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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존귀하게(빌1:20-24)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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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10-09 00:27 조회 20,565 댓글 0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삶과 죽음을 초연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신앙은 이처럼 선택과 그에 따르는 고난과 죽음의 위협까지라도 감수하여야만 한다.

매달 받아 보는 기독교 월간지인 크리스차니티 투데이는 세계인이 함께 보는 기독교 잡지이다. 이번 9월 호의 ‘간추린 세계’라는 지면에 소개된 뉴스 중에 보면 이란의 한 가정 교회 목사가 기독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있다. 올해 33살인 유세프 나다르카니 목사는 이미 하급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인데 대 법원이 이 선고를 부분적으로 철회한 상태에 있다고 한다. 대 법원은 그를 사형 언도한 하급 법원에 그에 관한 처리 건을 더 자세히 조사하라고 내려 보내고 말았다. 그 목사를 도왔던 이슬람교도인 변호사조차도 기독교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10년간 감옥형을 받게 되었다. 이번 사건이 확정되면 1990년 이후 이란에서 처음으로 배교 혐의로 사형이 치러지는 경우가 될 것이라고 한다.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맨 뒤에 가서는 사자의 입, 불의 세력, 칼날, 심한 고문,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는 시련, 돌로 치고 톱으로 켜고 칼로 죽이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걸쳐 입고 들판과 광야로 유리 방황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던 신앙 선배들을 언급한다.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다. 그 말씀을 읽다가 보면 히브리서 11장 38절에서 가서 괄호 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다.

