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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한 전도자의 감사(고전1:1- 9) 2013.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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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10-20 08:00 조회 19,344 댓글 0
 
이번 미국 방문 길에 뉴욕의 맨해튼과 보스턴의 여러 교회들을 방문할 기회를 가진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의 기회였다. 맨해튼의 크라이스트처치 Christ Church와 보스턴의 트리니티 처지 Trinity Church에 가볼 기회를 가진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미국 보스턴의 트리니티교회  옆 마당에는 필립 브룩스 Phillips Brooks(1835-1893) 목사의 상이 세워져 있다. 그 상을 제작한 조각가는 제작 의뢰가 들어오자 이 유명한 목회자가 공부했던 버지니아의 신학교에도 가보고, 그의 첫 목회지였던 필라델피아에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가 목회자로서 존귀하게 쓰임 받던 보스턴도 방문하여 브룩스의 삶의 광채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결국 그 조각가는 브룩스가 그렇게 점점 존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은 덕택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조각가는 동상을 제작하면서 브룩스의 모습 뒤에 팔을 뻗쳐 이 목회자의 머리에 축복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 동상으로 형상화 하였던 것이다. 그는 34살 때부터인 1869년부터 1891년까지 22년 동안 그 교회를 섬겼다. 그는 20살에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에 신학을 하여 성공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전에 잠시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있다. 120장 성탄 찬송인 ‘오 베들레헴 작은 골’ O Little Town of Bethlehem 이란 찬송의 가사를 쓴 찬송 시인이기도 하다. 위대한 설교가요 애국가요 시인이요 저술가요 교수였던 그가 58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자 세상사람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왕의 죽음보다 더 슬퍼하고 아쉬워하였다고 했다. 헬렌 켈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도록 지도하고 헬렌 켈러의 선생이었던 앤 셜리번에게도 신앙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당시 치열했던 남북전쟁 중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게도 신앙적인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그에게 많은 일화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1893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많은 성도들의 면회를 사절하였다. 단지 교만한 보스턴의 유명한 법률가인 잉거솔의 면회를 허용하였다. 그 때 병상에서 임종 전에 잉거솔에게 한 말은 “다른 성도들은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자네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보자고 했네.”였다.  법률가 잉거솔은 필립 부륵스 목사에게 전도 받은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필립 부륵스 목사의 말 중에 ‘설교란 인격을 통해 중재된 진리’라는 정의는 설교학에 관한 명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사역 때에 건축된 지금의 예배당은 당대의 최고의 건축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헨리 홉슨 리처드슨 Henry Hobson Richardson이 설계하여 건축하였고 당대 최고의 스테인 글라스 작가stained glass artists였던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에 의해서 제작 시공되었다. 성화를 각인한 벽화들도 당대 유명한 벽화가muralist 였던 존 라파즈John LaFarge의 작품들로서 오늘날도 예배당 전체가 거대한 예술작품을 이루고 있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였다. 특히 이방국가와 이방 도시를 찾아다니면 선교한 위대한 전도자였다. 그러한 저가 몇 해 전에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탄생된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다. 이탈리아 남부의 유명한 항구 도시가 고린도이다. 세계에 가 보고 싶은 나라나 도시가 많지만 그 중에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한 곳이 고린도이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 년 반 동안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는 주후 51년경의 일이다. 이탈리아의 아덴지역에서 전도하던 중에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믿는 이들도 있었고 조롱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떠나서 새롭게 도착한 곳이 고린도였다. 거기에 아굴라를 만났다. 장막을 깁는 직업이 같아서 함께 고린도에서 장막 깁는 일도 같이 한 적이 있다. 사도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을 찾아가서 예배드리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디모데와 실라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에 도착해 보니 사도 바울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파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대적하고 비방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다”고 말하고는 전도할 자리를 옮겨 갔다. 그 때 만난 사람이 디도 유스도이다. 그의 집은 회당 바로 곁에 있었다. 감사한 것은 회당장인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 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사도행전 18장 8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때에 밤에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말씀해 주셨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사도 바울은 일 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쳤다.
 
