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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집안에 가득한 향유의 향기(요12:1-8) 2016. 3. 13 사순절 제 5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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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3-16 22:59 조회 19,917 댓글 0
 
집안에 가득한 향유의 향기(요12:1-8)        2016. 3. 13 사순절 제 5주


꽃의 향기기 천리까지 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천리향(千里香)이란 꽃나무가 있다. 꽃의 향기도 멀리 가지만 사람이 행하는 좋은 일도 그 아름다운 미담의 향기가 멀리가고 오래 간다. 예루살렘에서 20여리 떨어진 마을인 베다니에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 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았다. 2,00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 같은 마을인 베다니에 나병에서 고침 받은 시몬도 살고 있었다. 요한복음 본문에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고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의 같은 내용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가셨다. 이 시몬은 예수 만나서 나병으로부터 고침 받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시몬’이란 이름을 가진 이이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베다니 마을 주민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음식을 준비하고 잔치하였다. 모처럼 베다니 마을에 오신 예수를 환영하는 잔치를 벌인 것이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그의 오라버니인 나사로는 예수 곁에 둘러앉은 이들과 함께 예수와 함께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날도 이런 저런 유익한 말씀을 계속하셨을 것이다. 그 나사로는 예수님이 살려 내신 그 주인공 나사로이다.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가셔서 그를 불러내심으로 나사로는 세상을 다시 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사로의 누이 동생인 마르다는 마을의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2절에 보면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베다니 마을에 방문하신 기회에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이처럼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예수의 곁에 나사로의 누이 동생인 마리아가 다가서더니 “지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되는 분량의 향유 옥합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렸다. ‘한 근’이라고 표현한 ‘리트란’이란 무게 단위는 327g 정도이니까 거의 냉면 그릇만한 크기의 큼직한 옥합에 담긴 향유이다. 요한복음 19장 39절에 보면 예수를 장례하기 위하여 니고데모가 침향이 섞인 몰약 100리트라(litra)를 가지고 와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리트라라는 무게 단위가 12장 3절의 ‘한 근’ 무게를 말한다. 

그 향유의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마태, 마가복음의 같은 장면에 보면 가롯 유다는 그것을 팔아서 가난 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지 허비하고 낭비하였다고 핀잔을 주었다. 가롯 유다는 화를 내고 분개하고 허비한다고 시비를 걸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요한복음은 그 가롯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배려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가롯 유다는 도둑이었다고 했다. 가롯 유다는 도둑놈이란 말이 아닌가. 예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셨고 12제자를 대표하여 예수와 제자들의 살림살이를 맡겼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종종 선교 기금으로 기증 받은 기금들 중에서 얼마는 몰래 몰래 빼 돌리는 도둑질을 헤 왔다. 한두번이 아니었다. 

요한은 6절에 보면,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갔다.”고 그의 비행을 고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화를 내고 분노하고 마리아가 귀하고 값진 향유를 허비했다고 책망하는 가롯 유다를 말리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그를 가만히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12:7)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장차 당신이 제자들과 그를 사랑하고 따르던 자들의 곁을 떠나갈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 며칠 후면 다가 올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그런 사실을 입증한다.  

일이 이루어져 가고 성취되어 가는 이면에는 언제나 미담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아름답고 향기 나는 감동적인 좋은 일들이 반드시 있다. 우리나라도 구한말 그렇게 어수선하고 풍전등화와 같던 상태에서 일제에 뺏겼던 국권을 되찾은 광복과 해방이 어떻게 왔나. 6.25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서 오늘 날과 같은 강성한 나라가 어떻게 되었나.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은혜이지만 다 쓰러져 가고 일본군대의 총과 칼에 의해서 이리 찢기고 저리 할퀴어졌던 이 땅에 전쟁의 슬픔과 참담한 폐허를 딛고 부흥하고 어떻게 발전해 왔나. 국권을 되찾고 국가 발전을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희생적으로 헌신한 수많은 애국 지도자들과 희생되어 간 선조들과 지금 노년기를 맞은 세대의 피와 땀과 눈물의 열매를 후대의 우리가 먹고 누리는 것이 아닌가.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131년 전에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 땅에 와서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나.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하고, 글을 모르던 이들에게 한글을 깨우쳐 주고 영어를 배우게 하였다. 알렌이나 스크랜튼 같은 의사 출신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서양 의술을 전하여 한국인들 중에서 의사를 키워내고 병원을 세웠다. 병약한 이들과 장애를 가진 이들을 정성으로 돌보고 사랑하는 치유와 섬김 사역에 앞장섰다. 저들이 앞장서서 모자원을 세우고, 고아원을 운영해 왔다. 서양식 학교를 세워서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는 문호를 열어 갔다. 가난한 이들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다. 질병과 전염병 퇴치에 힘썼다. 놀음하고 술에 중독되어 지내고 곰방대에 담배를 연신 피워 대던 습관에서 벗어나서 건전한 생활 운동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여성들을 학대하고 첩을 두던 축첩 제도를 바꾸어 나가는데 앞장섰다.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 시켜 주었다. 남녀평등의 길과 여성을 귀하게 여기는 성경적인 문화를 펼쳐 왔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가정의 질서를 회복하여 행복한 가정으로 살아가는 가정 회복 운동에 앞장섰다. 

