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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넘치는 위로(고후1:3-11)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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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10-09 07:53 조회 20,352 댓글 0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수 없다. 물론 일정한 기간 동안 혼자서 지낸다든지 혹은 홀로 수도자의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누군가의 손길에 의하여 도움을 입고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것이 아닌가. 한 아기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지내고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내며 사회인이 되기까지에는 그 누군가의 손길에 의한 도움과 위로와 격려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거나 버림 을 받은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이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고 살아가는 유익 중의 가장 큰 하나는 바로 위로(慰勞)를 받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로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의 모든 인간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아이시다. 성령님의 역할이야말로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병들고 지치고 상처 받고 고난과 환란과 고통과 역경과 두려움과 외로움과 지나친 경쟁 사회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인생들을 위로하는 영이시다. 성경에서 사용된 위로라는 헬라어인 파라칼레오(parakaleo)의 파라는 ‘∼으로부터’ ‘∼곁에’라는 뜻이다. 또한 칼레오는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위로라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향하여 ‘∼의 곁으로 부르다’는 의미에서 ‘권면하다. 위로하다, 용기를 북돋워주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 수훈에도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했다. 위로란 위로 받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며 사는 것이 인생살이다.  성 프란시스의 ‘평화를 위한 기도’ 중에도,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있다.

신불신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시인 이해인 수녀의 시집 중에 <작은 위로>라는 책이 있다. 70여 편의 각기 다른 시들을 묶은 그 시집의 제목으로 되어 있는 ‘작은 위로’라는 시가 그 시집의 두 번째 시로 실려 있다.

잔디밭에 쓰러진 분홍색 상사화를 보며 혼자서 울었어요
쓰러진 꽃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하늘을 봅니다
비에 젖은 꽃들도 위로해주시고요 아름다운 죄가 많아 가엾은 사람들도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보고 싶은 하느님 오늘도 하루 종일 꼼짝을 못하겠으니
어서 저를 일으켜주십시오 지혜의 웃음으로 저를 적셔주십시오

2002년에 출간된 시집이다. 1945년생이니 올해 66살인 그는 요즘도 이해인 수녀는 암과 투병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아마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 중에 그 어느 한 사람도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나 매 순간 그 누군가를 통해서 위로를 받고 또 그 무엇인가를 통해서 위로를 받으며 산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반면에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하고, 또 그 누군가를 위로해 주기도 한다. 세상살이는 하도 복잡해서 서로 물고 뜯고 찢고 찢기는 싸움이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동물적이다. 자기에게 조금만 불이익이 되거나 손해가 되거나 상처가 되면 금방 상대방을 되 반격한다.

최근에 미국 텍사스 주에 있는 엘파소 동물원의 암 호랑이는 그 동안 함께 잘 지내단 수컷 호랑이가 동물원 우리에 새롭게 들어온 다른 암컷 호랑이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수컷 호랑이를 몹시 잔인하게 물어 찢어 죽여 버렸다.(2011. 10. 8. 해외뉴스) 우즈이라는 이름의 6살짜리 수컷 호랑이가 세리라는 이름의 3살짜리 호랑이와 사이 좋게 잘 지냈는데 그만 지난 6월부터 그 한 우리에 14살짜리 멜리라는 다른 암컷 호랑이가 끼어들면서 삼각관계가 되고 만 것이다. 사육사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 초  여름부터 한 우리에 두 마리의 암컷 호랑이를 맞은 수컷 호랑이는 제법 기분 좋게 지내는 눈치였지만 두 암컷 호랑이 사이에는 그 날 이후로 계속하여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등지에 500여 마리정도 남아 있어서 멸종 위기에 있는 ‘말라야’ 라는 종의 이 호랑이 세계를 관찰해온 동물원장인 스티브 마살은 “호랑이 세계에 치정 살해 사건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일로 상처를 받고 어떤 일로 힘들어하고 어떤 일로 고통을 받고 어떤 일로 아픔을 겪는가. 사람은 어떤 경우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워하고 답답해하는가. 사람이 마음에 큰 고통이나 슬픔이나 괴로움을 갖고 마음 아파하는 경우가 어떤 때인가. 당신은 요즘 어떠한가. 만약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다면 그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늘 기도하고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내려  놓지 못하고 기도하면서 지내도 쉽게 해결 되지 않고 주님 앞에 부르짖어 간구하고 기도해도 시원한 응답이 없는 답답하고 무거운 생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런 기도의 제목이야 말로 그 어느 가족에게든, 그 어떤 전문적인 상담가에 게든 털어 놓아도 시원하지도 않고 쉽게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평생의 십자가를 지고 살거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가정과 직장과 일터와 학교와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까지도 겉으로는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정작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엄청난 상실의 아픔과 고통과 번민과 회의와 불안정과 우울과 상처와 죄책감과 두려움 가운데서 답답한 날들을 아무 일도 없는 냥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웃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두 번째 편지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고난과 환란을 극복하며 이방 선교의 선봉에서 서서 평생을 달려갔던 선교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대할 때마다 실감하는 대로 사도 바울이 겪은 선교 현장에서의 어려움이란 이루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고 안타까울 정도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바울 사도는 낙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향한 간절한 소원을 갖고 살아갔다. 오늘 말씀이 시작되는 3절은, “찬송하리로다”라고 시작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은 그야말로 못 말리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환란과 고통과 시련과 역경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과 입에 찬송을 잃지 않고 살던 오뚝이 신앙가였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후서 11장 20절부터 30절까지에 가서 자신이 겪던 환란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편지하고 있다.

