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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네게 장가들리라(호2:14-2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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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10-30 23:15 조회 20,357 댓글 0
 
오늘 말씀에 보면,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9, 20)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 이 말씀에 하나님과 인간의 오묘한 관계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교회나 나라나 민족보다 가정을 먼저 만드셨다. 아담과 그 곁에 돕는 배필을 통해서 에덴동산에 가정을 창조하셨다. 가정과 결혼의 바탕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한 처음의 사랑을 평생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평생을 서로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서로의 말과 행실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믿음직스럽게 행동하여야 한다. 믿음과 신뢰에 기초한 언행심사를 지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남편 호세아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유지해 나가야만 했다.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은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이었다. 늘 음란했고 늘 길거리로 나 다니며 자신의 몸을 함부로 굴리는 천한 여인으로 살아갔다. 그런 아내를 아내로 인정하며 길거리로 찾아 나서고 되찾아 가정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얼마 후면 또 뛰쳐나가고 다시 되 찾아오면 또 남편을 버리고 뛰쳐나가기를 반복하였다. 그런 우여 곡절 속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과 아들의 이름이 제 1장에 소개된다. 이스르엘과 로우하마와 로암미이다. 이스르엘은 이스라엘과 발음이 비숫하지만 그 뜻은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데,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뜻이다. 로루하마란 ‘긍휼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로암미란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이다. 참담한 시대 상황과 가정사를 소개하는 이름들이다.

이 같은 상태에서 어찌 가정이 유지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끊임없이 남편인 호세아에게 요구하시기를 그 부정하고 못된 아내 고멜의 음란하고 추한 삶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되찾아다가 집안에 들이고 함께 살아가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이 소설의 한 장면이 아니고 현실이라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남편이 그런 아내를 아내로 인정하고 가정을 유지하며 부부 관계를 지속하겠는가. 그러나 14장의 분량으로 되어 있는 호세아서의 예언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이 같은 내용은 호세아의 안타깝고 참담한 결혼 생활을 소개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하나님은 끝없이 바보 같은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참아주고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고 계신 것이다.

남 왕국 유다에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그 시대에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북 왕국의 여로보암 II 세 왕은 19대의 왕들 중에 13대 왕이다. 여로보암 왕은 BC 793-753년대의 41년간 북 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여로보암 왕은 전무후무한 번영을 이루었던 왕이었다. 나라가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무역이 빈번하고 백성들이 잘 살기 시작하자 신앙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 공식은 2,800년 전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이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언제나 타락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호세아라는 이름의 뜻은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호세아서의 내용은 철저히 복음서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豫表) 한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을만한 자격을 갖고 있는가. 우리 인간은 철저히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은총에 의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행위나 공로에 의하여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을 갖춘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했다. 모세처럼 율법을 받았어도 율법은 오직 죄를 깨달을 뿐이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고 했다.

이처럼 음란한 아내 고멜과 같이 죄와 악을 밥 먹듯이 하며 살아가던 인생들의 타락과 범죄의 현장에 영원한 남편으로 장가들기 위하여 우리 곁에 찾아오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완전히 부패하고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는 새로워 질 수 없는 불쌍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호세아와 같은 끝없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남편으로 다가 오시는 분의 우리 하나님이시란 말이다. 더럽고 추한 아내 고멜인데도 평생을 남편으로 장가들고 영원한 남편으로 장가들기를 원하시고 결단하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 남편으로 영원히 내 곁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더럽고 부정한 아내 고멜과 같은 자들이다. 그런 우리 각 사람의 곁에 찾아 오셔서 나의 신분과 여건과 자질과 능력과 사람됨을 묻지 아니하시고 나에게 남편으로 장가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이시다.

2장 3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아니하면 우리를 태어나던 순간처럼 뻘거벗기시겠다고 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타락한 아내 고멜처럼 세상으로 치달아 부정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을 항하여 “광야 같이 되게 하고 마른 땅과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라”고 경고하셨다.

남편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고멜과 같은 아내의 모습이 된 세상 백성들을 향하여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다. 본문 바로 앞 절인 호세아 2장 13절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시다. 이렇게 심각하게 경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본문에 이어진다.

