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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잘 되게 하시는 예수(막7:24-37) 201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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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7-20 19:21 조회 18,285 댓글 0
 
잘 되게 하시는 예수(막7:24-37) 2014. 7. 20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녀인 성도들을 잘 되게 하시고 좋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창세기의 시작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 내용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엿 새 동안 천지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 날마다의 창조 끝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을 선언하신 장면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근본이시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완전하고, 온전하고,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창조를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창조하신 하나님의 보존하시고 지탱하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비롯한 우주 만물에 완전한 질서가 있다.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 모든 것들을 지으시고 유지하시고 보존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은 약한 자를 고치시고 회복하시는 사역의 나날이셨다.
 
마가복음 7장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 15장 31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셨다. 장애인을 온전하게 하셨다. 다리 저는 사람을 걷게 하셨다. 앞 못 보던 사람을 보게 하셨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무리들은 놀랍게 여기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태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꼭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를 즐겨 하였다.
 
예수께서는 가시는 곳곳마다에서 각색 병자를 고쳐 주셨다. 오늘 날도 기적은 일어난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이천 년 전 뿐만 아니라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믿고 간구하는 이들에게 기적은 일어난다.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고생하는 것을 고쳐 달라고 요청한 헬라 사람인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의 이야기가 본문의 앞에 나온다. 예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고 말씀하셨다. 이 같은 예수의 말씀에 마음이 상할 듯도 하나 그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고 집요하게 예수의 도움을 간청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에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7:29)고 말씀하셨다. 그 여인이 집에 돌아가서 보니 그 동안 그렇게 귀신에 들려 고생하던 딸아이가 깨끗해 져 있었다. 같은 장면을 다룬 마태복음에 보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인하여 배척을 받으시던 예수께서 유대 땅인 갈릴리에서 벗어나서 이방 땅인 두로 지방에서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는 두로에서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다시 갈릴리 호수 가에 가셨다.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께 안수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예수는 그에게 안수해 주시는 대신에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벗어난 곳으로 데려 가셨다. 예수는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침 뭍은 손을 그의 혀에 대셨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 그리고 ‘에바다’라고 말씀하셨다. ‘에바다’란 뜻은 ‘열리라’는 뜻이다. 그 때에 그의 귀가 열리고 그의 맺혀 있던 혀가 풀려서 말이 분명해졌다. 예수는 이와 같은 기적의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예수의 치유 소문은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번져 가고 있었다. 25절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 온 것이었다.
 
예수를 만나 본 사람들은 누구나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장면을 보고 몹시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 서로 이야기 하였다.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He has done everything well.)
 
본문의 제목을 ‘잘되게 하시는 예수’라고 정한 것은 37절의 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이 잘되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잘되는 일, 좋은 결과가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누구에게나 온전한 회복을 선물해 주셨다.
 
이는 이사야서의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였다. 이사야 35장 5절과 6절에 보면,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온갖 요구를 들어 주시고 응답하시고 회복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나라는 마치도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꽃이 피어 향내가 나게 하는” 창조의 동산, 축복의 동산, 은혜의 동산, 영원한 회복의 동산인 것이다.
 
어느 사회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마치도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음식점에 가서 메뉴 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해 놓고 담소하며 기다리다 보면 맛있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져서 나오지 않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믿고 구하면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고 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라고 하였다. 본문 말씀이 교훈하는 바는 무엇인가.
 
 
딸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과 예수의 치유.
이 세상에 병든 아들딸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만큼 간절하고 절절한 것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의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 그런 불쌍한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가도록 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한 것이다. 아들딸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떼어 주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서라도 자녀들이 건강하고, 아들딸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어느 시골 마을에 홀어머니와 사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이 어린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아빠 없이 가난하게 사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엄마는 한 쪽 눈이 없으시다. 실명된 상태였다. 엄마는 읍내 길거리에서 좌판 장사를 한다. 돈이 될 만한 것이라면 어떤 채소, 어떤 산나물이라도 뜯어다가 몇 푼이라도 벌어 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겨울에는 봄과 여름 내내 틈틈이 마련해 두었던 마른 나물들과 콩, 녹두, 참깨, 들깨, 팥 등을 펼쳐 놓고 판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어느 해 가을 운동회에 나타나셨다. 아들은 초라하고 허름한 행색의 한 쪽 눈이 없는 엄마가 부끄러워 엄마에게 왜 학교에 왔느냐고 신경질을 부렸다. 그 후로 학교 아이들이 자꾸만 자기를 놀리는 것이었다. “너의 엄마는 한 쪽 눈도 없는 병신 엄마”라며 놀렸다. 이 아들은 그게 너무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그 날 밤 부엌에 물을 먹으려고 들어갔는데 엄마가 어두운 부엌에서 울고 계셨다. 아들은 엄마가 한 쪽 눈도 없이 우는 모습도 싫었다. 그런 그가 억척 같이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시골에서 엄마 떠나서 서울에서 학교 다니며 중고등학생들 과외 지도하며 지내니까 부끄러운 엄마를 다시는 보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그는 사랑하는 애인도 만나서 장래를 기약하였다. 엄마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결혼하였다. 여자 친구에게는 자기는 부모님이 없는 고아라고 속였다. 사회적인 신분도 분명해졌고 좋은 집에, 좋은 차에, 예쁜 딸도 태어났다.
 
