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있는 자는 들으라(계3:1-6) 2014. 3. 16
지난 주 중에 치과에 갈 일이 생겼다. 탁자 위에 신문이 있기에 순서를 기다리는 중에 모처럼 경향 신문을 보았다. 거기 가수 최백호 씨의 길지 않은 글이 실려 있었다. 목사인 내가 유행가를 부를 기회란 거의 없다. 더군다나 새로운 유행가는 요즘 어떤 노래가 유행하는 지도 잘 모른다. 그런 내가 군대 생활하면서 귀 동냥으로 들어서 아는 유행가들이 더러 있다. 그 중에 가수 최백호(1950-) 씨의 노래도 포함된다. 그런데 그는 최근의 일간지(경향신문, 2014. 3. 13) 1면에 ‘최백호의 내 인생의 책’이란 연재 기고문에서 자신은 평생 무신론자였고 앞으로도 별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자신은 무신론자로 세상을 마감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박인식의 책, <너에게 미치도록 걷다>의 불교적인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나는 아직 무신론자다. 앞으로도 특별한 사건이나 어떤 신비한 현상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을 거다. 간혹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혹시, 우리 인간이 신(神)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너무 멀리서 신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부처도 예수도 마호메트도 인간에서 시작을 했으니. 이 시대의 인류는 이제 거의 신의 경지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갖고 살며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런 그에게도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 만나고 하나님 체험하여 구원 받기를 바란다.
6. 25 전쟁 중에 태어난 그에게 오늘까지 생명을 지켜 주고, 그 걸쭉한 목소리를 주고, 그런 노래 할 수 있는 목청을 주고, 그런 음악들을 작사하고 혹은 작곡해 낼 정도의 창작력을 주신 분은 누구인가. 그는 경상남도 동래에서 독립운동가요 제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원봉 의원의 남매 자녀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가정 형편이 기울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1977년에 서울에 올라와서 데뷔 한 노래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라는 노래다. 아마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쓴 곡 같다. 그 노래 가사야 좀 우울하지만 “영일만 친구” 같은 노래는 얼마나 건전하고 희망적인가. 나는 그런 이들이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을 고백하고 살기를 원한다. 일간지에 나서서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자기는 이대로 행복하고 이대로 좋다는 글을 쓰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구라파 역사에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철학가였던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무신론자였다. 18세기에 활동하고 236년 전인 1778년에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학자요 무신론자인 그는 재산도 많은 백만장자였다. 평소에 그는 하나님이 없다는 글도 많이 쓰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책도 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연설도 많이 하였다. 100년 후가 지나면 지구상에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떠들며 다녔다. 그런 그에게 임종이 가까워지자 불안에 떨면서 부인에게 말했다. 84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내 생명이 6개월만 연장된다면 나는 내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절반을 내놓겠소. 나는 이제 그만 두렵고 떨리는 지옥으로 가게 되었소. 당신도 가게 될지 모르오.” 그리고 임종의 순간에 가서야 ‘그리스도여, 나를 도와주소서.’하고 절규하며 죽어 갔다. 공교롭게도 그가 살던 대 저택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8년 후에 프랑스 성서공회의 건물이 되었고 성경을 인쇄하고 반포하는 건물이 되었다.
지난 2월부터 주일 오후 시간에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통한 교훈을 묵상하고 있다. 지난주일 오후 분량인 사데 교회를 다시 묵상하려고 한다. 차례대로 하면 다섯 번째 교회이다. 사데는 고대 시대에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따라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대도시였다. 무역이 발전하고 양털 가공업과 염색 공업이 발전해서 경제적으로 큰 부를 이룬 상인들이 적지 않았다. 한 마디로 부요하게 잘 살았다. 게다가 도시의 위치가 난공불락의 요새여서 적들이 쉽게 쳐 들어오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따라서 적은 노력으로도 도시를 방어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형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무역도 장사도 잘되다 보니 그 도시의 시민들은 대개가 교만하고 사치하고 향락을 즐기며 살아갔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먹고 입고 쓰는 생필품의 조달조차 어렵던 과거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얼마나 잘 살게 되었는가. 물론 고달프게 살아가는 서민들도 적지 않지만 특히 서울과 같은 도심의 생활은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하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마치도 이천 년 전의 ‘사데 교회’의 구성원들처럼 경건의 모양만을 가지고 명목상의 교인 행세를 하면서 살아갈 위험이 없지 않다. 사데 교회의 교인들이 받은 책망의 내용을 교훈 삼아 성령 충만하고 예수 제대로 잘 믿고 하나님 잘 믿는 성도다운 성도의 믿음을 지켜 가자.
