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사람 엘리야(왕상 18:41-46) 2016. 4. 17
이번 성지 순례 노정은 모세 시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향하여 나아가던 광야 생활의 일부와 요단강을 건넌 이후의 가나안 정착 과정에 이르는 사사 시대, 사울 왕과 다윗 왕과 솔로몬 왕 그리고 분열 왕국 시대를 거친 예수 탄생과 생애의 흔적, 마지막 일주일과 고난,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의 현장까지를 일일이 대하는 강행군이었다. 성경의 그 현장마다 차 안에서 성경 읽고, 사전 지식을 재 정리하고 현장에 도착하여 둘러보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사진 찍고 또 새로운 목적지로 향하는 날마다의 일정은 15,000보에서 2만보를 일일이 걷으며 체험하는 그야말로 순례의 여정이었다. 날마다의 순례 여정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수많은 곳을 샅샅이 뒤지듯이 방문하였다. 참으로 유익하고 영적으로 풍성한 기회였다. 성경의 역사와 지리와 문화의 그 모든 사건 현장을 파노라마처럼 총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성도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를 앞장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함락하고 가나안 점령 시대를 열어가기 이전과 이후의 모습은 오늘날 요단강을 국경으로 하고 있는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현실과 똑 같다. 3500년 전인 모세 시대의 광야는 모압과 암몬 족속의 땅으로 대변되는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거반 차이가 없다. 남한 절반 면적인 삭막한 요르단에는 인구 800만 중에서 350만이 수도 암만에 모여 산다. 수도 암만을 벗어나면 마음이 우울해 질 정도로 삭막한 광야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야곱이 고향을 향하던 중에 통과한 얍복 강도 그 요르단에 있다. 그런 환경을 통과하여 가나안을 향하던 모세 시대의 200여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공급하신 만나와 메추라기의 공급이 아니었다면 모두 다 몰살당하고 말았을 환경이었다. 엘림과 같은 오아시스 지역에 촌락을 형성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 곳에도 우기가 있어서 비가 내린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물 줄기가 사라지고 만다. 소위 ‘와디’라고 말하는 그런 물줄기 말이다. 광야와 사막 지대의 일 년 강수량은 200mm뿐이다. 그나마 우기철에 집중하고 순식간에 사막에 물줄기를 형성하고 흐르다가 사라지도 만다. 요르단 지역에는 유전도 없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다. 그러하다 보니 주변 아랍 국가들이 기름으로 인해서 풍요한 것에 비하여 오늘 날도 가난하고 열악하게 살아간다. GDP 세계 92위 수준이다. 물론 그런 나라에도 잘 사는 귀족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수 천 년 양을 치며 사는 베두인의 생활 모습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 같다. 요단강을 건넌 이후의 이스라엘의 자연과 삶의 모습과 요르단의 열악한 생활 모습은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쓰신 모든 신앙의 선조들은 한 결 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에녹은 아들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고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 가신 인물이다. 에녹은 아마도 아들 무드셀라를 낳던 해인 65살 되던 해에 특별한 은혜 체험을 하였던 것 같다. 창세기 5장 21절에 소개된 “하나님과 동행하며”라는 말이 무엇인가. 에녹이 늘 기도하며 살았다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는다. 물론 저들 나름대로 자기들의 신앙, 자기들의 종교를 따라 기도하는 기도행위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상 앞에 절하고 우상 앞에 비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기도도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기도는 우주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동행하는 매 순간의 영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몸이 호흡을 하여야 살 수 있듯이 영혼의 호흡 활동이 곧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착각에 빠지면 안 된다.
