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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다 이루신 예수님(요19:23-30) 201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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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3-15 16:57 조회 17,834 댓글 0
 
 다 이루신 예수님(요19:23-30)         2015. 3. 15
 
 
성경이 교훈하는 구원의 길은  단 하나이다. 일반 종교, 타 종교에서는 대개 구원의 길이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종교 다원주의, 종교 통합의 이론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지하철역은 출구가 많아서 출구를 잘 못 나서면 건널목 건너서 다시 찾아 가면 된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그렇지 않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이다.
 
교회에 올 때 대중교통 이용하는 이들은 3호선 지하철인 구파발 역은 출구가 4곳이다. 연신내역은 출구가 7곳이다. 이처럼 출구를 잘못 나가면 건널목을 건너서 다시 목적지를 찾아 가면 된다. 세계에서 한 곳의 지하철역에 출구가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부평역이 31개의 출구로 가장 많다. 서울은 종로 3가역이 15개이다. 1, 3 5호선이 만나서 가장 출구가 많다. 세계에서는 일본 동경의 신주쿠역이 출구가 가장 많다. 자그마치 출구가 159군데나 된다. 그만큼 단일 역으로는 이용자도 세계에서 가장 많다. 다른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 환승 노선까지 합하면 정말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세계적인 지하철역이다. 이처럼 지하철은 아무리 복잡하고 아무리 출구가 많아도 물어서 가려는 길을 잘 찾아가면 목적지에 도착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는 다르다. 인간이 구원을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영생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이렇게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다. 구원의 길은 단 하나이다. 구원의 또 다른 길이란 없다. 복음은 단순한 것이며 진리도 단순한 것이다. 알고 보면 그렇고, 믿고 보면 그렇다. 복음 전하다 붙잡혀 대제사장의 문중과 공회 앞에서 변증하던 사도 베드로는 이런 유명한 고백을 하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으라 하였더라”
 
(행4:12)고 하였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구원의 길이다.
예수님은 이 땅의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에 천사 가브리엘이 예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설명해 주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罪)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다. 여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알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정하여 주면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그렇다. 성경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님의 말씀의 책이다.
 
“다 이루었다.”(요19:30)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말씀은 이 죄에 대한 대속자의 죽음을 선포하는 위대한 선언이다. ‘tetelestai’라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승리의 선언이시다. 영어 성경에 보면, “It is finished"라고 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요 대 목회자였던 스펄전 목사는 “이 한 단어에 복음의 모든 내용이 다 담겨있고 이 한 단어에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다 담겨있다.”고 설명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크나큰 고통을 당하시면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 중의 마지막 말씀이 이것이다.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나.
 
사람은 생을 마치는 그 순간의 그 말이 그의 생애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영국의 극작가요 평론가였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의 묘비명은 “우물쭈물 하다가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되어 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직역하면 “그렇게 오래 서성거리더니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고 적혀 있다.
 
지금 영국 여왕인 앨리자베스 2세(1926-)는 63년째 여왕이다. 1952년 이후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여왕은 70년을 살았는데 그 중에 25살 때인 1558년부터 44년간 왕이었다. 유럽 주변 열강들의 위협과 화폐 가치 하락, 신구교 간의 종교 전쟁 등등 복잡하고 시끄러운 시대를 이끌어간 여왕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렸다. 그녀는 늘 “과인(寡人)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는 말을 해서 국민들을 기쁘게 하려 하였다. 그녀는 독신주의로 살았다. 그녀의 아주 어린 시절에 어머니 엔 블린 왕비는 간통죄로 참수형을 당하여 죽었다. 계모도 아버지인 헨리 8세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이 어려서부터 컸다.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후에 평생 홀로 지냈다.  그런 그녀는 44년간 왕이었지만  1601년에 런던에서 일어난 대중 봉기의 반란을 진압하야야 하는 후유증과 자신의 우울증과 노년기의 각종 질환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날들을 지내다가 눈을 감았다. 그녀는 “ 이젠 다 끝났어.” 라고 말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엄청난 부귀를 누렸지만 마지막은 허무함과 허탈감 속에 “이제는 다 끝나버렸어.”하고 탄식하듯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인생이 결코 의미 있고 행복했던 인생만은 아니라는 한탄이 섞여있었다. 여한과 후회와 아쉬움이 크게 남는 한숨 가운데 숨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시며 영원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선언인 “다 이루었다.”는 고백은 결코 실패자의 고백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대속 하시는 구속주로서의 위대한 선언이신 것이다.
 