 
그런 그의 대굴 같은 집 대문 앞에 낯 설은 시골 아낙이 찾아 왔다. 그 아주머니는 친 손녀를 보자 너무 반가워하였다. 끌어안고 싶어 하였다. 시골에 사는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아들네를 찾아 온 것이다. 그런데 눈도 찌그러지고 남루한 복장의 시골 아낙이 대문간에서 친손녀를 알아보고 반가워하자 어린 손녀는 무섭다며 울기 시작했다. 아들은 그런 자기의 친 엄마를 정신 나간 미친 아주머니가 찾아 와서 남의 집을 어지럽힌 다며 대문을 꽝 닫고 내어 좇아버렸다. 여러 해가 지나고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고향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모이는 동창회에 초청을 받았다.
아내에게는 지방에 출장 간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오랜 만에 시골 마을의 고향 초등학교 교정을 밟았다. 뛰어 놀던 운동장, 그네, 시소, 축구대 등 옛날 풍경 그대로였다. 모처럼 오래도록 흩어져서 못 만났던 고향 친구들도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저녁나절 그냥 서울로 올라오려다가 그래도 마음 한편에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시골집에 가난하게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찾아 갔다. 다 낡은 집에는 퇴 마루에 방문이 열려 있었고, 부엌문도 열려 있었다. 굴뚝에서는 저녁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집 마당에 들어서서 부엌을 들여 다 보았는데 어머니가 부엌 바닥에 쓰려져 계셨다. “엄마, 엄마....”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신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 그 어머니의 품에 있는 안주머니에서는 맞춤법도 맞지 않는 아들에게 써 두었던 유서와 같은 편지가 한 통 나왔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난 네가 자랑스럽다. 아비도 일찍 잃고 네 아버지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자랐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아내와 결혼도 하고, 넓은 집도 마련하고, 예쁜 손녀도 태어난 것을 늘 기쁘게 생각한다. 난 네가 너무나 보고 싶다. 그래 다시는 서울에 안 갈테니 네가 가끔씩이라도 시골에 와서 이 에미를 좀 만나면 안 되겠니. 네가 아주 어렸을 적에 교통사고를 당하였고 네 한 쪽 눈을 실명해서 못 보게 되었을 때 엄마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단다. 다행히 내 눈을 네게 이식하는데 성공할 수 있어서 네 실명했던 한 쪽 눈이 다시 보게 되었을 때에 그 기쁨은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날까지 네가 어려서부터 한 쪽 눈 없는 네 엄마에 대하여 못 마땅하게 여기며 부끄럽게 여기며 지냈지만 엄마는 다 괜찮다. 네가 건강할 수만 있고, 네가 두 눈으로 밝게 세상을 볼 수만 있으면 말이다. 요즘 나는 점점 몸이 약하여 져서 더 이상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다. 부디 잘 살거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생각하는 예수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십자가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이룩해 주신 구원의 은총이 무엇인가. 일방적이고 희생적이고 끊임없는 사랑이 아닌가.
 
“주홍같이 붉은 나의 죄를 누가 흰 눈 같이 씻어 주었는가.
진홍 같이 붉은 죄를 누가 양털 같이 희게 해 주었는가” 말이다.
 
이사야서 1장 18절에 보면,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말이다. 누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였는가. 그리고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 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19-20)
 
예수께 찾아간 어머니는 자기의 귀신 들린 딸에게서 그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아 주시고 건강한 딸 되게 회복시켜 달라고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서 빌었다. 26절에 ‘간구하였다’고 했는데 영어 표현에 보면, 'She begged Jesus to drive demon out of her daughter.'라고 했다. ‘beg' 했다는 말은 배가 몹시 고픈 거지가 누군가에게 먹을 것을 구하며 동냥할 때 구걸하는 장면이다. 청하고 부탁하고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을 말한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라. 어린 딸이 귀신에 들려 고생하는데 예수께 찾아 가서 ‘내 어린 불쌍한 딸 좀 고쳐 주세요.’하고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서 비는 그 어머니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이 세상에 문제없이 사는 인생은 단 한 인생도 없다. 모든 인생은 그 어느 누구이든지 다 제 나름대로의 기도제목이 있다. 생명의 문제는 국가 권력이나 세계적인 재벌의 재산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기도 제목이 있으면 기도 제목에 합당한 대답도 있게 마련이다. 나의 약함이나 질병과 나의 가족이나 자녀들의 약함이나 기도의 제목들이 오히려 우리 모두가 예수의 사랑과 전능하신 능력을 체험하고 덧입는 계기가 되게 하자.
 