바알 숭배자 450명이 하루 종일 “바알이야 바알이여”하고 빌었지만 바알이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나. 죽은 신, 사람이 만든 신, 돌과 나무를 다듬고 깎아 만든 우상이 어떻게 인간의 기도를 듣는다는 말인가. 돼지 머리 앞에 절하고 돼지 코에 종이돈을 돌돌 말아서 꽂아 놓고 절하고 비는 이들이 있다. 아니, 죽은 돼지 머리가 인간의 소원을 어떻게 들어 준다는 말인가.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드보라, 한나, 사무엘, 다윗, 솔로몬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윗의 묘실, 선지자 사무엘의 묘실에도 가 보았다. 그 묘실은 좌우에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입구가 따로 있다. 남자는 머리에 ‘키파’라는 모자를 쓰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곳에는 기도하는 유대인들과 구약의 율법서인 토라와 탈무드를 소리 내서 읽는 유대인들이 열 댓 명씩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가는 곳마다 성경을 읽고, 가는 곳 마다 찬송하고, 가는 곳마다 기도하며 다녔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보다 6시간 늦다. 그곳의 주일 예배를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빌려 타고 드렸다. 성찬 예배로 예배드렸다. 그리고 가나 혼인잔치 기념 교회, 나사렛의 수태고지기념 교회, 요한 계시록 16장 16절의 아마겟돈 격전지로 언급되는 므깃도의 전쟁 유적도 둘러 보았다. 그리고 오후에 엘리야의 갈멜 산에 올랐다. 그곳에 엘리야 기념 교회가 있고 100여명쯤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 안에 그 산 언덕의 자연석 12돌을 쌓아 만든 제단이 예배당 전면에 놓여 있다. 그 곳에서 그 곳 시간 주일 오후 2시 30분경에 통곡과 진동을 경험하며 기도하였다. 시간의 제한을 받으며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영적 체험을 자제할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하루 종일이라도 갈멜 산 정상에 머물며 기도 하고 싶은 간절함이 컸다.
최근에 주일마다 묵상하고 있는 열왕기 상의 엘리야 선지자는 기도하던 선지자였다. 그의 대를 이은 엘리사도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기도하던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그 시대,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셔서 기도와 말씀의 사람으로 붙잡아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때가 되면 무슨 음식이든지 먹어야 육신의 에너지를 공급 받을 수 있다. 매 순간 호흡을 계속해야 살 수 있다. 최근에도 미세먼지와 황사가 심하였었다고 들었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라도 호흡해야 산다. 실내 공간에서는 공기 청정기를 틀어 가면서라도 맑은 공기를 확보해야 한다. 사람이 몇 분만 숨을 못 쉬게 되면 죽고 만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란 그런 것이다. “목사님, 이 바쁜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늘 기도만 하고 살수 있단 말입니까”하고 물으면 안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의 계속성을 신앙생활의 의무와 특권으로 여기며 영적으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직 영적으로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의 생애도 기도로 출발해서 기도로 생을 마감하시지 않았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3년간의 사역도 늘 밤마다 기도하시고, 개인적으로, 한적한 곳을 구별하여 놓고 찾아 가셔서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셔서 밤이 새도록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 그 기도 하시던 마지막 밤의 기도 장소, 그 기도 바위 위에 “겟세마네 동산교회”가 세워져 있다. 세계의 성지 순례객들이 그 예배당 안에 놓여 있는 그 기도 바위 곁에 엎드려 기도하고 한 발치라도 더 가까이 다가서서 기도드리고 싶어 한다. 나도 그 무리들 사이에 끼어서 기도하는데 내 곁의 한 흑인 중년 여성은 얼마나 큰 소리로 슬퍼하며 통곡하며 기도하던지 마치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던 골고다 언덕의 그 십자가 아래서 슬퍼하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통곡소리처럼 가슴을 쓰리게 하는 통곡과 기도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
본문에 보면 기도하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3년이 넘도록 비가 내리지 않던 때였다. 엘리야는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였고 닫힌 하늘의 문이 열리고 가뭄이 계속되는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갈멜 산 정상에서 바알 숭배자들과 기도 응답의 영적 대결을 마친 후에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들을 한명도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아다가 처형하였다. 엘리야의 명령을 들은 백성들이 나서서 바알을 신이라고 섬겨 오던 자칭 선지자들을 모조라 다 붙잡았다. 그리고 그들을 기손 시내로 끌어다가 거기서 다 죽였다. 우상 숭배자들을 죽였다는 말이 무엇인가. 우상 숭배의 뿌리를 뽑겠다는 의지적인 행위가 아닌가. 갈멜산 정상에 있는 엘리야 기념 교회 앞마당에는 엘리야의 대리석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동상의 형상이 그러하다. 오른 손에 큰 칼을 하늘로 치켜 든 엘리야가 왼쪽 발로 바알 숭배자의 목을 밟고 칼로 내려치는 동작을 동상으로 세워 놓았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잔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교훈을 분명하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싸움을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악한 영을 상대로 하는 영적 전투이다. 전쟁은 이겨야 한다. 패자와 승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크다. 열왕기상 18장 40절에 보면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고 했다. 이는 엘리야가 직접 나서서 450명의 바알 숭배자들을 죽였다는 말이 아니다. 분노한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엘리야 선지자의 명령에 따라서 그리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거사 앞에 임금 아합 조차도 어찌 하질 못하였다.