죄의 값을 다 치루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임 당하심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시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셨다는 선언이시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비밀을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편지하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하다. 아니, 하나님이 외아들이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를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바로 그러한 말씀이 아니신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깊이 있게 생각하고 제대 로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이 말씀하는 죄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것을 말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아니한 그 행위가 죄인 것이다.
 
모세의 때에 주신 ‘율법’ 앞에서도 ‘하라’고 하신 계명은 행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금하신 말씀을 범하는 불순종이 죄인 것이다. 성경적으로는 인간의 죄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아담에게서 시작된 죄를 원죄(原罪, original sin)라고 한다. 그 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짓는 모든 죄는 ‘자범죄’(actual sin)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비슷한 죄의 반복 가운데서 살아간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일곱 가지로 구분한다.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나태, 성욕”이 그것이다. 인류 역사의 그 모든 죄들은 별의 별 죄가 다 많은 것 같지만 그 뿌리는 이 일곱 가지 죄와 악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 등의 보이지 않는 죄의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지‧ 정‧ 의를 죄가 다스리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 속에 끊임없이 죄를 범하며 살아간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나서 책임을 전가하고 핑계를 대던 모습은 아담의 때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죄 앞에서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다 같다. 이것이 죄의 뿌리이다. 세상은 법을 정하여 놓고 그 법의 저울과 잣대로 인간의 범죄를 다룬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뜻을 다룬다.
 
인간이 사람을 죽이면 형법에 의하여 큰 벌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노해도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심하게 욕만 해도 공회에 잡혀 가게 된다고 하셨다. 또한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고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함부로 분노하거나 화를 벌컥 벌컥 내거나 심한 욕설을 퍼 붓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무시하고 깔보고 욕하는 행위를 지옥 불에 들어갈 정도로 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매우 나쁜 행실로 지적하셨다. 그리고 예의 있게, 겸손하게, 주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배려하면서 참신하고 안정된 인간관계를 갖고 살아가라고 교훈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 중의 제 7 계명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고 하셨다. 반대로 하면 무엇인가. “음욕을 품고 남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가 아닌가. 무슨 말씀인가. 동성 간이든, 이성 간이든 상대방을 성욕의 대상으로 대하면 이미 그 마음에 범죄한 것이란 말씀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차라리 신체의 일부를 잃고라도 지옥에 들어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유익하지 아니 하냐”고 하셨다. 남녀노유간에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신앙인 다음 마음가짐과 태도를 갖고 대하라는 교훈의 말씀이 아닌가.
 
이처럼 죄를 벗어나고, 죄를 멀리하고, 죄에서 손을 씼고 주님과 함께 깨끗한 신앙양심으로 살아가려면 날마다 순간마다 이 죄의 문제를 분별하는 성경적인 기준이 내 안에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다스려 이기시는 그 분의 영 즉 성령이 나를 다스리고 주장하여야만 한다. 갈라디아2장 20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주장하고 지배하고 다스리셔야만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죄의 값을 온전히 치루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그 십자가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방법이다.
 

온전함을 이루신 예수님.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은 아쉬움이 전혀 남지 않는 온전한 삶이요 온전한 죽음이요 삼일 후에 부활 하시는 온전한 부활 승리의 표상이시다.
 
평소에 주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고 교훈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낳은 예수님의 동생인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하였다.
 
그렇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생각과 입의 말과 모든 삶이 온전해 져 가는 범사를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거룩한 삶이요, 성화를 이루는 삶이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인 것이다.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다. 생각이 그러하고 마음가짐이 그러하고 삶의 태도가 그러하고 대인 관계가 그러하다.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주변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허물투성이요 부족함으로 가득할 뿐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담은 입의 말이 온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이 부족함 투성이이다. 결코 이 땅에 온전한 인간이란 없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의 삶을 사신 예수님만이 온전하신 분이시다.
 
요즘 교회 안에서 오케스트라 연주 팀이 주말마다 모여서 전문 지휘자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어린이로부터 어른까지 있다. 얼마나 연습하면 아름다운 연주가 가능할까.
 
