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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하신 일(수3:7-17)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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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10-30 23:16 조회 18,566 댓글 0
 
21년 전인 1990년 10월 3일에 동서독이 통일되었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하는 형식으로 통일이 이루어 진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동서로 나뉘었던 독일은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라고 이름 하던 긴긴 장벽에 동독과 서독을 분리하는 장벽으로 높게 가리어지고 군대와 경찰이 철통처럼 지키고 경계하기에 이르렀다. 독일 국민들에게 있어서 통일의 그 날은 감격스럽고 놀라운 날이었다. 물론 통일 후에 부담해야 하는 서독의 경제적인 부담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긴 하였지만 말이다. 헨리 블랙가비와 로이 에지먼의 공동저술인, <하나님의 길>이란 책에 보면 동서독 통일의 순간에 대한 감격과 그 배후에서 역사적인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개입에 대하여 묵상하는 내용으로 서문을 기록하고 있다. 저들은 ‘Lifeway'라는 국제적인 선교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컨설턴트요 책임자이다.

헨리 블랙가비 박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의 저자로 세계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침례교단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세계 교회를 향한 기도와 부흥과 영적 각성 운동에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말씀과 기도와 영성의 사람이다. 그는 책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
“군대가 철통같이 지키는 견고한 장벽을 민간인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허물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베를린 장벽은 그 옛날 여 리고 성벽처럼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분 만의 방법으로 두 벽을 모두 허무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렇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물론 그 속에는 인간의 수고와 기도와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한다. 동서고금의 역사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이 분명하게 들어나는 사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는 크게는 세계적이고 국가적인 일에서부터 개인과 가정의 역사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로 하면 구한말을 거치고 시작된 일제의 침략과 한일 합방 이후에 긴긴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 해방을 맞을 수 있었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으셨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분명하다. 물론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의 안과 밖에서 많은 수고와 희생적인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국한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5년 후에 일어난 동족간의 전쟁인 6. 25 전쟁이 3년 여 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과 유엔군이 피 흘리고 희생을 당한 후에 지금처럼 휴전 상태에서 남한이 이만큼이라도 발전하고 남북의 통일을 꿈꾸고 기도할 수 있게 된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마다 하신 분명한 일들이 역사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歷史)를 ‘History' 즉 'His+ Story'라고 하지 않는가.

그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다. 오늘 말씀 10절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라고 하지 않았는가. 상황과 배경은 이렇다. 모세가 죽고 그 대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지도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1:2)고 명령하셨다.

가나안 땅은 이미 모세가 살아 있을 때에 12명의 정탐꾼들에 의해서 정탐을 마친 땅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다. 그러나 지금 이 즈음에 다시 또 두 사람의 정탐꾼을 더 선발해서 가나안과 여리고 성을 정탐하고 돌아오도록 했다. 이것이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쳐들어가는 전쟁이니 완벽한 침략 준비를 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긴 내용이 두 정탐꾼의 여리고 성 정탐 일화이다. 하나님은 그 성에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람인 기생 라합을 통하여 섬세한 배려를 받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때와 장소와 사람을 사용하신다.

예레미야 33장에 보면 아직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다. 2절의 그 내용이 바로 이런 선포였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자,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여리고 성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두 사람의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후에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 첫째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어깨에 메어라.
그 둘째는, 있던 곳을 떠나서 이천 규빗 뒤에서 언약궤를 따르라.
그리하면 행할 길을 알게 될 것이고 이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지만 잘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 셋째는, 모든 백성들은 자신을 성결케 하라.
하나님께서 내일 우리 가운데서 기이한 일을 행하실 것이다.

이제 그 날이 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어께에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서 출발해서 요단강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본문은 그 이후에 벌어진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자, 그러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신가.

크게도 하시고 작게도 하시는 일.
이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7절 말씀에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라고 하셨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해 주신 말씀이시다. 그렇다. 하나님은 한 개인을 크게도 하시고 작게도 하신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이다. 물론 각 분야마다 지식을 연마하고 재능을 키우고 실력을 준비해야 그  분야에 존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을 크게도 하시고 작게도 하시는 능력은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길흉화복과 흥망성쇠와 그 가는 길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섭리자요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준비하고 수고하고 노력하고 애쓰고 힘써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봄에 씨앗을 심고 가꾸려 하여도 하늘에서 비와 해를 골고루 내려 주셔야 하고 적당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입혀 주셔야 하는 것이다.

