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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계속되는 기적의 현장(행9:31=4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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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8-04 20:32 조회 19,874 댓글 0
 
기독교는 치유와 생명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서 계신 동안에 하셨던 세 가지 사역 중의 하나가 치유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난 딸의 죽음을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살려 주셨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어서 장례 지낸 무덤 앞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서 불러 내셨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성령 충만한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은 8년 동안 침상에 누워서 고생하던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또한 죽은 여 제자 다비다를 살려 내셨다. 이처럼 기독교는 각색 병이 치유되는 치유의 종교요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에게 생명을 회복하고 영생하게 하는 생명의 종교이다.

갈릴리의 마을과 회당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가시는 곳곳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다. 예수님은 곳곳마다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고 천국을 선포하시고 항상 다양한 비유로 천국을 가르쳐 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오는 무리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동안 걷지 못하던 병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걷게 되었다. 손 마른 사람이 손이 펴져서 건강하게 되었다. 나병이 치료되고, 앞 못 보던 이가 보게 되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이들이 듣고 말하게 되었다.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이들이 깨끗해졌다. 귀신에 들려서 물 가운데 불 가운데 뛰어 들며 무덤 사이에 살던 이들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간질병이 치료되었다. 12년 동안 부인병인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에서 겉옷을 가만히 만지며 낫기를 사모하자 그 즉시 고침을 받았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았다. 성경은 그 여인이 고침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 마다 각색 병자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어 좇아내니 2,000마리의 돼지 떼에게 들어가서 돼지가 비탈로 내달아 바다에서 몰사하는 일도 생겼다.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부르시는 부르심과 강한 빛 앞에 엎드려져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로 삼일 간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기도하며 지냈다. 다메섹 성 안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주님이 말씀하셔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할 때에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 같은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다시 눈을 떠서 보게 되었다. 그 날로 세례 받고 성령 받은 사울은 즉시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시다”라고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그가 최근까지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울인 것을 알고 당혹스러워하였다. 여러 날 동안 사울의 복음 전파가 계속되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는 계교를 꾸미기 시작하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밤낮 성문을 지키기까지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님의 제자들은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다메섹 성벽으로 달아내려 도망가게 도왔다. 얼마 후에 사울은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가이사랴를 거쳐서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보내졌다. 그러는 중에 예루살렘과 유대의 여러 고을과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의 교회들은 핍박자가 사라진 후에 안정을 되찾고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가는 부흥기를 맞았다. 복음 전파로 인하여 주를 경외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져 갔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위로와 격려와 허락하시는 용기로 말미암아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일제 36년과 6. 25 전쟁으로 이어지는 고난과 핍박의 날들을 뒤로 하고 발전하고 부흥하는 시대를 거쳐서 오늘 날 세게 10 대 강국에 진입하는 기적을 이룬 것은 물론 산업 전선에서 밤낮 없이 뛰고 달리는 산업 역군들의 노력과 땀과 헌신이 그 바탕이 되었지만 아직도 분단된 우리나라의 남한 땅에 먼저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 번영의 축복을 감사하며 죄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결 운동과 정직 운동이 일어나게 도는 날 때가 되면 평화로운 복음 통일의 날도 허락 하실 것이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나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회개하고 부르짖어 간구할 때에 그런 해방과 출애굽과 포로 생활에서의 회복이 선물로 주어진 것처럼 말이다.

사사 시대의 교훈이 그러한 것처럼 인간은 잘 살고 번영하게 되면 타락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이미 2,000년 전에 로마의 목욕탕 문화는 현재의 우리의 목욕 문화 이상으로 화려하였다. 물론 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와 같은 인간의 생활이 있었지만 오늘 날은 문명이 돌고 도는 것이다. 또한 생활의 편의를 돕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엄청난  문명기기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해서 인간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요즘처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지만 서로 간에 진정한 소통이 잘 안 되는 대화의 단절은 점점 더 심각해 져 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여겨지는가.

