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하시는 역사Ⅱ(왕하2:15-22) 2016. 5.22
엘리야의 생애와 엘리사의 생애에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성령’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대개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 주의 영”이란 표현으로 사용되던 말씀이 본문에서는 ‘성령’이란 표현으로 사용된 것을 주목하게 된다. 열왕기하 2장에서는 9절과 15절과 16절에 ‘성령’이란 표현이 나온다.
성령이란 “하나님의 영”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악령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사무엘상에 소개된 사울 왕에 대한 내용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의 영에 충만한 반면에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이려 하던 사울 왕은 악령에 사로 잡혀 있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지만 악령이란 사단의 영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령이 하시는 역사를 관찰하고 주목하게 되어 있다. 엘리야도 성령의 사람이요 엘리사도 성령의 사람이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임하였던 성령의 역사가 갑절이나 자신에게 임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였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런 내용들로 가득하다.
증거를 분명하게 보여 주신 성령의 역사.
엘리야의 곁에서 선지자의 제자로 활동하던 50명의 제자들은 불 수레와 불말들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갈라놓았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회오리바람 가운데 하늘로 들어 올리셨다. 엘리야는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
엘리사는 이 황홀한 장면을 보면서 소리 질렀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이 순간 이후로 엘리야는 이 땅 위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엘리사는 자기의 옷을 둘로 잡아 찢었다. 엘리야 선지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신비하고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된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는 것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당혹감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선지자 엘리야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엘리야가 마지막 입고 다니던 겉옷만이 그의 시야에 들어 왔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그 겉옷을 가지고 요단 강 물을 쳤을 때에 물이 이리 저리 갈라졌다. 엘리야 때와 똑 같은 기적이 엘리사를 통하여 다시 일어났다.
엘리사는 요단 강물을 치며 말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계시니이까.”
이는 엘리야를 통하여 역사하시던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을 통한 역사가 계속되기를 소원하는 엘리사의 간절한 기도이다.
엘리사는 육지처럼 이리 저러 물이 흩어지고 갈라진 요단 강 바닥을 건너서 여리고 맞은편을 향하였다. 그 맞은편에서 승천하는 엘리야와 그 가까운 현장에 있던 엘리사를 주목하던 선지자의 50명 제자들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 오는 엘리사를 보고 말했다.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The spirit of Elijah is resting on Elisha.)
이것이 무슨 말인가. 공동번역 성경에 보면,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 위에 내려왔다.”고 했다. 그렇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들은 성경의 역사와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 쓰임 받던 신앙 인물들의 그런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각 사람과 우리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 안에 계속하여 임하기를 기도하고 간절히 소원하여야 하겠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목사는 그런 가정환경에서 태어났고 자라났다. 요한 웨슬리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다 영국 교회의 목사 가정이었다. 친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모두 목사였다. 아버지도 목사였다. 큰 형도 목사였고 동생 찰스 웨슬리도 목사가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크게 받았지만 특히 그의 어머니 수산나 사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라났다. 요한 웨슬리의 19남매 중에서 살아남은 10남매인 3형제와 7자매는 모두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훈련 가운데 자라 난 것으로 유명하다.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은 매우 철저하고 엄격하게 키웠다. 그래서 감리교도는 “규칙쟁이”라는 뜻에서 “Methodist"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규칙을 준수하고 철저하고 엄격한 생활 습관이 몸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어머니의 신앙 교육과 신앙 훈련은 영국 교회사에 뛰어난 인물인 요한 웨슬리는 배출하는 열매를 거두었다. 이처럼 인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되는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 50명은 엘리야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선지자 엘리야를 따라 다니며 수종을 들던 엘리사에게 임한 성령을 목격하였다. 