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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왕상17:17-24) 2016. 2. 27 사순절 제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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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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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3-02 23:25 조회 21,066 댓글 0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왕상17:17-24)       2016. 2. 27 사순절 제 3주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 삼년 반 동안 비도 내리지 않고 이슬도 내리지 않으셨다.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기는 이웃 나라인 시돈 땅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려운 세월 동안 하나님은 시돈 땅 사르밧에 사는 과부와 그의 아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다. 엘리야를 선대한 그의 가정에 하나님은 날마다 가루 독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3년 반 동안 그런 기적을 체험한 후에 그 가정에 슬픈 일이 생겼다. 그 여인의 아들이 병이 들더니 그 병의 증세가 심히 위증해졌다. 결국 그 아들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성경은 그 아들의 병명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몹시 중한 병에 걸렸고 결국은 죽고 말았다. 당황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망 사실을 엘리야 선지자에게 알렸다. 그 여인은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 여인이 아들의 죽음의 소식을 알리는 탄식의 내용에 보면 아들의 죽음을 자신이 살아온 날들의 죄(罪)와 연관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죽음은 죄의 값이라는 그녀의 평소의 생각과 신앙을 반영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이 여인이 지난 3년 반 전에 엘리야를 만났고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보며 살았다. 19절에 보면 첫 기적 후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의 집 다락에 엘리야 선지자가 생활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당시의 가옥 구조 중에는 다락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오늘 날로 하면 2층 집의 가장 전망 좋은 2층 꼭대기 공간과 같은 공간이라고 여기면 될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령이 강림하던 마가의 다락방도 120명이 넉넉히 들어갈 정도의 넓고 큰 공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엘리야는 늘 이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날마다 그 가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지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난 것을 원망하고 있다.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는가”, “당신이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는가”하며 원망과 탄식을 쏟아 놓았다. 이 여인의 이 같은 태도는 평소에 그녀가 갖고 있던 신앙 상태를 보여 주는 내용이다. 3년이 넘도록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기적을 보았건만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만 오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질병과 죄와 죽음 이 세 가지는 어느 시대 어느 개인, 어느 가정,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어느 족속들에게 있어서나 보편적인 문제이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살아도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살 수 있는 인생이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우리에게 질병의 회복과 죄의 용서와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오직 예수만이 죄 사함과 영생의 길이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 땅인 시돈의 사르밧에 홀로 되어 외아들과 함께 지내던 이 여인은 평소에 질병과 죽음은 죄의 값이라고 여기며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엘리야 선지자에게 원망하는 말투 안에도 그런 죄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욥기에 보면 재난을 당한 욥을 위로한답시고 찾아 간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 중에도 그런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4:7) 그러나 결코 성경은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일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어느 날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나이가 그의 부모니이까.”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고 설명해 주신 적이 있다. 

본문의 죽었던 아들을 엘리야를 통하여 다시 살려내신 하나님의 기적은 구약 성경에서는 유일한 기적 사건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12살 난 외동딸을 살린 일과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과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내셔서 살리신 기적의 장면을 우리가 안다. 그러나 엘리야 때에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신 이 기적은 구약 성경 시대에 단 한번 있었던 일이다. 

아들의 죽음 앞에 슬퍼하며 당황해 하던 이 여인은 중한 병으로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남으로 죽음은 죄의 값이라는 생각과 신앙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 가정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죽은 아들의 시체 위에 세 번이나 계속하여 몸을 펴서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그 죽었던 아들을 살려 내셨다. 우리는 엘리야가 어떤 방법으로 그 죽은 아들을 살려 냈느냐에 집착하면 안 된다. 성경을 오해하고 곡해하는 이들 중에는 이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그 시간에 그 아들이 완전히 숨을 거두고 죽은 상태는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냐고 반문하려고 한다. 그러나 17절에 보면, “병들어 증세기 심히 위증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고 하지 않았나. 이미 숨이 끊어져 죽었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죽은 아들을 살려 낸 엘리야의 방법이 아니다. 단지 살고 죽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난 후에 그 어머니의 고백을 보라.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인 줄을 알겠노라.”
“나는 이제야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알겠노라.”