이처럼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고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곳마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미담들이 처처에 넘쳐 나게 되었다.

마리아가 매우 귀하고 값진 향유 옥합을 가져다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이 미담은 지난 이천년 동안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계속하여 전해져 왔다. 이처럼 향기 나는 좋은 일은 그 미담의 향기가 집안에만 가득할 뿐만 아니라 마을과 도시와 국경을 넘어 세계만방에 전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대대로 후대에 계속하여 전해지게 마련이다. 

역사에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함께 전해진다. 그 어떤 일이든 숨길 수가 없고 감출 수도 없다. 안 좋은 일이야 쉬쉬 하며 감추고 덥고 가릴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일은 계속하여 전해지고 또 전해지는 법이다. 우리는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는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 베다니 마을에 살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함께 삼남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마리아의 좋은 일 한 아름답고 향기 나는 미담을 2,000년이 지난 오늘 날 까지도 또 다시 이야기 하고 또 다시 이야기 하지 않나. 좋은 일, 아름다운 일, 향기 나는 일, 복된 일의 소문이란 그런 것이다. “집안에 가득한 향유의 향기”를 가능하게 한 주인공 마리아의 신앙을 되짚어 보며 은혜를 다시 본 받고 나누자. 


지극히 비싼 향유를 부어 드린 일.
우리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돈 몇 푼 건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하게 꾸준히 계속해서 누군가를 돌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큰돈이 들고, 몫 돈이 드는 일을 누군가에게 하는 선행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베다니의 마리아는 그런 좋은 일을 하였고  지극히 비싼 향유를 들고 와서 향기 나는 일을 하였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부어 드린 향유는 아주 비싼 향유였다. 계산이 빠르고 셈에 밝았던 가롯 유다는 그 향유의 값어치를 삼백 데나리온의 값이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 년에 300일을 일하는 노동자는 그리 많지 않다.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이다. 그러니 300데나리온이란 값어치는 일 년 이상, 아니 일 년 반쯤 벌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정도의 금액을 말한다. 당시에 그런 정도의 값비싼 향유는 히밀라야 산맥의 야생화에서 채취한 것들로 그 값이 그렇게 비쌌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결혼을 준비하는 신부들은 여러 벌의 아름다운 의복과 특별히 값비싼 향유를 준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결혼 준비물 중에 3,000만 원 이상의 값어치가 나가는 향수를 결혼 준비물로 마련해 가지고 갈 신부가 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마리아가 자신의 결혼을 위해서 평소에 그렇게 값 비싼 향유를 마련해 가지고 있었는가. 아니면 오빠 나사로와 언지 마르다와 살아가는 이 가정의 부모님께서 여유가 있어서 그런 값비싼 향유를 마리아의 몫으로 유산처럼 물려주고 돌아 가셨는가. 아니면 마리아는 오래도록 돈을 벌도 돈을 모아서  언젠가는 예수님을 다시 뵐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그런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리려고 준비하며 지내 왔는가. 그러나 우리의 추측이 어떠하든 다 좋다. 마리아는 자기의 몫으로 있던 지극히 값비싼 향유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부어 드렸다. 마태와 마가는 머리에 부어 드렸다고 했다. 머리에 부어 드린 향유는 어깨와 몸을 타고 흘러 내려 예수의 발잔등에까지 흘러 내렸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렸다. 