엘리야에게 역사하던 성령의 역사가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나는 기적의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요단 강물을 이리 저리 갈라지게 하시더니 엘리사를 통하여도 똑 같은 기적이 일어나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엘리야 시대에 계속하여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켜 보여 주신 하나님은 엘리사의 때에도 계속하여 새롭고 다양한 기적들을 보여 주셨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물론 막연하게 기적이나 바라는 마음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처럼 불신앙 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믿음으로 성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건전한 신앙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선지자 활동 기간에 엘리야를 통하여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다. 그 모든 것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하늘에서 비와 이슬이 그치게 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 삼년 동안 가루 독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기도하니 갈멜 산꼭대기의 바알 숭배자 450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제물인 송아지와 제단을 불태우셨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간절히 기도할 때에 삼년 육 개월 만에 하늘 문을 여시고 풍성한 비를 내리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하늘로 회오리바람 가운데 불러올리시기 전에 그의 겉옷을 말아 가지고 요단 강물을 쳤을 때에 강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게 하셨고 그 마른 땅 위를 건너가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각종 기적을 행하신 성령의 역사처럼 엘리사를 통해서도 똑 같은 기적을 보여 주셨다.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쳤을 때에 강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그 마른 땅 위를 건너서 맞은편에 있던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 50명에게 다가 갔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보여 주시던 기적을 엘리사를 통하여 똑 같이 다시 보여 주심으로 엘리야 선지자의 50명 제자들이 엘리사를 따를 수 있도록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그런 성령의 하시는 일을 보여 주시고 엘리사의 영적 권위를 세워 주셨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자 당황해 하던 백성들 앞에서 여호수아에게 모세와 동일한 능력을 부어 주셨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언약을 이행하시겠다고 거듭 말씀하신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여호수아 시대에 똑 같이 이루어 가셨다. 하나님은 언약하신 언약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룩하시는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이신 여호와의 영을 모세에게 부어 주셨고 동일하게 여호수아에게도 부어 주셨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 성령 받기를 사모하고 간절히 열망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골고루 부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불안해하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수1:5-6)
여호수아에게 이러 말씀으로 용기를 주시고 성령을 함께 하신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요단강을 홍해처럼 마른 땅 되게 하셔서 건너가게 하셨다. 여리고 성을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셔서 무너트리시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모세에게 성령으로 함께하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성령으로 함께 하셨다. 이처럼 엘리야의 시대에 성령으로 인하여 각양 기적을 보여 주시고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여 주신 하나님께서 대를 이어서 엘리사의 시대에 성령으로 역사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새롭게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기적의 내용을 엘리야의 제자 50명이 지켜보게 하셨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엘리사를 따르도록 엘리사의 영적 권위는 높여 주셨다. 엘리사가 엘리야 선지자처럼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쳐서 이리 저리 가르고 마른 땅 위를 걸어서 50명의 엘리야의 제자들 앞에 왔을 때에 저들은 한 결 같이 한 입으로 말하였다.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50명의 제자들이 한 결 같이 엘리사 앞에 가서 땅에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엘리사의 권위를 높게 세워 써 가시기 시작하는 증거였다. 그렇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시시 때때로 보여 주시는 성령의 역사와 각양 기적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542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T'IS SO SWEET TO TRUST IN JESUS)의 후렴에 보면,
“예수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이는 그런 찬송시를 썼던 작사자인 영국의 루이스 스테드 (L. M. R. Stead)가 결혼한 지 5년 되던 해에 1882년에 이 찬송시를 작시하였다. 그해 여름 루이자 스테디 여사는 남편 스테드와 4살 된 딸을 데리고 일광욕을 즐기기 위에 롱아일랜드 (Long Island)해변을 찾아갔다. 