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왕상18:30-40) 2016. 4. 3
서울의 강북에는 삼각산이 기도의 산으로 알려져 있다. 강남에는 청계산이 기도의 산으로 유명하다. 삼각산에는 오늘 날에도 기도원이 여러 곳에 있고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스라엘의 거룩하고 신성한 산으로 알려 져 온 산 중의 한 곳이 갈멜 산이다. 금번 성지 순례 코스 중에 갈멜 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엘리야 기념 교회에도 갈 수 있을 것이다. 갈멜 산은 갈릴리 호수에서 서쪽 지중해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정상은 482m 높이이다. 서울 남산이 262m이니까 그보다 220m가 더 높은 정도이다. 북서쪽, 남동쪽을 향하여 산맥의 길이가 약 26㎞에 걸쳐 뻗어 있다. BC 16세기 이집트 문헌에도 '거룩한 산'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도 신성하게 여겼다고 한다. 6세기부터 은둔자들이 정착해 수행 생활을 즐겨 한 산이기도 하다. 1150년 로마 가톨릭 수도회인 카르멜회가 창설되었다. 산비탈에 있는 하이파 시내와 교외에는 많은 공원과 아름다운 숲이 있다. 남서쪽 경사면에는 동굴들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석기시대 인간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우리가 6주 전에 두 주 동안 열왕기 상 17장의 말씀을 대하였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야가 장차 임할 이스라엘의 가뭄에 대한 예언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밖 시돈 땅에 가서 머물면서 그 곳에서 만난 사르밧 과부와 그의 아들 곁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준 내용을 보았다. 하나님은 가뭄 가운데서도 그 가정의 가루 독의 가루가 마르지 않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 과부의 죽은 아들을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다시 살려 주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열왕기 상 18장의 내용은 가뭄이 시작 된 지 이미 3년 세월이 흐른 후의 장면이다. 하나님을 엘리야를 아합 임금 곁으로 보내셨다. 그 당시에 궁중 대신으로 있던 오바댜를 만나서 이제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비를 내리실 것이란 사실을 전하였다. 오바댜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아합의 부인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는 용감하게 나서서 선지자 백 명을 오십 명 씩 따로 따로 굴에 숨기고 먹을 떡과 마실 물을 은밀하게 제공해 왔다. 가뭄은 점점 극심해져서 더 이상 왕궁에 속한 말과 노새들조차도 먹일 물을 구할 길이 없어졌다. 왕이 직접 왕궁 밖으로 나서서 어디 남은 물줄기가 있는가하고 찾아도 찾을 수 없던 때였다. 아합 왕 따로 오바댜 따로 나라의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은 물줄기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즈음에 엘리야는 오바댜를 만났다. 그리고 왕 아합에게 엘리야를 만난 사실을 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힌 오바댜는 “내가 어찌 엘리야 선지자를 만난 사실을 감히 왕에게 아뢰겠는가”하고 난색을 표하였다. 그러던 중에 다시 용기를 낸 오바댜가 임금 아합에게 가서 엘리야를 만났다고 전하였다. 오바댜를 따라 나선 아합 왕이 드디어 엘리야를 만났다. 엘리야 선지자를 만난 아합 왕의 첫 마디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라는 공격적인 인사였다. 그 때에 엘리야는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왕상18:18-19)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 동안 삼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에 비가 내리지 않은 이유는 임금이 앞장서고 나라 안에 우상인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의 영적 타락과 범죄로 인한 것이라는 감히 임금 앞에서 책망의 말로 한 것이다. 그리고는 감히 왕 앞에 자신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신 참 신이시며 참 하나님이신지 아니면 왕이 앞장서서 바알 숭배자들과 함께 섬기는 바알 신이 참 신인지 확인해 보자는 영적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알 선지자 400명과 아세라 선지자 450명이 나서서 한 나절을 “바알이여 바알이여”하고 불러 댔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 전국 각처에 전갈을 보내서 바알 숭배자와 아세라 숭배자들을 850명을 불러 모았다. 그 때 엘리야는 담대하게 말하였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왕상18:22-24) 그 때에 엘리야의 설명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말이 옳도다”하고 한결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송아지 한 마리를 바알의 제단에 각을 떠서 얹어 놓고 바알 숭배자들은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 소제 드릴 시간이 가까워 오도록 하루 종일 “바알이여 바알이여”하고 바알을 불러 댔다. 그러나 바알의 제단에는 아무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바알 숭배자 400명은 그 쌓은 바알의 제단 주위에서 계속하여 뛰놀았다. 그러나 정오가 되어도 아무 징조가 보이질 않았다. 그 때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였다.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었다면 깨워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악에 받친 바알 숭배자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였다. 이미 시간은 오후도 다 지나가고 저녁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면서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계속하여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바알의 제단에는 아무 징조가 보이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신, 생명이 없는 신, 나무와 돌로 깎아 만든 우상이 어떻게 반응을 하고 응답을 한단 말인가.
