼 흔치 않다. 아니, 그런 경우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유월절이 입성하시면서 나귀를 타셨다. 그것도 어미 나귀가 아닌 새끼 나귀를 타셨다. 새끼 나귀는 대개 3년 반 정도 자라면 어미 나귀가 된다. 나귀는 말과에 속하는 짐승이다. 영어로 ‘donkey’라고 한다. 크기가 종류에 따라 서로 좀 다르긴 하지만 대개 잔등 높이가 1미터 정도 된다. 말처럼 잘 달리지도 못하고 동작이 빠르지는 못하지만 성질이 온순하고 험한 지형에서도 잘 넘어지지 않아서 짐을 실어 나르는데 안성맞춤이다. 귀가 토끼처럼 크고 꼬리는 끝에만 긴 털이 나 있어서 말의 꼬리와 다르고 소꼬리와 비슷하다.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신 장면을 상상하여 보라. 좀 우스워 보이지 않나.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 번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셨다.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마을에 보내셨다. 마을 안에 들어가서 어미 나귀와 그 곁에 새끼 나귀가 함께 있는 것을 보거든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다. 이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골고루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아닌가. 어찌하여 낯 설은 마을의 남의 집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시는 것일까. 만약에 주인이 “왜 남의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가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마태복음은 이는 선지자들이 일찍이 한 예언의 말이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바를 순종하며 나의 생명까지라도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가.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무엇을 얻고 취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 니라 내어 주고 생명까지라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오늘은 종려 주일이다. 종려 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새끼 나귀의 잔등에 펴서 깔기도 하였고 또 어떤 많은 이들은 자기 겉옷을 펴서 길 위에 깔기도 하였다.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죄의 값을 해결하신 평화의 왕 예수님.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인간은 누구나 평화를 목말라 한다. 가정이 평화롭기를 원한다. 부모 자식 간에, 부부 간에, 형제 자매 간에, 고부간에, 동서지간에 서로 서로 화목하고 좋고 평안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가정에 평화가 금 가고 깨지면 무슨 소용이 있나. 아무리 젊고 아무리 건강해도 주변 사람들과 서로 평화롭지 못하다면 산다는데 무슨 재미가 있나.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을 누리며 살아도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북 왕국 이스라엘의 3대 왕은 ‘바아사’이다. 24년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못된 왕 바아사에 대하여  크게 실망하셨다.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니의 아들 예후를 통해서 임금 바아사의 장래를 꾸짖어 예언하신 말씀이 나온다.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이라고 하셨다. 왕인 바아사를 하나님은 “네가 과거에 티끌”이 아니었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과 백성들 앞에서 범죄하고 그 죄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다. 그런 바아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 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왕상16:3)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인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예언이 이어진다.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16:4) 하나님이 못마땅하게 여기시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제 3대 임금 바아사는 24년간 왕으로 있었지만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 뒤에 대를 이어 왕이 된 바아사의 아들 엘라 왕은  허구헌난 술 잔치를 벌이고 먹고 마셨다. 하루는 왕궁 맡은 자인 아르사의 집에서 먹고 마시며 취해 있는데 그의 신하 중에 병거 절반을 통솔하던 시므리가 쳐들어 와서 왕을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엘라 왕은 2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바아사의 왕족들 중에 친지와 친구들까지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시므리가 반역을 일으켜 왕이 되었다는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군대 지휘관 중에서 오므리를 앞장 세워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오므리 장군은 무리를 이끌고 시므리가 엘라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디르사 성을 에워쌌다. 성읍이 함락 된 것을 안 시므리는 왕궁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그 불길 가운데서 스스로 죽었다. 성경은 7일 만에 끝난 시므리의 반역과 죽음을 “이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니라”(왕상116:19)고 하였다. 오므리는 왕이 되기 위하여 백성들 중에 반대편에 서있던 디브니의 추종 세력을 이겨 다스리고 12년 동안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제 6대 왕으로 통치하였다. 그는 사마리아 산을 사 들여 그 곳에 사미라아 성을 건설하였다. 그의 왕국은 강력해져 갔다. 그러나 오므리 왕도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악한 왕이었다. 열왕기상 16장 25절에 보면 “오무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라고 고발하고 있다.  그 다음 절에 보면,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오늘날로부터 2900년 전의 역사이다.
 