1890년에 독일의 조그만 제약사인 바이엘사에 펠릭스 호프만(Felix Hoffmann, 1868~1946)이란 이름의 23살 된 청년 화학자가 신입 연구원으로 입사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관절염이 심하여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통증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을 갖고 이런저런 실습을 하며 밤을 새워 가며 치료제를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아스피린을 발명하고 아버지께 드렸더니 아버지는 오랜만에 통증이 없는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가 발명한 아스피린은 버드나무의 껍질과 잎의 엑기스였다. 고대 에집트 인들도 버드나무에서 강장제와 진통제를 축축하여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 져 온다. 펠릭스 호프만은 그 버드나무 잎과 껍질을 짜서 만든 아스피린은 그 후로 온 세계로 수출되는 명약이 되었다. 바이엘사가 아스피린으로 대성공을 이루자 어느 나라의 버드나무가 효과가 가장 큰 버드나무인지를 알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서 버드나무 껍질과 잎을 수집하였다. 버드나무는 세계 어디에나 산재하여 있는 나무이다. 그 중에서 한국산 버드나무의 약효 함량이 최고였다. 한국산 버드나무 잎이 유럽산 버드나무 잎에 비하여 약효가 두 배 이상으로 높았다. 이에 바이엘사는 한국으로부터 버드나무 묘목을 구해다가 독일에 심었다. 버드나무는 꺾꽂이 하는 식물인지라 옮겨심기가 쉬운 나무이다. 한국으로부터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다 독일에 심었더니 잘 자랐다. 그런데 잎을 따서 엑기스를 뽑아 약을 만들었더니 약효가 한국에서 자란 나무에 비하여 훨씬 떨어지는 것이었다. 기후와 토질과 풍토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은 한국산 버드나무 껍질과 잎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아스피린 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께 부르짖으라.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라. 예수께 나의기도 제목을 자세하게 아뢰어라. 예수께 대답이 있다. 아삽의 시편인 시편 50편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고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듣고 분명하게 말하게 하시는 예수.
오늘날은 소통(疏通)이 잘되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과거에 비하면 얼마나 통신 수단이 발전한 통신 혁명의 시대에 산다. 과거 같으면 군대가 훈련할 때에도 통신병이 사과 궤짝만한 무전기를 잔등에 메고 다녔다. 그것도 찌직 거리며 잘 들리지도 않는 무전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납작한 핸드 폰 하나로 세계가 내 손 안에 들어와 있다. 그렇게 통신 수단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 부재의 시대’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가셨을 때에 사람들이 귀가 먹어 듣지도 못하고 말도 어눌하여 말을 더듬는 불쌍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안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를 예수는 따로 데려다 무리를 벗어난 한적한 곳에 세우시고 그의 양쪽 귀에 손가락을 넣으셨다. 그리고 손가락에 침을 뱉으셔서 그의 혀에 대시며 ‘에바다’, ‘열려라’하시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에 막혀 있던 귀가 열렸고, 맺혀 있던 혀가 풀렸다. 분명하게 말하고, 분명하게 듣는 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는 단순히 못 듣던 이를 듣게 하고, 말 못하던 이를 말하게 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말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듣고 말하는 영적 기능의 회복을 바라셨던 것이다. 요한 계시록 제 1, 2, 3장에 보면 초대 7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온다. 그 모든 교회들에게 마다 똑 같이 반복하여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렇다. 노아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았으나 하나님의 하시는 명령을 듣고 방주 건설에 참여하며 준행한 인물은 노아 한 사람 뿐이었다. 아브라함 시대에 양과 염소와 소와 나귀와 약대를 치는 거대한 족장들이 얼마나 많았으나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은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었다. 모세도 호렙 산 떨기나무의 불붙는 환상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은 인물이다.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도 개인적으로 찾아 오셔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였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1:2)
 
사무엘, 다윗, 이사야, 엘리야, 엘리사, 세례 요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 바울 등 저들 모두 그 시대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은 주인공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귀가 열려져서 잘 들을 뿐만 아니라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시는 음성이 들려 지는 주인공의 삶을 살줄 알아야 한다.
 
