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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중매에 열심을 내라(고후11:1-6) 201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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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9-14 07:22 조회 19,467 댓글 0
 
중매에 열심을 내라(고후11:1-6) 2014. 9. 14
 
 
어제 어느 목사님 가정의 아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시내의 한 교회에 다녀왔다. 결혼은 생애 중에서 큰 일 중의 큰일이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잘하여야 한다. 요즘이야 남녀 간에 서로 자신들의 배우자를 만나서 사귀고 결혼을 약속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동서고금에 전통적으로는 중매라는 과정이 있었다. 결혼이란 개인과 개인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인 한 가정과 다른 한 가정이 만나는 두 가문의 연합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결혼한 여러분은 연애결혼인가 아니면 중매결혼인가. 또한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면 연애결혼을 선호하는가 아니면 중매로 결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가. 우리 속담에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잔, 잘 못하면 뺨이 석 대”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중매는 신중하여야 하고 그 중매의 결과는 아무도 쉽사리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을 담고 있는 속담이 아닌가.
 
성경에 결혼 준비의 과정을 가장 자세하게 담고 있는 장면은 아마도 창세기 24장이 아닐까 싶다. 몰론 야곱과 라헬의 결혼 과정과 룻기의 보아스와 룻의 결혼 이야기도 빼어 놓을 수 없지만 말이다. 분류하자면 야곱은 연애 결혼이고, 룻과 보아스의 결혼에는 룻의 시어머니의 역할이 적지 않았으니 홀로 된 며느리 재가를 위하여 시어머니가 중매에 발 벗고 나선 격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통하여 뒤 늦게 낳게 하신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내용을 보라.
 
아브라함에게는 나이 많은 종이 있었다. 성경에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지만 '늙은 종’이라고 하였다. 그 종은 주인인 아브라함의 집안 모든 살림살이를 맡아하는 이었다. 아마도 그는 50년 전부터 아브라함의 살림살이를 맡아 하며 자녀 없던 아브라함이 후사를 이을 자로 거론하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말하는 ‘늙었다’는 ‘자켄’이란 히브리말의 뜻에는 ‘연세가 많다’는 뜻도 있지만 집안을 관리하고 책임지고 일하는 자에 대한 존칭의 의미도 담겨 있다. 그런 그에게 아브라함은 자기가 떠나 온 고향에 가서 며느리 감을 맞아 오라고 부탁하였다. 종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는 주인에게 여쭙기를 “만약에 그 곳의 처녀들 중에서 이곳으로 출가해 오기를 원하는 여성이 없으면 주인의 아들을 그 곳으로 데리고 가 볼까요”하고 물었다. 그 때에 주인인 아브라함이 종에게 대답하였다. 그 대답에는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맞아들이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신앙관이 들어난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 즉 천사를 너보다 먼저 보내실 것이다.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도록 하여라”하고 부탁하였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미리 준비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종에게 중요한 사명을 맡겨서 먼 길을 보내는 주인 아브라함은 종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 밑에 넣도록 하고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게 잘 감당하기를 맹세 받았다. 고대 중동 사람들에게 있어서 환도뼈 즉 허벅지 밑에 손을 넣는 맹세의 방법은 몇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남성의 상징 가까이에 손을 넣는 행위를 통해서 후손의 대에 이르기까지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와 둘째, 할례를 명하신 하나님의 신실함과 언약의 징표를 기억하게 하는 엄숙한 서약의 의미와 셋째, 주권자에 대하여 철저하게 복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결혼의 준비와 결혼생활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엄숙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낙타 열 필에 주인이 선물하고 싶어 하는 온갖 좋은 것들을 잔뜩 싣고 그 동행들과 함께 먼 길을 가서 메소보다미아 나홀 성에 도착하였다. 도착한 낙타들은 성 밖의 우물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쉬고 있었다. 시간은 저녁나절이었다. 성 안에서 딸들이 성 밖에 있는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나올 시간이 되었다. 늙은 종은 그 우물가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나의 주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주인의 며느리 감을 순조롭게 만나게 해 주세요. 누구에게든 나로 하여금 물 좀 마시게 해 달라고 요청할 터인데 나와 일행과 낙타에게 물을 마시도록 돕는 딸을 만나면 그가 주인의 며느리 후보인 것으로 알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종의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성 안에서는 딸들이 어깨에 물동이를 메고 물을 길으러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 중에 심히 아리따운 처녀에게 아브라함의 종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청하건데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그 딸은 마침 아브라함의 아우인 나홀이 아내 밀가를 통해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소생인 리브가였다. 그 처녀는 아브라함의 아우인 나홀의 손녀딸이었다. 족장 시대였던 당시의 결혼은 이처럼 근친결혼이 가능하였다. 집안사람들끼리 결혼하는 제도 말이다.
 