그 저녁나절에 엘리야가 나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은 송아지를 각을 떠서 준비 해 놓은 제단에 불을 내리셔서 번제물인 송아지와 나무와 돌과 흙을 불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아 버렸다.
그렇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니다.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인 인간이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든 우상물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아벨의 하나님, 에녹의 하나님, 노아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여호수아와 갈렙의 하나님이시다. 사사 기드온과 삼손과 드보라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시며 솔로몬의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본문처럼 엘리야의 하나님이시며 엘리사의 하나님이시다. 그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들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자.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는 엘리야.
30절에 보면, 수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은 수많은 무리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각처에서 갈멜 산에 몰려들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아합 왕이 자신 있게 전국의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불러 모으고 보란 듯이 바알과 여호와의 대결을 선언한 자리이니 말이다. 엘리야는 그 모든 백성들을 자신의 곁으로 가까이 나아오라고 초청하였다. 엘리야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이스라엘 12지파를 기념하는 12돌을 취하여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았다. 그 곳에는 오래 전부터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제단이 있었다. 그러나 아합 왕과 이세벨이 앞장서서 바알을 숭배하고 아세라를 숭배하는 우상 숭배 정책을 강화하는 동안에 여호와의 제단은 무너지고 황폐하게 버려져 있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修築)한 것이다. 수축(修築)한다는 말은 ‘집이나 축대를 고쳐 짓고 고쳐 쌓는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생활 중에 remodeling한다는 용어를 쓰는데 수축은 rebuilding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다시 쌓게 하심으로 여호와 신앙을 재건하고 하나님 신앙의 회복을 촉구하셨다.
오늘 날 나의 신앙 상태는 어떠한가. 오늘 날 나의 가족들의 신앙 상태는 어떠한가. 요즘의 나의 부모,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나의 아들딸, 나의 며느리 사위, 나의 손자 손녀들의 신앙 상태는 어떠한가. 겨울이 지나면 이 곳 저곳 해빙기를 맞아서 절벽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는 큰 위험을 조심해야 한다. 그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기 자신의 믿음의 제단이 무너지지 않도록 매 순간마다 날마다 주마다 점검하여야 한다. 그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데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모아야 한다.