칭찬도 좋지만 책망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아야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민족도 발전하게 마련이다. 주님을 믿는 신자인 성도들은 특히 그러하지 않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사데 교회에 편지하라.” 누가 누구에게 무슨 내용을 편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편지하신 분은 누구신가.
사데 교회에 편지하시는 분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일곱 영’이란 ‘성령’을, ‘일곱 별’이란 아시아의 ‘일곱 교회’ 즉 ‘우주적인 교회’를 말씀하신다. 그렇다. 우리 주님은 어느 한 교회에 국한 되고 제한되는 주님이 아니시다. 주님은 우주적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통치자이시다. 하나님은 한 성령으로 우주적인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 가운데 운행하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신다. 우리는 에베소서 4장의 그 유명한 선언의 말씀을 잘 기억한다. 감옥에 갇혀 지내며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권면하였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1-6)
여기 말씀 가운데 보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될 것을 강조한 사도 바울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강조하였다. 왜 그런가.
․몸이 하나다
․성령도 한분이시다.
․부르심도 하나다
․소망도 하나다
․주도 한 분이시다.
․믿음도 하나다
․세례도 하나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주님이시다”라고 강조하여 주었다.
그렇다. 일곱 영 혹은 일곱 별이란 하나님의 성령은 한 영이시며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라는 강조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일곱 영이란 하나님의 영이시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요한계시록 1장 4절에서도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하나님의 성령을 말씀하는데 이 성령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의 영이시다. 성도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의 다스림을 의지하고 사모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동서고금 어느 시대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을 고백하고 환영하고 의지하고 따르는 교회라면 그 모든 교회들은 하나다. 파이프 오르간이 울려 퍼지며 수 만 명이 모이는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교회의 회중이든지 아니면 저 아프리카에서 신발도 신지 못하고 살아가는 부족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서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어서 어느 마을의 수백 년 된 나무 그늘 밑에 모여 둘러서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무리들이든 그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것이다.
편지하신 분의 명령은 무엇인가.
꽁꽁 얼어 있던 얼음 속에서도 살아 있는 물고기는 봄을 반긴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아무리 작은 물고기라도 도도하게 흐리는 거센 물결의 급류라도 거슬러 올라가는 운동력과 지치지 않는 힘이 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급류에 휩싸여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내려가고 만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이와 같은 것이다. 살아 있는 철새들은 수 만 리 길을 높은 하늘을 날아서 동료들과 함께 제 갈 곳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러나 당장 배부르게 하는 들판의 콩과 밀과 옥수수를 주워 먹는데 혈안이 되어서 제 때에 먼 길을 날아가지 못하고 겨울이 찾아 와서 열어 죽어 버린 철새는 더 이상 제 갈 곳을 향하여 날아가는 무리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낙오자가 되고 만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1절 후반부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책망하셨다. 4절에는,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칭찬과 장래의 상급과 축복을 약속해 주시기도 하셨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죽은 자는 자신이 죽은 자인 것 조차도 모른다. 그러므로 산자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죽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국민적인 가수라도 아무리 볼테르처럼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철학을 한다고 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교회만 다니지 말고 하나님을 믿자. 예배드리는 자리에 이웃과 더불어 앉아 있지만 말고 나도 예수님을 믿자. 교인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말고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그래야 산자의 신앙인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올 2014년 3월의 대한민국을 빛낸 역사적인 인물로 ‘전덕기 목사’를 선정하였다. 1907년에 상동감리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전덕기 목사가 순교 당한지 올해로 100주년이 되었다. 