죽음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사르밧 과부와 그녀의 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오늘 날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다. 가난, 가뭄, 굶주림, 목마름, 남편 잃은 외로움과 슬픔, 아버지 없는 아들의 설음과 허전함, 병든 아들, 죽고 만 아들,  아들의 숨을 거둔 죽음 앞에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절규...이런 성경의 장면들이 열왕기 상 17장의 전체 내용이다. 

바알과 앗세라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나라와 그 주변 국가인 시돈 땅의 시대 상황을 읽어 볼 수 있다. 당시의 가정들은 너나 나나 별 차이 없이 이 같은 우상 숭배 가운데 계속되는 가뭄 가운데 겪어야 하는 재난과 슬픔과 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하고 한심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셔서 3년 반 동안의 가뭄 중에서도 먹을 것을 해결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 내심으로 그 과부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절절히 깨닫고 고백하게 하셨다. 사고와 질병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항상 멀리에 있지 않다. 
우리나라는 정신 질환이나 우울증을 다른 육체의 병과 다르게 쉬쉬하며 지내 왔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구태여 정신 병원을 찾아 가지 않더라도 동네 내과나 가정의학과에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 정신건강 진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산모의 경우 산부인과나 소아과에서 산후우울증 여부를 검사받을 수 있게 된다. 전문의 상담과 정신질환 의약품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이 확대돼 치료비 부담도 줄어든다. 정부는 지난 2월 25일자로 이 같은 내용의 '정신건강 종합대책'을 확정하여 발표했다. 지난 2011년 정신질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네 명 중 한 명(24.7%)이 정신질환을 평생 한 번 이상 앓은 적이 있다. 이는 조사의 결과일 뿐 드러나지 않은 통계를 합치면 사실상은 더 많은 국민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정신 질환을 앓은 적이 있거나 현재 앓고 있다는 얘기다. 이번 대책은 정신질환자를 조기 발견해 중증 질환이나 자살로 이어지는 걸 막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 정부의 발표이다. 