일은 종을 보낼 때에 주인 아브라함이 말한 것처럼 순조로웠다. 그 처녀는 낯 선 사람인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요청을 금방 받아 들였다. 급하게 물동이를 내려서 물을 마시게 하고 다시 급하게 물을 길어다가 열 마리의 낙타들이 마시도록 충분한 량의 물을 뛰어 다니면서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날랐다. 성경에 보면, ‘급히’라는 표현과 ‘달려가서’라는 표현이 각기 두 번씩이나 나온다. 무슨 말인가. 리브가의 첫 인상은 부지런하고 행동이 민활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흡족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외모도 출중하고 정숙한 여성이었다. 성경은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창24:16)고 하였다.
 
일은 너무나도 순적하게 진행되었다. 늙은 종은 묵묵히 그 처녀의 급하게 부지런히 낙타에게 물을 길어다 마시게 하는 모습을 주목하여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하였다. 기분이 흡족하여진 늙은 종은 그 현장에서 낙타에 싣고 간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녀에게 금 코걸이와 금 손목고리 한 쌍을 선물로 건네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네가 누구의 딸이냐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 일행이 묵을 곳이 있느냐” 묻기가 무섭게 그는 자신을 소개하였고 집으로 안내하였다. 환대를 받은 종과 일행과 낙타들을 위하여 리브가의 오라버니인 라반은 낙타에게 지푸라기와 사료를 풍성하게 주고 손님들을 위하여 발 씻을 물을 내어 오고 음식을 푸짐하게 베풀었다. 먼 길을 가서 배도 고프고 쉬고 싶기도 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종은 라반에게 물었다. 일은 너무나도 순조로웠고 그 날 밤으로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로 맞아들이도록 모든 대화가 잘 진행되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가져간 선물 보따리를 풀어서 은금 패물과 의복들을 리브가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 보물을 건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아브라함의 종이 주인에게 돌아가겠다고 하자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는 딸이 한 열흘 정도라도 곁에 좀 더 머물러 있으면서 출가를 준비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딸 리브가에게 며칠이나 더 있다 떠나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 날 아침으로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서 함께 출발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리브가를 시집보내는 친정 식구들은 오라버니와 어머니를 포함해서 한 결 같이 리브가를 축복하였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소식을 기다리며 들에까지 나아가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종이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이삭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묵상하다가 저 만치 시야에 들어오는 낙타를 탄 일행을 보게 되었다. 리브가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이삭에게 인도되었다. 저들은 가정을 이루고 이삭은 어머니 사라가 돌아가신 이후에 신부 리브가를 맞아서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손이 귀하던 언약의 가정인 아브라함의 가정에 준비된 며느리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된 후에 낳은 아들인 쌍둥이 형제 중의 동생인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아 창성한 언약의 족장 가문을 이루었다. 부부의 연을 맺는 중매가 이처럼 귀하듯이 한 영혼이 예수께 중매되는 복음 전파는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를 교훈하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다.
 