상대방의 진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관계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던 날 아침에 그를 알아보는 여자 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하였다. 그도 한 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하던 제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생의 가장 심각한 위기 앞에 계신 순간에 베드로는 더 이상 예수님 곁에 없었다. 비겁하고 나약하게 도망가고 숨고 말았다. 그랬던 베드로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회복을 체험하였고 기도 하던 중에 성령 충만한 사도로 변화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한다. 아무리 헌신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여도 성령 받지 못하면 단지 헌신은 헌신으로, 봉사는 봉사로 끝나고 만다. 베드로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마26:34)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하고 모든 제자들도 그를 따라서 장담하였다. 그러나 정작 주님이 고난 받기 시작하시고 로마 병정들에 의해서 옷이 벗겨지고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지고 채찍에 심한 매를 맞으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시던 그 쓰라린 고통의 날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아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베드로인데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기도하여 충만히 받은 후에 전혀 다른 인물로 변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3장에 제 구시 즉 우리의 오후 세시에 성전 기도를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 앞을 지나던 베드로와 요한
의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40년간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이를 걷고 뛰게 하셨다. 이는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기적이었다. 그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이곳저곳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성도들의 살아가는 형편을 보살피고 있었다. 오늘 날로 하면 심방을 간 것이다.


서로를 두루 찾아가서 돌아보는 믿음.
성도된 우리들은 안수 받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지구장, 속장, 교사 그 누구이든지 서로 서로의 형편을 돌아보고 관심을 갖는 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인의 소외 현상은 점점 심각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생활을 즐기는 현대인들은 고독의 병을 앓고 있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면 집의 현관 문과 아파트 문이 열릴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하여 마음 문이 열리게 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가 속회라는 이름으로 성도들 간에 서로의 가정을 방문하여서 예배드리고 함께 음식을 먹고 신앙적인 대화를 하고 서로의 삶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지 않는가. 이것은 예수님이 집집마다 찾아다니시고 본문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100리나 떨어진 40km 거에 있는 룻다라는 곳까지 찾아가서 성도들의 형편을 돌아 본 것에 기초하는 것이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벤살렘 교회에서 목회할 때에 남자 집사님 한 붅에 뉴 햄프셔에 사는 의사 사위 가정에 가서 머무는 동안에 심장에 이상이 생겨서 그 곳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주일 예배를 드리고 저녘 내내 운전하고 거의 밤이 깊도록 운전을 해서 그 곳을 찾아 갔으나 너무나도 멀어서 다 갈수가 없어서 가던 중간에 숙소를 정하여 잠을 자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서 또 다시 한 참을 운전하고 찾아가서 위로하고 예배드리고 돌아온 적이 있다. 이처럼 성도를 돌아보는 일은 가깝든지 멀든지, 낮이든지 밤이든지 구별이 없다. 예수님도 마을마다 집집마다 다니시며 가정에 들어 가셔서 둘러앉은 무리들에게 천국을 비유로 설명해 주시고 찾아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는 하셨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달아 내리는 현장에서 그들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깨끗하게 고치신 적이 있으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마다에서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새 삶을 허락하셨다. 그런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덧입은 성령 충만한 사도 베드로는 룻다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 곳에서 만난 8년 동안 누워서 고생하던 중풍병자를 고쳐 낸 것이다. 예수님의 은총인 것이다. 

교회가 교회되려면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집사, 권사 임원을 비롯한 성도들 간에 누구라고 서로의 형편을 돌아보아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이 되어 주고 중보 기도하는 연합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교회가 아닌가. 그러는 중에 병도 낫고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 제목이 응답받고 서로에게 간증하고 힘과 용기를 얻고 하는 생활이 얼마나 귀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을 선포하라.
베드로가 8년 된 병자를 낫게 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면 병자가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병자가 낫는 것은 자신의 낫고자 하는 믿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에 병자가 나으리라는 선포자의 믿음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바가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마16:17-18)

본문에 보면 애니아라는 이름의 8년 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이 환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선포할 때에 그가 일어나 8년 동안의 깔고 누워 있던 병석의 자리를 치우고 정돈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베드로가 얼마 전에는 40년 동안 걸어 본 적이 없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걷고 뛰게 하지 않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권세가 있는 것이다. 예수 이름을 선포할 때에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가능한 것이다.