그러므로 호세아서의 말씀은 단순히 못되고 타락하고 부정한 아내 고멜을 돌이키려는 남편 호세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마치도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갖고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나의 부정함과 상관없이 나에게 장가들어 평생을 나를 아내로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14절에서는 ‘위로’를, 15절에서는 ‘물질적인 풍요’를, 16절에서는 우리 인생들의 입에서 ‘하나님을 남편이라고 고백’하는 날이 다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고멜이 세상을 짝하여 돌아다니다가 남편 호세아의 곁에서 낳은 두 아들과 딸의 이름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부정한 아내 고멜의 생각과 입의 말에 가득 찬 것은 바알을 사랑하고 짝하는 이야기들뿐이었다. 남편인 하나님이 아내인 우리 인생들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7절을 함께 읽자.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그렇다. 하나님은 남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바알 신의 이름을 불러 대는 아내인 고멜과 같은 부정한 자의 그 입에서 바알이란 이름을 제거하기를 원하시고 다시는 바알이란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고 부르는 경우가 없게 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알이 무엇일까.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좋아하고, 더 친근히 하고, 더 애착을 갖고, 더 마음을 빼앗기고, 더 생각하고 더 가슴에 품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바알이다. 이는 정치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정치권력일 수 있다. 사업가들에게 있어서는 끝없이 추구하는 부의 축적일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는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그 예술혼 그 자체일 수 있다. 군사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지금 발전시켜 왔고 확보했고 보호막으로 느끼는 무기의 힘과 군대의 힘과 전력과 전략이 바알 일 수 있다. 남들보다 좋은 체력 조건이나 뛰어난 외모를 갖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 젊음이나 체력이나 미모나 아름다움 일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호세아서의 구석구석에서 폭력(호4:2, 6:9, 12:1)과 종교적인 위선(호6:)과 정치적인 반란(호7:3-7)과 힘과 자랑으로 여기는 외국과의 동맹(호7:11, 8:9)과 영적인 방종(호7:15)과 수 없는 사회적인 죄악(호12:7)과 자만(호13:6)으로 인한 죄악들을 들추어내고 고발하고 그 죄 값을 경고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 택함 받은 자들의 영원한 남편이신 하나님은 택함 받은 아내에게 영원히 장가들어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구속과 영원한 상급과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구원의 완성을 선물로 허락하실 그 날을 준비하고 계신 완전한 남편이시다.

하나님은 아내 될 각 사람을 위하여 그 날을 예비하시는 남편이시다. 16절의 ‘그날’, 18절의 ‘그 날' 바로 그 날인 것이다. 이는 1장 11절에서 말씀하는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오게 하실 이스르엘의 날이며 큰 날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르려 갔던 백성들이 포로의 땅에서 약속과 언약의 선조들의 땅으로 되돌아오게 될 축복의 날이며 회복의 날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는 B. C 722년에 앗수르에 멸망당했던 북 이스라엘과 B. C 537년에 바벨론에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B. C  537년에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조국 이스라엘로 되  돌아오는 그 날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 날에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블어서라도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했다. 회복과 잘 되는 은혜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 날이 되면 그 땅에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아내된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히 눕게 해 주실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는 천하 만민 중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이 기다려서 주님의 품에 온전히 돌아와 안기는 그 구원의 날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면 죄 사함 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날이며 영생이 시작되는 날이며 천국의 백성이 되는 날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신자들의 아버지이시며 창조주시며 섭리자 이시고 구속자이시며 인도자요 공급자요 보호자이이다. 뿐만 아니라 천하 만민들 가운데 하나님을 남편으로 깨닫고 아내 되어 살기를 원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남편이시다.

자! 그러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 각자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로 장가들기를 원하신다.
은총(恩寵)과 긍휼(矜恤)히 여김으로 장가들기를 원하신다.
진실(眞實)함으로 장가들기를 원하신다.
원어와 영어 성경에 보면 남편이 아내에게 약혼 선물로 주기 원하는 것이 이것들이라고 하였다.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과 진실’ 말이다. 여성들에게 물어 보자. 결혼을 준비하는 아내들에게 있어서 남편 될 예비 신랑이 신부에게 약혼 선물로 가장 먼저 마련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인가. 좋고 넓은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인가. 이미 결혼 전에 완벽하게 준비된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능력과 그 어떤 것들인가. 절대로 시부모를 모시고 살지 않거나 시부모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부담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약속하는 그 무엇인가. 그 반대로 물어 보자. 남편 될 입장에서 장차 아내가 어떤 신부로 어떤 아내로 평생 약혼 선물을 받아 들고 결혼 생활을 영위해 주기를 바라는가.

우리의 영의 남편이신 하나님께서 영의 아내인 신부될 조건이요 남편 될 자격으로 준비하고 곁에 다가 오기 원하는 장가드는 조건이 무엇인가.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로 장가들기를 원하신다.
2,800년 전에 호세아를 통하여 예언하시던 하나님의 기대는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기대와 섭리와 기준은 천년이 가고 또 천년이 다시 가도 변하지 않고 영원불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와 민족의 역사 앞에 가장 기대하시는 것은 바로 공의와 정의이다. 미가서 6장 8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셨다. 시편 37편 28절에는,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라고 했다.

남편으로 장가들기 원하는 하나님이 아내가 될 우리들에게 약혼 선물로 건네주기 원하시는 첫째가 공의와 정의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공의’란 하나님의 속성이신 하나님 편에서의 주관적인 의를 말한다. 나중의 정의란 ‘재판이나 판단의 기준이 되는 행동 기준으로서의 의’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 같은 공의와 정의의 기준 아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의롭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체데크’와 ‘미슈파트’ 즉, 영어 표현으로는 ‘righteousness and justice’이다.