아름답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한 소년이 물에 빠져 허둥대며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하자 루이자의 남편 스테드는 앞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바다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그 소년이 당황하여 그녀의 남편의 목을 끌어안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남편과 그 소년은 거친 파도 속에 휩싸여 멀어져 갔고 시신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어이없게 남편을 잃고 비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루이자 스테드는 그날부터 여러 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지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이자스테드는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께 자신의 쓰라린 고통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인 1882년에 미국의 복음성가 작곡가인 커크 패트릭(W. J. Kirkpatrick)에게 이 찬송시의 가사가 전달되었고 그의 찬송집 “승리의 노래들”(The Songs of Triumph)에 실려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불려 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성령의 증거를 보여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불행과 슬픔과 질병과 사고와 사건과 시련과 아픔과 고통과 핍박 속에서도 어둠 속의 빛처럼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령의 역사이다.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선교사에 의해 개척된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튼의 대를 이어 제 6대 담임목사가 된 전덕기(1875-1914)목사는 39살의 짧은 생을 살았다. 전덕기 목사는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9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숯장사를 하던 숙부 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17살 때에 미감리회 선교사인 스크랜턴을 스스로 찾아가 그의 집에서 일하기를 원하였다. 이후 그의 삶이 변화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 21살 때에 서재필을 만나게 되면서 독립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독립 운동에도 앞장서기 시작하였고 독립협회의 핵심 간부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그 같은 해에 세례를 받고 스크랜턴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22살 때에 상동교회 속장이 되었다. 24살 때에는 상동교회 안에 설립된 ‘공옥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며 불우한 형편의 청소년들을 돌보고 가르쳤다. 26살이 되던 1901년에는 권사가 되었고 그 다음해인 1902년에는 전도사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목회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당시의 교역자 양성 과정인 "신학회"에 참석하여 신학훈련을 받은 후 1911년에 다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그 해 가을에 졸업하였다. 31살이 되던 1905년에는 집사목사로 안수 받고 스크랜턴의 뒤를 이어 상동교회의 담임목사로 8년간 사역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갔다. 상동교회가 위치한 남대문 일대는 소외된 민중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므로 전덕기 목사는 그들을 찾아가는 현장 목회를 하였다. 그는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만족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민중이 생활하는 곳에서 민중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했다.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는 민중이 그의 주된 목회 대상이었다. 항상 나막신, 쑥 가루, 관을 준비하고 있다가 버려진 시체를 염하고 장례를 치렀으므로 가난한 집에서는 초상이 나면 으레 그를 찾았다고 한다. 전덕기는 목사 안수를 받기 전 3년 동안 상동교회의 청년회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우리 청년회 회원들은 성령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깊히 든 잠을 속속히 깨어서 마귀 결박을 받지 말고 하나님 앞에 항상 거하야 평강한 복을 받기를 원하오며 또한 다른 나라 사람들 같이 자유 활동과 좋은 사업을 많이 행하여 보기를 원한다"며 성령에 충만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상동청년회에 민영환ㆍ이동녕ㆍ이동위ㆍ이상설ㆍ이승만ㆍ이시영ㆍ이준ㆍ이필주ㆍㆍ주시경 등 민족운동사에 기록된 수많은 인물들이 관여하면서 상동교회 청년회는 큰 부흥기를 맞았고 상동교회는 “민족운동의 요람”과 같은 곳이 되었다. 최석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이 4사람은 상동교회 출신으로 33인의 3.1 독립 선언서 서명자들 가운데 포함된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심히 큰 능력의 근본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예수의 죽음과 함께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각 사람의 몸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송한다. “엘리야의 하나님”이란 찬송의 가사는 이렇다.
갈멜산에서 쌓인 번제물을 불로써 태워 보인 여호와여
엘리야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갈멜산 재단 위에 불로써 나타나신 엘리야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
내가 지금 주 앞에 울부짖나이다 불로 응답 하소서 응답 하소서
주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 간곡한 기도에 응답하소서
엘리야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 많은 무리들이 모인 곳에 불로써 나타나신 여호와여
갈멜산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갈멜산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눈물로 울부짖는 엘리야의 기도에 불내려 응답하시니 여호와 하나님
주여 지금 이곳에 불을 내리소서 우리 몸과 마음을 불사르소서
주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 간곡한 기도에 응답하소서
엘리야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멘
올해도 봄, 여름, 가을, 겨울 한해가 다 가도록 그리고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평생토록 “엘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증거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간증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
하나님 중심의 성령의 역사.
