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언(마26:57-68) 2016. 3. 20 종려주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그 날 이른 새벽 시간에 대 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는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의 모든 공회원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가롯 유다가 앞장서고 그 뒤를 따라갔던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의 군대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붙잡아 결박하였다. 몽치란 곤봉과 같이 생긴 그 당시의 무기이다. 무장한 큰 무리가 예수를 가야바의 집 뜰에 까지 끌고 갔다. 대 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를 죽이려고 예수를 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다. 많은 증인들이 나서서 자기 나름대로 예수를 죽게 할 거짓 증거를 제시하였으나 그들 모두의 증거가 다 적당하질 못하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두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전하였다. 그 때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일어서서 예수께 물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이 같은 일들이 진행 되는 그 시간 가야바의 집 뜰에 저만치 멀찍한 거리에 베드로가 성전에서 일하는 하인들 틈에 끼어 앉아 있었다. 베드로가 누구인가. 예수가 붙잡히던 그 새벽 시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빼어 들고 대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 내며 혈기를 부리던 그 베드로가 아닌가. 최후의 만찬이라고 이름 붙여 부르는 그 마지막 밤의 마지막 식사를 예수와 함께 한 베드로가 아닌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주님의 죽으심을 예고하신 엄숙한 밤이 그 밤이 아니었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께서는 모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셨다. 물론 베드로의 발도 씻어 주셨다. 그리고 그 밤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감람산에 가셔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그 기도하러 가시던 중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것을 미리 경고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약속한 듯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런 베드로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붙잡혀 들어가신 예수를 멀찍이서 하인들 틈에 끼어 앉아 “그 결말을 보려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장면을 상상하여 보라. 그렇게 나약하고 초라하게 숨는 행동을 보이며 대제사장의 하인들의 틈에 끼어 앉아서 예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관망하고 있다니. 마태복음 26장 69절 이하에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결국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였다. 맹세하고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하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예언대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야바의 집 뜰 밖으로 뛰쳐나가서 통곡하며 울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예수께서 처참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 골고다 언덕에 베드로는 없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없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서 부활 하신 그 시간 까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은밀한 곳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다.
이미 예수는 철저히 혼자 남으셨다. 고독하고 외로운 생의 마지막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대제사장의 심문이 계속되자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다. 그러자 화도 나고 답답해진 대제사장이 다시 나서서 예수께 질문하였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26:63) 그 때 침묵을 계속하시던 예수께서 한 마디 대답하였다. “네가 말하였느니라.”(You have said so.)
“네가 말하였느니라.”
이 말은 간접화법에 의하여 예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스스로 증언하신 자기 증언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언”이라고 정한 것이다.
예수는 긴 침묵을 깨고 세 가지의 자기 증언을 계속하였다.
그렇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그렇다.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예수는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실 것을 대 제사장과 거기에 모인 서기관들, 장로들, 공회원들 앞에서 증언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화려한 자기 옷을 찢으며 화를 내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고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그 곳,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모여 들었던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공회원들을 비롯한 많은 무리들이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소리쳤다.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성경은 이렇게 점잖게 표현했지만 실감나게 표현하면 무슨 말인가. “그를 죽여 버려라.”하고 많은 무리가 함성을 질러 댄 것이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께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저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하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예수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면서 소리쳤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언은 무엇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가사 대로 “예수는 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가 고백하였던 대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렇다.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히 살아계신 아버지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창조주(創造主)이시며 우주 삼라만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역사의 주관자(主管者)요 섭리(攝理)의 주인이시다.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아담의 하나님이요 아벨의 하나님이요 노아의 하나님이시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의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아이 성을 공략하고, 헤브론을 점령할 당시에 여호수아의 때에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여호수아의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기드온 때에도 살아 계셨고 사사 미리암의 때에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셨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시며 솔로몬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던 순간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이시며 그를 믿는 신자의 메시아이시다. 메시아 즉 그리스도란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이시며, 대제사장 중의 큰 대제사장시오,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시다. 예수는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영원한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 9장의 예언처럼 예수는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고 하였다. 예수는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평강의 왕이시다. 예수는 왕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예수는 대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오히려 모세의 율법과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고 완성하신 대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는 왕 중 왕이시며, 대제사장 중에서 가장 큰 대 제사장이시며 선지자들 중의 선지자이시다.