전덕기(1875-1914) 목사는 1875년에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1885년에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선교사가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 해에 정동 병원을 시작하였는데 고종 황제가 ‘시(施) 병원’이라고 병원이름을 정해 주었다. 2년 후인 1888년에 상동교회가 시작되고 나중에 스크랜턴 선교사가 담임 목사로 섬겼다. 10년 후인 1898년에 전덕기 청년이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23살에 세례 받고 입교하고 엡윗 청년회를 조직하고 나중에는 독립 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에 한일늑약이 된 후에 전덕기는 앞장서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구국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 전덕기는 상동교회의 6대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의 나이 32살 때의 일이다. 전덕기 목사는 그 같은 해에 우리가 역사에서 아는 이준(1859-1907) 열사를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 회의에 밀사로 파견하기 위해서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남다른 두각을 나타내고 애국심이 강했던 이준은 당시 상동교회의 청년회장이었다. 물론 그의 나이는 이미 청년은 아니었다. 48살의 이준은 고종 황제를 만나서 친서를 받아 냈고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장에 밀사로 참석하려 하였다. 일본의 한국 침략을 고발하고 한일늑약의 부당성과 한국이 독립되어야 함을 주창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통분한 마음으로 헤이그 현지에서 금식하다가 순국하였다. 러시아를 비롯한 선진국들의 반응은 냉답하였다. 더군다나 이준의 밀사 파견 사실을 알아 챈 일본이 국제적으로 가만히 있질 않았다. 전덕기 목사는 주시경 선생을 앞장세우고 상동교회에 청년학원을 운영하면서 한글 보급에도 힘을 쏟았다. 1914년 3월 23일 전덕기 목사는 독립 운동의 주체로 붙들려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9살 때의 일이다.
죽지 않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 한 개인이 나 한 사람 겨우 벌어서 먹고 입고 살고 그것에 머물러서는 않된다. 가정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일곱 별을 가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하신 교회다운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복음 전파의 사명과 회개와 변화와 충성된 청지기의 삶을 살 줄 알아야 한다. 시대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나라의 지체요 교회의 지체 의식을 갖고 살아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왜 역사가 전덕기 목사나 상동교회의 청년회장 출신인 이준 열사를 역사가 높이 기리는가. 불운했던 역사,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고 불행했던 역사의 한 가운데 있던 젊은이들이 성경적인 신앙관을 갖고 살아 있는 믿음의 사람답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려고 씨름했던 그 흔적이 우리를 감동 시키는 것이 아닌가.
구경꾼 신자가 되지 말고 역사의 중심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증참하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자.
그래서 주님은 사데 교회의 성도들에게 책망하며 일깨우며 말씀하셨다. 그러면 죽은 자의 상태에서 산자의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나.
․일깨어라 wake up
․남은 바를 굳건하게 하라 strength
․받고 들은 바를 기억하라 remember
․순종하라 obey
․회개하라 repent
‘일깨어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3절 끝에 보면,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 중에 가장 자주 하시는 강조가 바로 때에 대한 비유가 아닌가. 그 유명한 마태복음 25장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비유를 보라. 우리도 간혹 저녁에 잔치 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유대인들의 잔치는 저녁에 아니 밤에 시작된다. 그리고 여러 날 그 잔치의 즐거움이 풍성하게 계속된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이다. 예수께서 친히 하신 천국 비유의 말씀이다.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한 처녀요 그 다섯은 슬기로운 처녀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기름을 충분히 따로 준비하고 등불과 함께 가져갔다. 그러나 신랑이 더디 오자 모든 신부들이 다 졸며 잠들며 깨었다가는 다시 졸며 잠들며 하였다. 그런데 한 밤 중에 소리가 났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깜짝 놀란 신부들이 잠에서 깨어나 신랑을 맞이하려고 보니 어떤 신부의 등불은 깜빡 깜빡 기름이 다 떨어져 가고 등불이 꺼져 가고 있었다. 그 때에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부탁하였다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그 때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였다. “서로 같이 나누어 쓰기에는 서로 부족할 것 같으니 차라리 기름을 파는 자들에게 찾아 가서 기름을 사오라”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기 위해 잔치 자리를 떠난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불을 환하게 밝히며 신랑을 맞이하였고 신랑과 함께 잔치 자리에 들어 간 후에 문이 굳게 닫혔다. 뒤 늦게 기름을 마련해 가지고 온 미련한 처녀들이 잔치 집의 문을 두드리며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하고 간청하였으나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잔치집의 굳게 닫힌 문 안에서 이런 음성이 들러 나왔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이와 같은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 분부하신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본문의 ‘너는 일깨어라’는 2절의 말씀이 바로 이런 말씀이 아닌가.