본문은 중한 병과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한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은 젊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 회복과 희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죽음이 슬픔이지만 오늘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생명의 신비이다. 요즘처럼 사고와 재난과 사건과 어려운 병이 많은 세상에서 매일 매순간마다 이렇게 건강을 유지하며 활력 있게 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축복이며  살아 있는 자의 감격이고 희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 날마다 매 순간마다 산자의 사명을 다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하지만 여전히 누구에게나 질병은 고통이며 죽음은 슬픔이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질병을 환영하겠는가. 그 어느 누가 죽음을 기뻐하겠는가. 자기 자신의 질병과 죽음뿐만 아니라 가족이 겪는 질병의 고통과 죽음으로 인한 사별의 슬픔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아프기는 마찬가지이며 슬프기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겪는 질병의 고통과 죽음의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신앙적인 반응이 다를 뿐이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찬송하며 산다고 해서 아무 질병도 없고, 그 어떤 사별의 슬픔도 겪지 않고 날마다 기쁘고 언제나 즐겁고 항상 좋은 일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우리는 순탄하고 화려하고 남들이 부러워 할 만 한 이력서를 쓸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기란 어느 시대의 그 어느 누구에게나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의 선조는 1600년대에 영국에서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한 이민 가정이었다. 이민 초기에 직조공과 섬유 노동자로 일했다.  나중에 그의 할아버지는 나중에 지역 민병대장으로 일했다. 버지니아의 200에이커의 넓은 땅을 관리하는 지주로 자리 잡았다. 1에이커가 1224평이니까 200에이커는 244,800평의 어마 어마한 땅이다. 할아버지는 나중에 세 아들과 함께 가족 모두 켄터키로 이주하여 훨씬 넓은 땅을 마련하고 살다가 원주민의 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분할한 형제들은 각기 열심히 살아갔다. 그 중에 셋째 아들은 토마스 링컨은 신실한 침례교인이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신앙에 바탕을 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살았다. 춤도 추면 안 된다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노예 제도에 대하여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배심원, 토지 가격 측정원, 지역 순찰대의 책임 등을 맡고 지역에서 존경 받는 활동을 하던 토마스의 600에이커에 가깝던 그 많던 토지는 토지 등기의 어려움이 생기면서 빈털터리가 되었다. 73만평이 넘는 땅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우리가 아는 아브라함 링컨이 7살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은 아무 것도 없이 창고만한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밑바닥 인생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2년 후인 아브라함 링컨의 9살 때에 어머니는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잘 못 마시므로 전염되는 병에 걸려서 눈을 감고 말았다. 그 때 어머니의 나이는 34살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토마스는 가정을 돌볼 아내감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가까이에서 같이 자라난 사라 존스턴을 그 다음해에 새 아내로 맞아 들였다. 새 엄마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자녀들을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새 엄마는 평소에 책 읽기를 즐거워하는 아브라함 링컨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배움은 적었지만 평소에 이야기를 하는 솜씨가 있었던 아버지 덕분에 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으며 아버지에게서 이야기 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은 갑자기 가난해 진 가정 여건으로 인해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만 이후로 더 이상 학교생활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며 20대 초반의 청년기를 맞은 아브라함 링컨은 스스로의 생활 독립을 원하며 부모의 곁을 떠났다. 22살 때에 사업에 손을 댔으나 얼마간 벌었던 돈만 다 날리고 말았다. 23살 때에 주 의회에 진출하려 했으나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 다음 해에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나 일 년 만에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다. 이때 진 빚을 갚기 위해 17년 동안이나 고생을 해야만 했다. 25살 때에는 결혼을 하기로 했던 약혼자가 장티프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 이후로 극도의 신경쇠약증에 걸려 병원에 여섯 달 동안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는 그는 밤낮 없이 노력하였고 27살에 법률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29살 때에 주 의회 대변인 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그는 무려 여덟 번이나 선거에서 패배했고 두 번은 사업에 실패했다. 32살 때 신경 질환으로 다시 고생하였다. 43살 이후로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세 번 연속 낙선하였다. 상원 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또 떨어졌다. 그 다음 해에는 부통령이 되려 했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 상원 의원 선거에서 또 낙선했다. 그에게는 건강이든 사회생활이든 되는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51살에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862년 7월 22일 드디어 남북 전쟁의 끝에 노예 해방을 이루었다. 그 다음 해 1월1일에 공포하여 합법적인 노예 해방과 인권 평등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4년 임기 후에 재선에 당선되었으나 그 다음 해인 1865년, 56살 때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는 열악한 가정환경, 어렸을 적부터 겪은 어머니의 죽음, 누나의 죽음, 자신의 우울증 등을 이기고 실패에 실패, 낙선에 낙선을 거듭한 후에 미국 역사에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의 직책을 수행하고 노예를 해방한 역사적인 대통령의 역할을 마치고 암살당하여 눈을 감았다. 

그런 그에게는 평소에도 늘 질병과 죽음의 위협이 항상 그를 불안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변호사가 된 후에 켄터키의 대 부호의 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아브라함 링컨에게 네 명의 아들들이 차례로 태어났다. 그러나 큰 아들 로버트 링컨 말고는 둘째 아들은 폐결핵으로 4살 때에 죽었다. 셋째 아들은 대통령으로 지내던 때에 워싱턴 DC의 백악관 안에서 11살 때에 열병으로 세상을 앞서 떠나고 말았다. 넷째 아들도 아버지 아브라함 링컨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18살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정 안에서 겪은 이와 같은 연속된 슬픔은 아브라함 링컨 뿐 만 아니라 그의 부인인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 1818-1882) 여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아브라함 링컨의 부인은 세 아들의 죽음, 대통령이던 남편의 암살로 인한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 가운데 지내야 했다. 결국 아브라함 링컨의 부인은 남편이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암살을 당한지 10년 후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던 큰 아들 로버트 링컨의 도움을 받아 정신 병원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64살 나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남들의 겉으로 들어난 화려한 것만 보고 막연하게 부러워하면 안 된다. 