렘브란트가 그린 성화 중에 바로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향유가 흘러내리는 예수의 발잔등에 마리아의 눈물방울이 똑 떨어지는 그런 장면을 묘사한 렘브란트의 상상력이 배어 있는 그림이 있다. 

 오늘 날 세계에 유통되는 향수 중에는 샤넬 NO 5가 유명하지 않나. 그러나 최고로 비싼 것은 DKNY사의 제품으로 그 값이 100만불이라고 한다. 각종 보석을 화려하게 장식한 향수병에 담긴 향수인데 그 값이 100만불이다. 우리 돈으로 11억 5천 만 원 쯤 한다. 이 향수는 향수의 향기도 향기이지만 그 향수를 담은 병의 장식이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비싼 것이다. 달걀 모양의 병 컬렉터의 에디션은 14K의 황금과 백금을 비롯해서 2700개의 다이아몬드, 183개의 사파이어, 루비 등 2909개의 보석을 장식하였다. 보석 세공 디자이너인 마틴 캐츠(Martin Katz)가 2011년에 1,500시간을 투자하여 만든 제품이다. DKNY 회사는 이 향수를 판 값 100만 불을 모두 다 “action against hunger"라는 국제 자선 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런 일을 한 것이다. 마리아는 가롯 유다가 화를 내고 분내고 허비한다고 책망하는 그런 일을 왜 했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신분은 제자였지만 주님을 사랑했던 제자가 아니었다. 결국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팔아 버리고 불행한 운명을 맞지 않나. 
우리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값비싼 그 무엇을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사실을 값진 그 무엇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 나의 전부를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다 주고 싶어지는 것 아닌가. 

사랑하는 아내나 사랑하는 남편이나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이 병들어 죽어 가는데 수술비가 없고 치료비가 모자란다면 집을 팔고 반지와 목걸이를 팔고 논밭을 팔아서라도 사랑하는 가족의 병을 고치려고 발버둥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랑은 부분적인 사랑이 아니다. 나를 자녀 삼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셔서 천국의 소망과 죄 사함의 은총과 자녀의 권세를 영원히 선물로 허락해 주신 그 은혜는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며 주님 안에 하나 된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이어야 한다. 이 사랑은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 데이에 초콜릿을 전하느냐 못 전하느냐의 그런 정도의 감각적인 차원의 사랑이 아니지 않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가. 지금 여기 마리아가 예수께 표현하는 이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닌가. 

우리의 식어진 사랑, 우리의 식어진 첫 사랑의 회복이란 마리아의 모습처럼 이런 사랑이어야 하지 않나.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이 깨달아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기쁨과 감격의 때가 있었지 않나. 은혜 받고 나니, 구원의 감격을 깨닫고 나니 앉아 있어도 기쁘고 서 있어도 기쁘고 걸어가도 기쁘고 누워 있어도 기쁘고 혼자 있어도 기쁘고 누구와 같이 있어도 기쁘고 건강해고 기쁘고 병약해도 기쁘고 가졌어도 기쁘고 없어도 기뻤었지 않나. 그런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소망과 평안과 위로와 안식과 믿음이 샘솟듯 계속하여 내 마음에 자리 잡던 그런 첫 은혜의 순간, 첫 사랑의 순간, 첫 회심과 감격의 순간이 있었지 않나. 예수님을 향하여 그런 사랑과 섬김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나. 

6년 전 우리는 예수 사랑이란 이름으로 모여서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갖고 광야 길로 나섰는데 교회가 탄생되었고 성도들이 새벽마다 모이기 시작하였다. 의자 하나, 책상 하나, 컴퓨터 하나, 숟가락 젓가락 하나 없던 우리들은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모아서 우리끼리 둘러앉을 공간이 없던 서울 장안에서 여기서도 모였었고 저기서도 모였었다. 오갈 데 없고 새벽 예배 처소가 마땅히 없어도 어디에라도 서로 연락해서 날마다 새벽마다 모여서 기도하고 부르짖고 간구하며 그렇게 열 댓 곳을 찾아다니며 이 곳에 성전 터를 마련하고 예배당이 지어지는 감격을 체험하였다. 