공부...공부, 성공...성공, 출세... 출세 다 좋지만 나의 가족 각 사람의 영혼의 제단이 무너지지 않도록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작은 구멍이 땜을 무너트린다. 작은 구멍이 거대한 배를 가라앉게 한다. 작은 무관심이 운동장 같이 거대한 배를 전복시킨다. 여객선 타이타닉(Titanic)은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이 운영한 북대서양을 횡단하는 당시의 초호화 여객선이다. 배의 길이가 269미터이다. 46000톤으로 그 당시 군용 함정을 포함해서 가장 크게, 가장 화려하게, 해양 국가 영국의 해양 기술을 총동원하여 영국의 자존심을 걸고 만든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여객선이었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첫 항해를 시작하였다. 최대 3327명이 탈수 있는 거대한 호화 여객선에 2,224명이 타고 출발하였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에 빙산과 충돌하였다. 이 때문에 주갑판이 함몰되면서 배의 오른쪽에 구멍이 났다.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3시간 내에 타이타닉 호는 완전히 침몰하였다. 타이타닉 호는 방수용 격벽이 설계되어 있었고 문들도 물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자랑했으나 막상 사고를 당하고 보니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이었다. 구명정에 타지 못한 채 깜깜한 대서양의 밤바다로 뛰어든 수많은 사람들은 불과 몇 분 만에 저체온 증으로 죽어갔다. 침몰할 당시까지도 배에는 1,000여명의 사람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배와 함께 침수 되고 말았다. 구명정을 타고 있다가 몇 시간 뒤에 구조된 사람은 불과 710명에 불과하였고 1,514명이 죽었다. 이는 역사적으로 전쟁이 아닌 평화 시에 일어난 해난 사고 가운데 가장 큰 인명피해 가운데 하나이다.
작은 구멍 하나가 축구장 2배 반 길이의 어머 어마하게 큰 타이타닉 호를 3시간 만에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그 까짓것 주일 한 번 빠진다고, 예배 한 번 안 드린다고, 성경 한 번 안 읽는다고, 기도 한 번 안 드린다고, 전도 좀 안했다고 뭐가 어떻게 되겠어.. 뭐 그렇게 극성 맡게 예수 믿고 매사에 하나님! 하나님! 할 필요가 뭐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의 작은 구멍이 그 한 사람의 인생을 점점 여호와로부터 멀어져 가게하고 바알이 신처럼 여겨지고, 아세라가 신처럼 믿어지기 시작한단 말이다.
바알이 무엇인가. 아세라가 무엇인가. 요즘 말하는 스펙 쌓기를 위해서 학원으로 학원으로, 과외로 과외로 치닫는 동안에 우리의 자녀들이 점점 여호와로부터 멀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이도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놀고 세상의 세속 문화 가운데서 잘 살아가는 그런 바알에게 무릎을 꿇어 버린 아들딸, 며느리 사위, 그런 손자 손녀들이 되어 버리고 만다. 바알 숭배하는 우상 숭배 신앙이 이스라엘 나라라도 국가적인 불행을 부르게 하는 화근의 시작이 아닌가.
지난 주중에 며칠간 미세 먼지와 황사 현상이 겹치니까 세상이 어떠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공장 연기가 온 하늘을 뒤 덮은 것 같은 그런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나.
아차 하는 동안에 우상인 바알의 신상을 가슴에 품고, 우상의 문신을 몸에 새기고, 바알의 신상을 목에 걸고 홍수처럼 떠밀려 가는 세속 문화의 한 중심에서 여호와의 단이 무너지든 말든 아무 신경 쓰지 않고도 떵떵거리며 출세 가도를 달려가려 하는 세속의 군상들이 우리 주변에는 넘쳐 난다.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인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제 8대 왕이 아합(BC 874-853)이다. 22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온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바알 우상 숭배 국가로 엉망을 만들어 놓았다. 결혼도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과 결혼하여 노골적으로 이방 나라와 손잡고 이방 나라 시돈 왕 엣 바알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 성경은 그런 아합을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왕상 16:30)라고 고발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아합 왕의 악이 무엇인가. 그가 무슨 악을 저질렀나.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우상인 바알을 숭배하면서, 하나님 믿지 않는 이방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살아도 아무 문제없다는 그 사고방식이 화근이 시작이었다. 아합 왕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보란 듯이 바알의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바알 앞에 제단을 쌓았다.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고 만 것이다. 이 설명은 성경이 자세하게 나와 있는 내용들이다. 열왕기 상 16장 31절 중반 절부터 33절까지를 보라.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세상을 적당히 즐기며 타협하며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무슨 밤낮 하나님 하나님 하고 밤낮 예수님 예수님 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살면 안 된다 말이다.