“약할 때 강함되시네” 찬송하자.


약할때 강함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주
주나의 모든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수 없네
주나의 모든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나의 모든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나의 모든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모범적인 성도의 삶
나를 본 주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선한 영향력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여 8년 된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고 건강한 생활을 시작한 소문이 나자 룻다와 사론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다 고침 받은 애니아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는 영혼 구원의 부흥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우리는 나 한 사람 겨우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영접하고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변화를 통하여 내 가족과 내 일가친척과 내 주변의 일상적인 주변 사람들이 나의 변화된 삶을 보고 주께로 돌아오는 영혼 구원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는 불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난 저 사람처럼 예수 믿는 다면 예수 믿을 마음이 없다” 그런 것이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세상 중에서 “저 사람이 예수 믿고 새 삶을 살아가는 행복한 모습을 보니 나도 예수 믿고 싶다.”는 감동이 전해지도록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성도다운 삶이란 성경이 하라하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고 금하는 것을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미국의 한인 교회 들 가운데 보면, 한인들 간에 교회를 중심으로 계를 하다가 계주가 자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계돈을 사용하다가 그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지자 해결하지 못하고,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교회에도 상처를 남기고 떠나가 버리는 경우를 본다. 그러므로 왜 교회가 이런 것 저런 것을 금하는 지를 잘 깨달아 알아서 음성적인 지하 활동을 하는 성도들이 없어야만 할 것이다.