그런 예수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심문 앞에 침묵하신 이유는 왕의 침묵이며 대제사장으로서의 침묵이며 선지로서의 침묵이다. 왕으로서 침묵하신 이유는 장차 때가 되면 불의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산헤드린의 공회원들 앞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제사장으로서 침묵하셨다. 대제사장으로서의 침묵이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끌려가고 잠잠히 죽임을 당하셨으나 예수는 실로 그를 믿는 모든 백성들을 죄에서 자유하게 해 주시는 영원한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리고 선지자로서 침묵하신 것이다. 예수는 그 동안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선지자로서 얼마나 많은 진리의 말씀을 온갖 비유로 말씀하시고 천국을 비유로 가르쳐 오셨는가. 그런데도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예수를 조롱하고 배척해 오던 저들을 향하여 일말의 대화의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심으로 침묵하신 것이다.
예수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의 그 어느 누구에게나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이시다. 그를 믿는 각 사람의 메시아이시다.그러므로 누구나 예수를 만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고 그 분을 왕으로 모신 예수의 다스림을 기쁨으로 받게 된다. 복음을 깨닫고 은혜 받고 나면 우리 각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 각 사람의 범사에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따르고 순종하게 된다.
고당 조만식(1883-1950)은 19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67살을 살다가 1950년에 공산당에게 피살당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후대가 기억하는 그는 독립 운동가요 교육자요 기독교 지도자요 언론인이요 기독교시민단체의 지도자요 정치인이었다. 평남 강서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큰 농사를 하던 이었다. 그는 6살 때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13살에 한학에 능통한 명석한 인재였다. 그 즈음에 아버지의 권유를 따라 결혼하고 첫 아들을 낳았는데 정신박약아가 태어났다. 15살 때에 시작한 포물상, 지물상의 사업이 잘 되자 이미 10대 후반부터 술 잘 먹고 돈 잘 쓰는 방탕한 청년기를 지냈다. 그런 그가 22살 때에 한정교라는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친구를 따라서 평양 장대현 교회에 출석하였다. 친구 한정교의 전도가 역사에 남는 인물 조만식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기독 청년으로 세워 가게 되었다. 조만식이 친구를 따라 교회에 처음 간 그날 평양 장대현 교회의 주일 예배 인원은 1,500여명에 달했다. 1905년, 그 당시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광경을 구경 할 수 있는 곳은 그곳, 장대현교회 뿐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찬송하고, 한 목소리로 소리 내서 통성 기도하는 광경을 보고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날 예배를 인도하는 서양 선교사의 예배 인도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날 밤에 그는 잠을 한 잠도 못 잤다. 밤새도록 낮에 경험한 그 예배의 경험이 머릿속에 가득하였다. 그 후에 장대현 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고 친구 한정교의 소개로 숭실 중학교에 입학하길 원하였다. 그러나 술과 담배뿐만 아니라 그 동안 날마다 방탕하게 살면서 돈 잘 버는 청년 사업가였던 그를 서양 선교사인 교장 배위량 박사는 입학생으로 받아 주질 않았다. 그는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고 친구인 한정교가 여러 번 숭실 학교 입학을 교섭해서 겨우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즐겨하던 술과 담배를 끊느라 고생을 많이 하였다.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에 다니면서도 몰래 담배 피고 몰래 술을 마셨다고 창피를 당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 그는 숭실중학교 때 술과 담배를 끊은 후로 나중 40년은 절대로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교장이었던 배위량 선교사와 교사였던 박자중 선생과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등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 그 후로 반듯하게 새 생활을 시작한 모범 학생이요 모범 청년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특히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꿈을 갖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일본에서 인도의 간디에 관한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하였다. 그러던 중에 우리나라에 잠시 귀국하여 있는 동안에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이 한국 지배를 시작한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 역사가 “경술국치일”로 기억하는 그 날, 일본은 한일 합방 기념 경축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만식은 그 식장에 뛰어 들어 행사장을 난장판 만들겠다고 화를 참지 못하였고 그런 그를 그의 아버지가 말렸다. “실력을 키워야지 지금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린 것이다. 마음을 다 잡은 그는 다시 일본에 건너가서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를 마치고 만주의 오산학교로 돌아가서 교사로 지냈다. 그리고 몇 해 후에는 32살 나이에 오산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오산 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은 105인 사건으로 일본에 붙잡혀 옥에 갇힌 상태였다. 고당 조만식은 남강 이승훈의 대를 이어 8년 동안 오산 학교를 든든한 학교로 세우고 후학을 양성해 나갔다. 그 후 1919년 3. 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간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출옥 후에는 평양 YMCA총무로 활동하면서 산정현 교회 장로로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그는 물산 장려 운동을 펼쳐서 가난한 백성들이 잘 사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신탁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소련의 북조선 점령군 사령관 치샤코프는 조만식에게 “신탁 통치 결정서에 서명만 하면 조선의 초대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를 설득하고 회유하였다. 