“20.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2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이 같은 사도 바울의 모습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넘치는 고난만큼 넘치는 위로도 주시는 아버지이시라는 믿음과 소망과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그냥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이러저러한 우여곡절과 고통과 시련과 아픔과 슬픔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나에게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쳤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자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비가 되는 ‘그리스도로 인한 위로’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구레네 시몬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맨 마지막 날 아침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도 언덕을 향하여 채찍질에 얻어터지고 옷 찢고 ‘침 뱉고 주먹으로 치며 손바닥으로 때리고’(마26:67)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 조롱하며 짐승처럼 취급하는 로마 병정들에게 끌려가시던 예수 그리스도! 총독의 병사들이 예수의 오른 손에 갈대를 들려주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마27:29)하며 다시 침을 뱉고 그 오른 손의 갈대를 다시 빼앗아서 예수의 머리를 내려 쳤다.(마27:30) 이미 거반 다 죽은 자처럼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제 십자가를 메고 갈수 없게 된 그 곤고한 자리에 붙들려 지목당하고 얼떨결에 끌려 나간 구레네 사람 시몬! 그 시몬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 날 아침에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렇게 대한다. 심지어는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그런 자조적인 비웃음을 웃는 이들이 뒤 섞여서 살아간다. 어떤 경우에는 꽤나 오래도록 함께 신앙생활을 함께 하던 이들 중에서도 내가 겪는 환란이나 고통이나 우리 가정이 겪는 어려움에 대하여 조롱하듯이 바라바고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침묵하고 계신지 말하라“고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다. 

 “얼마나 아프셨나” 라는 제목의 복음 성가가 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 조차 힘을 잃고 온누리에 비치잖네 아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흐르네”

“너의 죄 너희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모두 다 사하시려 십자가 달리신 주 얼굴과 손과 발에 흐르는 그 귀한 피 골고다 언덕 위에 죄로 붉게 적셨네 아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흐르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고 또 겪었던 주인공이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믿는 하나님, 사도 바울이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분이신가.

고난을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고난을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한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사도 바울과 선교의 뜻을 같이 하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 일행들의 고난은 그 반대로 그 누군가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때때로 누리는 하나님의 위로조차도 그 누군가가 또 다시 그런 위로를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우리들 곁에도 아들딸 혹은 손자손녀들로 인하여 가슴 아파하고 마음 아파 우는 가정들이 있다. 그 아픔이나 고통은 몇 마디의 말이나 몇 시간의 이야기로 쉽게 해결 될 수 없는 평생의 고통이요 아픔인 경우도 있다. 서로의 형편을 잘 알아서 중보하는 기도를 나누며 살아간다고 하여도 여전하다.

송명희 자매를 낳아 키운 그 어머니 아버지의 고통을 누가 알랴. 희아 자매가 양 손에 두 손가락씩 네 손가락만 가지고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자존감 있는 인물로 성장해 가기까지 그를 곁에서 지켜보고 돌보아야 했던 그의 어머니나 아버지의 마음을 어찌 그 누가 쉽게 헤아릴 수 있으랴. 한국에도 다녀간 호주의 닉 부이치치 같은 청년이 오늘에 이르기 까지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그런 아들을 낳아 놓고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와 오늘 날 청년기를 맞고 세계를 다니며 희망을 이야기하기까지 그 배후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울고 웃고 한숨짓고 탄식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날들을 딛고 일어서서 여기까지 왔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읽다가 보면 산상수훈이 끝나자마자 8장부터 쏟아져 나오는 수  많은 각종 병자들의 치유 사건과 그 기록을 대하게 된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신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 즉시 나병이 나아 깨끗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중풍병자인 백부장의 하인을 만나지도 못하신 상태에서 말씀으로 고쳐 주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시자 백부장은 “말씀만 하시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그 때에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하고 말씀하실 그 시간에 즉시 하인이 나았다. 이렇게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은 앞 못 보는 사람, 손 마른 사람, 걷지 못하여 평생 앉아서 지내던 사람, 못 듣던 사람, 말 못하던 사람, 귀신 들린 사람들을 수도 없이 고치시고 깨끗하게 해 주셨다.