믿음은 있었으나 우리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던 그런 날들을 지내고 한 해 한 해 여기 까지 왔다. 그 동안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예수의 몸 된 교회의 탄생과 이곳에 성전 터를 마련하고 예배당이 지어지는 과정에 지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의 머리에 붓고 발에 붓고 엎드려서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듯이 그렇게 교회를 섬겨온 여인들이 우리 가운데는 적지 않다. 물론 남성 신자들 가운데도 그런 믿음을 표현한 이들이 있었다.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마리아처럼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지극히 값 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부어 드리며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은 남자 성도들 보다는 마리아와 같은 여성 성도들의 수가 훨씬 여럿이었다. 우리들은 우리 가운데 마리아처럼 예수 앞에 엎드려서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리려고 했던 이들의 향기 나는 일들을 기억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계속하여 향유의 향기로 가득한 하나님의 집이어야 한다. 그 섬김과 헌신의 향기가 사라져 버리면 안 된다. 계속하여 누군가가  오늘 날의 마리아가 되어야만 한다. 향유의 향기가 사라지기 전에 또 다른 누군가가 마리아가 되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향유 옥합을 깨어 드리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아 드리는 그런 섬김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제 밤 그런 섬김의 손길로 연합해서 잘 준비하고 결식아동을 섬기는 사랑의 한 끼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런 일이 교회의 안과 밖에서 계속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우리는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누군가를 대접하고 누군가를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 그런 섬김의 삶을 사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식고 나의 믿음이 식어 버린 이들이 없지 않다. 오히려 가롯 유다처럼 화를 내고 분노하고 판단하고 잘못했다고 말하고 책망하려고 하는 이들을 우리는 평생토록 교회를 섬겨 오면서 그런 보지 않았어야 할 모습을 본 기억이 없지 않다. 

2016년 사순절이 이렇게 한 주 한 주 지나가고 있다. 여러분과 함께 교회의 역사 현장의 중심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서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한다. 목사인 나 자신을 포함해서  바로 나 자신이, 내가 오늘 날 주님의 몸 된 교회 현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마리아가 되자. 주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 옥합, 나드 한 근을 깨트려 부어 드리는 그런 주인공이 되자. 남들이 아닌 내가, 나 자신이 주님의 몸 된 교회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서 지극히 비싼 내 소유의 향유 옥합을 깨어 부어 드리는 그런 주인공으로 섬기자. 

다음 주일은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이다. 왜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 날 이 아침에 마리아를 기억하며 이런 말씀을 간절히 묵상하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이들은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없다.

연세가 80이 넘으셨든, 70대이시든 60대이든, 50대이든 아니면 40대, 30대, 20대 아니 청소년이든 어린이이든 상관이 없다.

미국 백화점의 왕 잔 와나메이커는 어렸을 적에 벽돌 공장에서 일하면서 낡고 비가 새는 예배당을 바라보던 자기의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는 자기가 일하던 벽돌 공장에서 벽돌 몇 장을 사 가지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말했다. “목사님 우리교회도 비가 새지 않는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않되나요.” 그런 어린 소년의 마음이 불이 붙여져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올 2016년, 사순절이 다 지나기 전에 우리가 섬기는 교회 안에 그렇게 집안 가득하게 향유의 향기가 가득해지는 그런 제 2, 제 3의 마리아들이 가득하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열 명의 마리아, 백 명의 마리아가 예수의 몸 된 교회 위에 지극히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부어 드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발잔등에 흐르는 향유를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 드리는 그런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현장의 마리아가 바로 내가 되고 우리가 되고 바로 당신이 되기를 소망한다. 