“직장 생활 잘하고 사업, 장사, 무역 잘 하고 공부하고 취직하고 돈 벌고 시집 장가가고 아들 딸 낳고 주말이면 애들 데리고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놀러도 좀 다니고 그렇게 살면 되지 무슨 밤낮 교회 교회 하며 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면 위험하단 말이다.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과 그들을 추종하는 이스라엘의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나라에 넘쳐나는 바알 숭배자들이 그러했단 말이다.
2016년 봄, 사순절과 부활절이 지나간 이 때에 간절히 소원한다. 개인마다 가정마다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는 그런 우리가 되길 소원한다. 엘리야 선지자는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야곱의 12아들들을 기념하는 12돌을 취하여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에 12돌을 쌓았다. 야곱이 누구인가. 얍복강 가에서 밤새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던 중에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 그 야곱이 아닌가. 31절에, 엘리야는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신 자” 그 야곱을 기념하는 12돌을 쌓으므로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였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한 엘리야.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 뜻을 갖고 있다. 엘리사는 ‘하나님은 구원자’란 뜻이다. 이처럼 엘리야는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 여호와의 선지자였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제단을 다시 쌓았다. 12돌 제단을 쌓은 후에 그 제단에 돌아가며 깊은 고랑을 팠다. 그 위에 나무를 펼쳐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았다. 그리고 물 통 넷을 준비해서 세 차례 계속하여 산 아래에서 12통의 물을 길어다가 붓도록 시켰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온 나라가 아합 임금과 이세벨을 두려워하며 바알을 숭배해 왔다. 지난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었다. 그런 저들이 바알을 부르며 제사하였지만 바알을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나무와 돌로 깎아 다듬어 만든 우상이 무슨 응답을 어떻게 하겠는가. 아침부터 저녁 소제 시간까지 바알을 부르고 또 부르며 나중에는 바알 선지자들이 몸에서 피가 나도록 해 가면서 바알을 불렀어도 바알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엘리야 선지자의 차례가 된 것이다. 바알 선지자 400명과 아세라 선지자 450명 그리고 그 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쌓은 여호와의 제단에 제사드릴 준비를 정성스럽게 진행하였다. 죽기를 각오한 일사각오의 신앙이 아니라면 엘리야 선지자가 감히 어떻게 이렇게 침착하고 담대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입술로 주여 주여 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는 마음가짐이다.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쉐마’의 교훈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 아닌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하게 모시고 믿고 섬기고 그 명령 따라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북 왕국 이스라엘의 임금 아합과 왕비 이세벨은 그렇지를 않았다. 어디서 바알이나 아세라 상과 같은 해괴한 우상을 들여다가 그걸 신이라고 섬겼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번 4월에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는 영화가 개봉된다. 이 영화는 2010년 8월 6일 칠레의 광산 붕괴 사고로 지하 700미터 아래에 갇힌 31명의 광부와 운전수, 조수까지 총 33명이 매몰 현장에서 69일 만에 모두 다 살아 돌아 온 감동적인 실화를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저들 33명은 단 3일치 밖에 없던 비상식량을 갖고 69일을 버텼다. 구조대의 드릴 작업이 성공했고 매물 17일 만에 “33명 전원 살아 있다”는 쪽지가 지하 700미터에서 지상으로 전해졌다. 구조 작업은 강행되었고 광산 붕괴이후 69일 기간 동안 그들을 모두 살려 낼 수 있었다. 습도 90% 평균 기온 32도의 환경에서 69일을 버틴 것이다. 그 당시에 아프카니스탄에서 우물을 파던 미국 기술자들이 나서서 무려 69일 만에 33명의 목숨을 땅 속 700미터를 파 들어간 역 갱도 파이프를 통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모두 다 구출해 내는데 성공하였다.
믿음의 사람들은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가.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살아가려 하는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은 과연 내게 있어서 어떤 분이신가.