세월이 몇 해 지나고 고린도 교회는 계속하여 부흥해 가고 있었다. 처처에 세워진 교회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과 관심과 애정이 남 다르지만 그 같은 사랑은 고린도 교회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린도 전서와 후서의 분량만 보아도 사도 바울의 선교 생애 중에서 고린도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해 주지 않는가. 로마서의 분량이 만만치 안치만 개 교회를 향한 편지의 분량과 내용으로는 고린도 전후서가 가장 방대하니 말이다. 그 첫 편지인 고린도 전서를 마침 주일을 맞은 오늘부터 묵상하게 되었다. 말씀의 내용을 9절까지 대하실텐데 분량이 만만치 않다. 제목을 ‘한 전도자의 감사’라고 정하였다. 4절 끝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되어 있다. 훨씬 편지의 글다운 정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무엇을 감사한다고 하였는가. 고린도전서의 서론이요 인사말에 가까운 본문을 더욱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임하길 바란다.
 
 
자신에 대한 감사.
사도 바울이 문안 인사하는 곁에는 소스데네도 언급되었다. 사도행전 18장 17절에 보면 고린도의 회당장이었던 인물이 소스데네이다. 그가 개종하여 사도 바울의 전도 일행으로 늘 동행하게 되었음을 알게 하는 내용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 된 것은 자신의 의지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노라고 밝힌다. 사도 바울이디모데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밝히듯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1:13)였던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적자가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이방에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9장에 소개된 대로 다메섹에서 변화되기 이전까지는 철저한 교회에 대한 핍박자요 예수의 부활 복음에 대한 비방자요 박해자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해서 열렬한 복음 전파자요 예수의 부활 복음의 증언자가 되었는가. 그 배후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표현을 고린도 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 후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이 사도된 것은 자신의 의지적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증언하고 강조한 것이다. 그와 같은 강조는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했다. 여기서 ‘사도’(使徒)란 헬라어로 ‘Απόστολος’인데 그 뜻은 ‘보냄을 받은 자’ 혹은 ‘대리자’란 뜻이다. 헬라 당시에 황제나 군주를 대신하여 전권을 위임 받고 일정한 지역에 파견된 전권대사 즉 오늘 날로 말하면 '대사'(大使) ambassador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의 12제자들이 사도였다. 바울도 사도였다. 가롯 유다가 죽은 후에 제비를 뽑아 12의 숫자에 보충된 맛디아도 사도였다. 사도행전 14장 4절에 보면 바울과 동행하던 바나바도 사도였다.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보면 예수의 형제요 야고보서의 기록자인 예수의 아우 야고보도 사도였다.(갈1:19) 이처럼 사도란 초대 교회의 때에 예수의 부활 복음 전파에 전념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매우 권위가 있는 호칭이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하고 감사하는 것은 자신은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 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증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집사요 권사요 목사요 전도사로 부르심을 받은 이 모든 부르심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가.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은사와 재주와 역량과 능력을 따라서 주께서 힘주시는 대로 기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도들에 대한 감사.
사도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서 감사를 말하는 감사의 이유는 조롱하고 핍박하고 방해하고 반대하는 이방 도시의 열악한 영적 전쟁터에서 어떻게 주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탄생되고 교회가 자리잡혀서 성장해 가는지 그것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고백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그냥 성도들이라고 하지 않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불렀다. 2절을 보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하였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요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인가. 성도라는 표현보다 더 좋은 호칭이 이 세상에 그 어디에 있겠는가. 요즘 뉴스에 보니 북한의 김정은 비서가 개인 섬에서 미국의 유명한 프로 농구 선수인 데니스 로드먼을 초청하여 시가 80억 상당의 길이 60미터에 달하는 세계적인 초호화 영국제 요트에서 술 파티를 벌이고 7성급 수준의 호화 별장을 꾸민 섬에서 수십 척의 제트 스키와 마구간의 말들이 즐비한 환경에서 세상 최고의 호화판 생활을 벌이고 있다지 않는가. 북한 백성의 삼분의 이가 굶어 허덕이고 있는데 본인만 나 몰라라 하고 떵떵거리며 즐기고 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성도된 우리는 그런 악의 축을 부러워하지 말고 성도다운 삶을 감사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병든 자, 가난한자, 소외된 자, 불쌍한 자, 외로운 자, 낙심한 자,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낙담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생의 의욕을 갖지 못하고 답답한 인생으로 살아가는 불행하고 불쌍한 이웃을 향하여 교회와 성도는 무언가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름으로 행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참 성도다운 성도의 모습이 아닌가.
 