신명기 13장 7절 이하에 보면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따르지도 말고, 그들의 미혹의 말을 듣지도 말고, 우상 숭배자들을 긍휼히 여기지도 말고 애석히 여기지도 말고 덮어 숨기지도 말라고 하였다.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줄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신13:9)고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꾀어서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자들은 “너는 돌로 쳐 죽이라”(신13:10)고 엄하게 명령하셨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사람을 쉽게 돌로 쳐 죽이라는 강조인가. 아니다. 우상 숭배하다가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동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잘 믿고 섬기는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강조가 아닌가.
성도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정의와 공의로 불의를 이겨야 한다. 진리로 거짓을 이겨야만 한다. 빛으로 어둠을 이겨야만 한다. 생명으로 죽음을 이겨야만 한다. 이것이 구원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예수의 십자가의 마지막 임종 직전의 선언은 영적 승리를 선언하신 영원한 승리의 선언이시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기도의 사람 엘리야,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할 때에 무슨 일이 있었나.
큰 비 소리를 들은 엘리야.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한 후에 곧 이어서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임금에게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하고 청하는 장면이 본문의 시작이다. 이는 갈멜 산 정상에 여호와의 불이 임하는 장면과 바알 숭배자들이 하루 종일 광란을 벌여도 바알 신이 묵묵 부답이었던 그 날 그 하루의 모든 일을 아합 왕도 지켜보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명령을 따라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바알 숭배자들을 결박하여 기손 시내로 끌어다가 모두 다 처단하기 까지 그 모든 역사의 현장을 임금 아합이 지켜보았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임금 아합에게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하고 말하였다.
그 당시에 온 이스라엘 나라에 그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하고 있던 큰 비 소리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는 듣고 있었다. 기도의 사람이란 이래야 하지 않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소리, 세속의 소리를 듣는데 귀가 먹먹해져 있는 시대에 삼년 동안 들리지 않던 큰 비가 몰려오는 큰 비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시대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가.
교회 안에, 속회 안에, 교회 학교와 청소년부와 청년부와 각 부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큰 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의 사람들로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큰 비 소리”가 무엇인가. 이는 남들이 못 들은 큰 비를 몰고 오는 천둥소리를 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믿음의 사람만이 믿음의 영적 귀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가.
노아 시대의 노아는 그 당대의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홍수 심판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시대를 준비하였다. 4천 년 전의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처럼 양과 염소와 소와 약대를 치며 사는 족장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러나 아브라함은 남들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출발하였다. 이는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사무엘, 다윗도 다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기도의 사람으로 사용하셨다. 야고보는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였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5:17-18)
오늘 날 세상 사람들은 어떤가. “비가 올 것인가 안 올 것인가는 가상청의 일기 예보를 보아야지... 아니 기도한다고 비가 오고, 기도 한다고 비가 멈춘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기도의 필요성에 대하여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가 말하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는 말이 무엇인가. 엘리야는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란 말이 아닌가.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비를 내리고 안 내리고는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이며 자연을 다스리시는 그 분의 영역인데 하찮은 우리 인간이 기도한다고 비가 안 오고 기도한다고 안 오던 비가 내린다는 말인가.”
그런데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나. 우상인 바알을 숭배하는 일에 앞 장 서던 악한 임금 아합의 때에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이유가 엘리야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도 엘리야의 기도의 힘이라는 설명이다. 엘리야 시대의 엘리야의 모든 모습을 보면 마치도 하나님과 엘리야가 하나로 합일되어 있는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엘리야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안에 엘리야가 꽉 들어차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엘리야는 구약 시대 그 많던 선지자들 중의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말리기 선지자를 통해서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는 말씀으로 엘리야를 다시 언급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지자 엘리야는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6)는 말씀과 회복의 선지자였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이처럼 행복한 날이 그 어디에 있을까. 구약 성경의 끝인 말라기 4장 6절을 보라. 맨 마지막 말씀이 무엇인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그렇다. 하나님의 구약 시대를 닫는 성경 말씀의 끝은 “돌이키라”는 “회개”(悔改)의 촉구이다.