하나님은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다. 그런데 엘리야의 제자 50명은 저들 곁에 있는 또 다른 용감한 사람 50명을 동원하여 엘리야의 시체를 찾아 나서게 하겠다고 요청하였다. 그 때에 엘리사는 단호하게 말렸다. “보내지 말라.” 그러나 저들은 엘리사에게 강청하였고 결국 엘리사도 “보내라”고 허락하였다. 그러나 용감한 자 50명이 여리고 주변의 이곳저곳을 사흘 동안 찾아 나섰지만 엘리야의 시체를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 왔다. 이런 경험으로 인하여 엘리야를 따르던 제자 50명을 비롯한 저들이 보내었던 용감한 50명은 모두가 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엘리사의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고백하게 하셨다. 그렇다. 인간은 이 땅에서 영원하지 않다. 오직 영원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뿐이시다. 인간에게 능력이 있고 인간 스스로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다. 베드로 사도가 그의 편지에서 강조한 것처럼 인간은 나그네이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1:14)고 하였다. 그렇다. 이 세상에 31년을 더 살면 1000년을 살 수 있었던 무드셀라도 이 땅에 없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사무엘, 다윗, 솔로몬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없다. 저들은 다 나그네였다. 세례 요한, 예수의 12제자,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바나바, 디모데, 아볼로 그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 오직 영원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엘리야의 시대에 엘리야를 통하여 역사하시던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권능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이제 엘리야는 더 이상 이 땅 위에 없다. 엘리야 곁에서 제자로 지내던 50명의 제자들은 엘리사 앞에 땅에 엎드려 무릎을 꿇었다. 엘리야에게 역사하시던 성령의 역사가 엘리사 위에 임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경배 받을 대상이 아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욥바에 선교 여정 중에 고넬료가 보낸 종들의 안내를 받고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러 갔다. 그 때에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며 베드로를 영접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일어서시오 나도 사람이요.”하고 말하며 일으켜 세웠고 서로 함께 말하며 베드로 사도가 오기를 기다리며 모여 있던 여러 사람들 곁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렇다. 사람이 사람을 숭배하고, 사람이 사람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평등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누구나 평등하다. 인간이 인간을 우상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역행하는 처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 반도의 북쪽에서는 죽은 인간의 몸이 썩지 않도록 해 놓고 그를 신격화 하는 3대에 걸친 인간 우상 공화국을 건설해 가고 있다. 1994년 7월8일, 82살에 사망한 김일성(1912-1994)은 땅에 묻히지 않았다. 아직도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 그의 시체가 보존돼 있다. 김일성의 시체는 레닌의 시신 영구 보존 작업을 수행한 러시아 ‘생물구조연구센터’에서 ‘엠바밍(embalming)’이라는 기술을 이용해 방부 처리했다. 이 연구기관에서는 시체를 발삼향의 액체가 담긴 수조에 넣고 나서 그 향액을 삼투압을 이용해서 피부로 삼투시켰다. 뇌와 안구, 내장 등은 빼내 젤 상태의 발삼액을 시신 내에 채워 넣은 다음 피부가 건조되도록 몇 시간 공기에 노출시켰다. 발삼향액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노출 부분을 미라처럼 가죽 포대로 감고 얼굴에 화장을 시키는 등 치장하는 방법으로 시체를 영구보존했다. 시체 영구보존 처리 과정이 끝난 다음에도 지속적 관리가 필요하다. 시체를 주 2회 관(棺)에서 꺼내 방부제를 얼굴과 손 등의 노출부위에 발라야 한다. 또 2-3년에 한 번 정도는 발삼향액 수조에 한 달 가량 시체를 담가야 한다. 이 같이 김일성의 시신을 영구보존하는 과정엔 10억5000만원이 들었다. 지속적 관리에도 연간 8억 5000만 원 정도가 든다. 북한은 김정일의 지시로 김일성이 생존했을 당시 사용한 집무실 ‘금수산 의사당’을 현재 시신이 보관된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조하느라 8500억 원을 쏟아 부었다. “금수산 태양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 곳에는 69살에 사망한 김정일(1941-2011)의 시체도 똑 같은 방법으로 보존하고 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 중심의 역사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다. 나이 100세된 아브라함과 나이 90세된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이 태어나도록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요셉이 스스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높여 주신 것이다. 모세가 스스로 홍해를 건넌 것 아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도록 그런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동안에 만나와 메추라기와 맑은 물을 모세가 공급하고 모세가 해결한 것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 불리 먹게 해 주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셔서 풍성하게 마시게 해 주신 것이다.
