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꿇고 비는 기도(엡3:14-21) 2015. 11. 22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도하는 사도였다. 사울이 다메섹의 체험 후에 두 눈이 가려져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사흘 동안 어둠 속에서 지내야 했다. 그 사흘 동안에도 사울은 다메섹의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었다.(행9:11)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도 늘 하나님께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은 전통을 따라서 일어서서 기도하였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도 서서 기도했고 세리도 서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 서서 드리는 기도도 태도와 내용이 너무나 달랐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서서 기도하기는 했으나 그 태도가 바리새인과 달랐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본문의 바울은 서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란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순종하는 태도의 기도자세이다. 바울은 ‘아버지 앞에’ 기도한다고 했다. 여기서 ‘앞에’라는 단어는 ‘친근한 사람과 아주 가깝게 마주 대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하였다. 하늘에 있는 족속이란 천사들의 세계를 말씀한다. 땅에 있는 족속이란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말씀한다. 창세기 2장 20절에는 가축이나 새나 짐승의 이름을 아담이 이름 지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우주만물의 모든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으신 아버지이시다. 집에서도 자손이 태어나면 부모가 이름을 지어 부르지 않나. 하나님은 이름을 주신 아버지이시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147:4)고 하였다.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사40:26)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의 이름을 지어 부르셨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의 이름을 비롯한 그 수많은 별들의 이름과 별자리의 이름을 일일이 지어 부르셨다. 그 별들의 이름이 자동차의 이름에도 사용되지 않았나. 수성(Mercury), 금성(Venus), 화성(Mars), 목성(Jupiter), 토성(Saturn), 천왕성(Uranus), 해왕성(Neptune), 명왕성(Pluto) 같은 이름들 중에 말이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빌며 기도한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이 무엇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는 기도.
바울이 늘 기도하던 그 기도의 힘은 성령이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기도하였다.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속사람의 강건함’이 무엇인가. 육체에 속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속성을 말하는 겉 사람에 반대되는 표현이 속사람이다. 그러므로 ‘속사람’이란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활동하는 인격을 다스리는 영의 사람 즉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인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으로 채워져서 강건해 지기를 기도하였다.
요즘 여러분은 무슨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고 있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살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간구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엡3:20)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영광의 풍성함은 잠시 잠간 있다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영광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대대로 영원무궁한 영광”(엡3:21)이시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은혜와 지혜와 총명”의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영광이다. 요한 계시록의 말씀처럼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계4:12) 영광의 풍성함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매사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기도 생활을 하여야만 한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기대와 바람을 미리 마음에 정해 놓고 하나님을 내 요구에 끌러 내리는 그런 인위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성도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속사람에 날마다 순간마다 거하신다. 그리고 성령을 환영하는 믿음의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은 다스리신다. 그리할 때에 그 성령님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풍성하게 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담대하여야 한다.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야 한다. 아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는 신앙고백 위에 기도하여야 한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16:13)고 하였다.
출애굽기 17장에는 광야 길을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가는 길을 막아섰던 아말렉 족속과 전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르비딤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모세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싸울 만한 자들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도록 명령하였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피곤해 지자 모세의 손이 내려 왔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기고 내려오면 지는 것이었다. 그 때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놓고 그 위에 모세가 앉게 하였다. 그리고 모세의 치켜 든 손을 아론과 훌이 양편에서 잡고 함께 치켜들고 기도하였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였다.(출17:12) 감동적이지 않나. 나이 80이 넘은 모세가 그렇게 하루 종일 손을 들고 기도하고 모세보다 세 살이나 나이다 더 많은 형 아론이 그 곁에 서서 서로 손을 붙잡고 하루 종일 해가 지기 까지 서로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 맞은편에는 훌이 그렇게 하였다. 훌이 누구인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남편인 매형이 아닌가. 그 당시의 모세와 아론과 훌은 모두가 다 속사람에 강건함을 덧입었던 기도의 사람이요 성령 충만의 사람이요 여호와의 영광의 풍성함으로 가득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기도하는 인생이 복을 받는다. 기도하는 가문이 흥왕해 진다. 기도하는 형제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는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의 풍성한 능력을 통하여 속사람이 강건해 지도록 은혜를 내려 주신다.
성령은 기도를 기도되게 하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 출애굽을 위하여 바로 임금을 만났던 모세, 출애굽의 선봉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홍해를 향하여 지팡이를 내어 밀 당시의 모세, 시내 산꼭대기에서 사십일을 금식하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지냈던 모세의 모습은 속사람이 강건하였던 성령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덧입었던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이는 요단강을 건널 당시의 여호수아, 여리고 성을 돌던 때의 여호수아, 아이 성 전투의 실패 후에 아간의 범죄 사건을 심판하고 다시 아이 성 공략을 위하여 앞장 설 당시의 여호수아나 헤브론의 산악을 점령해 들어가던 당시의 갈렙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강건한 속사람의 모습을 만나 보게 되지 않나.