아브라함 링컨은 포기와 좌절을 모르는 오뚝이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상원 의원에 떨어진 후에 “내가 걸어 온 길은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미끄러져 길바닥 위에 넘어지곤 했다. 그러나 나는 곧 기운을 다시 차리고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길이 약간 미끄럽긴 해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항상 새롭게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그의 신앙 정신과 끈질김이 결국은 역사의 인물이 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역사가 조슈아 울프 쉥크는 “아브라함 링컨의 우울증은 매우 심각해 실제 26살 때와 32살 때에는 거의 자살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링컨 자신은 우울증 환자의 참담함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노력하고 일했다. 바로 그와 같은 노력이 그를 빈털터리가 된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변호사, 하원 의원, 상원 의원을 거쳐서 미국 역사의 위대한 대통령이 되게 하였다"고 말했다.

아브라함 링컨은 그런 열악한 환경과 자신을 누르고 있는 우울증의 어려움 속에서도 늠름하게 하나님 신앙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다가 간 신앙의 선조가 되었다. 그가 평소에 즐겨하던 연설문, 기도문, 노예 해방 선언문 등을 정리한 “아브라함 링컨의 신앙생활 10계명”은 이렇다.

1)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이다. 
2)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3) 나는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할 것이다. 
4) 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다. 
5) 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할 것이다. 
6)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할 것이다. 
7) 나는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그분께만 영광을 올려 드릴 것이다. 
8) 나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하며 평등하다고 믿는다. 
9) 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할 것이다. 
10) 나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할 것이다.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지금 나에게 생명이 남아 있음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믿는 성도다운 사명자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겠다. 날마다 성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신자다운 삶을 살다가 때가 되어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그 순간 주님의 품에 안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엘리야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 죽은 아이의 혼이 몸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셨고 살아나게 하셨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알아서 하실 텐데 기도는 왜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과부의 아들이 죽은 소식을 듣고 “어서 장례를 준비하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20절과 21절에 보면, 반복해서 하나님께 큰 소리를 부르짖어 기도한 모습이 소개 된다. 그렇다고 가족의 죽음 앞에 우리도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부르짖는 기도의 힘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이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심으로 시돈 땅의 우상 숭배의 소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이 득실거리는 시돈 땅 사르밧을 중심으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이 점점 번져 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시는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셨다. 20절에 보면, 부르짖어 기도하는 엘리야의 기도 내용  중에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재앙을 내리셨습니까”하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 ‘또’라는 기도가 무엇인가. “그동안 3년 반 동안이나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 재앙을 주시더니 남편 없이 살아가는 이 가정의 아들마저 죽게 하시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파하는 나의 위신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체면이 무엇입니까”라고 부르짖는 기도가 아닌가. 

하나님의 엘리야의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으시고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셨다. 엘리야를 통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 이삭을 나이 100세의 아브라함이 스스로 낳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통하여 그런 일을 하신 것이다. 90세 된 사라가 스스로 아들 이삭을 낳았나. 아니다 경수 끊긴 사라의 태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들 이삭을 주신 것이다. 이삭이 농사하여 한 해에 100배의 소출을 거두었다. 이삭이 그렇게 하였나. 아니다 하나님이 되게 해 주신 것이다. 르호봇의 그 깊고 넓은 샘물을 이삭이 스스로 팠나. 이삭의 종들의 힘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물줄기를 예비해 주신 것이다. 애굽의 바로 왕의 꿈을 감옥에서 불려 나간 히브리 노예 요셉이 스스로 해석했나.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통하여 바로 임금의 꿈을 해몽하셨다. 그리고 그를 높여 80년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셨다. 모세를 통하여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다. 모세를 통하여 광야에 성막을 건축하게 하셨다. 모세를 통하여 계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셨다. 불평과 원망 중에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백성들 앞에서 모세를 통하여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 꼭대기에 달게 하셨다. 그리고 그 구리 뱀을 쳐다보는 자들마다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때에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셔서 요단강이 40년 전의 홍해처럼 갈라서게 하셨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명령하신 방법대로 순종할 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셨다. 기드온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였을 때에 300명의 적은 용사들과 함께 나가서 모래알처럼 많은 미디안의 군대를 격파하여 승리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아갔던 소년 다윗의 물매 돌 한 개로 블레셋과의 전쟁을 끝나게 하셨다. 적장 골리앗을 죽인 것은 사울과 그의 그 많던 군대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의지하던 믿음의 소년 다윗이 던진 물매 돌 한 개로 골리앗을 죽음으로 몰고 가셨다.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여 기적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기도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각색 기사와 이적들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그 많은 솔로몬의 잠언들이 솔로몬 스스로의 지혜의 열매인가. 아니지 않나. 하나님이 솔로몬의 지혜를 다루어 주신 것이 아닌가. 

