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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피난처 삼은 자(시91:9-16)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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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10-20 15:50 조회 6 댓글 0
 

                  여호와를 피난처 삼은 자(시91:9-16)        2024. 10. 20

 

 

누구나 무병장수를 꿈꾸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별의별 일들을 다 겪게 된다. 각종 질병과 전염병과 자연재해의 위험이 적지 않다. 어떤 나라는 끊임이 없이 지진의 불안 가운데서 지낸다. 쓰나미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겪기도 한다. 홍수의 피해나 화재의 두려움도 적지 않다. 크고 작은 사고와 사건이 끊임이 없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501명이 죽은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2003년, 192명이 죽은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2014년 4월 16일, 314명이 배와 함께 침몰한 세월호 침몰 사고, 2022년 10월 29일, 159명이 시체를 쌓아 놓은 것치럼 무더기로 죽음을 당한 이태원 참사 등을 누가 피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더군다나 전쟁의 참상은 자세하게 설명하기 조차 두렵다. 6.25 전쟁으로 죽은 군인의 숫자 말고 남북한의 민간인만도 25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지금도 지구 저편에서는 무수한 생명의 목숨을 잃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10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화와 재앙이 끊임이 없는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편 91편은 누가 언제 쓴 시편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모세나 다윗이 썼을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시편 91편의 기록자는 3절에서 ‘올무’와‘전염병’, 5절에서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 6절에서는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 세상에는 이처럼 두려운 일들이 사면초가처럼 우겨 싸고 있다. 어디 마땅히 피하며 살아갈 곳이 없다.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재난이 끊임이 없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서 믿음의 사람인 시편 91편의 기록자는 9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지존자를 자신의 거처로 삼은 자”의 삶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실로 인생은 연약하다. 이사야 40장 30절의 표현대로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진다”그와 같은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시편 91편 1절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라고 초청하고 있다. 

 

자, 그러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한 사람인 시편 91편 기록자의 믿음의 고백은 무엇인가.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하는 시편 기자의 고배과 믿음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그가 지키신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시고 명령하셔서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맞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지켜주시는 주님이시다. 3절의 표현처럼 “새 사냥꾼의 올무”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켜 주시는 주님이시다. 4절의 표현처럼, “그의 깃으로 덮으시고 날개 아래 피하게 하신다”“방패와 손 방패”가 되어 주신다. 물론 우리는 질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때에 그 곳에서 내가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주님은 왜 외면하셨나요, 주님은 어디에 계셨나요”라고 말이다. 우리는 욥기의 주인공인 욥의 고난, 욥이 당한 재난을 안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고와 사건과 재난이 많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몇마디로 쉽게 말하면 않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각 사람을 환난과 위험과 고통이 가득한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심이 분명하기 때문에 말이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라도 우리 각 사람은 분명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 때 그 때마다 주님은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의 출입에 빛이 되어 주시고 걸음마다 등불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사자와 독사를 발로 밟게 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을 환난에서 건져 주시는 주님이시다. 보호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14절 끝에 ‘높이리라’라고 하였는데 영어 성경에 보니까 ‘protect’즉 ‘보호하신다’라고 하였다. 맞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붙들어 주시고 건져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이렇게 질병과 사고와 사건이 끊임이 없는 세상에서 하루 하루 순간 순간마다 이만한 건강을 유지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지키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 중에는 투병 생활하는 분들이 있다.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내 곁을 떠나기도 한다. 어느 순간에 슬픔이 비수처럼 엄습하기도 한다. 답답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하루 버티며 기진맥진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없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나 자신이 좀 쉬고 싶어도 하루도 마음 편하게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의 2, 3절 가사를 보라.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맞다. 세상에는 시험과 걱정과 괴로운 일과 근심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찬송한다.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맞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우리에게 용기 주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오직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인생 중에 그 누구를 의지한들 만족이 있겠는가. 사람이 아무리 재물을 의지한들 그 재물이 얼마나 내게 만족을 주겠는가. 세상에 권력이 부족해서 죽은 왕이 있는가. 세상에 재물이 부족해서 일찍 죽은 재벌이 있는가. 알렉산더는 33살에 죽고 진시황은 49살에 죽었다. 저들이 자기의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없었는가. 따르는 군대가 없었는가. 생명은 주께 달려있는 것이다. 인생이 살고 죽는 것이 주의 손 안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께서 인생을 지키시고, 붙들어 주시고, 위험에서 건져 주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목숨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라고 고백하였다. 

