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천상병은 인생을 ‘소풍’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소풍 왔다가 본향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묘사한 바가 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나라의 노래 가사 중에는 인생을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망설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사실 인간이 한 생을 살아가는 것은 끝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가고 또 가는 것이다. 이런 모험심이 바탕이 되어서 중세의 오대양 육대주를 향한 대 탐험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세기 중반을 넘어서서는 우주를 향한 대 탐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보지 않는 땅과 가보지 않은 세계와 가보지 않은 시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사람은 나름대로 자신이 가고 파하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생의 목적일 수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학문, 권력, 명예, 출세, 재물, 인기, 사업의 성공을 향해서 새로운 세계로 가고 또 간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은 좀 다르다. 그는 유대인인 히브리인으로 태어났다. 또한 태어나면서 로마의 시민권자로 태어날 수 있었다. 공부도 많이 해서 당시의 최고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이란 인물 밑에서 수학한 당대의 또 하나의 석학이었다. 구약 성경의 율법 연구에도 능통한 율법학자였다. 그 율법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생활 속에 철저하게 실천하며 살던 율법 신봉자였다. 소위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평소의 자기 신앙과 신념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박멸하려 하던 주인공이었다. 그런 그가 다메섹의 변화를 체험한 후에 계속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가고 가는 복음 전파의 선봉에 서는 전도자의 생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 본문은 소위 제 3차전도 여정의 시작이다. 사도행전 13장의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고 구브로를 향해 떠나갔던 출발이 제 1차 선교 여정의 출발이었다면 벌써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마크 젠키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의 수석 역사학자이다. 그의 책 <탐험의 시대>는 지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현대인의 탐험이 얽힌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기차나 증기선이 발명되긴 했지만 여전히 다른 대륙에까지 가는 것은 멀고 먼 여행이요 그래서 여행이라기보다는 모험이요 탐험에 가깝던 시절이 있었다. 비행기가 발명되고 대륙과 대륙이 하루 생활권으로 가까워졌다고 해도 여전히 가보지 않은 땅과 밟아 보지 않은 낯 설은 문명의 나라를 찾아가는 것은 가슴이 뛰고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날도 여전히 인간은 높이로 하면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향하고 깊이로 하며 아직 들어 가 보지 못한 저 태평양과 대서양의 깊고 깊은 바다 속에 들어 가 보려는 탐험을 계속하고 있다. 땅 끝으로 하면 남극과 북극을 향한 탐험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이는 모든 분야의 학문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더 나은 학문과 의학과 과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각 분야의 금속 공학과 전자 분야의 점점 세분화되어 가는 미지의 학문 미개척 분야를 향해서 끊임없이 가고 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각종 현대 예술의 세계와 영화와 연극과 오페라와 뮤지컬의 분야 등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체육 분야도 마찬가지다. 올 여름에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육상 선수권대회 100미터 달리기의 영웅 우사인 볼트 같은 선수들이 참가한다고 한다. 그들의 신는 운동화는 현대 인체 공학을 연구한 최첨단 제품의 단 한 벌의 운동화를 제작하여 신고 달린다. 0. 01초의 기록 갱신을 위해서 뛰고 또 뛰는 것이다. 과거에 에디오피아의 아베베 같은 마라톤 선수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42,195미터를 2시간 15분 16.2초 만에 완주하고 금메달을 목에 거는 기염을 토한 적이 있다. 이는 전설 같은 옛 날 이야기이다. 175cm의 키에 61kg의 28살 난 청년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1932-1973)는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 '맨발의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었다. 4년 후인 1964년 도쿄 올림픽 6주 전에는 맹장 제거 수술을 받은 몸으로 출전해서 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때에는 운동화를 신고 뛰어서 3분을 앞당긴 2시간 12분 11.2초의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당시로서는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을 2연패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무도 그의 우승을 예상하지 못해서 자기 나라의 국가조차 준비하지 않는 바람에 에디오피아 국가 대신에 일본 국가를 대신 연주해 주었다는 일화도 전해 온다. 또 4년 후인 1968년에는 멕시코 올림픽 마라톤에서 달리던 중에 17킬로미터쯤 달리다가 다리뼈가 부러지는 바람이 포기 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해에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목뼈가 부러지고 척추를 크게 다친 채로 교통사고 10시간 만에 발견되었다. 그 자동차는 에디오피아의 황제 헤일레 세라시(Heile Serassie)가 하사품으로 선물해 준 폭스바겐 비틀 자동차였다. 그는 하반신 마비의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재활 치료를 받으며 장애인 올림픽에 나가서 양궁과 탁구와 사격과 노르웨이에서 열린 25km 눈썰매 크로스컨트리 경기에서 금메달을 타고 또 타는 신화적인 인물로 살아갔다. “나는 다만 달릴 뿐이다. 내게 달릴 수 있는 두 다리는 마비되었지만 두 팔이 있다.”는 말을 남기며 난관 극복의 신화적인 모델 인생을 살아갔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이처럼 계속하여 어디론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지난 시간인 과거를 거쳐서 지금이란 시간의 현재를 살지만 계속하여 스쳐 지나가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 미래라는 시간을 향하여 계속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마을과 집에서 떠나지 않고 평생을 사는 경우란 그리 흔치 않다. 인간은 어디론가 새로운 곳을 향하여 떠나가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관심과 기호와 취미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계속하여 변해 가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성경의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다. 그렇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 전도자는 제자(弟子)를 세워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세워 나갔다. 저들은 예수의 제자이며 또한 사도 바울의 제자들이었다. 예수님과 곁에도 열두 제자와 칠십 명의 제자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 같은 숨은 제자의 헌신이 계속되었다. 숫자로 헤아리는 열둘이나 칠십 명의 제자들 중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충실한 제자의 삶을 살아가며 예수님의 사역을 섬겨 나갔다. 사도 바울의 선교도 마찬가지다. 오늘 본문의 1절과 2절에 보면 “제자들을 불러 권하고, 제자들에게 권하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제자의 삶을 끝없이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가족 구성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복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가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부모도 부부도 형제자매도 자녀들도 다 마찬가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살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병든 가정과 위기를 겪는 가정과 금이 간 가정과 문제 속에 살아가는 가정과 가족을 다시 세우고 치유하는 힘은 오직 한 가지이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어야 한다.