오늘 날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의 믿음, 엘리야와 같은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물론 기도만 하고 앉아 있다고 역사가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부르짖어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이 이루시는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소망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필요를 따라 새롭게 응답하시고 기적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죽은 자를 살리셨다. 배고픈 광야의 무리들을 배 불리 먹이시고 오히려 풍성하게 남게 하셨다.  바람과 파도라도 잔잔하게 하셨다. 때로는 풍랑이 높게 이는 파도 위로 걸어가셨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밤바다의 배 가까이 걸어가셔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기도 하셨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그 하나님이 지금 세계 처처에 각종 재난과 전쟁과 테러와 사고와 질병과 전염병이 득실거리는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날을 주시고, 새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기적을 보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엘리야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슬퍼하며 낙담하는 주변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들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일 하시는 것을 드러내어 알리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시는 하나님.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사순절의 40일 새벽 순례가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는 부활의 새벽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삼일 만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기독교는 말씀과 기도의 종교이다.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자 그 어머니는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이 말씀은 그 동안 3년 육 개월 동안 이 가정에서 더불어 대접 받고 지내던 엘리야가 하루가 멀다 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얼마나 반복하여 이 집의 어머니와 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말씀의 능력과 권위를 증거하고 전파하였겠는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장면이다. 

이 집의 과부는 예전에 막연하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고백하게 되었다. 이 여인은 자신이 겪었던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확실해지게 되었다. 로마서에 보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며 이방 선교 현장을 누볐던 사도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라고 하였다. 

내일 모래는 3.1절 97주년이 되는 날이다. 2019년이 되면 3. 1 운동이 있었던 100주년을 맞게 된다. 일제의 식민지가 주는 우리 민족의 아픔과 슬픔과 분노와 저항이 무엇인가. 최근까지 계속되어 온 전쟁에 끌려가서 성 노예 취급을 받았던 당시의 젊은 여성들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가 겪는 슬픔과 한이 무엇인가. 독립유공자유족회 등 120여 민족단체들로 구성된 ‘8.15광복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지난 해 광복절 날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과 현충사 앞 광장에서 ‘광복70주년 8.15광복절 민족공동행사’를 가졌다. 식민지 세월 동안 일제에 의해 600만 명 이상 이 끌려간 우리의 선조들 중에서 200여만 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유해가 아직도 일본 땅에 흩어져 있다며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역사는 구한말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얼마나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나.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의 검객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고 불태워 졌다. 1895년 10월 8일 새벽의 사건이었다. 다음 해인 1896년 2월 11일, 불안과 초조 가운데 국사를 돌 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하게 지내던 고종은 한양의 덕수궁 곁에 자리 잡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지내게 되었다. 민비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후에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후의 嚴妃)을 통해 고종에게 친 러시아 세력들이 접근했다. 대원군과 친일파가 고종의 폐위를 공모하고 있으니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 가서 지낼 것을 고종에게 종용하였다. 민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날마다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고 말았다. 한편 러시아 측은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한양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2월 11일 새벽에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가 타는 교자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덕수궁 곁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숨겼다. 이것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이란 것이다. 쓰러져 가던 조선 말 역사의 한 장면이다. 세월은 흘러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더 이상 막아 내지 못하고 식민지가 시작되었다. 36년 식민지의 피해는 일일이 다 나열 할 수조차 없다.

