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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신앙(행24:1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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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8-18 06:08 조회 21,141 댓글 0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양심이란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를 말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중에 붙잡혀서 곤혹을 당하던 중에 소동하는 무리들을 진압하던 천부장은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이란 사실을 알고 그를 귀하게 보호하며 영내로 이끌어서 보호해 왔다. 다음 날 대 제사장 아나니아와 공회 앞에서 변증할 기회를 갖게 하였으나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에 소요만 더 심해져 가는 것을 알게 된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총독 벨릭스 앞에까지 보내서 심문을 받게 했다. 총독은 매우 거만한 태도로 머리로 표시하며 턱을 내밀어 바울에게 ‘말하라’고 함부로 대하고 있다. 바울의 대답은 분명하였다. 자신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는 삶을 살아 왔노라고 했다. 어떤 면에서 있어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 왔다는 말인가.


양심(良心)에 거리낌이 없는 부활(復活) 신앙.
첫째, 남들은 나를 나사렛의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하지만 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를 따라 살아 왔고 그 복음의 도를 전파하며 살아 왔노라.

둘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벗어 난 적이 없다.

셋째,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선지서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다 믿으며 살아 왔다.

넷째, 동족인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이 소망의 바탕은 부활신앙이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사도행전 9장에 있는 내용대로 다메섹의 변화 체험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다메섹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려고 가던 사울이 강한 빛 앞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예수님의 음성과 부르심을 체험한 이후로 온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인 것을 부정하고 믿지 못하던 사울인데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설명의 세계가 아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사십 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각양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교훈하고 전파하셨다. 예수님은 33살 되시던 해의 유월절에 붙잡히셔서 예루살렘 성문 밖의 골고다 언덕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사십일을 이 땅에 계시다가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승천하셨다.

우린 이런 사실을 아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실 재림의 약속이 믿어져야 한다. 영의 세계는 영으로만 깨닫고 알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말씀은 단순히 듣는 행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듣는 다는 말은 ‘깨달아 알고 믿고 순종하고 전파한다.’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고 하였다.

유대인들은 부활과 천사와 영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로 크게 나누인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저들 동족들의 정황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때를 놓치지 않고 더욱 명확하게 부활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다. 즉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증거 하였다. 우리는 대개 의인의 부활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안다. 그러면 도대체 ‘악인의 부활’이란 무엇을 말할까.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는 말씀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를 구별하는 행위심판이 분명히 있다. 의인은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상급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악인은 장차 부활하되 하나님 앞에서 영벌을 받고 지옥의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14절에서 ‘의인의 부활’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또한 요한복음 5장 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생명의 부활’이란 곧 ‘영생의 부활’을 말씀하는 것이다.