가정을 이룰 남녀를 중매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중매하는 일보다 천배 만 배 더 쉽지 않은 일은 중매로 이루어진 부부가 행복하게 평생토록 가정을 잘 지키며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 바 있다. 남편의 아내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영광스럽고 티와 흠과 주름 잡힌 것이 없는 교회로 사랑하길 원하시듯이 남편이 자기 몸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하고 존경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결혼 생활에 비밀이 큰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에도 영원한 신비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예수께 중매하는 중매 그 자체에 신비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복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출발을 중매하는 것에 비유하여 편지하였다. 사실 우리 각 사람들은 누구가가 나 자신을 예수께 중매하여 신자가 된 것이다. 부모님을 통해서이든 친구들을 통해서이든 그 어떤 낯 설은 이의 중보 기도하는 섬김과 구령의 열정에 의해서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고 중매가 되어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게 된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 다른 주변의 그 누군가를 예수 그리스도께 게속하여 중매하는 전도자인 중매쟁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소개하고 중매하는 전도자인 우리는 떤 모습의 신앙인이 되어야 할까
 
 
진실하고 순수한 헌신의 마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4절에서 말씀하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으로 인한 영적 혼탁이 심각하였다. 산사태가 나서 집안에 흙탕물이 밀려들어오면 난장판이 되고 마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는 자칭 거짓 사도들이 가만히 스며들어 와서 교회의 영적 질서를 무너트리고 금가게 하였다. 3절에서 뱀의 간계로 미혹을 받은 하와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내용이다. 바울이 언급한 뱀이란 거짓 사도들을 말한다. 또한 미혹을 받은 하와는 뱀의 간교한 미혹에 넘어가 버린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다. 화려한 결혼식보다 중요한 것은 가정을 진실하고 순수하게 잘 지켜나가는 것이 아닌가.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는 고린도 교회의 개척자요 복음 전파자요 사도인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편지가 아닌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주인의 아들 이삭이 부인을 맞이하는 중매자의 중차대한 과업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매 순간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천사의 순적한 인도하심을 간절히 염원하면서 메소보다미아의 나홀 성을 찾아 간 것처럼 우리는 그런 영적 중매자의 겸허한 마음을 언제나 잘 지켜 나가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전도 받은 이들로 연합하여 출발한 교회가 고린도 교회인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거짓 사도들의 미혹에 물들고 넘어진 교인들로 인하여 교회가 영적으로 병들어 있었다. 사도 바울의 지적은 구체적이다. 사도 바울이 전파한 적이 없는 ‘다른 예수’를 예수라고 받아들이고,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이며 성령이라고 주장하며, 전파한 적이 없고 받은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복음인양 착각하고 분별력을 잃은 채로 미혹에 빠져서 끌려 다니는 고린도 교인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덴동산의 뱀의 간계에 미혹 당한 하와의 예를 들면서 그 안타까운 심정을 전한 것이다.
 
가정 문제를 다루는 TV의 드라마 소재들을 보면 이처럼 막 나가는 가정의 이야기, 막 나가는 부부의 이야기, 아무리 드라마이지만 설정 자체가 별 희한하게 병들어가고, 금이 가고, 얽혀 가고, 무너져 가는 가정의 부부 이야기를 소재로 다루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그런 극단적이 상황 설정을 해서 시청률을 끌어 올리려는 의도를 갖고 풀어 나가는 말도 되지 않는 상황 전개를 보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 보면 그런 경우는 드라마에서만 대하는 일화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겪는 일들이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정사이며, 부부의 이야기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씁쓸하게 한다.
 
사실이 아니겠고 지어 만든 이야기이겠지만 지난 번 세미나 때에 강사가 그런 일화를 들었다. 서양의 어느 교회가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창녀촌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이 제 몸 팔아 번 돈을 싸 가지고 와서 건축헌금을 하겠다고 했단다. 그 교회 목사님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우리 교회는 이런 돈을 건축 헌금으로 받을 수는 없다”고 하자 저들 여성들이 하는 말이 "목사님 그냥 받으세요. 원래 이 돈은 목사님 교회의 남자들 돈이었으니까요.”하고 말하더란다. 기독교인 행세하는 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두 얼굴, 그 이중성을 고발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무리 지어 만든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무엇인가를 교훈하지 않나. 우린 어떤가. 나는 어떤가. 대인관계, 재물 관계, 시간 사용, 취미 생활, 우리가 생각하고 누군가 대화하고, 길을 가고 앉고 서는 그 모든 출입과 삶의 현장에 나의 민낯, 나의 실상은 어떠한가. 나의 세상살이의 현 주소는 어떤가.
 
