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9-18) 2016. 5. 1어린이 주일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어린이는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미래이다. 어린이가 없는 가정을 상상하여 보라. 어린이가 없는 교회나 나라를 생각해 보라. 과거에는 과밀학급으로 교실이 부족하여 오전반, 오후 반 나누어 수업하던 곳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학교와 교실이 텅텅 비어 간다. 교회학교도 마찬가지현상이다. 어린이가 줄어들고 있다. 인구 감소의 원인 중에는 어른들이 장수하시는 반면에 아기가 태어나는 비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2015년 평균 1. 26명이다. 세계 평균 2. 51명의 절반 수준이다.
우리는 한 가정에 태어나는 한 아기의 장래를 미리 알 수 없다. 한 아기의 성장기에 잘 먹이든 못 먹이든, 잘 입히든 못 입히든 자녀의 장래를 향한 부모의 소원은 한결 같다.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원한다.
어제 서초구청 옆에 있는 외교 연구원 강당의 예식장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했다. 신부가 외무고시에 합격한 친구 목사의 딸이다. 1층 현관 한쪽 벽에는 외교관을 활동하다가 순직한 이들을 기념판 좌우에 보직과 순직 년도를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기념 판의 넓은 중앙에는 하얀 별을 40여개 달아 놓았다. 그 중에는 1983년에 지금의 미얀마인 당시의 버마 아웅산 폭파 사건에 순직한 이범석 외무부장관을 비롯한 여러 명의 명단과 당시 보직도 적어 놓은 것을 보았다. 당시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엘리야는 누구인가. 열왕기상 17장 1절에 보면 그는 디셉 사람으로서 길르앗에 살고 있었다. 성경은 엘리야에 대하여 그 이상의 더 자세한 배경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엘리야의 이름이 주는 상징이다.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너도 나도 바알 숭배에 빠져 있던 당시에 이 얼마나 도전이 되는 이름인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뉜 이후에 북 왕국은 초대 임금 여로보암(재위 22년, BC930-909)으로부터 대대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초대 임금 여로보암은 우상 숭배 장려 정책을 벌였다. 여로보암은 왕이 된지 22년 만에 죽었다. 그의 아들, 왕자 ‘나답’이 왕이 되었으나 그도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왕상15:26) 그런 그가 ‘바아사’에게 살해 되고 말았다. ‘나답’을 죽이고 왕이 된 ‘바아사’는 21년 동안이나 정권을 이어 갔다. 그러나 열왕기 상 15장 34절에 보면 성경은 임금 ‘바아사’도 악한 임금이었다고 했다.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바아사’왕이 죽은 후에 ‘엘라’가 왕이 되었으나 2년 만에 군사 반역을 일으킨 ‘시무리’ 장군에 의해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무리’ 장군은 반역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지 7일 만에 ‘오무리’ 장군에게 살해당하여 죽고 말았다. ‘오무리’ 장군은 군사 혁명으로 왕이 되어 12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는 사마리아 산을 사들여서 그 산 위에 사마리아 성읍을 건축하였다. 그 동안의 북 왕국의 어느 역대 왕들의 때 보다 강력한 북 왕국 이스라엘을 세워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치적일 뿐이었다. 하나님이 ‘오무리’왕을 어떻게 보셨을까. 열왕기 상 16장 25-26절을 보자.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리고 그 대를 이어서 왕이 된 자가 ‘아합’이다. 우리는 그 동안 여러 주에 걸쳐서 아합 왕 시대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과 범죄상을 보아왔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임금 아합이 앞장서서 바알을 숭배하며 우상 숭배에 빠져 지내던 시대 상황을 보았다. 아합의 우상 숭배는 그가 결혼과 뿌리가 깊다. 아합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였다. 이세벨은 철저하게 바알 숭배 신앙 가운데 자라난 시돈 왕의 딸이다.
아합 임금은 북 왕국의 7대 왕이다. 그런 그에 이르도록 북 왕국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한 결 같이 여호와 신앙에서 멀어져 가고 바알 숭배 즉 우상 숭배에 빠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시절에 북 왕국에서 태어나 자라난 인물이 엘리야이다. 엘리야의 그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라고 이미 설명했다. 엘리야의 부모가 엘리야를 낳아 키우면서 아들의 이름을 ‘엘리야’라고 지어 불었다는 것은 부모의 담대한 ‘여호와 신앙’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아기 엘리야가 장성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여호와의 말씀을 예언하고, 여호와의 권능에 붙잡혀 활동한 장면을 계속하여 대해 가고 있다.