죽은 자에게 부활이 있느냐 혹은 없느냐의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인 동족들이 고소하고 고발하여 사도 바울을 로마의 총독인 벨릭스 앞에까지 피고 신분으로 세운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신앙 고백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가운데 아직 부활 신앙이 없는 이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을 갖게 도와 달라고 성령님께 간구해야 할 것이다. 주일 예배 때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 신경’에 보면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으며”하는 신앙 고백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절에만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지 말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마가복음 16장 6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한 천사가 말하기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는 살아 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고 선언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 된 지 사흘 만에 살아 나셨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 그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음을 영원히 이기고 영생하시는 주님이시다. 어둠을 절대로 빛을 이길 수 없다. 사망은 절대로 생명을 이길 수 없다. 부활이란 그런 것이다. 부활이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영원한 신비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봄이 오는 자연의 신비를 해마다 체험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계절이 여름이거나 일 년 내내 춥기만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체험으로 알지 않는가. 부활이란 그런 것이다. 이 같은 자연의 신비나 부활의 신비는 말로 설명 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평생 눈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나라가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 말이다. 그런 열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 이런 크리스마스 캐롤의 맛을 어찌 느낄 수가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이런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들이 부활의 주님과 한 영이 되어 동행하게 될 때에 우리는 철저하게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며 살아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개인적으로 체험하며 살아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영국 역사에 유명한 제씨 팬 루이스(Jessi Penn Lewis, 1861-1927)라는 여성 평신도 순회 설교자가 있었다. 그녀는 21살에 중생을 체험한 후로 66살에 하나님 앞으로 가기 까지 평생을 복음 전파와 부활 신앙을 증거하는 일에 전력을 다한 주인공이다. 그는 간증한다. 귀용 부인이 쓴 <십자가의 도>라는 책을 읽다가 예수님께 평생을 헌신하며 살 것을 결단하게 되었다고 간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앤드류 머레이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책을 통해서 성령 충만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성령 충만을 목말라 하던 어느 날 아침 식탁 앞에서 아침을 먹으려다 말고 순식간에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그 후로 그녀는 능력 있게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능력에 대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권세 있는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그녀는 영국을 대표하는 ‘케직 사경회’에서 성경을 가르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 교회 역사에 길이 빛나는 1904년의 웨일즈 대 각성 부흥 운동과 성령 운동의 불을 붙인 장본인이기도 한다. 그녀는 평생을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과 중국에 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녀는 그의 책, <십자가의 도>(The Centrality of the Cross)라는 책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명확하게 복음을 제시하고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책에서 로마서 6장을 설명한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꽉 차 있다.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사는 삶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분리할 수 없는 진리이다.”는 마비 박사의 글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모태에서 양수 가운데서 탯줄을 통하여 온갖 영양의 섭취와 배설 행위까지를 일체 다 해결하며 지내다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보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 70-80년 동안 주어지는 것처럼 죽음과 부활을 따로 따로 끊어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역사적인 사실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사적인 사실로 생생하게 믿어지고 받아 드려 지는 그런 믿음이 각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 앞에 진정한 희망이 있게 된다.

이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분명한 체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삶이 변하고 새로워지고 달라지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5-11)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의 삶을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구제(救濟)와 예배(禮拜).
1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간증한다. 그는 흉년을 겪는 동족을 위하여 이방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구제 연보를 거두어다가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걸 간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제물을 준비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던 유대 신앙에 철저하게 젖어 살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본문에서는 구제에 대하여 간단히 스쳐 지나가는 말로 언급하고 말지만 사도 바울의 제 1, 2, 3차 전도 여정 가운데 보면 그는 가난한 이웃과 불쌍한 이웃과 춥고 배고프고 굶주리고 병든 이웃들에 대하여 끝이 없이 사랑과 관심과 섬김을 계속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17절에 언급된 ‘구제와 제사’ 즉 이웃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예배의 생활은 평생토록 병행하는 삶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금번에도 어느 선교 단체가 거대한 컨테이너에 각양 생필품과 전자 제품 등을 가득 채워서 아프리카로 보내는 내용이 교단 신문에 실린 것을 보았다. 그 물품을 보내는 해운 비만도 1,700만원이 들었다고 했다. 구제는 이처럼 사랑의 마음을 물질에 담아서 나누는 것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기초 의약품을 비롯해서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지난 번 공주 지방 집회에 갔다가 케냐에서 16년째 선교하고 있는 임재찬 선교사를 만났다. 케냐 마사이 족이 어떤 신을 신고 어떻게 걷기에 ‘마사이족 운동화와 구두’가 우리나라에 그렇게 유행이냐고 물었더니 “신발이 없으니까 버려진 폐타이어를 잘라서 구멍 내가지고 버려진 줄로 얼기설기 엮어서 신는 것”이 저들 마사이 족의 신발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없으면 못 신고 고작 신발을 신는다는 것이 타이어 쪼가리를 잘라서 신발이랍시고 만들어 신는다는 것이다. 그러하다 보니 자연히 앞축과 뒤축이 둥그렇기 때문에 뒤뚱 거리며 걷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보폭을 넓게 걷고 먼 길 가려니 서둘러 걷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술은 그런 것이다. 가슴이 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교회가 이제 새 성전 시대를 맞이하면서 구제와 예배의 균형을 잘 이루어 나가는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사도행전 10장의 가이샤랴에 주둔하던 이달리아의 백부장 고넬료는 구제와 기도생활이 하나님께 상달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삶이 경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더불어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외하면서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인물이었다.