전도서 11장 6절에 보면,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다. 그렇다. 이것이 진리다.

마치도 토기장이의 손 안에서 토기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을 만드는 그 모든 계획과 결과가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다. 숙련된 손길로 만들지만 맘에 들지 않으면 우그러트려서 다시 만들거나 구워 낸 그릇이라도 깨트려 버리고 새롭게 만드는 권한이 오직 토기장이 자신에게만 있다. 단지 토기는 흙이요 토기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토기장이와 같은 분이시다.

경기도 여주에서 목회하는 동기 목사가 있다. 여주는 해마다 세계 도자기 박람회가 열리는 도시이다. 한번은 그 곳 여주에 방문 했다가 도자기 전시관을 둘러 본 적이 있다. 참으로 크기와 모양과 색상이 형형색색으로 서로 다 다른 너무나도 아름답고 신비한 색상들의 도자기를 만나 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도공 즉 토기장이의 손끝에 달려 있다. 제조 과정에 신비가 배어 있다. 우리나라의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의 역사로부터 세계인들에게 알려진 도자기 제조법의 신비가 전수 되어 내려오고 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지만 각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서로 다 다르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고 반응하느냐가 중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에녹 때에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갔으나 에녹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동행한 사람은 에녹 한 사람 뿐이었다. 노아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던 그 긴긴 백여 년의 세월 동안 노아의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아 아는 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없었다. 방주가 다 지어지고 그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은 노아의 내외간과 세 아들 내외인 여덟 식구뿐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말씀으로 부르실 때에  하나님을 따라, 말씀을 따라 나선 것은 대단한 모험이요 출발이었다. 4,000년이 지난 오늘 날 그 아브라함의 발걸음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없고 마음에 생각되는 것이 없어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따라 나서는 길은 때가 되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길인 것이다.

이삭은 이것을 알아 모리아 산에서 결박당하면 아버지 아브라함과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에서와 야곱의 차이가 무엇인가. 에서는 언제나 씩씩했고 언제나 용감했고 언제나 공격적이었고 저돌적이고 당당했다. 그러나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신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말씀 훈련이 되어 있질 못했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하고 작아 보이던 동생 야곱은 점점 큰 자가 되어 갔고 에서의 나중은 점점 별 볼일 없는 인생으로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하나님은 스스로 크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라도 하나님의 크심을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말라기 1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고 했다.


인생의 모든 범사를 크게도 하시고 작게도 하시는 권세가 하나님 안에 있다. 찬송 중에도 35장 1절에, “큰 영화로신 주 이곳에 오셔서 이 모인 자들로 주 백성 삼으사 그 중에 항상 계시고 그 중에 항상 계시고 큰 영광 나타내소서.”라고 찬송한다.
복음 성가 중에서도 이렇게 찬양하지 않는가.

“크신 주께 영광 돌리세 하나님의 성에서
그의 거룩한 산에서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상의 기쁨 저 북방에 있는 시온 산
큰 왕의 성일세 SING 할렐루야(x3) 큰 왕의 성일세”

그렇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을 크게도 하시고 작게도 하시며 역사 속에 큰일을 행하기도 하시고 인간의 편에서 커 보이는 일도 별 것 아닌 것으로 역사 속에 지워 버리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

요즘 자주 부르는 찬송 615장의 1절 가사의 시작도 “그 큰일을 행하신 주께 영광...”, 2절은 “그 큰일을 행하신 여호와께....”라고 하나님을 큰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찬양하지 않는가.

누가 창세기의 요셉을 그렇게 큰 인물 되게 하였는가. 누가 모세를 바로 임금 앞에서와 광야 사십 년 내내 그렇게 큰 사람이요 말씀의 사람으로 쓰셨는가. 누가 여호수아를 가나안 입성의 선봉에서 그렇게 존귀한 지도자 되게 하셨는가. 누가 다윗을 그와 같이 역사적인 큰 왕으로 삼으셨는가. 누가 솔로몬에게 그 많은 잠언과 전도서의 말과 지혜를 주었는가. 누가 한나의 태에 사무엘을 주었으며 누가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이삭 줍던 모압 여인 룻에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은총을 주었는가.