영화 이야기를 또 하자. 이번 4월 7일에 <신은 죽지 않았다. 2>라는 영화도 개봉된다. 그렇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은 지난 부활 주일 오후에 청소년들이 부른 찬송처럼 동쪽에 서쪽에 남쪽에 북쪽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시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만방에 증거 해 보여 주시는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경배합니다”라는 찬양이 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경배합니다
아버지 채워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경배합니다
예수님 채워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성령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경배합니다
성령님 채워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이런 찬양을 아무나 부를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님을 사랑하며 경배하는 성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활 예수님을 통하고 성령님을 통해서 날마다 항상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의 살아 도우심을 증거 하는 수많은 기사와 이적들을 보게 해 주실 것이다.
사도행전 4장의 베드로 사도의 담대한 복음 증거가 무엇인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한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여호와의 이름,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 앞에서 무너진 신앙의 제단을 수축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겸손하게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불의 응답을 체험한 엘리야.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00명과 아세라 선지자 450명이 지켜보고 그 많은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는 한 가운데서 여호와의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드리기 시작하였다. 엘리야는 기도하는 선지자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6-37)
이와 같은 기도가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 왔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무로가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다. 그 현장을 지켜보던 모든 백성들이 땅에 엎드려 여호와 하나님을 드높였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예수께서도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나.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있겠느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며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있겠느냐 육신의 아버지도 아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받을 것도 말씀해 주셨다.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그렇다. 기도하고 성령 받아야 한다. 기도하고 불을 받아야 한다. 기도하고 능력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역기 한 두 번 들고 아령 한 두 번 한다고 사랑이 아빠 추성훈 씨의 근육질 몸매가 되겠는가. 이처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모처럼 기도 한 번 드렸는데 금방 기도의 응답으로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임하겠는가. 엘리야가 3년간 비와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던 그 당시에 얼마나 간절하고 처절한 심정으로 날마다 순간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드렸겠는가.
며칠 전에 교회 곁 상가 앞길에 SUV 승용차를 몰고 온 60대 여성이 잠시 차에서 내려서 누군가를 기다라고 있는데 딸인지 며느리가 두어 살 쯤 된 손녀를 안고 차 곁으로 다가 갔다. 할머니는 손녀가 반가워서 춤을 추며 반가워하는데 손녀가 획하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였다. 그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처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그렇게 서먹하고, 그렇게 어색하고, 그렇게 남남 같은 관계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엘리야가 기도 드렸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각을 떠서 올려놓은 제단의 번제물을 태우고 나무와 돌과 흙과 도랑의 물까지 핥았다는 장면이 무엇을 말하나. 지난 날 우리는 여호와의 불의 응답을 체험하며 여기 까지 나아 온 것처럼 올해도 봄, 여름, 가을이 지나가고 2016년 한 해가 다 가도록 수많은 크고 작은 여호와의 불의 응답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곳 서울시 은평구 연서로 44길 5에 위치한 예수사랑교회 예배당도 그런 기도 응답, 불의 응답의 처소가 아닌가. 이 곳은 3개의 사철과 암자 주지승들이 S H공사로부터 분할 받은 법당 건축 용지였다. 그런데 6년 전에 동서남북 갈 바를 알지 못해하며 새벽 마다 기도하고, 냉천동 감리교 신학대학 100주년 기념관 지하 예배당에 모여서 주일마다 기도드리고 예배드리던 우리 가운데 여호와께서 불을 내리시듯이 응답하셔서 마련하게 해 주신 곳이 이 곳이 아닌가. 여호와는 살아계시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엘리사의 하나님이요, 엘리야의 하나님이 곧 오늘 날 나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들 각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기도하면 역사가 바뀐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신다. 주께서 친히 기도 생활을 가르쳐 주셨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
땅에 엎드린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입을 모아 하나님을 드높였다.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40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한 명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을 기손 시내로 끌어다가 죽이게 하셨다. 바알 선지자들을 모조리 다 죽였다는 말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역사의 아합 시대에 우상 바알 숭배를 멈추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회복해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 장면이 아닌가. 올 한해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