인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 받는 것이다. 다른 동물과 달라서 인간을 교육을 통하여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소나 말이나 개나 고양이나 물개나 앵무새는 동물의 세계가 갖고 있는 본능이 다음 대에 이어져 간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부모에 의해서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서 그 성장 환경과 성장 배경이 한 사람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가령 부모를 일찍이 잃고 고아로 자랐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다. 한 아기가 태어나서 자라나기 까지 인간은 밥만 먹고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친부모이든 양부모이든 일가친척이든 혹은 어느 스승을 비롯한 수많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선한 영향이든, 악한 영향이든 영향을 받으면서 그 영향을 소화해 내고 이겨 나가며 자라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의 부모가 아예 이름부터 ‘엘리야’라고 지어 불렀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를 백번, 천 번, 만 번 반복하며 ‘여호와의 말씀’ 신앙 가운데 키워 냈단 말이다. 그리고 그 엘리야는 그런 이름을 지어 부르며 그와 같은 여호와 신앙으로 성장 해 주기를 바라던 그의 부모의 소원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시대적인 선지자가 되어 존귀하게 쓰임 받았다.
“공부해라, 공부해라”도 좋고 필요하지만 어려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 자녀로 키워 내는 가정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엘리야는 그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왕비 이세벨의 칼을 피하여 갈멜산에서 출발해서 먼 곳, 브엘세바 광야로 피신하였다. 하나님은 로뎀 나무 아래 누워 고단하게 잠이 들어 버린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깨우셨다. 구운 떡과 물을 마시도록 하셨다. 나중에 천사를 다시 보냈더니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그를 어루만져 깨우셨고 다시 떡과 물을 먹고 마시도록 하셨다. 엘리야는 심신이 몹시 지쳐 있었다. 그런 그는 천사가 공급해 주는 떡과 물을 먹고 미신 후에 새 힘을 얻었다. 8절에 “음식물의 힘에 의지하여”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인간은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영의 양식도 풍성히 공급 받아야 하지만 육체는 음식을 먹어야 산다. 그러므로 몸에 좋은 음식을 골고루 먹고 힘을 얻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도 골고루 공급 받아야 한다. 인간은 영혼육을 지난 인격체이다. 그러므로 영의 양식, 혼의 양식, 육의 양식을 균형 있게 계속하여 공급 받아야 건강한 인격, 건전한 영․ 혼․ 육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
엘리야의 상태는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쳐 있었다. 물론 그에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믿음이 있었지만 많이 지쳐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정의처럼 인간이 인간다워 지려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골고루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안타까움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거니시는 동산 에덴에 살던 저들 부부인데 어찌하여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타락하였는가. 뿐만 아니라 남편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한 아내 하와의 정황을 보고 어찌하여 아내의 청을 받아 들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아담마저 따 먹게 되었는가. 그 타락의 연속적인 상황을 보면 부부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몰래 끼어든 뱀의 유혹 즉 사탄의 궤계를 분별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장면, 장면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기 이전의 통일 왕국의 마지막 왕은 솔로몬(BC970-930)이었다. 솔로몬이 20살에 아버지 다윗 왕의 대를 이어 왕이 될 때의 장면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솔로몬이 ‘듣는 마음’ 즉 ‘지혜로운 마음’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던 장면을 보라.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던 장면은 어떤가.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죽은 아들과 살아남은 한 아들의 문제를 갖고 재판을 요청한 두 여인의 청을 듣고 명 재판을 하던 장면은 어떤가.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소원을 따라 7년의 긴 세월 동안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던 때의 모습을 보라. 열왕기 상 8장에 소개되어 있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의 내용은 어떤가. 예루살렘 성전 봉헌식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온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왕상8:66)
솔로몬은 해마다 세 번씩 여호와의 성전 제단 앞에서 번제와 감사제를 드렸다. 솔로몬의 지혜는 따를 자가 없었다. 나라는 부강했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모든 왕들보다 큰지라. 천하의 열 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다.”(대하9:22-23) 솔로몬은 은을 돌처럼 썼다. 솔로몬은 마시는 잔마다 모두 다 금이었다. 백향목을 뽕나무처럼 사용하였다. 솔로몬 곁의 군대는 방패도 금으로 만들었다. 애굽과 주변 나라의 왕들이 솔로몬을 위하여 “금, 은, 상아, 원숭이, 공작, 말”등을 끝없이 보내 왔다. 의복, 갑옷, 향품, 말과 노새가 넘쳐 났다.