힘을 다하여 행한 좋은 일.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께 지극히 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드린 것은 그녀가 망설이다 말고, 다른 계산하다 말고, 다른 속셈을 갖고 궁리만 하다가 말았다면 어떻게 그런 기적과 그런 미담의 향기 나는 아름다운 일, 좋은 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겠나. 마가복음의 같은 본문을 찾아보자. 마가복음 14장 3절부터 나오는 말씀이다. 거기 6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한 일을 보고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8절에 보면,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었다.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칭찬해 주셨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부어 드린 일은 좋은 일이며 힘을 다하여 한 일라고 칭찬해 주셨다. 요즘 나는 어떤가. 요즘 우리는 어떤가. 요즘 우리 가정은 어떤가.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수많은 선교사들은 힘을 다하여 낯 설은 남의 나라를 찾아 왔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한 이들이 아닌가.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모두 다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았던 사도 바울이나 바나바처럼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고, 남미로 가고, 태평양의 어느 작은 섬, 적은 부족이 사는 곳으로 다 나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직업, 나의 기술, 나의 전공, 나의 재주, 나의 경험, 나의 능력, 나의 재력, 나의 소득, 나의 수입, 나의 관심 분야의 그 모든 것들을 단순화해서 주님 사랑하는데 집중할 줄 알아야 한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매사에 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해서 마리아처럼 무릎을 꿇고 엎드려 좋은 일을 계속 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6년 동안 우리들은 우리 가운데서 그런 일들을 서로 보아 왔다. 힘을 다하여 주님이 새롭게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기적의 현장에서 좋은 일에 열심을 다해 왔다. 그러나 뒤 돌아 보면 여전히 아쉬움이 많았다. 우리 가운데 좋은 일에 힘을 다하고 애를 쓰고 충성스럽게 헌신하며 마리아처럼 헌신한 이들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두 손 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망설이며 구경만 하고 있는 동안에 한 해가 가고 또 한해가 가고 여기까지 세월이 흘러 온 이들도 있다. 

어떻게 해서 홍해가 갈라졌는지 어떻게 해서 반석에서 물이 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아침마다 만나를 공급받게 되었는지 별 관심 없이 그냥 앞에 가는 사람 뒤만 따라 온 이들도 없지 않단 말이다. 

이제 내가 홍해 앞에 믿음으로 발을 들여 놓을 차례이다. 이제 내가 반석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할 차례이다. 이제 내 앞에 어떻게 해서 아침마다 만나가 내리게 되었는지 자세히 주목하고 내가 간증할 차례가 되었다.

우리 지난 6년을 뒤로하고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새로운 꿈의 공동체”가 되자. 6년 전 동서남북을 바라다보면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막연해 하고 막막해 하며 기도하던 그 때의 그 첫 심정, 그 초심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내가 좋은 일에 힘을 다하는 베다니의 마리아가  되자. 특별히 여성 모두에게 청한다. 내가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방문해서 예수의 머리 위에 지극히 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붓고 예수의 발을 머리털로 닦던 그 마리아가 내가 되자. 남들 바라보지 말고 내가 베다니의 마리아가 되자. 

그리함으로 우리의 신앙 현장에 향유의 향기로 가득하게 하고 진동하게 하자. 지금 이곳에, 이 예배당에 몇 온스의  값 비싼 향수병을 갖다가 깨트린 다면 온 예배당 안이 향수의 향기로 진동 할 것이다. 내가 향유가 되다. 나 자신이 향유가 되자. 예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내가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예수께 전제처럼 부어 드림이 되는 향유 옥합이 되자. 

우리가 늘 기억하고 암송하는 로마서 12장 1절 말씀처럼 “나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자.” 예수를 향한 나의 섬김이 곧 영적 예배인 것을 서로가 다 알도록 그렇게 섬기자. 베다니의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고 교훈하시고 감동하게 하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자. 그래서 다시 우리 안에 기적을 이루자. 우리는 이 곳 새로운 예배당에 입당 한 이후에 안일의 잠을 자며 마치 내 생애에 신앙생활과 충성 생활의 그 모든 것들을 다한것처럼 깊은 잠을 청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제 그 깊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자.

요나가 니느웨를 향하여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배 안에서 잠을 쿨쿨 자고 있었다. 배가 풍랑을 만났고 요나는 제비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하나님은 요나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 요나는 사흘 동안 그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요나의 회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게 하셨다. 그 요나가 니느웨 성민들에게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나.

오늘 우리도 다시스로 향하는 배 안에서 잠이 든 모습으로 지내면 안 된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다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 좋은 일에 힘써야 한다. 무엇이 나의 좋은 일인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좋은 일이다. 나의 힘과 경험과 가진 것과 있는 것과 귀한 것과 지극히 비싸고 좋은 것을 예수님을 위하여 향유 옥합을 깨트리듯이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와 몸과 발에 흘러내리도록 부어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이면 안된다. 이제 내 차례다. 내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 드려야 한다. 내가 예수께 지극히 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부어 드릴 차례이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그런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시체를 자기 무덤에 장례한 이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다. 관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도 침향 백근을 가지고 나와서 예수의 장례를 정성스럽게 도왔다. 그러나 베다니의 마리아가 먼저였다. 마리아는 아리마대 요셉보다, 니고데모보다 더 먼저 예수의 장례를 정성스럽게 향기나게 힘을 다하여 준비한 역사적인 여인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4장 8절에서,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마리아가 힘껏 최선을 다하여 행한 좋은 일을 극찬하셨다. 