지난 20세기도 인류의 싸움과 전쟁은 계속되었다. 영국에서 발행한 <평화 속의 전쟁>이란 보고서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후만 해도 100개국에서 130건의 군사 분규가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서만 10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2차 세계 대전과  6.25 한국전과 월남전과 걸프전 등에서 약 5000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이와 같은 갈등과 반목과 시비와 싸움과 테러와 보복과 전쟁이 계속되는 죄와 악의 소굴인 인간 세상에 예수님께서 죄를 대속할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평화의 왕이시다. 인간은 마음속에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된다. 편안 한 것과 평안한 것은 다르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면 편안 할 수 있다. 그러나 평안과 평화는 환경과 여건이 좋다고 저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시편 29편 11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리시로다”라고 하였다. 잠언 3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앞길을 지름길이 되게 하시며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고 하였다.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메시아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 절에 보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사와 평강은 더함이 무궁하다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 안에 누리는 평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누리는 평화는 잠시 잠간의 평화가 아니라 무궁하고 영원한 평화요 평강인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말씀이 아니셨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예언에 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1:79)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평강’ 즉 ‘에이레네’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이룩하실 평강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는 것을 말씀한다. 뿐만 아니라 죄 사함을 통하여 마음에 평화가 찾아 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해 주시는 평화의 왕이시다.
 

겸손한 왕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겸손한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9)고 하셨다. 예수님은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대로 오신 겸손한 왕이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는 말씀이 본문인 마태복음 21장 5절에 인용되고 있지 않나.
교만한 것은 어리석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겸손하여야 한다. 남들과 비교하여 더 배웠다고 교만하고, 인물 더 잘 났다고 교만하고, 남들보다 더 벌었다고, 더 모았다고 교만하고, 남들보다 세상 지위와 권력과 명예가 뭐 더 대단하다고 교만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욥22:29)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이신다.”(시10:17)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먹고 배 부르게 하신다.”(시22:26)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붙들어 주신다”(시147:6)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여 아름답게 하신다.”(시149:4)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잠3:34)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잠11:2)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15:33)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19)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신다”(사57:15)
 
사도행전 20장 1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사역을 회상하면서  자신은 자난 날 ‘모든 겸손과 눈물’로 사역하였노라고 고백하였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2:3)고 분부하였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라고 분부하였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보면 예수님의 아우인 야고보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교훈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 편지에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3:8)라고 겸손한 삶을 강조하였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서는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교훈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라고하면 반드시 서로 겸손한 삶을 항상 유지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사사 중에 삼손도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할 때에 불행해 지고 말았다. 임금 사울도 하나님이 그를 임금으로 부르실 때에는 짐 보따리 사이에 숨던 겸손한 인물이었으나 나중에 교만해지고 거짓되고 선지자 사무엘과 하나님 앞에서 경거망동하게 행동할 때에 하나님조차도 그를 버리시지 않았나.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겸손한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생활이어야만 한다.
주신 건강, 주신 재물, 주어진 환경, 주어진 나의 삶의 그 모든 것 앞에서 교만 떨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 백성답고 구원 받은 성도다운 모습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겸손하셨다. 새끼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속에 상상하여 보라.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 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찬송 212장 1절)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늘 새 힘을 주시고 잘 감당하게 하시는 능력의 공급자이시다. 찬송 534장 3절의 고백과 결단은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겸손 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늘에서 부르네 모시어 들이세
좋은 자리 드리고 주실 은혜 구하세 하늘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1706-1790)은 미국 건국 초기의 지도자로 대통령만 못 되었을 뿐 자기가 원하는 모든 중요한 직위를 다 가져보았던 사람이다. 그는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미국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로 불리는 몇 명의 정치가 중의 한 사람이다. 피뢰침과 다촛점 렌즈를 발명한 발명가이기도 하다. 미국 100불짜리 지폐에 그의 얼굴 초상화가 실려 있다. 그는 비누와 양초를 만들어서 수입원을 갖고 살아가는 가정의 15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서 10살 때 학교를 다니다 말고 인쇄소에 취직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24살 때에는 직접 인쇄소를 경영하였다. 25살 때에 펜실베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는데 이와 같은 업적은 나중에 도서관 운영을 체계화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26살 때에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이란 책을 써서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떤 일이든 탁월하게 이룩해 내는 열정가요 추진력이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는 지금의 하원의원, 상원 의원 직을 다 거쳤고 체신장관격의 직임을 오래 도록 잘 감당하고 우정 업무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가 학교를 다닌 기간은 고작해야 2년 남짓이었다. 그가 22살이었을 때에 스스로 반문하기를 "내 인생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런 자기반성을 거쳐 12가지 덕목들을 뽑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갔다.
 