3절에서 말씀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이란 '진실함과 순수한 헌신'(sincere and pure devotion)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남녀를 서로에게 소개하여 중매를 성사시키려 해도 진실함과 깨끗한 마음, 진실함과 순수한 헌신의 마음이 있어야 하겠거늘 하물며 나의 주변의 그 누군가를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삶이 먼저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깨끗하고, 얼마나 순결하고, 얼마나 순수한 헌신의 마음을 갖고 정성을 다하여야 한 영혼을 주님께 중매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먼 남들은커녕 내 가족이나 부모 형제 혹은 남편이나 아내를 예수께 중매하려 하여도 어떤 경우에는 평생을 노력하여도 쉽지 않은 경우가 없지 않다.
 
미국 보스턴, 트리니티 처치(Trinity Church)의 유명한 목회자였던 필립 브룩스 목사(Phillips Brooks, 1835-1893)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기 주변의 그 많은 신자들의 방문을 사절하고 당대에 유명한 불가지론자였던 잉거솔을 만나길 원하였다. 변호사 겸 정치인이었던 로버트 잉거솔(Robert Green Ingersoll, 1833-1899)의 방문만큼은 허락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거절하면서 나만 특별히 문병을 허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잉거솔이 묻자 브룩스 목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죽더라도 다른 친구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네. 그러나 영원한 세계를 믿지 않는 자네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만날 수 없기 때문이야” 그 날 잉거솔은 충격을 받고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그리고 6년 후에 로버트 잉거솔도 이 세상을 떠났다. 내 주변의 그 누군가를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는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로버트 잉거솔은 언제나 성경을 맹렬히 비판하고 인본주의 철학과 과학적 합리주의 사상을 전파시켰다. 정규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지만 1854년 일리노이 주(州) 법조계에 입문한 이래 일리노이 주 피오리아, 뉴욕 시, 워싱턴 D. C. 등지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해 많은 돈을 벌었다. 남북전쟁(1861-1865) 때 군복무를 마친 후 철저한 공화주의자가 되어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1867-1869), 대통령선거에서의 당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이러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그의 종교관으로 인해 공화당 행정부는 잉거솔을 각료나 외교관으로 임명하는 데 항상 주저했다. 그런 그의 나중에 필립 부룩스 목사를 통하여 복음 전도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누군가를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면 내가 먼저 진실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헌신의 마음을 유지하여야만 할 것이다. 필립 부룩스 목사는 공부를 잘하였다. 20살 때에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할 정도였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고 싶었었다. 그런데 교수 자격시험에 낙방하고 말았다. 상심하고 지내던 그에게 누군가가 버지니아 신학교 입학을 권면하였다. 그는 나중에 감동적이고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남북 전쟁 당시에 북군의 편을 들었고 노예 해방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장례식에서도 감동적인 설교를 선포하였다. 그의 교회에 다니는 양복직공은 어느 날 그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에 목사님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필립 부룩스 목사, 그는 실로 영감이 넘치는 복음의 중매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소식을 열심을 다하여 전파한 중매쟁이였다. 우리 각 사람도 모두가 그 누군가에게 예수를 중매하는 복음 전파자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이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신부로 중매가 되려면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 되는 나 자신의 마음가짐은 어떠하여야 할까. 그 출발과 평생의 삶이 항상 정결한 처녀의 마음가짐이어야만 한다. 중매한다는 것은 중매쟁이가 감언이설로 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소개로 하면 되겠는가. 참으로 진실하게 남녀 간에 서로가 평생토록 후회함이 없는 백년가약을 맺고 행복하게 살아갈 만한 신부와 신랑으로 책임을 지고 살아가도록 소개하고 중매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데로 누구를 누구에게 중매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왜 그런가. 당장 중매가 되어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결혼 생활이 오래도록, 평생토록 잘 유지되는 결혼 생활이 될 만한 중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남녀를 부부가 되도록 중매하는 일은 이처럼 위험 부담이 크다.
 