2007년 1월 12일, 미국 <워싱턴 포스트> 신문사에서 실험을 하였다.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수준 있는 음악을 알아듣는가를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죠수아 벨(Joshua Bell,1967-)에게 청바지를 입고 야구모자를 눌러 쓰게 하고 350만 불(약 39억)짜리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갖고 43분간 6곡을 메들리로 연주하도록 부탁하였다. 사실 죠수아 벨의 바이올린 독주를 연주장에서 제대로 가까이의 로얄 석에서 듣고 감상하려면 한 장에 수 백불씩 하는 입장권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그런 연주자이다. 워싱턴 D. C 의 랑팡 플라자역 에서 아침 7시부터 50분부터 43분간 쉬지 않고 연주하였다. 시민들은 휴대 전화 통화 하랴 문자 주고받으랴 휴대 전화로 아침 뉴스 읽으며 출근하랴 총총 걸음으로 걸으며 1097명이 바쁘게 지나갔다. 그의 연주를 눈 여겨 가며 귀 기울여 들은 시민은 단 일곱 사람뿐이었다. 저들의 그의 앞에 놓인 모자 안에 32불을 넣었다.
 
이어령 박사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그의 책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관심도 마치 이와 같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오늘 날 교회가 하도 흔하고 어느 누구라도 원하면 가까운 교회에 들어가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고 준비된 설교 말씀 들을 수 있다 보니까 마치도 죠수아 벨의 연주를 길거리에서 들으며 스쳐 지나가듯이 별로 가치 있고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러하지 않나. 그냥 대강 되는대로 믿고 되는 대로 살고 되는대로 대강 믿는 사람들 속에 어울려 지내는 정도를 갖고 신자의 삶이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예수님께서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를 비롯한 12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높이 못 박혀 처형 당하실 때에 그 골고다 현장에 없었다. 온전함을 이루려면 있어야 할 시간에 있어야 할 장소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역사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제자라고는 요한복음 19장 26절의 “ 사랑하는 제자” 한 명 뿐이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자신은 제자들 중에서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형님뻘 되는 다른 제자들이 다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떠나가 버린 예수님의 고난당하시는 그 골고다 언덕 십자가 밑에, 거기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남은 삶을 부탁한 것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Here is your mother)는 말씀은 효자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에게 대 할 수 없던 공경과 사랑을 이종 사촌이며 제자인 사도 요한에게 위임하는 유언의 장면이며 엄숙한 순간이다.
 
온전하신 예수님 안에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 분 안에 거해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고 하셨다. 예수님 안에 온전한 삶을 가꾸어 가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이어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는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말이다. 
 

하나 됨을 이룩하신 예수님.
사랑하면 하나 될 수 있다. 하나가 되면 온전해 지고, 온전함을 이루면 하나가 되게 마련이다. 사탄은 성도나 교회를 자꾸만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나누이게 하려고 온갖 악한 공작을 동원한다. 그러나 성령은 계속하여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23절에서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하나 되고, 믿는 자들과 하나 되기를 늘 원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셨다. 믿는 자를 향하신 예수님의 소원은 언제나 분명하시다. 하나 되고 온전해 지길 원하신다. 그리함으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파송의 이유와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주를 믿는 성도들도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불순종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십자가는 그 모양이 그러하듯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화평과 화목을 이루신 하나님의 선물이시다.
 
사탄 마귀 원수는 하나 된 것을 자꾸만 둘로 나뉘게 하려고 한다. 부모와 자녀 간에 나누이게 하고 부부 간에 나누이게 하고 형제자매 간에 나누이게 하고 친구와 가까운 주변 사람들 간에 자꾸만 나누이게 하려고 이간질하고 분리하고 대립하게 하고 반목하고 갈등을 갖게 하고 불만과 시비와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히게 한다. 사탄 마귀는 성도를 섭섭 병에 들어 넘어지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하나 되게 하고 일치되게 하시는 화합과 화목과 화해와 화평의 영이시다. 우리가 부르는 <주는 평화>라는 복음 성가 가사 그대로이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내/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바울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리고 18절에서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서로가 하나 됨을 이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19-22)
 
십자가의 권세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의 축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나 되게 하신 주님을 영원히 경배하고 찬양하며 살아가는 천국 백성이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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