그 당시 북한의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던 그는 붙잡혀 연금 생활을 하면서 6. 25 전쟁이 벌어질 때 까지 갇혀 지내야 했다. 1950년 10월 18일(10월 15일?),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해 가던 공산당은 조만식을 처형하였다. 그는 결국 공산당에 의해서 학살당하고 말았다. 고당 조만식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다가 갔다. 우리나라의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인 주기철, 손양원,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 고당 조만식, 백범 김구, 우남 이승만, 응칠 안중근, 이준 열사, 도산 안창호, 문창모, 장기려 박사 등 저들 모두의 펄펄 끓어오르던 믿음이 모두 부활 예수를 만난 그런 믿음이 아닌가. 예수의 삶과 교훈을 실천한 예수의 사람들이 아니었나.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체험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믿음 생활다운 믿음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냥 누구를 위해서 교회 다녀 주는 것처럼, 예수 믿어 주는 것처럼, 들러리를 서 주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 오늘 종려 주일,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입성하셔야만 한다. 그를 평화의 왕으로 영접하여야 한다. 예수는 나를 다스리시는 영원한 통치자, 영원한 대 제사장, 영원한 선지자이심을 믿고 따르고 증거하는 주님의 참다운 제자가 모두 다 되어야 한다.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인자.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마다 함께 고백하는 사도 신경의 내용이 무엇인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여기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고 고백한다.
고백이란 믿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아기로 태어나신 초림을 믿는 성도라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뿐만 아니라 승천과 재림도 믿어야만 한다. 아니,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믿어져야만 한다. 그런 믿음이 나에게 주어지도록 성령의 도우심과 주의 도우심을 겸손하게 기도하여야만 한다.
먼 나라에 가서 지내던 가족이 때가 되면 돌아오듯이 우리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승천은 예수께서 친히 죽으시던 그날 아침에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와 그 곁에 몰려 와 있던 유대교 문중들에게 확언 하신 말씀이시다. 우리는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의 승천 장면을 자세하게 대할 수 있다. 예수의 모든 생애는 허구가 아니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다 감당하셨다. 예수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 하셨다. 그리고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셨다. 그 승천에 대하여 예수는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리라.”고 예언해 주셨다. 승천하신 예수는 그가 증거 한 대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 장엄한 신학으로 풀어 설명해 주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0-23)
승천 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장면을 가장 실감나게 목격한 주인공은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이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보좌를 보았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 이 얼마나 그림을 보듯이 명확하고 분명한 천국의 장면인가.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던 초대교회 집사인 첫 순교자였다.
요한 계시록의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요한 계시록 4장에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4:1-4)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예수를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 반복하여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27장에도 보면 보좌에 앉으신 예수를 찬양하고 있다. 찬송가 가사를 쓴 새뮤얼 스티넷(Samuel Stennett, 1727-1795)목사는 영국의 제 칠일 침례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의 부목사로 사역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를 이어 그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영국 찬송가의 6대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6대 작가란, 아이자크 왓츠 ・ 필립 닷드리지 ・ 찰스 웨슬리 ・ 존 뉴턴 ・ 윌리엄 카우퍼, 그리고 새뮤얼 스티넷이다. 이 찬송은 본래 9절로 되어 있는데, 우리 찬송가에는 5절만 채택되어 있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 같이 빛나네 해 같이 빛나네
주님의 보좌 있는데 천한 몸 이르러 그 영광 몸소
뵈올 때 내 기쁨 넘치리 내 기쁨 넘치리.”
특히 4절 가사가 감동적이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요 저 사망 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큰 기쁨 넘치네,”
성도된 우리는 비록 육체의 한계 가운데 이 땅에 나그네와 안개 같은 생을 살아갈 지라도 분명한 고백과 믿음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부활과 승천의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근본이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스스로의 부활, 승천,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14:1-4)
늘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그를 심문하는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분명하게 다시 말씀하셨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재림에 대하여 말이다.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심판주.