오늘 날 우리 가운데 고난이 있다. 고난이 전혀 없는 인생이나 가정은 없다. 그 고난과 환란과 역경과 고통과 어려운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은 나의 겪는 이 모든 고난을 견뎌내게 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 아닌가.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을 견뎌 나가는 것이 믿음이 아니냔 말이다. 고난 극복의 의지와 믿음을 갖도록 기도하는 것도 일종의 치유를 경험해 나가는 것이다. 어렵다고 주저앉고 힘들다고 포기하고 괴롭다고 끝내 버리고 답답하다고 뛰쳐나가 버리면 어떻게 인생이 인생 되고 가정이 가정되고 교회가 교회 되겠는가.

과거에 미국의 어느 부인이 남편을 잃은 후에도 재산을 많이 갖고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세 딸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 구라파로 여행을 떠났다가 큰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자신도 세 딸을 모두 그 풍랑 가운데 잃고 자기만 겨우 살아남았다. 실의에 빠져 우울증과 상실감과 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지옥 생활과 같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지내던 그에게 이웃 부인이 복음을 전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웃 집 부인의 정성스러운 중보기도와 보살핌과 복음 전도가 그에게 위로가 되었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알 수 없고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놀라운 평화가 그의 마음속에 찾아 든 것이다. 그는 그 많은 재산을 정리하여 가지고 이스라엘로 갔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지에 ‘아메리칸 캐론’이란 고아원과 탁아소를 건립하였다. 그야 말로 오늘 본문 4절의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는 말씀대로 살아간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의지가 되는 것을 찾아보려고 나섰다가 오히려 인생을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고 가는 불행한 주인공들이 의외로 많다. 사회적으로 하면 존경 받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도 술과 마약과 놀음과 도박에 빠져서 불행을 부르는 이들의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지난주에도 발표된 카지노와 놀음 현장에 여러 해 동안 몰래 드나들었다는 의사와 고위직 공무원과 경찰과 대학의 교수들의 사건이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들은 무언가 의지할 곳을 찾고 쾌락을 찾고 향락을 찾고 만족을  찾아 나서지만 결국 그 나중은 피 눈물 나는  후회와 아쉬움 가운데 빠져 버리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인생이 인생답게 살려면 창조자를 만나고 창조자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오늘 고린도 후서 1장에서만 보아도 하나님 아버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3절), 자비의 하나님(3절), 모든 위로의 하나님(3절),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9절), 거룩한 하나님(12절), 진실하신 하나님(12절), 은혜의 하나님(12절), 미쁘신 하나님(18절),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20절), 성도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하나님(21절)”이시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는 믿음처럼 존귀한 믿음이 없다. 사도 바울은 살 소망이 더 이상 없어지고 힘에 겨운 고난을 겪으면서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 가운데서 살아갔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제일 못 마땅하게 여기신다. 왜 인간이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가. 9절에 보면,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건져 내시리라는 소망.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환란과 풍파와 시험과 역경과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건져 내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비록 죽음이 우리 앞을 가로 막을지라도 주를 위해서 살아가다가 죽으면 순교자가 되는 것이니 복되다는 믿음에서 변함도 없고 흔들림도 없어야만 한다. 요한 계시록 15장 12절과 13절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했다.

75세에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은 25년 후인 100세에 언약의 아들 이삭을 선물로 낳는 위로를 받았다. 아들 이삭도 40에 장가들어 60살에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낳으면서 인생의 새로운 위로를 체험하기 시작하였다. 야곱이 낳은 12아들들 중에서 10명의 형들에게 미움 받고 벌거벗겨진 채 팔리어 갔던 요셉은 17년 후에 노예의 현장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였다. 야곱은 늘그막에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의 총리로 출세한 모습을 만나서 고센 땅에 엄청난 위로의 나중 17년을 꿈처럼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갔다. 광야에서 늙어 가던 80세의 모세를 떨기 나무의 불이 붙는 환상 가운데 불러 내셔서 나중의 그의 생애 40년을 쓰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룻기의 불쌍한 시어머니 나오미와 불행한 젊은 과부 룻은 나중에 베들레헴의 대 지주 보아스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큰 위로를 받게 되면서 운명이 새롭게 바뀌는 주인공이 되지 않았는가. 브닌나로 인하여 언제나 마음이 격동하고 불 붙는것 같던 비운의 여인 한나는 그 남편 엘가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나중에 주신 아들 사무엘을 낳아 하나님 앞에 나실인으로 바쳐 키우면서 민족의 영적 지도자를 낳아 양육한 유명한 위로의 어머니가 되었다.

역대하 32장에 보면 앗수르의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다. 당시의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물근원을 다스리고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망대를 쌓고 외성을 쌓아 견고하게 하고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한 후에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7.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8.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대하32:7-8)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성령으로 혹은 사람과 자연의 현상을 통하여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격려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고난을 견디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려 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큰 사망에서 건져 주실 것이다. 10절의 묘한 표현을 보라. 하나님은 과거에도 큰 사망에서 건지셨고 지금도 건져 주시고 앞으로도 장래에도 우리를 큰 사망에서 건져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부터 5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런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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