첫째-절제: 과음이나 과식을 하지 않는다.
둘째-침묵: 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하지 않는다.
셋째-질서: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일은 알 맞는 시간에 한다.
넷째-결단: 해야 하는 일은 꼭 완수한다.
다섯째-절약: 비싼 것은 사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면 산다.
여섯째-근면: 시간은 헛되이 쓰지 않는다.
일곱째-성실: 남을 해치는 악한 책략을 하지 않는다.
여덟째-정의: 남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
아홉째-중용: 극단은 피한다.
열째-청결: 몸과 옷과 집안을 깨끗하게 한다.
열한 번째-평정: 사소한 일에 화를 내지 않는다.
열두 번째-순결: 성을 남용하지 않고 건강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간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12가지를 적어서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목사님은 "다 좋은데 한 가지가 빠졌군요. 바로 '겸손'입니다. 이 12가지를 다 이루었다고 해도 '겸손'이 없으면 12가지를 다 잃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하고 충고해 주었다. 그러자 밴자민 프랭클린은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가장 첫 번째 항목에 겸손을 넣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다”고 적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활 단위를 13주 단위로 구분하여 매주 한 항목씩 묵상하고 자신에게 깊이 적용하려고 힘썼다. 그는 78세 때 회고록을 쓰면서 “완벽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노력하였던 덕택에 좀 더 착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 올 수 있었다”고 회상하였고 84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의 자서전은 오늘 날 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역사적인 책 중의 하나이다.
 

구원하는 왕이신 예수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천하 만민을 구원하실 구원의 왕이시다. ‘호산나! 호산나!’ 하는 함성 소리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이다. 시편 118편 25절의,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앞서며 뒤 따르는 무리들은 서로 “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에 무리들 가운데 서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예수님을 설명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완성하시는 선지자요 단번 희생 제물이 되어 그를 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 메시아이시다. 예수님은 각색 병자들을 질병에서 구원하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서 건강하게 구원해 주셨다. 배 고픈 광야의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셨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셨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구원은 그 정도의 구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인간을 죄와 사망의 흑암 권세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히 광명한 빛의 자녀로 영생하도록 구원하신 구원하는 왕이시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왕이 지나갈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거나 흔들면서 왕의 행차를 환영하고는 하였다. 종려나무 즉 ‘Palm Tree'는 의와 정직과 승리와 번성과 풍요의 상징이다. 종려나무는 큰 것은 높이가 30미터씩 자라나는 장대하고 웅장하고 하늘로 치 솟아 번성하는 나무이다. 그 열매는 꿀처럼 달다.
 
누가복음 19장 28절 이하에 보면 백성들의 ‘호산나’하고 외치는 큰 함성 소리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주었다.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눅19:38)라고 외쳤다. 그렇다. 예수님은 온전하고 영원한 평화와 영광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구세주이신 왕이시다. 이 세상 왕들 중에는 백성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집착하는 독재자들도 있다. 과거에는 그런 독재자가 오늘 날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의 상황도 그러하였다. 로마의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더욱 큰 목소리로 “호산나 호산나”하고 소리친 것이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군가나 나타나서 자신들을 억압과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길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 구원의 왕이시다. 예수님의 다스리심은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7)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을 구원하시되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구원하고 다스리고 보존하시는 전능하신 왕이시다.
 
구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다 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러나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마 약속해 주셨다. 예수님이 구원의 왕으로 이룩하신 구원은 제한적인 구원이나 일시적인 구원이나 지엽적인 구원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왕으로 믿고 따르고 섬기는 모든 인생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빛으로 선사해 주시는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이시다.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왕이신 예수님의 구원은,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는”(사9:2-4)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 나는 구원이시다.
 
이런 기쁨은 사사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로 메뚜기 떼처럼 많던 미디안의 군대를 무찌른 후의 기쁨과 같은 기쁨이다. 얼굴을 가리고 이삭 줍던 모압 여인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고 베들레헴에서 오벳을 낳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축하받던 날의 기쁨과 같은 기쁨이요 즐거움인 것이다.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아 기뻐하고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낳아 기뻐하던 그런 기쁨이요 즐거움인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은 그런 구원의 기쁨을 주시는 구원의 왕이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구원의 왕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찬미를 받으시되 영원히 영원히 그런 찬미 가운데 거하실 구원의 왕이시다.
 
구원의 왕이신 예수님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power and wealth and wisdom and strength and honor and glory and praise!) (계5:12)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왕이시다. 그러므로 종려 주일은  날 구원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또 다시 찬송하는 그런 날이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Amen! Praise and glory and wisdom and thanks and honor and power and strength be to our God for ever and ever. Amen!) (계7:12) 호산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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