사데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신 예수께서 오늘 날 우리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말씀하신다. 그 말씀이 들려 지는 귀가 복된 귀가 아닌가.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죽은 상태가 아닌 산 믿음으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시면서 반복하여 교훈하고 또 교훈하신다.
“일깨어라, 굳건하게 하라, 받고 들은 바를 기억하라, 순종하라, 회개하라.”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이 들려 지는 것이 복이다.
요즘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건널목도 아닌 곳에서 양쪽 귀에 이어 폰을 꽂고 손에는 핸드폰으로 동영상의 화면을 보거나 D. M. B TV 방송을 보면서 차가 오든 말든 알아서 멈추고 알아서 비켜 가라는 듯이 씩씩하게 길을 건너는 젊은이들을 볼 때가 자주 있다. 아주 작은 부주의와 사소한 실수가 큰 화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항상 주의하고 일깨어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사용된 원어의 의미는 꺼져 가는 불씨를 되 살려서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마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 다른 비유로 일깨어 깨어 있어야 하는 신앙에 대하여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셨다. 주님의 심판 날과 재림의 날이 어느 날 도적 같이 다가 올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신 교훈의 말씀이 “주의 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고 하셨다. 집안일을 맡기고 타국에 떠난 주인이 권한을 맡기고 떠났지만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하였다. 주인이 저물 때 올지, 밤중에 올지, 닭 울 때 올지, 새벽에 올지 어찌 알겠느냐고 하셨다. 주인이 홀연히 와서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거기 마가복음 13장 33절부터 37절까지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다.
본문에 ‘일깨어라 그리고 굳건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 남은 바란 남은 자를 말한다. ‘남은 자’가 무엇인가. ‘remnant’ 하나님은 남은 자의 하나님이시다. 사데 교회의 교인들이 다 죽은 자 같지만 그렇지 않은 신자들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 남은 자가 소중한 것이다. 다 죽은 자 같아도 남은 자가 신앙의 불씨요 거룩한 불씨요 성령의 불씨요 부흥의 불씨요 회개의 불씨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써 가신다.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는 말씀은 나누어 묵상하면 ‘기억하라, 순종하라,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영어 성경에 보면 ‘remember, obey, repent'라고 분명히 나누어 설명하였다. 3절에서 말씀하는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라는 말씀은 그 동안 사도들과 복음 전파자들을 통하여 전하여지고 가르침을 받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사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교회 생활 몇 년 만하면 성경에 대하여,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거의 없다. 문제는 그 받고 들어 아는 것을 생활 속에 실천하는 것이 숙제가 아닌가. 듣고 배워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실천에 옮기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 믿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대로 행하여 야 한다. 그것이 산 자의 믿음이다. 우리 속담에도 ‘부뚜막의 소금도 입에 넣어야 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므로 듣고 깨달아 아는 말씀을 순종하고 회개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자라나는 것이다.
강만원씨는 종교, 철학 부문의 기독교 서적을 주로 번역하는 전문번역가이며 작가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을 강의하고 책을 번역하거나 써서 출간하기도 한다.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다. 그 책은 철저히 주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이 되셔서 나를 도구로 쓰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올바르게 성경을 바라보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조건에 대해 기독교인의 눈높이에서 성경을 연구한 추천할 만한 책이다.