그런데 그 대단하던 믿음의 사람 솔로몬이 타락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이방 여인들을 첩으로 맞아들이는데 혈안이 되었다. 열왕기 상 11장 3절에 보면, “왕은 후궁이 칠백명이요 첩이 삼백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그 다음절을 계속 읽어 보면, 솔로몬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궁들과 첩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켜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솔로몬의 마음과 믿음은 더 이상 아버지 다윗의 신앙과 달라지지 시작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다.”(왕상11:4) 솔로몬은 시돈 사람들이 믿는 아스다롯, 암몬 사람들이 믿는 밀곰, 모압 사람들이 믿는 그모스, 암몬 사람들이 믿는 또 다른 우상인 몰록을 믿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앞산에다가 그 우상들을 섬기는 산당도 지었다. 하나님은 중간에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우상 숭배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셨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였다.(왕상11:9-10)
나중에 솔로몬은 60살에 죽었다. 아들 르호보암이 남 왕국 유다의 왕이 되었다. 10지파가 나뉘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을 따로 세우고 애굽에서 올라온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 북 왕국 이스라엘이 초대 임금 여로보암 때부터 완전히 여호와를 떠나고 우상 숭배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 후에 왕들이 세워지고 죽임 당하고, 세워지고 죽임 당하는 우여곡절을 겪는 중에 6명의 임금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7대 임금으로 세워진 자가 아합이다.
엘리야는 그 아합 왕 때에 활동을 시작한 하나님의 선자지이다. 그 엘리야가 지금 브엘세바 광야를 거쳐서 40일 밤낮을 걷고 걸어서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 8절에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고 한 것을 보면 엘리야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의 산 호렙’에 가서 피신도 할 겸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머물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 분명하다. 엘리야가 그 곳, 호렙 산의 동굴에 들어가 머물면서 얼마를 지내는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엘리야를 부르시는 하나님.
호렙 산 동굴에 숨어 지내던 엘리야를 하나님이 부르셨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고 물으셨다. “엘리야야 너 여기서 무엇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 질문의 의도는 무엇인가. 지금 호렙 산 동굴은 엘리야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닌가. 엘리야가 브엘세바의 광야로 피신 한 일, 호렙 산의 동굴에 숨어 지내는 일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하셔서 새 힘을 얻게 하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대를 벗어나서 다시 40일 밤낮을 피하고 피하여 400km의 먼 거리에 있는 호렙 산에 있는 동굴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런 엘리야의 모습을 하나님은 마땅하게 여기지 않으신 것이다.
그 동안 엘리야는 많이 지치고 무기력과 우울과 낙담과 고독과 실의와 허탈감에 빠져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갈멜산에서 브엘세바로, 브엘세바 광야에서 호렙 산으로 피하고 또 피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브엘세바에도 찾아 가시고 호렙 산의 동굴 속에도 찾아 가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은 가뭄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갔다가 거기에서도 하나님 체험을 새롭게 하였다. 이삭은 그랄 왕 아비메렉을 피하여 ‘에섹’과 ‘싯나’와 ‘르호봇’과 ‘브엘세바’에 가서 생활 하던 때에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 기도를 받은 후에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향하던 ‘루스’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 광야의 이름을 ‘루스’라 하지 않고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하나님은 애굽의 감옥 안에 있던 요셉에게 찾아 가셔서 그를 바로 왕 앞으로 불러 내셨다. 하나님은 나이 30의 요셉을 더 이상 감옥에 갇혀서 인생을 끝낼 자가 아니라고 여기고 불러 내셨다. 평소의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은 주목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의 불붙는 듯한 환상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민족의 지도자로 부르셨다. 애굽의 왕궁을 떠나서 40년 동안 미디안의 광야에서 양을 치던 80살의 모세를 찾아 가서 불러내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오늘 날도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아무개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네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하고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쓰실 사람에게 찾아오시고 불러내시는 아버지이시다.