웃시야 임금이 죽던 해에 청년 이사야는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였다. 웃시야 왕은 남 유다의 제 10대 임금이었다. 그는 52년간 임금으로 있다가 주전 739년에 죽었다.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사야는 그 웃시야 임금이 죽던 해에 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이사야가 대답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12제자들을 부르시던 예수 때의 장면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마가복음 1장 16절 이하에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이 나온다.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이 하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다. 그날 그 곳 갈릴리 해변에서 자기들을 부르신 예수의 부르심을 듣고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 나섰을 때에 저들은 역사적인 사도의 길을 걷는 형제 출신 제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예수를 따라 나섰던 베드로가 우여 곡절 끝에 성령 받고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 받은 베드로 사도의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이들이 하루에 삼천 명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베드로는 ‘에바다’를 체험한 주인공이다. 그의 두 귀에 주의 부르시는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을 뿐만 아니라 성령 받고 혀가 풀려서 복음의 말씀을 정확하고 담대하게 전파한 말씀의 사람, ‘에바다’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복음 앞에 귀가 막혀 있고 혀가 굳어 있는 주인공이 아니라 복음 앞에 귀가 열려 있고 뻣뻣하던 혀가 풀려 져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잘되게 하시는 예수.
예수는 모든 것을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 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예수는 그를 만나러 찾아 온 모든 병자들, 모든 환자들, 모든 사람들을 잘되게 회복시켜 주시는 치료의 주님이셨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다. 남녀노소의 차이도 없다. 예수께서는 그 어느 누구나 사랑하시고, 그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대해 주신다. 모든 사람을 대하시는 예수의 기대와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의 영과 혼과 육이 잘되기를 소망하였다. 그러므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먹이고, 바람과 파도 앞에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위하여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해 주신 것이다.
 
그 주님은 이천 년 전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고 하였다. 그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인생마다 각 사람이 잘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Dear friend, I pray that you may enjoy good health and that all may go well with you, even as your soul is getting along well.)(요한 3서 2절)고 하였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아들 딸, 며느리와 사위에게 부모들이 해 주는 덕담이 무엇인가. “아들 딸 많이 낳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아라”하고 축복해 주지 않나.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하신 마음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 땅의 곳곳마다에서, 갈릴리 주변에서, 심지어는 국경을 넘어간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하신 끝이 없는 사역들이 무엇인가. 병든 장를 고치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건강하게 해 주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라도 살려 주셨다.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그 하시는 일들이 인간을 잘 되게 해 주시는 사역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향하여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도다.”
He has done everything well.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 안에서, 예수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라면 내가 행하는 일들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서 잘하여야 하겠다. 주인이 갑자가 돌아 와서 칭찬 해 줄만한 그런 인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마25:21, 23) 이는 다섯 달란트 남긴 종과 두 달란트 남긴 종이 똑 같이 들은 칭찬이 아닌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면 잘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에서의 운명과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았던 야곱의 나중이 쌍둥이 형제라도 서로 너무 다르지 않나. 야곱의 아들 요셉을 보라. 안 되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 잘되었지 않나. 하나님 안에 살면, 하나님과 동행하면 남의 나라에 팔리어 가도 잘되고, 노예가 되도 잘되고, 감옥에 가도 그 나중이 점점 잘되지 않는가.
 
모세나 다윗은 살인자였지만 저들의 나중이 잘되지 않았는가. 진정으로 하나님 마나고, 참으로 예수를 만나면 그 인생은 영, 혼, 육이 균형 있게 골고루 잘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고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가.
 
기생 라합이나 모압 여인 룻을 보라. 하나님 신앙을 택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면 그 나중에 점점 잘되게 되어 있다. 에스더는 부모 일찍 잃고 사촌 오빠의 손길 가운데 하나님 신앙으로 살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아서 존귀하게 되지 않았나.
 
베드로나 안드레나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나를 따라 오너라”는 부르심을 따르지 않고 그냥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일에만 매달렸다면 저들 형제가 초대 교회 역사에 그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되었겠나.
 
예수 따라 나서니 잘되지 않았나. 요한은 예수 따라 나서니 예수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 계시록을 받아쓰는 성경 기록자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나.
 
지금 너무 안 되고 있는가. 잘되리라는 기대와 소망을 버리지 말라. 몸과 마음이 쇠약한가. 그래도 주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라. 왜 그래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잘 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 이신 구세주가 아니신가. 주 안에서 복되고 영원히 형통한 나날이 되기릴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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