이런 칭찬은 예수의 제자들이었던 베드로도 안드레도 야고보도 요한도 들어 보지 못한 칭찬이었다. 평소에 큰소리치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붙잡히셔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 모른다고 말하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힘을 다해서 지극히 비싼 아주 비싼 매우 비싼 엄청나게 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의 머리에 부어 드렸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해 드린 역사적인 여인이 되었다.
 

후대에 기억될 복된 일. 
같은 본문을 다룬 마가복음 14장 9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좋은 일은 역사에 남는 법이다. 신촌 연세 세브란스 병원의 거대한 최 현대식 본관 병원에 가면 로비의 벽면에 세브란스의 헌신에 대한 기록을 청동 판에 새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세브란스가 누구인가. 왜 한국인들은 만나 본 적인 없는 세브란스를 기억하려 하는가. 미국 클리브랜드 시의 L.H. 세브란스가 연희 의료원의 병원 설립기금을 막대하게 기증하여 그의 성을 붙인 것이 세브란스 아닌가.

1884년 궁정어의(宮廷御醫)로 봉사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H. N. Allen 박사에게 1885년 4월 10일 고종황제가 구리개(銅峴 : 현재 을지로 입구)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병원을 설립하게 하였다. 초기 이름은 광혜원(廣惠院)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시작이다. 1886년 3월 29일 학생 16명을 의학생으로 받아들였다. 16명의 학생 중 12명만이 본과로 진출되어 졸업 후 외국에 파견되는 사절단이나 군함의 의사로 활약하였다. 이것이 곧 연세대학교 역사의 시작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 강습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 후 제중원은 캐나다 Toronto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O. R. Avison)박사가 인계 받아 1899년 미국 클리블랜드시의 세브란스(L. H. Severance)씨로부터 기증 받았던 기금으로 1904년 병원을 신축하고 의학 교육기관을 확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세브란스병원이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이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지원과 남. 북 감리교 선교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협력을 얻어 언더우드가 서울 YMCA에서 Chosun Christian College(문과, 수물과, 상과, 농과, 신과)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현재의 교지는 1917년 존·티·언더우스의 기부금으로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의 대지 19만평을 교지로 구입하였다. 

그 시작은 작고 미약하였으나 이제는 세계적인 의과대학이요 세계적이고 국가적인 종합 병원과 최첨단 의료기관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학교, 병원, 교회, 복지 기관 다 마찬가지다. 그 시작은 작고 미약하였으나 그 나중이 창대해 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의 몸된 교회 앞에 쏟아 붓고 머리털로 닦는 헌신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 선한 일, 그 좋은 일, 그 힘껏 주를 섬긴 일들이 후대에 계속하여 기억되고 전해질 것이다.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이란 예수전도단, 하와이 열방대학의 설립자인 로렌 커닝햄의 책 78페이지에 보면 1971년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방문하여 당시 6000명의 주일 예배 성도들 앞에서 설교한 경험을 회고하고 있다. 당시에 교인들 중에서 자동차를 타고 교회에 오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조용기 목사는 심방 다니는데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자전거 한 대만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때였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그 때는 너나 나나 다 가난했다. 그런 대한민국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다. 

그가 김포 공항에 도착해 보니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은 산에 나무가 없었다. 다 베어다가 땔감으로 썼기 때문이었다. 시내버스는 콩나물시루와 같았다. 미어 터졌다. 아파트를 짓기는 했지만 허름하고 날림이었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이제는 내 차례다. 역사에 기억될 만한 헌신을 할 내 차례가 되었다. 후대가 기억할 만한 좋은 일을 하자, 힘껏 하자, 향기 나게 하자. 감동이 됙게 하자. 모든 물질은 사라지고 만다. 인생의 생로병사는 피할 길이 없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좋은 일 한 것만 역사에 남고 후대가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 차례이다. 이제 내가 나서서 예수 앞에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부어 드릴 차례다. 그런 기적의 주인공으로 사순절을 지내고 부활의 새벽을 맞는 주인공이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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