지난주에 강화도에 서둘러 다녀왔다. 입당 첫 주일 예배 때에 사용할 소나무 십자가를 제작하기 위해서 강화도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 지나가는 길에 산 중턱에 거대한 시설의 예배당 두 채가 보였다. 물어 보았더니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세운 ‘강화 꽃동네’ 시설이라고 하였다. 오웅진 신부 한 사람과 최귀동 거지 할아버지의 구제하는 마음이 오늘 날의 그런 거대한 섬김의 집 운영이 가능해 진 것이다. 구제는 구교냐 신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처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불쌍한 사람을 응급치료하고 자기 짐승에 태우고 묵을 집을 찾아서 하룻밤을 곁에서 지내며 돕고 남은 필요한 치료 경비도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사랑을 베풀던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친히 교훈하신 구제와 사랑의 실천에 대한 강조가 아닌가. 제사장도 그냥 지나갔고 레위 사람도 피하여 지나간 강도 만나 고통당하는 한 사람의 그 아픔의 현장에 다가간 것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에 담김 다양한 교훈이 있다.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 유일하게 나오는 이 비유의 시작은 어느 날 예수님을 방문한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찾아 와서는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질문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율법에 기록된 내용을 말해 보라고 반문하셨다. 율법 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10:27)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이 기회를 지나치지 않고 교훈의 말씀을 해 주셨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눅10:28)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 때에 이어서 비유로 해 주신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이 분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Go and do likewise)

구제란 생각으로 하고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 나오는 내용처럼 말이다. 의인이라고 칭찬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언제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대접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37-39) 그 때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우리와 일본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지만 일본 교회역사에 대단한 인물들이 있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産, Kagawa Toyohiko, 1888-1960)라는 사람이 있었다. 근 일본 고베 지역에서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러다 예수를 믿게 되어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미국 프린스턴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일본 고베 지방 빈민굴에 들어가 14년을 봉사하며 지냈다. 그는 스스로를 빈민굴의 밑을 닦아주는 사람이라고 자처했다. 그렇게 해서 발전된 그의 신학은 ‘항문의 신학’(Theology of Anus)으로 명명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일본의 바울’이라고 부른다. 스스로의 상처와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많은 사람을 돌보는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상처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사용해 상처의 자리에 영광의 꽃이 피도록 했던 것이다. 일본 협동조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의 일생을 만화로 극화한 책이 나왔다. 오사키 테이조 글, 후지오 고오 그림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책이다. 그는 평생을 빈민가에 투신해 무상급식과 무상교육 운동을 펼쳤다. 일생을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과 빈민구제 노동운동과 협동조합 설립에 바쳤다. 세계 최대의 서민복지생협인 ‘코프고베’의 설립자이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에 대하여 가장 먼저 공개 사과한 일본인으로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과수원 농부들에 따르면 상처 있는 나무 과실이 더 맛있다고 한다. 꽃도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자란 꽃들이 더 향이 짙다. 일본이 대지진으로 받은 큰 상처에 영광의 꽃을 피우도록 기도하자. 인류학자들은 일본의 쓰나미 현장에서 갑자기 부모형제를 잃고 충격과 슬픔 가운데 살아남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중에서 장차 역사적인 인물이 자라날 것이라고 하였다. 고난이 없는 영광이란 없다. 가난을 겪어 본 이들이어야 가난한 이웃이 보이는 것이다. 배고파 보았어야 굶주림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내 몸이 아파 보아야 병의 고통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구제와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은 로마 선교를 이루어야 할 복음 전파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이끌어 가고 계셨다. 사도 바울의 변증을 다 들은 총독 벨릭스는 오히려 사도 바울이 하는 말에 관심을 갖고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하는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는 판결을 뒤로 미루고 천부장 루시아가 오기까지 기다리자고 하면서 백부장에게 사도 바울을 잘 지키고 자유도 주고 그를 아는 곁의 친구들을 통하여 돌봄을 받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오묘하지 않는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동행과 보호하심을 믿고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자.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이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에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와 같은 체험 신앙의 하루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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