복음 전도자는 항상 새로운 곳을 향하여 떠나가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고 만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복음의 혜택과 복음으로 인하여 받은 혜택의 자리에 안주하고 말면 타락이 찾아오고 만다.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 온 환란과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이 확산되어 갔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성취 과정인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의 정의처럼 도전하고 응전하는 반복이 인간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변한 인물이 되었다. 이전에 자랑스러워하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하여 새로운 길을 가고 또 가는 그런 복음 지향적인 인생으로 변화된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장면을 잘 보여주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우선 지리적으로 그러하다. 바울의 선교단 일행은 에베소 지역 전도 중에 큰 무리의 소요를 겪었다. 그 소요가 그친 후에 사도 바울은 삼 년여 동안이나 복음을 전파하며 머물렀던 곳이라 정이 많이 들었던 에베소를 떠나서 또 다시 새로운 곳으로 복음 전파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 1절에 보면 마게도냐로 갔다. 아시아를 떠나서 유럽으로 간 것이다. 그 지역의 지방으로 다녀가며 헬라로 갔다. 거기서 석 달 동안 있다가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했다. 그 지역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죽여 버리려고 했다는 말이다. 그 때에 마게도냐를 거쳐서 다시 아시아 지역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 곳에서 무교절을 지낸 후에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닷새 동안 걸려서 뱃길로 드로아에 도착해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곳에서 선교 집회를 열던 중에 그 집회에 참석했던 청년 유두고가 삼층 창가에 걸터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말고 졸다가 바닥에 떨어져서 죽는 사고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모두 다 놀라워하고 충격을 받았는데 사도 바울이 그 죽은 유두고의 몸에 엎드려서 몸을 맞대고 기도하였더니 그 청년이 다시 살아났다. 오늘 6절까지 보았지만 13절 이하에 보면 16절까지 사도 바울의 선교단 일행이 또 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고 또 가는 장면이 소개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가고 가니라’고 정한 것이다.
엊그제 미국의 차현회 목사님이 070 전화번호로 LA에서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생각나서 전화하셨노라고 하면서 나의 최근 목회 근황을 이것저것 물으셨다. 올해로 86세 되셨는데 아주 건강하게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시면서 선교에 대한 열정이 지금도 청년과 같으시다. 그는 1980년대 초에 한인교회 역사상 최초로 미국 시카고에서 초교파 세계 선교사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복음을 아는 사람, 복음을 체험한 사람, 그 가슴에 복음의 불이 붙어 있는 사람의 특징은 계속하여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가고 또 간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이는 지리적인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273년 전인 1738년 5월 24일에 회심을 경험한 존 웨슬리 목사가 평생을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말을 타고 88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까지 가고 가는 전도자의 삶을 산 것과 같다. 존 웨슬리 목사가 35살에 회심을 체험한 후에 장장 53년을 한 결 같이 복음 전파를 위해 나아가고 또 다시 나아갔다. 그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
(The World Is My Perish!)
라고 말할 정도로 열방을 품는 열정이 식지 않던 전도자였다.
“나는 한권의 책의 사람이고 싶다.”
(Let Me Be A Man Of One Book.)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긴 성경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요 선교의 사람이요 전도의 사람이었다. 8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 남긴 유언은 이러하다.
“모든 것에 있어서 최고의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우리 복음의 사람들이 나가가는 길은 이런 길이어야 한다. 이젠 더 이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고 복음을 위하여 가고 또 가는 그런 생을 살아가고자 하여야 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함께 가는 자들이 있어야 한다.
4절에 “함께 가는 자”라고 했다. 이어서 여러 동행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선교 역사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행20:4)
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에서는 빼어 놓을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그런 소중한 주인공이 되자. 등산가들이 히말리아의 그 높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셀파들의 연합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복음 안에서 나아가는 길에 이런 미담들이 넘쳐 나기를 소망한다. 성도된 우리는 기도로 함께 가고, 말씀으로 함께 가고, 헌신으로 함께 가는 것이다. 서로를 섬기고 돌보고 나누고 베푸는 모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함께 가는 것이다.
어제 속회 심방 갔다가 들었다. 중학교 교실에서 아침 공부 전에 성경 읽는 운동이 친구들에게 번져 가고 있다고 한다. 한 가정은 부모가 못 참석하게 된 속회에 초등학교 어린이가 동생들을 데리고 참석하였다. 헌금 시간이 되자 가방을 뒤져서 100원짜리 동전 세 개, 300원을 헌금하는데 어른들이 모두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함께 가는 것이다. 다 다음 주에 필리핀 선교지에 감면 선교사님과 선교지의 목회자들과 만나는 분들에게 이런 간증을 전하고 싶다. 이것이 선교요 이것이 전도요 이것이 사도 바울과 같은 복은 전파의 계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최근에 나 자신이 새롭게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디모데전서 4장 16절이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복음을 전파하는 이 선한 일을 계속하다 보면 주님께서 또 새로운 기적을 보게 하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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