다윗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예루살렘 성전을 100개인들 못 지었겠나. 그러나 하나님이 막으시니 임금인 다윗이라고 성막에서 제사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여야 했다. 그 아름답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을 솔로몬이 지은 것 아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복을 주셔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는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신 것뿐이다.
사흘 밤낮을 찾아 나섰어도 엘리야의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그 동안 엘리야를 따르던 엘리야의 모든 제자들의 시선과 관심은 새롭게 지도자로 선택 받은 엘리사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왜일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해 가실 성령의 새 시대를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인간 중심의 역사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 우리가 성경에서 대하는대로 앗수르와 애굽과 바벨론과 메대와 바사와 헬라와 로마의 역사가 결코 역사 가운데 영원하지 않았다. 애굽의 바로 왕도 죽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도 33살 밖에는 못 살았다. 로마의 시저도 알려진 가이우스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BC 110-44)도 56살을 넘기지 못했다. 불노초와 불사초를 찾아 오게 했던 중국의 진시황(秦始皇,BC 259-210)도 50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몽골의 칭키스칸(1155-1227)은 태어난 년도조차 불분명하다. 그런 그도 분명한 것은 1227년 8월 18일에 눈을 감았다. 칭키스칸(Genghis Khan , 成吉思汗)이란 이름 뜻은 “전 세계의 군주”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의 권력과 대륙 침략 야욕도 영원하지 못했다. 중국 역사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진 당나라 현종의 후궁이었던 양귀비(楊貴妃,719-756)도 이 세상에 없다. 양귀비는 37살에 죽었다. 마릴린 먼로(1926-1962)는 양귀비보다 일 년 짧은 36살에 죽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 하면 끝이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영원한 것이란 없다. 권력도 부도 명예도 젊음도 아름다움도 건강도 그 어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법이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엘리야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엘리야를 통해서 역사하시던 성령이 엘리사를 통해 역사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시체조차도 이 세상에 남겨 두지 않으셨다.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중심이시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돌려 드려야 한다.
고치시는 성령의 역사.
열왕기 하 2장 19절 이하부터는 더 이상 엘리야에 대한 말씀이 소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회오리바람 가운데 하늘로 불러 올리셨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새로운 기적을 보여 주기 시작하셨다.
여리고는 유대의 산지로부터 저 지대로 흘러가는 강과 넓은 평야가 있다. 종려나무가 무성하고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의 열매가 풍부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여리고는 방향 나무를 비롯한 각종 향기로운 나무들이 무성하였다. 멀리에는 모압 산지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경치가 아름답고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물이 좋지 않았다. 본문은 여리고 지역의 물이 왜 좋지 않은지에 대하여는 설명해 주지 않고 있다. 19절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라는 말은 땅과 거민 모두를 말한다. 그러므로 물이 좋지 않으므로 땅의 소산도 제대로 익기 전에 그 열매가 떨어지기도 하고 사람과 짐승들도 질병으로 고생하거나 아기나 짐승의 새끼가 만삭되지 못하고 유산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말한다. 늘 물이 나빠서 토산이 익지 못하고 일찍 떨어져 버리는 식물과 동물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사람도 아기가 만삭되지 못하고 조산하거나 유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리고 성민들은 그 원인을 물이 나빠서라고 여겼다. 여리고 백성들의 이와 같은 하소연을 들은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 때 여리고 성읍 사람들은 서둘러 가서 소금을 가져 왔다. 소금을 가지고 물 근원을 찾아간 엘리사는 그 물 근원 가운데 소금을 던져 넣으며 선언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왕하2:21)
왜 새 그룻에 담아 오라 하였을까. 왜 소금을 가져 오라 하였을까. 이 모든 명령 가운데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일해 가시는 새로운 기적을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보게 된다. “새 그릇”이란 “새롭게 임할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게 하는 장면이다. ‘소금’이란 부패를 방지하고 맛나게 하며 생명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5:13)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엘리사의 시대를 새롭게 열어 가시면서 새 그릇에 담아 가지고 나아온 여리고 백성들의 소금을 가지고 엘리사를 통해서 여리고 성읍의 주민들이 사용하는 물 근원을 새롭게 고치셨다. 나쁜 물, 좋지 못하던 물을 좋은 물이 되어 흘러가게 하셨다. 22절에 보면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고 했다.