 

시편 91편 5절에 보면, “너는 밤에 찾아 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이라고 했다. 모세 시대의 광야 생활이 그랬다. 밤에는 추웠고 낮에는 견딜 수 없게 뜨거웠다. 일교차가 대단하였다. 그런 곳에서 사십 년을 지내야 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과 보호하심이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였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밤낮으로 지켜 주시고 붙들어 주셨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곳이 광야 생활이었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인생이 광야 생활과 같지 않나.

 

내 스스로 나의 범사를 지키며 살아 갈 수가 있는가. 불가능하다.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라면 이 험한 세상을 안연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4절에 보니까“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이런 은혜를 매 순간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가 응답(應答)하신다.

15절에 보니까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간구하면 들으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 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 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이어서 해 주신 교훈의 말씀이 무엇인가.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라고 하셨다.

 

맞다. 기도의 교훈은 분명하다. 사람이 나보다 유력한 그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하여도 효과가 있거늘 하물며 만물의 창조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할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겠는가. 

 

육신의 아버지라도 자녀가 무엇을 구하면 도와주고 해결해 주고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법이 아닌가.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무엇을 원하고 바랄 때에 그 어찌 도와주시지 않겠는가. 그 어찌 응답하시지 않겠는가.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91:15)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사랑하는 아들딸이 환난을 당하는데 외면하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아들딸을 위해서 사랑을 쏟고 정성을 쏟고 모든 좋은 것을 모두 다 동원하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창세기의 요셉을 보라. 누가 그런 불행한 운명을 선택하겠는가. 그러나 요셉은 열 명의 배 다른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에 발가벗겨 진채로 팔려 가는 노예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요셉의 나이 17살 때의 일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요셉이 누구인가. 아브라함의 증손자가 아닌가.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면서 얼마나 불안에 떨었겠는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절규하며 기도하였겠는가. 그런 그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다. 외면하지 않으셨다. 13년의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은 요셉을 존귀하게 붙들어 세우셨다. 하나님은 요셉을 환난에서 건지셨을 뿐만 아니라 존귀하고 영화롭게 높여 주셨다. 하나님은 요셉의 11년 종살이와 2년간의 여주인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던 날들 중에 늘 요셉과 함께 하셨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기도가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간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도생활이 아닌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그 앞 구절인 예레미야 33장 2절에 보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일을 만들어 성취하시는 여호와시다. 일을 시작만 해 놓으시고 이룩하지 못하시는 부족한 아버지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못 하시는 일이 없으신 전능자(全能者)이시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시다. 

 

 

만족한 구원을 이루신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모든 종교의 마지막은 한곳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남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길이며 정상에 올라가면 다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 그럴싸하지만 틀린 말이다. 진리는 하나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요14:6) 맞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여기에 답이 있다. 예수만이 오직 믿는 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누구나 장수를 꿈 꾸어 왔다. 그러나 원한다고 누구나 다 자기 원하는대로 장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잠언 16장 31절에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장수한들 무드셀라만큼 살 자가 있겠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하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의 장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구원과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면 왕이었으면 무엇하고 세계적인 재벌이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수백만의 군대를 호령하던 장수면 무엇하겠는가. 

 

베트남에서는 지난 4월에, 베트남 역사상 최대 금융 사기범에게 사형 언도를 내렸다. 호치민 인민법원은 이날 부동산 개발업체 '반 틴 팟(Van Thinh Phat) 홀딩스'의 회장 쯔엉 미 란(68) 회장에 대해 횡령 · 뇌물공여 · 은행 규정 위반 등 3가지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를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사형 선고와 함께 란 회장에게 사이공상업은행(SCB)가 피해를 입은 673조 8000억동(VND; 약 37조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란 회장은 85명의 공범과 함께 약 16조 6,600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는다. 베트남 GDP의 3%에 달하는 액수라고 한다. 사람은 스스로 범죄에 갇히고 양심에 갇히고 불안에 갇히고 죄책감에 갇히고 절망에 갇히는 법이다. 누구라도 죽음과 심판의 순간이 찾아오면 피하고 숨을 수 있는 다른 길이란 없다. 생명과 구원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을 가질 때에 주어지는 선물이 영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하여 이렇게 교훈해 주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라고 하였다. 

 

결실의 계절이 다 지나기 전에 한 사람이 한 사람씩이라도 전도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전도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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