나라의 일을 하려면 국가고시에 합격해야 하기도 하지만 일정한 수준이 되면 나라의 부름을 받아야 나랏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백성들의 선택이든 혹은 최고 권력자의 지명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으셔서 불러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사사 시대에 삼손, 기드온, 드보라에게 찾아 가셔서 불러 내셔서 사용하셨다. 사사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은 평소에 하나님을 믿던 여선지자 드보라를 사사로 부르셨다. 당시에 드보라는 ‘랍비돗’이란 남편의 아내였다. 드보라는 가정주부였다. 그런 드보라에게 하나님은 납달리 자손과 스블론 자손 1만 명을 붙여 주셨다. 드보라는 바락을 동원하여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치게 하셨다. 그 후 드보라가 사사로 있는 동안 이스라엘 나라에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평온을 주셨다.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언제라도 찾아 오셔서 나를 부르시고 쓰실 만한 신앙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교훈하였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하나님이 찾으시고, 하나님의 쓰실 만한 인생이 되려면 어떠하여야 하나.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귀히 쓰임 받을만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거룩한 그릇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된 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불러 쓰시는 것이다. 이것이 부르심이다. 이것이 소명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공부해라 공부해라”만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각 분야의 인재로 자라나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하나님이 찾으시고 하나님이 쓰실만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가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장면을 보면 예수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셨다. 어부인 안드레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다. 갈릴리의 고기 잡던 현장, 빈 그물을 씻고 있던 현장에서 부르셨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를 부르셨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같은 동네인 벳세다 사람인 빌립을 부르셨다. 예수께서는 저들 열 두 제자들을 일일이 먼저 부르셔서, 기사와 표적을 보이시고, 훈련하시고, 교훈하시고, 성령을 부어 주셔서 제자와 사도로 삼아 쓰셨다.
어린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누구나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시고 나에게 찾아 와서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엘리야의 시대 진단.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그 당시는 영적으로 몹시 타락한 시대였다.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을 비롯하여 전국에 바알과 앗세라 우상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꾼 850명이 모일 정도의 타락한 시대였다. 가는 곳마다 바알을 숭배하였다.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3년 6개월 동안 하늘에서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 다시 비가 내린 것도 안타깝게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던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갈멜산을 중심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에 하나님은 3년 반 만에 증거의 비를 내리셨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 숭배자 450명을 그릿 시냇가에서 처단하게 하셨다.
그런 대단하게 쓰임 받던 엘리야인데 이세벨의 죽이겠다고 하자 엘리야가 브엘세바로, 호렙 산의 동굴로 도망하고 피신하였다. 엘리야는 호렙 산의 동굴에 찾아 오셔서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 앞에 대답하였다.
내 열심히 유별한 것을 아시지요.
모든 백성들이 바알을 우상으로 숭배하고 나만 홀로 남은 것 아시지요.
저들이 내 생명을 찾아 죽이려는 것도 아시지요.
그러면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말씀드린 중요한 내용 3가지가 본문에 있다. 10절과 14절에 보면 엘리야는 그와 같은 시대 상황을 두 차례나 반복해서 하나님께 보고 하고 있다.
주의 언약을 버렸다.
주의 제단을 헐어 버렸다.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
주의 언약을 버렸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며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에도 보면 호렙 산 동굴 속에 들어가 머물던 엘리야에게 임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가. ‘주의 언약’이란 ‘주의 말씀’이다.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즉 언약의 말씀을 소종하게 여기는 인생과 가정을 찾고 계시다. 왜 신앙생활, 교회 생활, 말씀 생활, 기도 생활, 찬송, 전도, 봉사, 헌신, 구제, 선교 중심 생활을 이토록 강조하는 것인가.
스포츠로 하면 야구, 골프, 축구, 수영, 피겨 스케이팅 이런 분야의 선수들이 어느 날 갑자가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은 언약 중심, 제단 중심, 주의 선지자 중심의 신앙생활을 원하신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중심,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의 신앙생활 울타리를 벗어나지 말 것을 기대 하신다.
