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삼상17:41-49) 2014. 3. 9
전쟁은 이겨야 한다. 싸우기 전부터 질 준비하고, 잘 계획해서 생각을 하고, 잘 훈련해서 전쟁해야 한다. 그러나 승리와 패배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전쟁이다. 그 어떤 크고 작은 싸움이든, 전쟁이든 전쟁에서 이긴 자와 진 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주변 국가, 주변 부족들과의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런 싸움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세 때의 출애굽 과정도 당시의 거대한 고대 국가였던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바로 임금의 학정을 벗어나서 출애굽을 성공적으로 이룩한다는 것은 생각이 귀할 뿐 그 일을 성취한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을 바로 임금 앞에 보내셨고 열 가지로 계속되는 재앙 앞에서 결국은 바로 왕이 두 손을 들고 말도록 역사를 바꾸어 가셨다.
출애굽하여 홍해를 성공적으로 건넌 역사적인 히브리 민족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바로 왕의 군대의 추격전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신 전쟁이요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전쟁이었다. 도도하게 흐르던 홍해의 물을 양쪽에 벽처럼 갈라 세우시고 그 사이로 히브리 백성들이 통과하였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로 결심하신 히브리 민족의 뒤를 좇아서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와 마병을 홍해 한 가운데서 두 물이 다시 합쳐져서 흐르게 하심으로 물 가운데서 장례해 버리고 마셨다. 하나님의 전쟁 개입 사건은 성경에서 대하는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일화 중의 하나가 아닌가.
사실 하나님은 칼과 창으로 싸우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나중에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복종하게 하심으로 죄와 악과의 싸움에서 사랑과 용서의 영원한 승리를 이룩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주력 무기는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오늘처럼 흰 눈이 내리면 온 천지가 흰 눈에 가리어서 전혀 새로운 광경의 세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덮어 주는 사랑, 가리어 주는 사랑, 눈 감아주는 사랑, 용서해 주는 사랑,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영영 우리를 죄 없다 하시는 사랑이며 우리의 죄를 기억조차 하시지 않는 완전한 사랑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 아침에는 만나를 먹여 주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햇볕을 막아 주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어둠을 밝혀 주신 것은 애굽의 군대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애굽의 바로 왕의 악한 손길에서 건져 내신 후에 먹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셨다. 사랑만이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지금 약해져 있는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하나님만이 나를 강하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지금 지쳐 있는가. 나를 회복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나를 강건하게 하시고, 나를 살만하게 하시고, 나를 기쁘게, 나를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힘이 그 분에게서 공급되는 것이다.
40년 광야 생활 끝에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의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여호수아를 앞 장 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전에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듯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똑 같은 하나님의 이기게 하시는 기적을 보았다. 난공불락의 고대 도성인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명령하신 방법대로 날마다 엿새 동안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제 칠일 째에 일곱 바퀴를 돌았을 때에 꿈처럼 봄바람에 고드름이 녹아내리듯이 그 거대한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여리고 성 함락 작전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전쟁의 과정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우리의 인생살이가 다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기도하여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인간이 제 스스로의 노력만을 가지고 이룩할 수 있는 것이 과연 그 얼마나 되는가. 인간은 국가 간의 전쟁이든 개인적인 그 어떤 세상사의 씨름이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셔야 하고 하나님이 되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자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이 루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던 야곱을 만나 주시고, 나중 20년 후에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을 만나 주셨다. 전쟁은 하나님을 만난 수 있는 기회이다. 인생의 역전을 이루는 씨름의 현장에서 주께 매어 달리고 기도하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비겁자 야곱이 하나님 안에서의 승리자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를 이루고 ,아들딸 성공시키고, 마음대로 건강하며 장수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교만한 것인가. 요 며칠 전(2014. 3. 6)에 종로와 강서구의 빌딩 부자인 수천억대의 부자 67살 송 모씨가 자기 사무실에서 피살 된 채로 시체가 발견되었다. 인생이 그런 것이다. 너무 돈! 돈! 돈! 해 보아야 소용없다. 그 돈이란 것이 내 목숨을 단 1초도 연장시키지 못한다.
‘내가, 내가, 내가’하고 말하면서 그 무엇이든지 내가 노력하고, 내가 수고하고, 내가 애쓰고, 내가 주도면밀하고, 내가 성실하고,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잘 해서 할 수 있었고 그 무엇이든지 이룩해 왔다고 고백하는 그 누군가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냐는 말이다.