이는 사울 임금을 피하여 광야와 동굴로 피하고 숨던 때의 다윗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천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던 솔로몬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이사야, 갈멜 산꼭대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우상을 섬기던 자들과 대결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던 엘리야의 모습도 그렇지 않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의지하여야 한다. 그래야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 질 수 있다.
비겁하게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고 도망가 버렸던 베드로가 어떻게 하루에 3,000명씩을 회개하게 하는 말씀의 사도가 되었는가. 성령 충만 받기를 기도하였기 때문이 아니가. 성령 받고 나니까 베드로가 담대해 졌다. 기도하니까 베드로의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졌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속사람이 강건해야 세상의 죄악을 이기며 살 수 있다. 겉 사람이 강해지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거, 탐심에 붙잡혀 살게 된다. 그 나중은 개인도 불행해지고, 가정도 기울고, 주변에 심각한 해와 악을 지지르게 된다. 그러므로 속사람의 강건함으로 겉 사람의 강건을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만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한 능력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는 기도.
16절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했고, 17절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이것이 사도 바울의 무릎을 꿇고 빌던 기도의 또 다른 내용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사람인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그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계셔야만 한다. 믿음 생활이란 마음에 예수로 가득하게 채우는 생활이다. 그리스도를 마음 가득하게 모시고 살아가는 생활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불교는 마음을 비우는 것을 강조한다. 빈 것 즉 ‘허’(虛)를 말하고 ‘공’(空)을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마음속을 비우는 종교가 아니라 채우는 종교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하게 채우고,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성령으로 가득하게 채우고 받은 은혜와 감사와 소망으로 가닥하게 채우는 생활이어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가득하게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내 마음을 비워 두면 그 빈 마음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와서 내 마음을 세상 잡념으로 꽉 채우고 만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중에 내어 쫒긴 마귀가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거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다시 자신이 쫓겨났던 그 사람의 마음을 찾아 왔다. 들여 다 보니 그 마음이 텅텅 비어 있었다. 일곱 다른 친구 마귀를 데리고 들어가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결국은 그 사람의 마음의 형편이 처음과 비교해서 더욱 더 형편없어 지고 말았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음을 비워 두면 안 된다. 성령으로 가득하게 채우고 예수님 생각으로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
그렇다. 마귀의 생각이 어느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으면 그 마귀의 생각으로 인해서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로 그 마음에 가득하게 채우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잔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실락원>에서 “인간의 마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옥이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로 가득하게 채우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마귀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은 그의 마음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고 계시도록 주님을 영접한 삶을 지속해 나가야만 한다.
가롯 유다는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서 멀리하고 사탄을 가까이 했을 때에 예수를 팔아 버리는 불행한 제자가 되고 말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들의 소유인 땅을 팔아 일부는 감추고 일부는 사도 베드로의 발 앞에 가져가지 않았나. 그런데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책망하였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네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로다.”(행5:3-4)고 책망할 때에 아나니아는 베드로 사도의 발 앞에서 엎드러져서 죽고 말았다. 아나니아의 혼이 떠났고 사람들은 아나니아의 시체를 그 시간으로 처리해 버리는 불행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이 소문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졌고 젊은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싸서 매고 나가 장사하였다. 세 시간 쯤 후에 나타난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도 남편처럼 베드로 사도 앞에서 거짓말을 하였다. 책망을 들을 때에 부인인 삽비라도 베드로가 보는 앞에서 혼이 떠나고 죽고 말았다. 그 후에 “온 교회와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하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망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마음에 진실이 떠나고 거짓과 속임의 영에 사로잡히면 충성하고도 불행해지고 헌신하고도 불행해 지는 교훈을 주지 않나.
신앙생활이란 믿음으로 말미암는 생활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살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의 많은 분량은 믿음으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믿음 좋은 신앙의 선진들의 일화로 가득하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나.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으로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은, 믿음으로 요셉은, 믿음으로 모세는” 이라고 소개하지 않나. 요셉의 형제가 열둘이나 되었음에도 성경은 다른 형제들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던 요셉의 생애를 믿음으로 산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의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11:22)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17살에 10명의 배 다른 형제들에 의해서 빨가벗겨진 채 애굽에 노예로 팔리어 갔던 요셉이 나이 30에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나. 성공하고 출세한 것 아닌가. 그것도 몇 개월이나 몇 달 만에 자리를 비우고 내려오는 총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돌아갈 때인 110살까지 자그마치 80년 동안 당시의 거대한 강국이었던 애급의 총리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그의 정치적인 지위, 역량, 치적, 공로, 부요함 뭐 그런 것들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믿음으로 요셉이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라고 하였다. 이것이 믿음이란 말이다. 장차 요셉의 후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며 요셉의 후손이며 요셉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의 땅에서 숫자는 많아졌다. 그러나 그 노예의 땅에서 노예 생활에 만족하며 살 것이 아니라 장차 애급을 떠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갈 날이 다가 올 것에 대하여 믿음을 갖고 말하였다는 점을 요셉의 믿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며 살아가는 믿음 생활이란 세상적인 그 어떤 신념이나 자기 신조를 갖고 살아가는 그런 정도의 차원을 뛰어 넘는 것이다.