그러나 이 세상의 남자, 여자, 어른, 아이 그 어느 누구이든지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시며 영원한 남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그 누군가를 중매하는 일은 얼마든지 믿고 담대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그런가. 예수 그리스도는 100점짜리 남편이요, 이 세상 신부들의 남편에 대한 이상향을 전부 종합하여 주문하여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천하에 한분 밖에 없는 일등 남편이기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신부가 문제이지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는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문제 삼을 소지가 전혀 없다. 본문 2절에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매자였던 바울의 본심이다.
 
구약 성경, 호세아서의 신부처럼 세상을 뛰쳐나가고 길거리로 가출해 버리는 신부 고멜이 문제이지 언제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아내 고멜을 찾기 위하여 길거리로 찾아 나서는 남편 호세아의 마음은 얼마나 대단한가. 호세아서의 호세아의 마음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닌가. 예수는 그런 신랑, 그런 남편이시다.
 
신부의 제 일 가는 조건은 무엇인가. 정결한 삶이 아닌가. 우리는 남녀노유 그 어느 누구나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는 죄와 흠과 티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들의 남편이셔서 신부된 우리가 정결한 신부로서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예레미야 3장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신부로 택하여 데려다가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세우고 지식과 명철로 양육하리라”는 말씀도 해 주셨다. 그렇다. 신부된 우리가 남편이신 예수께 중매되어 예수를 남편으로 모셔 드리고 예수 남편과 더불어 살아가면 우리의 참 좋은 신랑 이신 예수께서는 나를 신부로 택하여 아내 삼으신 기쁨을 가지고 나에게 목자들을 세워서 마치도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보아 주시고 주님의 지식과 명철로 나를 양육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여 주셨다.
 
물론 세상살이야 혼자 살면 외롭고 같이 살면 괴롭다지만 예수를 남편으로 모시는 사는 영적 결혼 생활에는 후회될 것이 전혀 없다. 완전한 결혼 생활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신부된 나의 마음가짐이다. 신부된 나의 삶의 태도이다. 아내 된 내가 나를 사랑하는 남편 예수께 대하여 어떤 모습으로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가느냐의 문제이다. 가롯 유다는 제자였지만 예수님과 그런 관계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300데나리온 나가는 순전한 향유 나드 한 옥합을 깨트려 주님께 부어 드리며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씻던 마리아의 주님 섬김은 달랐다.
 
 
모든 말과 모든 지식으로 열심을 내는 중매.
입당 제 1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있어서 열심을 다하여 예수께 이웃을 중매하는 중매쟁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중매 운동, 그런 전도 운동, 그런 성령 운동이 일어나길 바란다. 5절과 6절에서 말씀하는 사도 바울이 강조가 그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식한 사도였다. 그 어느 사도들과 비교하여 결코 부족함이 없이 뛰어난 사도였다. 그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도였다. 물론 그의 말은 유창하지 못하였다. 어눌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불붙는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은1 그의 말과 편지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성령을 체험하고 아는 지식으로 넘쳐 났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2:14)는 말씀대로 우리의 남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풍성하고 충만한 사랑이 이 지역 근동에 바닷물처럼 덮여 지기를 간구하자. 이 곳 폭포동에서 부터 그런 성령의 역사가 폭포수처럼 넘쳐나도록 기도하자. 예수를 나의 영의 남편으로 중매하고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고 하였다. 하나님은 호세아서에서 말씀하셨다.“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9-20)
 