그가 쓴 체험기를 보았다. 어느 날 어려운 번역 원고 정리를 위해서 기도도 하고 머리도 식힐 겸 기도원에 가서 며칠 지내는 중에 개인기도 방이 없어서 여럿이 함께 묵게 되었다. 그에게 이런 저런 룸메이트 들이 말을 걸어오고 성경에 관한 질문도 하였다. 한 곱사등을 한 분이 그의 곁에서 말을 걸었다. 시간이 없어 긴 대화를 못 했는데 다음 날 산책길에 기도원 뒷산 자락 벤치에서 다시 또 만났다. 그가 살아 온 인생 이야길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곱사등이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대신에 아주 어려서부터 목수 일을 가르쳤다. 그가 물었다. “우리나라의 목수 기술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발전할 목수 기술자가 누구인줄 아세요?” 당연히 모르니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의 설명으로는 불상을 만드는 목공이라고 했다. 그의 설명으로는 과거에 대졸자 초봉이 30만원이고 부장 월급이 80만원 이던 시절에 자기는 불상 만드는 목수 일로 매달 120만원과 그 이외의 넘치는 수당을 받으며 일했다고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술집에 드나들며 술집 아가씨들 틈바구니에서 돈 쓰는 맛에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루하루가 괴롭기만 하였다. 어렸을 적에 친구들과 함께 교회 다니던 기억이 났다. 곱사등이라고 놀림 받고 따돌림 받고 늘 소외되고 외롭고 고독하게 지내던 그에게 술집을 드나들면서 술집 아가씨들에게서 위로를 찾고 흥청망청 돈 뿌리며 술 퍼마시고 지내는 것은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날마다 불상을 깎아 만드는 일도 마음에 부담이 되고 떳떳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인생을 이렇게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가 일색이었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축복 받는다.”는 식의 축복 일변도의 설교가 너무나 듣기 싫었다. 그는 말한다.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앉아있으면, 맨날 하나님 믿으면 복 받고, 돈 벌고, 건강해진다는 말뿐인데,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돈 벌고 싶으면 저는 교회에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불상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하면 돈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은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불구로 태어난 저는 구원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축복보다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란 무엇인가’에 늘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답답해서 교회를 몇 곳 옮겨 보기도 하였지만 목사님들의 설교는 항상 일색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헌금 잘 드리고 하나님께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식의 설교뿐이더군요. 지금 저는 더 이상 불상을 깎아 만들지 않지만 제 목수 기술로 다른 직장에서 일하면서 돈도 부족하지 않게 벌고 잘 지냅니다. 그러나 늘 내 마음 속에 가득 찬 질문이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아마도 그가 찾아다닌 교회는 그런 말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였나 보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요7:38)고 하셨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9)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수께서 친히 교훈해 주셨다.
마태복음 5장의 팔복 설교에 보면 예수님은 천국을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그들의 것임이라.”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 받은 성도라면 성도다운 믿음을 잘 발전 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겨우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것에 만족하지 말고 담대히 복음의 용사답게 세상의 죄와 악을 이기며 내 속에 온갖 욕망을 매 순간 다스려 이기며 복음의 사람답게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주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주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며 순종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반드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기는 자를 향한 약속은 무엇인가.