중국의 수도 남경(난징)이 함락된 후 마쓰이 이와네 대장 휘하의 5만 여 일본군은 1937년 12월 중국인 포로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강간·학살·약탈을 자행했고 기관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의 방법으로 학살했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 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 역사적 만행을 저지른 장본인들의 정치 세력들은 여전히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시인하려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당시의 아합 임금 당시의 북 왕국 이스라엘이 그런 한심한 때였다.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도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는커녕 점점 더 사악해져만 갔다. 그 당시에 시돈 땅에 피신하여 사르밧 과부의 집에 머물던 엘리야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기적은 무엇을 말씀하는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날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하여 해방을 맞고 6. 25의 참상을 딛고 폐허와 가난을 딛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가. 꺼져 가는 등불과 같던 우리 민족, 상한 갈대처럼 힘없게 무너져 가던 우리 나라가 어떻게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는가. 가까운 곳 휴전선 너머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극악한 정권이 지배하고 있어도 이렇게 주일 날 평화롭게 예배드리고, 하루 하루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 갈 수 있는 도우심이 어디에서 오는가. 중국, 러시아, 일본, 북한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미국의 힘인가. 중국의 도움인가. 사드의 힘인가. 항공모함의 힘인가. 잠수함의 힘인가. 한 대에 4,400억 나가는 최첨단 전투기 F-22의 힘인가. 우리나라 육해공군의 힘인가. 물론 다 중요하고 다 필요하다. 

반대로 북한이 여전히 저 체제를 버티는 힘은 무엇인가. 핵을 보유했기 때문인가. 수소 폭탄 때문인가. 미국 워싱턴DC까지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 때문인가. 

누가 우리를 지킬 수 있나. 누가 우리의 요새와 피난처와 도움이신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이든 민족이든 어떻게 단 하루라도 안전하게 보존 될 수 있나.

사르밧 여인이 원래 남편이 없었나. 원래 가난했었나. 원래 아들이 없었나. 이 과부의 힘으로 남편을 살려 낼 수 있나. 죽은 남편이 남편 없는 이 가정의 경제를 해결했나. 삼년 육 개월의 가뭄 가운데 그 과부와 아들의 먹을거리를 누가 해결 해 주었나. 가루독이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이 마르지 않게 한 힘이 누구에게서 왔나. 죽었던 아들이 어떻게 살아났나. 

그러므로 왕이라도 자랑하면 안 된다. 세계적인 재벌이라도 교만하면 안 된다. 비교하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산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시는 일을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고 진실한 말씀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시돈 땅 사르밧 과부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던 이방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신앙의 고백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이제는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우리 모두 이런 신앙의 고백이 있는 인생, 이런 가족, 이런 가정, 이런 공동체, 이런 세상을 가꾸며 살아가자. 

삼성의 이건희(1942-) 회장은 지난 해 주식 배당금 최고액을 받았는데 그 금액이 1,772억 원이다. 그러나 그런 돈으로 생명을 단 1시간이라도 일 분 일 초라도 건강하게 회복시킬 수 있나.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인생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 사람은 정치권력, 끝이 없는 경제의 힘, 지식의 만용, 명예와 인기의 늪과 수렁에서 벗어 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겸손해야 한다. 

남편 없이 살던 과부가 겪은 슬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찾던 사르밧 여인의 모습처럼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떠났던 혼이 몸에 돌아 와서 다시 살아나듯이 영이 떠나고 혼이 나간 듯이 정신을 잃고 살아가는 허망한 몸짓, 허탄한 손짓을 멈추어야 한다. 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넋을 잃고 살고, 정신 나간 자처럼 사는 세속에서, 탐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참된 나의 나 된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을 되찾고 회복하여야만 한다. 사르밧 여인은 가난과 질병과 죽음과 죄의 공포 가운데서 죽었던 아들을 살려 주신 하나님을 재발견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백하였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그렇다.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시고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말씀이시다.

풀은 마른다. 화려하던 꽃도 시들고 만다. 오직 영원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뿐이시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그래야 영원을 누리며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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