이번에 여리고에서 본문에 소개된 여리고의 물 근원을 방문해 보았다. 지금도 얼마나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맑은 물이 콸콸 샘솟아 오르는지 모른다. 1000미터 깊이의 지하에서 1분에 4.5톤의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그 물 근원의 맑고 좋은 샘물로 여리고의 토산이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과실나무의 열매가 좋아지고 동물들이 건강한 새끼를 낳고 여리고 성민들이 건강한 아기를 출산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고치시는 하나님이시다. 질병에서 건져내서 강건한 건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죽음에서 건져내서 생명을 얻게 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사망에서 영생을 얻고 누리게 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날마다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을 내어 쫓고 심지어는 죽은 자라도 살리시며 천국을 비유의 말씀으로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곳마다 마을과 회당과 성 안과 밖에서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구원의 역사가 넘쳐 났다. 가령 마가복음을 보라 마가는 마태나 누가와 다르게 제 1장부터 예수께서 각색 병자를 고치신 기적의 장면들을 기록하고 있다.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에 가셨던 예수께서 그 곳에서 만난 더러운 귀신들려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고쳐 주셨다. 예수는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귀신을 꾸짖으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시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경련을 일으키며 큰 소리를 지르고 나갔다. 그날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께서 교훈하시는 말씀과 그 가르치시는 권위가 서기관들과 너무나도 다른 것을 보고 놀랐다. 심지어 예수께서 귀신까지 꾸짖어 내어 쫓고 그 사람을 건강하게 회복 시켜 주시는 것을 보면서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막1:27) 이 일로 예수님의 소문은 온 갈릴리 사방에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며 누워 있는 집에 문병을 가셨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만나 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에 열병이 떠나가고 깨끗하게 나았다. 예수님을 인해서 건강을 회복한 베드로의 장모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예수님과 사위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접하였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어 가는데 사람들이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데리고 예수께 왔다. 예수께서는 그 집에서 각종 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셨다.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온 동네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에 다 모여 들었다. 예수는 날이 아직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셔서 한 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베드로와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예수를 찾아 나섰다. 예수는 이웃 마을과 이웃 회당을 찾아 가셔서 복음을 전하시며 귀신을 내어 쫓고 전도 하러 다니셨다. 예수님은 한센 병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안식일이지만 손 마른 자도 고치셨다.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는 중에 고물을 베고 잠이 들어 버리셨다. 그 때에 풍랑이 심해지고 큰 광풍이 불어서 배 안에까지 물이 넘쳐 들어왔다. 다급해진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 호수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시자 금방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다. 지금 내용들은 마가복음 1-4장의 내용을 대략 정리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고치시는 여호와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만나는 수많은 각색 병자들을 저들의 질병으로부터 깨끗하게 해 주셨다. 엘리사를 통해서 던져진 소금이 물의 근원을 고쳐 주신 것처럼 예수님은 생명수의 근원이시다.
예수께서는 명절 끝 날에 큰 소리로 외쳐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그렇다. 지금 내게 생명 주신 것 감사하고 오늘 지금 이 시간에 예배자로 살게 하신을 감사하며 나의 병을 고치시고, 내가 살아가는 곳의 물 근원을 고치셔서 토산을 좋게 하시는 치유의 주님,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 가운데 성령이 하시는 역사를 찬미하며 경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