인간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가 되도록 아들 없이 살았겠는가. 인간이 제 마음대로 목숨을 연장 할 수 있었다면 무드셀라가 이왕이면 31년을 더 살아서 1000살을 채우도록 살지 969살에 이 세상을 떠났겠는가. 인간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세례 요한을 함부로 대하던 헤롯왕이 충에 걸려서 죽고 말았겠는가. 알렉산더가 33살에 죽고 말았겠는가. 인간의 생명과 범사가 이기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의 말씀을 기억하여 보라.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6:27) 그렇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가운데에 어느 농사꾼이 한 해 농사를 잘하여 풍년을 거두어들인 비유가 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비유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형제간에 재산 분할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하시면서 하신 비유이다. 한 부자가 그 밭의 소출이 풍성하게 수확되었다. 마음속에 “곳간을 헐고 다시 크게 짓고 그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스스로에게 이야기 하듯이 말하였다. 그런데 그 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와 같은 비유의 말씀 후에 예수께서는 한 마디 말씀을 더 해주셨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
농부가 농사를 시작하였으나 그 심은 곡식이 열매를 풍성히 맺을 때까지 메뚜기를 금해 주시고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분이 누구시냐는 말이다.
전쟁이란 것이 그렇지 아니한가. 전쟁을 시작할 수는 있겠으나 그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셔야만 한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 주셔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사울 왕 때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다. 적군 블레셋에는 골리앗이란 거대한 장수가 군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진지 40일이 지나도록 사울 왕과 그의 측근이 고관대작들과 그 어떤 이스라엘 나라 안의 장수도 앞장 서 나가서 골리앗을 대적하여 싸우려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윗이 이 전쟁에 나가서 골리앗을 때려눕힐 수 있다고 말한 그 말이 임금 사울에게까지 들렸다. 사울 왕은 소년 다윗을 곁으로 불렀다. 왕은 자신이 입던 놋 투구를 머리에 쓰고 갑옷을 입고 칼을 차보도록 하였다. 사울 왕도 작은 체구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투구와 갑옷과 칼이 어린 소년 다윗에게 맞을 리가 없었다. 다윗은 임금 사울 앞에서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습니다”하고 말하고는 왕의 앞을 물러나서 손에 막대기를 들고 시냇가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다.
교만이 극에 달한 골리앗의 위협.
골리앗은 그 앞에 방패 든 자를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골리앗은 다윗을 업신여기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믿는 자기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년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골리앗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마치도 전쟁을 이미 다 끝낸 장수의 말과 같았다. 그의 말은 승리의 확신에 차 있었고 어린 소년 다윗을 조롱하기 시작하였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을 하나님도 듣고 계신다고 하셨다. 불평의 말이든 감사의 말이든 그 모든 인생의 말을 하나님이 들이신다고 하였다. 그렇다. 지금 이 전쟁터에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의 사람인 이스라엘의 소년 다윗! 일찍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장래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인 소년 다윗에게 하는 말을 하나님도 듣고 계셨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를 조롱한다든지 교만하게 말하고 행동한다든지 혹은 심지어 남을 저주하는 말을 한다든지 한다면 하나님도 그 말을 들으신다. 흔히 우리가 산행 하면서 소리를 치면 그 소리가 그대로 메아리쳐서 내 귀에 들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가정의 화초나 식물에도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화초를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화초의 반응이 다르다. 하물며 사람이랴. 하물며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의 블랙박스에 모든 것이 다 기록된단 말이다. 그런대도 하나님은 눈 감아 주시고 모른 척 해주시고 용서해 주시니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내외는 미국에 사는 두 아들과 작은 며느리와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그 기능 중에 카카오 톡의 무료 통화가 가능한 보이스 톡으로 통화하고는 한다. 특히 둘째 아들 내외와 통화할 때에는 스피커폰으로 통화한다. 그러면 저쪽에서 아들 부부가 스피커폰으로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 이쪽에 있는 우리 내외의 귀에 바로 곁에서 말하는 소리처럼 선명하고 큰 소리로 들린다. 아주 잘 들린다. 매우 잘 들린다. 인간이 지구 이쪽과 지구 저 쪽에서 하는 소리가 그처럼 생생하게 들린다면 하나님께서 못 들으시는 소리가 어디에 있으시랴.