예수님은 이 땅에 2,000년 전에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오셨던 것처럼 다시 오실 것이다. 초림 때에는 초라하게 오셨으나 재림 때에는 우주적이고 장엄한 영광의 구주로 오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와 같은 장면을 계시록 1장 7절에서 명확하게 기록하였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실 때에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조용히, 가만히, 초라하고 평범하게 태어 나셨으나 다시 오실 재림의 때에는 구름 타시고 영광 중에 오실 것이다. 천하 만민이 그를 볼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직후에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그들의 곁에 서서 말하였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그 재림의 날을 위하여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등불 밝히고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듯 기다리는 신앙으로 살아야 하겠다. 달란트를 맡겨 놓고 집을 비우고 떠나갔던 임금이 와서 계산하자고 말하는 순간처럼 갑자기 재림 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살아야 하겠다. 양을 오른편에 그리고 염소를 왼편에 구별하듯이 갑자기 오셔서 심판하실 주님의 심판 앞에 오른 쪽의 양의 무리를 구별하시듯이 영생을 선물로 주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을 믿는 성도들은 세상을 막 살면 안 된다. 세상적으로, 세속적인 가치관에 붙잡혀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고 잘 사는" 데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면 안 된다. 주를 믿는 성도라면 세상을 대하고, 재물을 대하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소위 성공, 출세를 말하는 그 가치관이 달라야 한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성공해야 하는지, 무엇이 성공적인 삶인지를 묻고 그 질문에 자신이 성경적인 대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달라져야만 한다.
다 부인하고, 다 저주하고, 다 도망가고, 다 숨어 버렸던 예수의 제자들이 나중에 성령 받고 나니까 초대 교회의 일꾼이요 이방 선교의 기둥들이 되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도마 등등 저들 가롯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모두가 순교자가 되기까지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다. 그렇게 비겁하고 나약하게 부인하고 배반하고 도망가고 숨던 제자들이 담대한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한 힘이 무엇인가.
이제는 내 차례다. 지난 주 말씀처럼 내가 향유 옥합을 깨트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부어 드릴 차례이다. 내가 예수의 몸된 교회의 발채에 엎드려 내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릴 차례이다. 내가 부활 복음에 붙잡혀서 예수 위해서 살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교회의 부흥이 단순한 부흥이 아니라 곧 믿는 자의 수를 더해가고 구원 받는 이들의 수를 더해 가게 하는 복음 전파의 과정이라면 그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시간과 재물과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집중하며 살 줄 알아야 하다. 이제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선순위와 태도가 변해야 한다. 변할 때가 되었다. 해마다 그냥 그렇게 사순절이라고 지내고, 종려 주일 지내고, 고난 주간 지내고, 부활 주일 지내고, 부활 주일 오후에 부활 달걀 몇 개 이웃에게 전하고 또 다시 일 년을 보내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나부터 변해야 한다. 내가 달라져야 한다. 내 마음에 식지 않는 복음 전파의 열정의 불이 붙어야 한다.
주 예수의 재림의 때는 한 밤 중에 도둑이 오듯이 그렇게 갑자기 오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깨어서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한다.
“주 예수님 언제 오실는지 한 밤에나 낮에나 늘 깨어서 주님 맞는 성도 주의 영광 보겠네 주 안에서 우리 몸과 맘이 깨끗하게 되어서 주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모두 기쁨으로 맞으라”(찬송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내용을 보라.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갔나. 아니다. 거지 나사로는 거지라서 불쌍하게 살았으니까 위로와 보상으로 천국에 갔나.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과 지옥의 교훈을 분명히 깨닫고 천국 백성다운 믿음으로 주를 믿고 살아가야 한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천국과 지옥, 승천과 재림 등 이 모든 말씀과 예수의 생애 속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들이 다 담겨 있다. 침묵 하시던 예수께서 침착하게 또박 또박 말씀하셨다. 예수의 그 대답을 들은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 화려한 대제사장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다”고 버럭 화를 내면서 무슨 증인이 어찌 더 필요하냐고 말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예수는 침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그를 때리는 무리들 한 가운데서 온갖 조롱을 다 당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 가셔서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골고다에 끌려 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며 고난 주간을 맞이할 우리 모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언의 말씀이 잘 깨달아지고 넘치는 소망과 부활 복음의 능력을 덧입고 부활의 새벽을 맞이하는 은총이 각 사람에게 임하기를 소망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