세례 요한은 그런 말씀의 선지자로 이 땅에 보냄을 받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의 삶을 살아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세례 요한의 말씀 선포가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가 아닌가. 예수의 말씀 선포의 시작은 무엇인가.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왜 세례 요한과 예수의 말씀 선포의 주제가 같은가. 이는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의 계속이 아닌가. 회개가 무엇인가. “돌이키라”는 것이 아닌가. 자녀가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 알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닌가. 왜 아합 임금 시대에 북 왕국 이스라엘에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었나. 돌이키라는 신호가 아닌가. 회개하라는 촉구가 아닌가. 갈멜 산의 기도 응답 후에 큰 비 소리를 듣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은 무엇을 말씀하나. 엘리야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보았던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변화산에 올라 가셨던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 하신 장면은 무엇을 교훈하나. 엘리야 그는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 위에서 만나 대화하던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람, 영의 사람이었다.
기도하는 엘리야.
그 기도의 사람 엘리야가 바알 숭배자들을 모조리 기손 시냇가에서 처단한 후에 다시 갈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다.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고 있다. 엘리야의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던 기도 제목이 무엇이었나. 국회의원 당선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나. 좋은 학교 가게 해 달라는 기도였나. 부자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나. 아들 딸 낳게 해 달라는 기도였나. 시집 장가 가게 해 달라는 기도였나.
엘리야는 삼년 반이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땅에 다시 비가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우상 숭배자들인 바알 숭배자들 450명을 기손 시내에서 죽인 후에 하나님께 그 영적 대결의 상황을 보고하듯이 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하던 엘리야가 사환에게 부탁하였다.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여기서 말하는 바다란 지중해이다. 갈멜 산꼭대기에서 바다 쪽을 바라다 본 사환이 기도 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가서 말했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 때 엘리야는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고 말했다. 엘리야 선지자의 명령에 순종한 사환이 엘리야에게 다가 가서 말했다.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그 때 엘리야는 사환에게 “올라가 아합 임금에게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시라”고 전하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더니 하늘이 캄캄해졌다.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임금 아합은 왕의 수례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기 시작하였다. 45절의 ‘이스르엘’은 나사렛에서 40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아합 임금의 별궁이 있던 곳의 지명이다. 아합의 별궁은 이스르엘의 길보아 산 밑에 있었다. 열왕기 상 21장 1절에 보면 나봇 이란 사람의 포도원이 있던 곳이 바로 이스르엘이다.
기손 강은 비가 오면 범람하여 통행에 큰 지장을 줄 정도로 큰 비가 오면 물줄기가 거세지는 강이었다. 기손 강에 대한 말씀은 사사기 5장 21절에도 나온다. 기손 강은 갈멜 산에서 발원해서 지중해까지 37km를 이어 흐르는 강 줄이기이다. 그 강물이 범람하기 전에 왕 아합에게 어서 별궁이 있는 이스르엘로 가시도록 하라는 전갈을 전하게 한 것이다.
믿음의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사랑하는 아기가 울면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가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이 무엇인가.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이 아닌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하고 간구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신다. 기도 하였으나 응답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고 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1:6)고 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곧 기도 생활이다. 요즘 잔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니 별로 기도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앙생활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기도하여야 한다. 가정, 육아, 직장, 사업, 장사, 공부 다 중요하지만 기도하여야 한다.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과 함께 기도하여야 한다. 성도들은 만나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행2:46)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2:47)
그런 교회로 만들어 가자. 초대 교회의 성도들과 같은 그런 성도들의 삶을 실천하자. 베드로는 성령 받은 후에 늘 그런 기도 생활과 성령 충만한 삶에 힘을 쏟았다. 한번은 욥바에 선교 여정 중에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하였다. 시간은 정오였다. 그 기도 시간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았다. 그 기간에 가이사랴 빌립보의 백부장 고넬료도 제 구시의 기도 시간, 우리의 오후 3시에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기도하던 그 곳, 욥바가 오늘 날 이스라엘의 국제공항이 있는 텔아비브라는 해양도시이다. 귀국 하는 목요일 오후 시간에 그 곳, 베드로가 기도하다가 환상을 체험한 곳에 세워진 “베드로 환상 교회”를 둘러보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저녁 시간에 교회 안에서는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처럼 기도의 사람들이 기도하던 현장은 2천년이 지나도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분명해지지 않나.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가정, 기도하는 일터,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교회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호와의 능력이 임한 엘리야.