지금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그러하다. 오늘의 이 짧은 본문 속에서도 그는 그와 같은 자신의 심경을 반복하여 표현하고 있다. 20절에 “살든지 죽든지”, 21절에 “사는 것..........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22절에서는 육신으로 살아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23절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 있다고 했다. 마치도 지난 주 중에 전기 단전 사고로 인해서 서울에서만도 수백 군데의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깜깜한 공간에 갇힌 채 공포에 떨었던 시민들의 심정처럼 말이다. 그런 경험이야 지나가는 경험일수 있지만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심각한 생의 고민에 빠져서 기도하고 있다.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훌쩍 주님 안에서 육신의 죽음을 체험하고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저 천국의 생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여기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사실 그러고 싶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얼마간 더 살아 있는 것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비록 감옥에 갇힌다든지 그 어떤 환란과 핍박과 고난을 계속하여 겪는다고 하여도 좋다고 여겼다. 24절에 나오는 말씀의 내용이다. 3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누구에게나 있는 같은 싸움 즉 영적 싸움의 과정이라고 여겼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의 체험과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경험한 이후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다. 오늘 말씀인 빌립보서 1장 1절의 시작부분에도 보면 그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했다. 그는 늘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할까하는 것이 사명이요 책임으로 여기며 살아갔다. 바울의 일상은 오직 복음을 위한 일이었다.(빌1:5) 그는 성도 가운데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그 모든 것들을 이루시리라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그렇다. 우리 주님은 시작하신 착한 일, 시작하신 좋은 일, 시작하신 선한 일을 때가 되면 주님이 계획하신 날에 반드시 이루시는 주님이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서 바라 볼 때에 태양이 수평선을 넘어 아름다운 가을 하늘을 물들이며 석양빛을 남기고 어둠 속에 사라져 가면 우리가 모른 지구 또 다른 저 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찬란하게 비추이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아침 햇빛으로 비추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시작과 끝이 모두 다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종말 신앙이 분명했다. 오늘 빌립보서 1장에 보면, 6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라고 했고, 10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간과 계절과 세월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살든지 죽든지 오직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와 믿음에 가득 차 있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간절한 기대와 소망(所望).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누구나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와 소망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기대와 소망 중에서 특별히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최근에 어떤 기대와 소망을 간절하게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가. 바울의 소원은 오직 한가지였다. 18절에 보면, 겉 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했다. 12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일조차도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는 쪽으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거스르는 것 같은 일까지라도 우리 마음에 복음 전파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갖고만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간섭하시고 섭리하실 것이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경험은 오히려 그의 주변에 있는 선교 동역자 들에게는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다.(빌1:14) 바울은 모든 환경, 모든 여건, 모든 상황, 모든 경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파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12절에, “복음 전파”, 14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파”, 15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 16절에서는 “복음을 변증”, 17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전파”, 18절에서는 “모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의 우선순위와 가치를 강조하고 계속하여 구구절절이 또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성도는 이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라는 복음 성가가 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 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사도요, 위대한 선교사요 우리 신앙의 모범이요 대 선배인 사도 바울의 당시 신앙이 바로 이러하였다.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 생각뿐이었다.(빌1:3) 복음 전파를 향한 바울의 기도와 간구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언제나 기쁨에 가득 찬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빌1:4,18) 왜인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지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녀 교육, 직장 안정, 사업 번영, 취업, 결혼, 출산, 노후 준비, 질병 치료 등등 수많은 기도 제목과 기대와 소망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누구의 가슴에나 다 불붙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매사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성도가 성도답게 살지 못하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조롱을 당한다. 성도가 성도다운 말을 하고 성도다운 행동을 하며 살지 못하면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주님께 욕을 돌리고 만다. 나 한 사람을 바라 다 보는 세상의 눈은 천개 만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조심하고 삼가고 아무 일에든지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내가 잘못하면 나 한 사람만 손가락질 당하고 나 한 사람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다. 교회 전체와 이 땅의 그리스도인 전체가 욕을 먹는 것이다. 나아가 홍수 후에 포도 농사하고 포도주에 취해서 잠이 들었던 사건이 노아 개인의 추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두고두고 성경은 노아의 그 사건과 그 실수를 이야기 하고 또 이야기 하지 않는가.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 산 중으로 피신한 롯의 두 딸들이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하고 아버지의 씨를 받아 대를 이은 모압과 암몬의 사건이 어찌 그 옛날 사건으로 끝나고 마는가. 아니다.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나면 역사에 두고두고 이야기 되고 또 이야기 되어 끊일 날이 없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다 지쳐서 아내 사라의 요구를 받아 들여서 낳은 하갈을 통한 아들 이스마엘에 관한 일화가 어찌 아브라함 때의 일로 끊나는가. 아니지 않는가. 역사란 그런 것이다. 잘한 것은 잘 한대로 잘 못한 것은 잘 못 한대로, 자랑스러운 것은 자랑스러운 대로 부끄러운 사건은 부끄러운 사건대로 역사 속에 기록되고 전해오고 또 이야기되고 또 다시 거론 되는 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에서가 배고픈 것 못 참고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 얻어먹고 장자권 내어 준 이야기가 어느 때의 이야기인가. 그런데 성경과 역사는 에서의 그와 같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일, 아간이 아이성 전투에서 시날 산의 외투와 금 덩어리 은 덩어리 감추어서 불행해진 사건, 사사 삼손의 이방 여인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사명을 잃어 버렸던 사건, 다윗이 부하 장수인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고 부하를 교묘하게 전쟁의 일선에서 죽인 일화를 보라.

예수의 자 중에 가롯 유대가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아 버리고 목매달아 죽어 버린 사건, 베드로가 큰 소리 치던 날, 장담하던 날 다 잊어버리고 붙들려 심문 받으시러 끌려 다니시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린 사건을 성경은 빼어 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부끄러운 일과 자랑스러운 일을 한자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하는 것이 성경이요 역사다. 그러므로 우리의 날마다의 기도는 “주님! 우리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리고 또 반복하여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사람이 언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에 부끄러워진다. 본질에서 떠나고 사명에서 벗어나게 말하고 행동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욥기에 보면 욥의 친구 빌닷을 통하여 욥을 위로 하신 하나님의 말씀 중에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로다”(욥8:22)라고 했다. 다윗은 시편 25편 2절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라고 했다. 다윗의 또 다른 시편인 6편 10절에 보면,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라고 했다. 다윗은 계속하여 그런 기도 생활을 틈틈이 반복하였다. 시편 31편 1절에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17절에서는,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시편 119편 116절에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다.