성도란 죄와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고 죄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구별된 자요, 성별된 자요, 주께 제물로 드려진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죄를 짝하면서 세상을 막 살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도로 부르시고, 성도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대사가 남의 나라에 가서 막 살면 그 평판을 듣고 본국에서 그 지위를 파면하고 송환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에 걸 맞는 거룩하고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세상을 떠난 대도 조세형이 한 때는 변화 되었다. 새로워 졌다. 과거를 청산했다. 딴 사람이 되었다고 언론에 소개되고 교회마다 불려 다니며 간증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변화된 줄 알았는데 일본에 까지 건너가서 도둑질을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된 적도 있다. 국내에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옛날의 악한 습관으로 되 돌아 간 적이 있다. 한 때는 그도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새 생활하며 살라고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결국은 옛날의 도둑질 하던 습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다가 비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도 한 때는 성도라는 이름이 붙어 다니던 사람이었다. 무얼 말하는가. 성도는 성도 다워야 한다. 성도답게 살아가야 한다. 매일 매일, 날마다 순간마다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주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성도들이니 성도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빚진 자 자운 삶을 겸손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에 보면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었다. “주여 형제가 내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 때 예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무슨 말씀인가. 늘 용서하며 살란 말씀이다. 우리 속담에도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를 바위에 새기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리고 예수께서 이어서 해 주신 비유가 천국을 비유하신 왕에게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과 그가 돌아가던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멱살을 잡으면서 내 빚 갚으라고 봉변을 준 사건의 비유이다. 일만 달란트란 돈은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과 비교하면 164,383년을 벌어야 하는 돈이다. 일만 달란트는 6조의 돈이다. 60억 혹은 600억이나 6000억이 아니라 6조의 돈이다. 그만큼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100데나리온 즉 1,000만원 빚 못 갚은 사람의 목을 조이면서 ‘내 돈 내 놓으라’고 소란을 피우고 그를 감옥에 쳐 넣었다. 이 사실이 왕께 알려졌다. 왕은 그를 괘씸하게 여겨서 다시 불러 들였고 크게 화를 내면서 그도 옥에 쳐 넣고 말았다. 이것은 예수의 비유다. 비유는 교훈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그렇게 힘을 입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도라고 불리어지는 그것과 하나님이 나를 성도로 불러 주신 그 부르심에 대한 절절한 감격과 감사가 있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모를 때에 핍박하던 자신이 이제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고 전파된 복음이 고린도에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고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넘쳐 나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축복의 인사를 하고 있지 않나. 3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인사하면 이렇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빕니다.”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그런 주의 은혜와 평화가 서로에게 넘치기를 기원하고 축복하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던 성도들에 대한 감사.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다. 5절에서 언급하는 대로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한 이들이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체험하여 아는 것도 많고 복음 전파에 있어서 언어적인 달변가들도 많았다. 헬라 철학이 발전한 지역 중의 한 곳이었던 고린도 시민들 중에서 성도된 저들은 주를 믿는 믿음에 있어서 지식과 사고와 사상과 언변에 능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르스도를 증거하는 분명하고 견고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6절) 모든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한 마디로 부족함이 없는 믿음과 은혜의 사람들로 넘쳐 났다. 또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 신앙도 분명해서 지나치게 이 세상살이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이었다. 물론 파고 들어가 보면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투성이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뿌리를 든든하게 내려 가고 있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언급된 대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주의 은혜 뿐만 아니라 각자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사도 활발하였다. 대다수의 성도들은 부활과 재림 신앙에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었고 성령의 열매를 간절히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8절 이하에 사도 바울은 감사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며 목자의 심정을 갖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으면,
 
“예수께서도 여러분을 끝까지 굳게 세워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가지게 해주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8-9)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주의 은혜와 평강과 견고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귐이 풍성하고 깊어 가길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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