하나님은 원하신다. 하나님이 친히 나의 남편이 되셔서 나에게 장가들어 더불어 살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편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나의 남편으로 모셔 들이고 나면 나의 인생은 찬란해 질 것이다. 그분을 남편 삼으니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시인 윤동주의 ‘십자가'와 ‘서시’, 안익태 선생의 ‘애국가’가 탄생한 것 아닌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인 ‘천지 창조’나 조각 ‘다윗상’이나 성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피에타’ 같은 작품이 예수를 남편 삼고 정결한 신부의 삶을 살아가려 하다 보니 가능하였던 것이 아닌가. 렘브란트가 예수를 남편 삼고 성경에서 영감을 받으니 ‘돌아온 탕자’와 같은 기독교 명화가 그려진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이들이 열심히 없이 그런 업적을 후대에 남긴 이들이 있는가.
 
“가이드 포스트”(2014년 7월호)에 소개된 여성 소설가 정유정 작가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1966년생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소설가의 꿈이 있었다. 전남 함평의 시골 마을에서 괄괄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남자 애들과 함께 박쥐를 잡는다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진 적도 있다. 불장난을 하다가 눈썹을 홀랑 태운 적도 있다. 그런 그의 성격 고쳐 주신다고 엄마가 책을 사다가 주면 그 내용을 달달달 외워서 친구들 앞에서 유창한 변사의 솜씨를 뽐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희곡을 쓰던 외삼촌이 술에 절어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하고 불쌍한 문학도로 살다가 생을 마친 것을 한스럽게 여긴 어머니가 딸의 꿈을 꺾어 놓았었다. 그런 형편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간호사로 5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9년간의 사회생활을 접고 사표를 던진 후에 2001년도부터 늦깎이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장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 모험이었다. 11번의 고배 끝에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라는 소설이 어느 신문사를 통해서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히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무명 작가였다. 그녀는 당시의 자신의 심정을 글을 쓰는 사람답게 표현하였다. “벼랑 끝에 엄지발가락 하나만 땅에 딛고 서있는 것처럼 절박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러던 그녀가 지금은 <7년의 밤>과 같은 소설은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10만 권이 팔렸다. 그 책 하나로 35만 권이 팔렸다. 이젠 그녀의 책은 <내 심장을 쏴라>, <28>, <히말라야 인생 방황> 등 쓰는 것마다 베스트셀러가 되기 시작하였다. 10여 년 간 고독과 씨름하고 오늘 날의 그녀가 되도록 그녀는 2500페이지 분량의 초고 뭉치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시작할 정도의 강박증을 뛰어 넘어서서야 오늘 날의 자신이 가능해 졌다고 했다. 한 마디로 그는 “열심의 사람으로 작가 세계에 자기가 설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노라”는 회고담이었다.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열심을 내는 중매가 얼마나 소중한가. 어떤 목사가 임종 전에 두 교인을 곁으로 불렀다. 변호사와 의사였다. 저들은 자신들 두 사람만 부른 것을 의아해 하기도 하고 만족해하기도 하며 물었다. 어째 자기들 두 사람만 불렀는가하고. 그러나 목사의 대답은 이랬다. “나도 예수처럼 두 강도 사이에서 죽고 싶었다.” 그리고 목사는 숨을 거두었다. 그 날 이후 이 두 교인들은 제대로 회개하고 훌륭한 기독교인의 거듭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 목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누군가를 예수께 제대로 중매한 것 아닌가.
 
최근에 어느 분이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목사님 지난 날 목사님에게서 드러나던 그런 열정과 그런 간절함이 다시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하는 내용이었다. 주님은 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각 사람, 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런 기대를 하실 것이다.
 
예수를 나의 남편으로 모셔 들이되 예수를 향한 사랑의 열정과 간절함이 다시금 활활 타오르는 그런 신부, 그런 아내가 되자. 나의 남편 되시는 예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쏟아 부어 주신 그런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고 증거 있는 사랑으로 말씀하시고 나의 곁으로 다가오신다.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엄청난 사랑을 흠뻑 입고 그 사랑을 만방에 전파하되 사도 바울처럼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열심을 다하는 복음의 중매쟁이로 살아가자. 나의 영원하신 남편이신 주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그런 신부의 삶을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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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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