전문분야의 책이면서 지난 해 우리나라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책이 있다. 27살에 하버드대학교의 교수가 된 마이클 센델(Michael J. Sandel, 1953-)박사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라는 책이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동일한 질문 앞에 노출되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부요와 가난, 자유와 억압, 보수와 진보, 권리와 의무, 거짓과 진실 등의 결코 쉽지 않은 주제들을 수많은 일상의 예화들을 곁들여 풀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본체이시다. 하나님은 그림자가 없으신 분이시다. 밝고 맑은 태양에도 흑점이 있지만 하나님은 흠과 티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기억하고 암송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영원한 진리의 선언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사랑의 선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선언이신 것이다.
어떻게 죄와 흠과 티가 없으신 하나님이 이 땅의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실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을 깨달아 알고 그 진리를 믿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며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선언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남녀노유 누구나를 공평하게 사랑하신다. 세계 천하 만민 모두를 차별 없이 한결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그분이 우리 각 사람에게 다가 오셔서 공의와 정의로 장가들기를 원하시는 영원한 남편이시다. 부정하고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음란한 아내인 고멜과 같은 인생들의 곁에 찾아 오셔서 공의와 정의로 장가들어 살아가시면서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며 사실만한 아내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 우리의 영의 남편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며 은혜인가.

은총(恩寵)과 긍휼(矜恤)히 여김으로 장가들기를 원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편에서 인간을 대하시는 전적으로 진실하신 사랑의 표현이다. ‘헤세드’ 즉 ‘은총’(恩寵)이란 아무런 공로나 가치가 없는 죄악 투성이인 인간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사랑하시는 성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일컫는 것이다. 성경은 은총을 은혜와 인자와 자비와 선대와 긍휼이란 말들로 골고루 사용한다. 인간을 향하신 하님의 은총은 선하고 기이하고 풍부하고 보배롭고 생명보다 귀한 것이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주변사람들을 통해서 늘상 덧 입고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혜택이며 도움이며 사랑이며 은혜이며 긍휼과 자비와 축복인 것이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아비멜렉 임금 앞에서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만 아내 사라를 그랄 왕인 아비멜렉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언약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고 고향을 떠나 살던 아브라함에게 생애 최대의 위기가 찾아 온 것이다. 그런 거짓되고 비겁하고 나약한 아브라함을 곤경에서 구해 낸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은총과 긍휼로 장가들어 살아가기 원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창세기 20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아비멜렉 왕에게 빼앗긴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셨다. 꿈에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상으로 다급해지신 것이다. 왜인가. 사라는 그냥 단순히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라 장차 언약의 아들 이삭을 낳을 열방의 어미가 될 자였기 때문이다.

또, 창세기 47장 29절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날아 가까운 것을 예견하고 아들 요셉을 불러서 유언의 말을 남긴다.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여기서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오늘 여기 하나님이 장가들기 원하시는 조건인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내로 살아가면서 세상을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은 자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 은총은 룻기의 주인공인 룻을 통해서 시어머니 나오미가 누리게 된 노년기의 은혜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가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나라나 민족이라도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떠나가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우리의 남편이신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삶의 공급자이시다.

호세아 2장 5절에 보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누리는 그 모든 삶의 혜택들이 바알에게서 공급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호세아 2장 5절의 말씀처럼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이 음행하며 살고 세상을 짝하며 살았어도 누리게 하는 바알의 선물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시다. 그래서 화가 나신 남편 하나님은 6절에서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라고 하셨다. 남편 하나님이 화가 많이 나셨다. 호세아 2장 8절에서 10절을 보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이제라도 정신을 치라고 회개하여 나 같은 형편없는 인생에게 은총과 긍휼로 장가들어 영원히 사랑하며 참아주며 용서해 주며 살기를 원하시는 남편 하나님께 진실한 모습을 보여야만 할 것이다. 왜인가.

진실(眞實)함으로 장가들기를 원하신다.
그렇다. 우리 남편 하나님은 나에게 진실함으로 장가들기를 원하시는 신랑이시다. 하나님은 진실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진실함으로 물과 피를 다 쏟아 골고다 언덕에서 구원을 완성하신 것이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성령 또한 진실하신 성령님이시다. 남편이신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실함으로 아내될 나의 곁으로 다가오시는 진실하신 신랑이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189장, “진실하신 주 성령”의 가사에도 보면 그런 고백이 나온다.

“진실하신 주 성령 성도 곁에 계시사
순례 길을 갈 때에 손을 잡아 주소서
모든 곤한 사람들 기쁜 소식 들리니
성령 말씀하기를 나를 따라 오너라”

우리 믿음의 사람인 성도들은 각 사람이 그 누가나 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안에서 그 분이 진실하심으로 나에게 장가들기 원하시는 그 진실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신부의 정결함과 거룩함이 얼마나 크나큰 축복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다. 20절의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는 말은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그런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정의를 비롯하여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남편으로 체험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율법과 법도와 율례와 계명과 규례를 따라 모세가 하나님을 아는 정도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그 분 안에 하나가 되고 일체(一體)가 되어 아는 단계를 말한다.

공의(公義)와 정의(正義)와 은총(恩寵)과 긍휼(矜恤)하심과 진실(眞實)함으로 나를 아내로 삼아 장가들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넉넉하신 사랑을 깨달아 알고,  영원한 평화와 안식과 위로와 화목과 화평과 풍성한 행복을 누리는 정결한 아내의 삶을 모두 다 살아 갈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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