카이로와 필리핀 대사를 거치고 초대 이스라엘 대사를 지낸 박동순 장로는 성경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는 책을 통해서 신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깨달아 알고 실천하며 살아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특히 로마서 12장 9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힘쓴다고 하였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예수를 믿고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된 증거는 세상에 빛으로 향기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막 살면 안 된다. 모범이 되고 덕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야만 한다. 이는 가정에서이든 세상 그 어디에서든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
이 세상에는 살았다고 하나 죽은 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성경적인 기준으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인생은 산자요 그렇지 못한 자는 죽은 자이다. 가령 인도와 같은 나라에 길거리에 누워 있는 소를 신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힌두교인의 그런 모습은 기독교 신앙의 기준으로 하면 죽은 자의 신앙이다. 인도에 아직 못 가보았지만 네팔에 가니까 그런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카투만두 공항 가까이의 쓰레기장을 뒤지는 소를 보았다. 도시 안에서 풀을 뜯을 수가 없으니까 소가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 먹을거리를 찾고 있었다. 신이라고 모시는 소가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 동남아에 가면 뱀이나 코끼리나 원숭이나 도마뱀을 신으로 섬기는 부족들이 많다. 그 어떤 피조물일지라도 자연이나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나 해와 달과 별들을 신으로 섬기는 그 모든 것이 우상숭배가 아닌가.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가 룻다를 거쳐서 욥바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선교 여정을 계속한 것이다. 여기 룻다나 욥바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팔레스틴 지역에 하변가에 형성된 도시들이다.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50km정도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지금은 텔 아비브 외곽에 ‘얍바’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당시의 ‘욥바’이다. 베드로는 그 지역까지 선교 여정을 계속하였다. 순회복음 전도 사역을 계속한 것이다. 이번 여름에 7월 말부터 9월 말까지 매달 월말에 공주지방, 서산지방, 강원도 태백지방의 수십 개 교회 연합인 지방 연합집회를 인도한다. 청주 지방에서도 지방 집회 부탁이 있었지만 일정이 겹쳐서 더 이상 섬길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에 베드로 사도는 룻다나 욥바 지역의 복음 전파와 부흥해 가는 소식을 듣고 순회 복음 전도 사역 중에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욥바 지역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었다. 그의 다른 이름은 ‘도르가’이다. 그는 착한 일을 많이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구제하기를 즐겨 하는 이였다.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는 일인가. 어제 잔치 날 참석한 친척 중에 사촌을 만났다. 그는 젊은 부부 의사이다. 아내는 상담심리학을 전공한 정신과 의사로 원주 기독병원에 근무한다. 남편은 충북 음성 쪽에 있는 카톨릭 요양 보호 시설인 꽃동네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주 오래 전에 꽃 동네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곳은 천주교의 젊은 오웅진신부가 천석군 집안의 후손이었지만 전쟁 후에 가세가 기울고 자신도 남을 동냥하며 살던 최귀동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시작한 행려자와 결핵환자와 노인성만성 질환자들과 알콜 중독자등을 모시고 섬기는 요양시설과 병원이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충북 음성군 금왕읍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북해도 탄광에서 박해와 고문으로 정신병자가 되었다. 일본은 그의 잔등에 주소와 이름표를 달아 한국으로 되돌려 보냈다. 돌아와 보니 집안은 이미 풍비박산이 났고 몸은 병들어 무극천 다리 밑에 거적을 치고 사는 걸인이 되었다. 그는 다리 밑에서 사는 결핵환자, 정신 병자 등의 거지 18명을 날마다 끼니마다 구걸하여 얻어다가 먹여 살렸다. 죽으면 무극산 자락에 장례하여 주었다. 그 후 40여 년 동안을 남는 밥만 얻어다가 자기보다 못한 걸인들을 보살피며 살았다. 1986년 2월 15일 '작은 예수'라는 칭호를 들으며 '한국가톨릭대상' 사랑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 집지어주라"는 말과 함께 부상으로 받은 상금 120만 원을 내놓아 12억 원이 들어가는 노인요양원을 건립하게 하였다. 1990년 1월 4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온 나라 매스컴이 보도하고, 수십만 꽃동네회원과 꽃동네가족·봉사자·수도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5일장을 치른 후 꽃동네 입구 양지바른 언덕에 모셨다. 꽃동네회원님의 조의금으로는 할아버지의 동상을 세웠다. 그를 만난 젊은 오웅진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꿈과 결심을 가지고 천주교 사제가 되었다. (1976. 5. 3)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 있는 무극천주교회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해질 무렵, 성당 앞을 지나가는 걸인 최귀동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뒤를 따라가게 된 신부님은 성당 뒤 용담산 기슭에 있는 움막 속에서 동냥도 못 나가고 사는 걸인들에게 자신이 얻어온 밥을 먹여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1976. 9. 12) 오 신부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하며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튿날 주머니돈 1300원을 몽땅 털어 시멘트를 구입한 신부는 무극성당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시멘트 블록을 찍기 시작, 마침내 용담산 기슭에 방 다섯 칸 부엌 다섯 칸짜리 시멘트 블록집(사랑의집)을 짓고 무극천 다리 밑에 살던 걸인 18명을 맞아들였다. (1976. 11. 15) 꽃동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꽃동네를 찾아오는 걸인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꽃동네를 돕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일생동안 사랑과 봉사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젊은이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분들을 맞이할 수 있는 시설이 한동 한동 늘어났고, 한 달에 1000원 이상 회비를 내는 꽃동네회가 생겨났으며, 천주교 수도공동체인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와 자매회가 창설되었다.

예수 영접하고 예수 믿으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 실제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 뿐만 아니라 죽은 자처럼 희망이 없이 살아가던 자들에게 사명이 살아나고 능력이 살아나고 생명력이 불붙여 지곳 활활 살아난다.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처럼 말이다. 여호와의 바람이 불면 마른 뼈가 군대가 되는 것이다. 나 하나 겨우 벌어 먹고 살고 내 가족 챙기고 내 자식 키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웃을 섬기고 약한자와 가난한 자와 죄와 악과 죽음의 영에 붙들린 자들을 생명과 부활과 영생의 영으로 일으켜 세워서 다비다를 살리듯이 다시 살게 하고 영생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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