성도는 인생의 선한 싸움을 싸워 이겨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의하게 살면 죽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신앙을 갖고 산자의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죽은 자의 생각과 계획과 의식을 갖고 살면 스스로 화를 부리고 이 땅에서부터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사데 교회의 교인들은 사데라는 도시의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데는 이미 이천 년 전에 무역이 발전하고 상업이 발전해서 풍요하게 살고 떵떵거리며 살던 도시였다. 도시도 높은 요새에 위치해 있어서 외적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그러하다 보니 신앙이 죽어 가고 있었다. “배부르다 따뜻하다 이제 됐다” 하는 그 때가 위험한 때이다. 잘 될 때가 잘 안 될 때 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 고생 많이 하며 살 때에 잘 못되는 가정, 그런 부부는 거의 없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재물 쌓여져 가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고 하는 일마다 잘고 일이 술술 잘 풀려 나갈 때가 오히려 위험한 것이다. 건강할 때, 힘이 넘쳐 날 때가 병약할 때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다. 이는 개인도, 가정도, 부부도, 기업도, 나라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시편 37편에 보면,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시37:20)고 하였다. 시편 37편 15절에는 “악인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악인의 활은 부러지리로다”라고 하였다. 요즘 새벽마다 묵상하는 사무엘상의 사울 왕의 운명이 그러하지 않는가.
최근 뉴스에 보았는가. 서울 장안에서 옥상에 세 겹으로 온실 설비를 하고 대마초를 키우던 사람이 붙잡혔다. 섭씨온도 23℃에 선풍기 바람은 약풍. 작열하는 붉은 조명과 캐나다산 퇴비. 대마 화분 사방에는 은박 돗자리를 둘렀다. 한 달 치 전기세만 160만원. 따뜻하게 모셔야 했다. 캐나다에서 공수한 최고급 대마종자의 싹을 틔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보안도 철저히 했다. 특유의 냄새 때문에 들통 나지 않도록 환풍 시설도 갖췄다. 그렇게 뿌리를 내린 대마는 3000명이 한꺼번에 피울 수 있는 양이 나왔다. 품질도 최상급이었다. 4개월 극진히 키운 끝에 이제 수확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마가 꽃을 피우기 며칠 전 '대마의 꿈'은 산산이 무너졌다. 불의하게 살면 망한다. 죽는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의하게 살면 안 된다. 입으로만 하나님 믿는 척 하고, 입으로만 찬양하고 입술로만 찬양할 뿐 마음과 정성이 떠난 헛된 예배자, 헛된 경배자로 살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사데 교회의 교인들이 받은 책망이 그것이다. “이름은 살았다고 하나 죽은 자로다.”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인가.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4절으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과 같은 산자의 믿음을 지켜서 이긴 자의 상급으로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이 합당한 자로 인정하시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자. 생명책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주님의 사람이라고 시인 해 주시는 그런 영광스러운 믿음의 승자들로 살아가자.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무엇인가. 우리 믿음의 옷을 더럽히지 말자. 그리하여 흰 옷을 입혀 주시는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자. 흰 옷이란 죄악을 거부하고 멀리하며 살아 온 성도들에게 덧 입혀 주시는 승리와 정결의 상징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신부의 세마포 옷과 같은 구원 받은 성도요 성화의 삶을 살고 영화롭게 영광스럽게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상급으로 입혀 주시는 영광스러운 옷이다. 요한 계시록 3장 21절에 보면,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신다”고 하셨다. 4절을 자세히 보라. 사데 교회가 형편없는 교회 같았지만 그 교 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다”고 인정해 주셨다. 그 몇 명 중의 한 사람이 내가 되도록 나의 믿음을 일깨워 말씀에 순종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자.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는 신자로 살아 가자.
350장 찬송의 가사 그대로이다. 1절과 4절을 함께 부르자.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육체 아니오 마귀권세 맞서 싸워 깨쳐 버리고
죽을 영혼 살릴 것일세 한 마음으로 힘써 나가세
한 마음으로 힘써 싸우세 악한 마귀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승전고를 울리기까지
죄악 중에 빠진 사람 죄를 뉘우쳐 십자가에 달린 예수
믿기만 하면 위태한 데 빠진 영혼 구원 얻어서
천국 백성 될 것임일세 한 마음으로 힘써 나가세
한 마음으로 힘써 싸우세 악한 마귀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승전고를 울리기까지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전서 5장 8절과 9절에서 말씀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그러므로 끊임없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육신적인 탐심과 욕망과 게으름과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의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더럽히지 말고 이기는 자의 상급인 흰 옷 입고 주 안에서 영원히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과 죄악을 이기며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