예수는 마가복음 8장 38절에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경고하셨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파하며 살다가 주님이 나를 옳다 인정하시는 생을 다하기 까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법이다. 주님을 존귀하게 해 드리는 생을 살 줄 알아야 우리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존귀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언제나 온전히 담대(膽大)하게.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려면 어제나 오늘이나 한 결 같이  온전히 담대하고 충분히 용기 있는 행동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 성경에 “온전히 담대하여”라는 표현을 공동번역 성경에 보면,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NIV 영어 성경에서는 ‘sufficient courage’ 즉 ‘충분한 용기’라고 했다.  그렇다. 역사는 주저하고 망설이며 충분히 용기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를 주도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도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가한 다윗의 형들이 40일간이나 엘라 골짜기의 바위와 큰 나무 뒤에 숨어서 블레셋의 골리앗 장수와 나가 싸울 용기를 아무도 가지지 못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임금 사울조차도 용기 있게 행동하지 목하던 전쟁을 다스린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용기있는 소년 다윗이 아니었나. 향나님을 향한 다윗의 신앙 고백과 용기 넘치는 행동은 당시의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오늘 날도 하나님은 이런 한 사람을 찾고 계시다.

게리 하우겐(Gary A. Haugen)은 미국 워싱턴 D. C에 본부를 둔 인권 단체인 ‘국제정의선교회’(International Justice Mission)의 설립자이며 대표이다. 하버드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호주에 있는 애들레이드 대학교에서 방문 교수로 정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미국 법무부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1994년에 UN의 르완다 대량학살 수사팀을 지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 해 가을 변호사, 검찰, 경찰, 법의학 전문가들로 조직된 국제적인 팀을 이끌었다. 이 일을 계기로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불의와 권력 남용에 대항해 누군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를 주위에서 찾았다. 그러나 얼마 후 하나님이 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계심을 깨달았다. 그리고 1997년, 제3세계의 폭력과 성적 착취와 노예 제도 그리고 압제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IJM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모세였던 것처럼, 하우겐과 그의 동료들은 오늘날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찾아 가고 있다. 게리 하우겐은 그의 책, <정의를 위한 용기>(Just Courage)"하나님은 정의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계시며 다른 계획이란 없는 분이십니다.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우리입니다"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은 불의와의 싸움을 두려워한다. 그 세력이 너무나 거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불의는 정의와의 정면 대결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가 되면 결국 정의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게리 하우겐은 그의 책에서 이런 간증을 한다. “IJM은 외국에 나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나가는 것은 별로 두렵지 않았지만, 돌아왔을 때가 문제였죠. 서너 해쯤 해외에서 작은 기독교 단체를 위해 일하면, 돌아와서는 형편없는 사람들과 일하는 형편없는 직업에, 형편없는 집에 살면서 형편없는 옷을 입고 형편없는 차를 몰며 형편없는 커피를 마셔야 하겠지요. 하지만 끔찍한 환경에서 매춘을 강요받는 한 어린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 희생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창가에 갇혀 하루에도 대여섯 명씩 강제로 손님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의 일상적인 학대와 고통에 비교한다면, 제가 감수하는 피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으면 악은 결국 무너질 것이다. 모세의 시대에 모세를, 다윗의 시대에 다윗을 찾아 쓰신 하나님이 엘리야의 시대에 엘리야를 찾아서 그렇게 사용하셨다. 지금 로마의 감옥 안에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감옥 안에서 몸이 많이 약해져 있고 지쳐 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는 어떤 방도 무슨 방도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더욱 더 전파 될 수만 있다면 자신은 비록 옥중에 있지만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오늘 날 우리들의 신앙생활 현장에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구석구석에 세워지기를 열망한다.

J.F. 케네디의 <용기 있는 사람들>에는 "승자와 패자"라는 제목의 이런 묵상이 있다.

승자(勝者)는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패자(敗者)는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한다.
승자는 과정을 위하여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하여 산다.
승자는 순간마다 성취의 만족을 경험하고,
패자는 영원히 성취의 만족을 경험하지 못한다.
승자는 구름 위의 태양을 보고, 패자는 구름 속의 비를 본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서는 쾌감을 알고,
패자는 넘어지면 재수를 한탄한다.


케네디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어떠한 위험과 장애와 고난과 압력이 따르더라도 우리는 해야 만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본문에서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바울의 마음과 생각과 기도 가운데 가득한 것은 교회요 성도들이요 복음의 전파를 위한 것이었다. 24절이 그걸 말한다. 성도들을 위한 유익이 있다면 더 살아서 그런 복음 전파의 역할을 위해 좀 더 쓰임 받아야 하겠다는 유언적인 고백 말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향해서 이런 사명과 고백에 붙들려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만을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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