갈멜 산꼭대기에 다시 올라가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던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였다. 46절의 말씀이다. 엘리야는 이미 여호와의 능력의 사람이었다. 갈멜 산 정상에서 바알 숭배자들이 지켜보고 온 백성들과 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도하던 엘리야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나. 열왕기상 18장 36-37절을 다시 보자.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는 엘리야가 얼마나 여호와의 능력에 사로잡혀 기도하였나를 보여주는 엄숙한 기도의 장면인가. 그렇다. 성도는 남녀노소 누구든지 모두 다 각 사람에게 일일이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여야만 한다. 또한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기를 간구하여야 한다. 간절히 염원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능력이 임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대마다 들어 쓰셨다.
호렙 산 떨기나무의 불이 붙는 환상 앞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부어 주신 능력의 징표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의 동족들에게 보내시려 하자 불안해하고 착잡해 한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동족이 모세를 믿지 아니하고 동족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서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이것이 모세의 불안이었다. 그 때 하나님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지팡이니이다”하고 대답하자 “그것을 땅에 던지라”고 하셨다. 땅에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다. 모세가 깜짝 놀라서 그 뱀을 피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 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뱀의 꼬리를 잡는 순간에 뱀이 변하여 지팡이가 되었다. 하나님은 또 다른 기적도 보여 주셨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모세의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대 보니 나병이 생겨서 손이 눈 같이 되었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다시 품에 넣었다가 꺼내 보니 깨끗하게 나았다. 하나님은 이 두 기적 사건을 보게 하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출4:5)
하나님은 모세에게 형 아론을 만나게 해 주셨다. 모세와 아론을 애굽의 바로 왕을 찾아 갔다. 마지막 장자를 치기까지 열가지 재앙 앞에 바로 왕의 마음은 점점 더 강퍅해져만 갔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권능, 여호와의 능력 앞에 바로 왕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여호와의 능력이 임해야 한다. 출애굽의 성공은 모세의 힘이나 아론의 지혜가 아니었다. 모세를 통한 여호와의 능력이었다. 모세에게 임한 여호와의 능력은 광야 생활 40년간 날마다 계속되었다. 이번에 방문해 본 느보 산 정상의 기념 교회 마당에는 거대한 나무에 구리 뱀을 매어 단 모세 시대의 광야 기적의 장면을 조형물로 세워 놓은 것을 보았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엘리야의 이름 뜻이 바로 그것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란 의미가 ‘엘리야’의 이름이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엘리사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이 오늘 날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변화산 정상에서 신비하게 변형 되셨던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그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선지자이다. 여호와의 능력이 그 엘리야에게 임하였다. 세상에 나가면 실력 많은 사람들이 넘쳐 난다. 권력자, 재벌, 각 분야의 탁월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세상에는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그 시대에 여호와의 능력이 임한 사람을 찾으시다. 여호와의 능력이 임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고 증거를 나타내 보이신다.
아합 시대에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던 그 곳 이스라엘 땅, 그 곳 갈멜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방의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오늘 날 푸르고 푸른 곡창지대이다. 비가 내려야 한다. 축복의 비가 하늘에서 이 땅에 임하여야 한다. 은혜의 비가 내려야 한다. 개인, 가정, 일터, 도시, 나라, 교회, 성도들 각 사람 위에 풍성하게 넘쳐흐르는 소낙비, 장대비가 내려야 한다. 며칠 전 예루살렘에도 우기 철을 마무리하는 늦은 비가 내렸다. 오늘 이렇게 비가 내리고 나면 화창하던 벚꽃이 지고 푸르고 푸른 계절이 시작될 것이다.
성령의 비가 내려야 한다. 축복의 비, 은총의 비, 응답의 비, 치유의 비, 회복의 비, 능력의 비, 권능의 비, 말씀의 비, 부흥의 비, 잘되고 복되고 번성하게 하는 하늘의 비가 내리고 또 내려야 한다. 그래야 산다. 개인도 살고 가정도 살고 나라도 민족도 그래야 산다. 교회로 교회되게 하고 성도로 성도되게 하는 힘은 여호와의 능력이다. 예수께서도 그 하나님의 능력, 여호와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 마지막 밤, 마지막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까지도 기도하셨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여호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된다. 엘리야는 아합 임금이 탄 마차 앞에서 허리를 동여매고 마차 앞에서 달려갔다. 여호와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아합 임금으로 하여금 직접 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겠나. 기도하여 능력 받고 능력 받아 하나님의 존귀한 사람답게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