누가 나사렛의 동정녀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는가. 누가 어부 베드로를 사도가 되게 하였으며 누가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이방의 큰 사도 되게 하였는가. 누가 방탕하던 청년 어거스틴을 성자되게 하였으며 누가 마틴 루터를 통하여 1517년에 가톨릭에 항거하는 종교 개혁의 선봉에서 용감하게 하였는가.

창세기 23장 6절에 보면, 가나안의 원 주민인 헷 족속의 사람들이 그 곳에 가서 살던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을 향하여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라는 칭찬의 말을 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인가. 우리가 고향을 떠나고 부모 형제 일가친척을 떠나서 아브라함처럼 이 도시 혹은 저 도시 혹은 이 나라 혹은 저 나라에 가서 사는 생활 중에 그 곳의 그 누군가가 나를 향하여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이런 평가와 인정을 해 준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보람된 일인가.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런 은총과 복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드러내는 일.
일마다 때마다 뜻을 같이하고 함께 하여야 할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이 복이지만 그 모든 복의 배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복 중의 복이다. 사람은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많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증거가 점점 들어나야 한다. 7절에서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태양을 멈추시기도 하고 홍해와 요단을 갈라서게 하는 자연 현상을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크고 작은 일을 성취해 가신다.

창세기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인 요셉의 특징이 무엇인가.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요셉이었다. 창세기 37장에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간 후에 요셉의 전 생애에 후렴처럼 등장하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이 요셉이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39:2) 요셉이 바로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에 들어가서 종으로 일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은 요셉으로 인하여 그 주인의 집과 소유물과 밭의 농작물에까지 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고 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이란 이런 것들이다. 요셉은 주인 마님의 유혹을 피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 그 안에서도 요셉은 언제나 부지런하고 정직했다. 결국 요셉은 감옥 안에서까지도 간수장의 마음에 들어서 감옥에서 살림 살이를 맡아 주관하는 총무가 될 정도였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창39:21),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3)

지금 여호수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요셉과 모세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그런 은혜와 축복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시편 3편 6절의 다윗의 고백처럼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는 고백의 사람으로 살아갈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 땅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의 곁으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말씀이 이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렇다. 우리의 하나님은 집안에도 계시고 광야에도 계시는 분이시다. 낮에도 계시고 밤에도 함께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가리어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밝히고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평안할 때에도 함께 계시고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과 질병과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 가운데에도 함께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잘 될 때도 함께 하시고 잘 안될 때에는 더욱 섬세하신 은총으로 깨달음을 주시며 내 곁에 함께 하시는 분이 자상하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이다.

살아 계셔서 명령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일.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시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도 계셨고 영원 후에도 계실 창조주시오 섭리자시요 주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그 분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천지우주만물 창조 이전부터 계시던 원 창조 그 자체이시다. 아담이 먼저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다. 에덴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하나님이 계셨다. 세상이 지어지고 조성되기 이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고 했다. 그 이전에 이미 계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므로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창조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잘못될 인생은 한 사람도 없다 아담과 하와의 삶이 교훈하는 바가 무엇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은 계속하여 인생들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주님이시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모세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가. 그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와 규례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친히 받아 적은 말씀의 사람이었다. 사십일을 시내 산에 올라 금식하며 두 돌 판에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받아 적었다. 그러나 산 아래의 형 아론과 백성들은 모세와 달랐다.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춤추며 광란하며 그 송아지가 신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요 한계다. 아론과 같은 그런 피가 우리 안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랑하면 안 되다. 겸손하여야 한다. 본문 14절부터 17절의 요단강이 갈라지는 사건을 가만히 보라. 누가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여호수아인가 제사장들인가 백성들인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기도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준비하고 정성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의 모든 일들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신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말씀하시고 때가 되면 이루시는 것이다. 살아계신 주께서 일마다 때마다 간섭하셔서 온전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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