얼마 전에 미국 정부가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상들과 주요 국가의 주요 기관의 통신 내용을 도청하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 지면서 국제적으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사람도 국제간에 어떤 의도를 가지면 상대방의 통화 내용을 지구 곳곳에서 감청하고 도청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인간의 그 어떤 그 무슨 말이나 그 무슨 소리나 그 무슨 생각과 계획인들 모르시는 것이 있으시겠는가.
본문에 등장하는 골리앗의 말 한마다 한 마디를 정리하면 얼마나 독선적이고 오만하고 교만한가. 이스라엘의 어린 소년 다윗을 보면서 업신여기는 말을 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고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로 주겠다.”고 조롱하는 말을 보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의 그 누군가로부터 이런 취급을 받거나 이런 조롱을 당한다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러나 걱정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불쾌해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 된 하나님의 아들딸인 우리들의 출입과 범사와 말과 행동과 환경과 겪는 일들과 일어나는 일들의 중심에서 우리를 보살피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마치도 소년 다윗을 업신여기고 조롱하고 저주하려고 달려 드는 골리앗의 세력과 같다. 세상은 그리 쉽게 우리를 축복의 강가로 접근하게 내어 버려두질 않는다. 세상에는 이곳저곳에 여기저기에 부비 튜랩과 지뢰 밭 투성이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겨 싸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환경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는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제 얼마 있으면 가롯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시고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앞장서서 예수를 로마의 군대 세력에게 내 맡겨서 십자가의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갈 것을 아셨다. 그리고도 그 인생의 쓴 잔을 피하고 숨거나 도망하지 아니하시고 붙잡히셔서 그 참혹한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다 당하셨다. 그 모든 것을 예견하셨던 예수는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명한 소망과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렇다. 하나님 안에 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장대한 골리앗의 교만한 조롱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영원한 승리의 주님이요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소년 다윗의 하나님 신앙.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한 생애를 존귀하게 써 가기 시작하신 베들레헴의 어린 소년 다윗의 신앙을 보여 주고 있다. “난세에 영웅 난다”는 말이 있다. 온 나라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였다면 돋보이지도 않았고 드러나지도 않았을 소년 다윗이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온 군대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던 때에 전쟁의 중심에 세움 받고, 역사의 중심에 세움 받는 주인공이 되었다. 위기가 기회가 되게 한 것이다. 다윗에게는 일곱 명의 형들이 있었지만 언제나 들판의 양떼를 돌보는 일은 어려서부터 다윗의 몫이었다. 그러하다 보니 아버지 이새의 양떼를 돌보던 때에 양 새끼 한 마리라도 곰과 사자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목동의 본능이 몸에 배어 있었다. 다윗은 사자의 입과 곰의 발톱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어려서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한 번도 곰과 사자의 공격으로부터 아버지 이새의 양떼를 빼앗긴 적이 없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다윗이 용감했다거나 무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여 주셨고 다윗이 돌보던 아버지 이새의 양떼를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언제나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소년 다윗을 위협하고 저주하고 조롱하는 골리앗 앞에서 다윗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보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삼17:45) 이 얼마나 용감하고 담대하고 씩씩한 믿음의 고백인가.
계속된 다윗의 말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침착하고 담대하였나를 알 수 있다. 다윗의 세 명의 형들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 나라의 군대가 모두 다 두려워서 바위와 나무 숲 사이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던 지난 40일 간의 엘라 골짜기의 전쟁의 소강상태를 지금 소년 다윗이 다루어 가고 있지 않는가.