왜 하나님은 창세기의 그 많은 분량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로 가득하게 하셨을까. 저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모세나 여호수아나 갈렙의 특징은 무엇인가. 기드온, 사무엘, 다윗의 특징은 무엇인가. 저들 모두가 다 주의 언약 중심, 주의 제단 중심, 주의 선지자 중심의 삶을 살지 않았나.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이스마엘은 무엇이 이삭과 다른가, 이삭의 장남 에서, 야곱의 장남 루우벤, 사사 삼손, 제사장 엘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주의 언약을 떠나면, 주의 언약을 버리면 불행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찬송하지 않나.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 하시니” 그렇다.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어린이와 청소년과 젊은이와 어른과 노년기를 살아야 한다. 평생토록 하나님의 언약 중심, 하나님의 제단인 교회 중심, 하나님의 선지자인 목회자 중심의 신앙생활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이스마엘도 엄마가 낳았고, 이삭도 엄마가 낳았다. 이스마엘의 아버지나 이삭의 아버지가 같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하여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고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하여 낳은 아들이 이삭이 아닌가. 이스마엘이나 이삭이나 둘 다 아브라함의 아들인데 왜 하나님은 이스마엘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나.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과정을 거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명확하게 선언한 말씀이 로마서 9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롬9:6-9)
“이왕 낳았으니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세상 공부 잘하게 해서 성공시키자 출세시키자” 이런 식의 자녀관, 이런 정도의 양육관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 중심, 하나님의 제단 중심, 하나님의 선지자 중심의 신앙 인물을 키워 내야 한다.
엘리야의 남은 사명.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런 자연 현상 가운데도 여호와는 계시지 않았다. 그 동안도 보아라. 갈멜 산 정상에 불이 내려 여호와의 제단을 태우고 도랑의 열두 통 물을 핥았다. 바알 숭배자 450명을 처단하였다. 3년 반 만에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단비를 내려 주셨다. 그 정도의 기적을 보았으면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의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점점 더 악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세벨이 나서서 엘리야 선지자를 죽여 없애겠다고 하지 않나.
맞다. 세상에 태풍이나 토네이도나 허리케인 같은 바다와 대륙을 뒤 흔드는 크고 강한 바람과 수 십 만 명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쓰나미나 지진이나 몇 달씩 도시와 산과 마을을 불태우는 엄청난 불을 보고도 인생들이 쉽게 회개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좀 더 새롭게 체험하길 원하였다. 그런데 호렙 산 주변의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며 지나갔다. 바람 후에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 후에는 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자연의 재난, 자연의 이상 현상일 뿐 그 가운데 여호와가 계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다. 엘리야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그리고 호렙 산의 동굴 어귀에 나가 섰다. 그 때에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다시 들렸다. 엘리야는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이전에 호렙 산에 처음 찾아 오셔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대답했던 그와 똑 같은 대답을 다시 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 생각은 엘리야의 생각 속에 가득 찬 당시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합 임금 시대의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 그랬다.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
그 때에 하나님은 엘리아에게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에 새롭게 세워질 왕에게 네가 기름을 붓게 될 것이라는 사명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의 대를 이어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 갈 새 인물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남은 사명을 대신하여 이어 하게 하실 것도 말씀해 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처럼 사명을 새롭게 해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저나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이다. 지난 날 나를 통하여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던 그 과거의 추억, 그 과거의 간증에만 붙잡혀 살아가면 안 된다. 다시 또 새롭게 나를 통하여 일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분부하시는 사명 앞에 주저하거나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명자는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는 믿음으로 사명을 다해야 한다. 모세는 광야생활 40년을 마감하고 요단 강 건너 여리고를 바라다보면서 느보 산에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모세의 시종이었던 여호수아를 통하여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고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서게 하셨다. 세월이 지난 후 어수선하던 사사 시대 말기에 하나님은 ‘사무엘’같은 훌륭하게 준비된 하나님의 선지자를 세우셔서 새 시대를 열어 가셨다.
가정의 달 첫 날을 주일로 맞고 어린이 주일로 예배드리고 있다.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이름의 ‘엘리야’와 같은 시대적인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 주의 제단 중심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주의 선지자 중심의 인물들을 키워내는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