다윗은 거침없이 계속하여 골리앗에게 말하였다. 마치도 웅변대회 장에서 웅변을 하는 연사가 원고를 외워서 웅변하듯이 카랑 카랑한 소년의 음성으로, 기가 전혀 죽지 않은 담대함으로, 이렇게 분명한 어조로 할 말을 제대로 다 했으니 말이다. 다윗은 한마디 한 마디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거론하고 고백하였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실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의 군대의 시체를 새와 들짐승의 먹 이로 주어서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들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하나님이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실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너무나 신앙이 없는 자처럼 답답해하고,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고, 염려와 의심과 두려움 가운데 살아갈 때가 없지 않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유 없는 고난이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
최근에 이희아 양의 글을 읽어 보았다.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며 간증하는 피아니스트 이희아 자매 말이다. 이희아 자매는 태어 날 때에 양 손에 손가락의 두 개씩 네 손가락을 갖고 태어났다. 발도 양 발에 발가락에 단 한 개 씩 뿐이었다. 그나마 두 다리도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날마다 근심 가운데 지내던 희아 양의 어머니가 어느 날엔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해 상 십자가를 모셔 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하나님 우리 아기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깨달아 지기를 “모양이 다르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희아 양의 엄마는 주님의 이런 음성이 들린 후에 잠을 자고 있는 아기 희아 양의 양 손을 포대기 속에서 꺼내서 들여 다 보는데 네 손가락만 달린 아기의 양 손이 마치도 튤립 꽃의 꽃망울처럼 예쁘게 보이기 시작하였고 아기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하게 보였다. 그 순간 희아 양의 엄마는 기쁨으로 크게 외쳤다. “하나님은 우리 희아도 사랑하시는구나.” 그런 엄마의 간증과 함께 희아 양은 자기 자신의 최근의 심경을 글에서 써 내려 가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하나님의 영을 그 영혼 속에 불어 넣어 주셨다. 하나님은 항상 기쁘게 웃으시며 못 생긴 나를 그윽한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며 지켜 주시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아무 걱정이 없이 잠자리에 들고는 한다. 하나님은 피부색이 다르거나 키가 크고 작거나 건강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착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사람은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역할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적당한 달란트를 주셨는데 나에게는 음악의 달란트를 주셨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음악에 힘을 쏟는다. 12살 때까지 엄마가 근무하시는 병원에서 생활하고는 했는데 기형아로 태어난 아기나 병약하게 태어난 아기나 너무 일찍 태어난 아기들로 인해서 울고 슬퍼하고 당황스러워 하는 엄마들과 아빠들과 가족들을 늘 보았다. 그런 사이로 돌아다니며 너무나도 밝고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는 어렸을 적의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 아빠들은 자신들의 장애를 가진 아기로 태어난 아기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보았다. 나는 지금도 너무나 감사하며 행복하게 피아노를 연습하고 연주하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며 천국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는 대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나도 알고 남들도 알게 하는 그런 나날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이란 칼과 창에 있지 않은 것을 만방에 전하고 증거하는 그런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아! 저 아무개가 하나님 믿고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분명해” 이런 말들이 우리 주변에서 쏟아져 나오도록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윗의 고백을 들으시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고단한 인생길의 영적 싸움에서도 이기게 하실 줄로 믿는다. 왜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다 함께 이 찬양을 부르자.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십자가 죄 사 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다윗에게 완전한 승리를 허락하신 하나님.
어떻게 물맷돌 한 개로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성경의 이 장면은 역사의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쏜 살 같이 빨리 달려가면서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가지고 물매에 감아 던졌다. 그 돌멩이는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 시켰고 돌은 아예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 빠져 나오질 않았다. 골리앗은 그 순간 땅에 엎드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질 못하였다. 전쟁은 끝이 났다. 블레셋의 군대는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블레셋 진영의 언덕에 뛰어 올라간 다윗은 골리앗의 옆구리에 있던 칼을 빼어 내서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쳐 가지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 왔다. 다윗은 베어낸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고 골리앗이 입었던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었다.(삼상17:54) 전쟁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이 전쟁은 다윗을 앞장 세우셔서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전쟁이었다. 요즘 무엇 때문에 잠 못 이루며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는가.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해 하는 입의 말을 거두고 다윗처럼 입의 고백을 새롭게 하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오늘, 지금, 나를 향하신 여호와의 구원을 기도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듯이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두 다 여호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모세는 기도하여 백성들을 살려 내는 불뱀의 응답을 체험하였고 여호수아는 기도하여 태양이 멈추어 서는 기적을 보았다. 삼손은 인생의 마지막에 이룬 업적이 평생의 업적보다 컸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의 생명이 15년 연장되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40년 동안 앉아서만 지내던 앉은뱅이를 손잡아 일으켜 세웠다. 예수님은 각색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배고픈 자들을 배 불리 먹이시고 오히려 12 광주리가 남게 하셨다. 예수님은 필요하시면 물 위도 걸으셨고 풍랑과 바람도 잔잔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고 승천하여 하나님 곁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주님이시다.
하나님 안에 살고, 예수님 안에 살면 이기는 자가 된다. 날마다 순간마다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간증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