성도의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하였다. 성도의 믿음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지고 귀한가. 예수님 우편의 강도는 비록 십자가 처형을 받을 강도였지만 그의 곁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영혼을 그에게 맡기는 고백을 하지 않았나. 그 때에 예수께서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천국의 영생하는 삶으로 초청하지 않으셨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은 마르틴 루터를 1517년에 종교 개혁자로 부르신 말씀이요 221년 후인 1738년에 요한 웨슬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말씀이다. 마르틴 루터는 한 때에 금식과 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많은 신도들이 유리 가루가 뿌려져 있는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릎에서는 피가 절절 흐르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도 그런 고행에 참여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평화는 없었다. 그러나 한 참 동안 계단을 기어오르던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이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10:38)는 말씀은 히브리서에도 나온다. 그렇다.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는 기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임재를 체험하며 사는 자들이다. 이 말씀은 로마서에서 만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미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합2:4)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자들이다.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롬5:1), 성도는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엡2:8), 성도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갈3:26), 성도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롬12:3), 성도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들이다.(딤전3:9)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사업 하는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가면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박물관이 있다. 헨리 포드는 미시간의 매우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후에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하나님 안에서 잘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말이 끄는 마차를 보았다. 그는 문득 속으로 생각하였다. “말이 끌지 않고도, 말이 없이도 달려 갈 수 있는 마차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자동차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헨리 포드는 어린 시절부터 유별나게 기계 만지기를 좋아했던 그는 27세 때에 디트로이트로 이사하였다. 에디슨 전등회사에 입사하여 그의 성실성이 인정되어 2년 만에 기계주임이 되었다. 이때부터 포드는 가솔린 엔진 실험에 정열을 쏟기 시작하였다. 33세 때인 1896년 6월에 마침내 제1호차를 가동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6년 후에 시속 72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로 개량되었다. 10명의 투자자들이 몰려들었고 자동차 생산을 시작하였으나 채 일 년도 되지 못해 도산되고 말았다. 다시 그 다음 해인 1903년에 디트로이트에 포드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 생산 회사를 직접 설립하였다. 그러나 자동차 값이 너무나 비쌌고 결함도 많았다. 연구에 연구를 계속한 끝에 5년이 흘러갔다. 드디어 1908년에 일 년 동안 6,850대를 만들어 내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한 해 생산량 일만 대를 돌파하였다.
고종 황제가 1903년에 수입해 온 자동차도 ‘T형 자동차’인 그 때쯤의 것이었다지만 전해져 오지 못하여 아쉽다. 그 후 1911년 두 번째로 고종황제가 타기 위해 영국으로부터 다임러 리무진 한 대를 도입했다. 고종의 그 자동차는 다행스럽게도 경복궁 고궁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그 후로 자동차 생산 기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01년 전인 1914년에는 컨베이어 벨트 조립 시스템을 통해서 2분마다 자동차 한 대 씩이 조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일 년 동안에 730,000대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포드사의 자동차 생산량은 미국 전체의 60%를 차지하게 되었고 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디트로이트 포드 기념박물관에는 헨리 포드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사진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꾸던 사람이요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렇다. 꿈과 믿음 이것처럼 귀한 자산은 없다. 포드는 제 1차 세계대전 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슨과 친구처럼 지냈다. 그들 서로는 매일 성경 한 장을 꼭 읽자고 서로 굳게 약속했다. 세월이 지난 후에 헨리 포드는 그 일을 회상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약속을 지켰어. 그 친구 역시 죽을 때까지 그 약속을 성실히 지킨 것으로 알고 있어.”
강철 왕 데일 카네기가 어느 날 자동차 왕으로 불리던 헨리 포드를 만나러 그의 회사를 방문하였다. 당시 78세였던 그는 사업에 지치기는커녕 젊음과 활력이 왕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카네기는 그에게 물었다. "사업을 하면서 고민하는 일은 없었습니까?" 그러자 포드는 “없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내 의견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책임지시는 한 모든 일들은 결국 가장 좋은 결과를 맺게 될 것을 나는 늘 믿습니다. 안 되는 일은 될 때까지 다시 하면 됩니다. 나는 고민과 염려를 늘 주께 맡겨 드리고 기도하며 지혜를 구합니다. 나는 주님만을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요즘 무슨 꿈을 갖고 살아가고 있나. 요즘 어떤 믿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꿈과 믿음이 만나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기도하며 믿음으로 실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포드 자동차 회사의 발전기가 고장 났다. 자동차 생산이 자주 멈추게 되었다. 어려 기술자가 달려들어도 쉽게 해결이 나질 않았다. 발전기를 설치한 원 기술자인 스타인 맥스를 초청하였다. 몇 분 동안 기계의 이 곳 저 곳을 점검하고 두드리고 하더니 문제를 해결하였다. 나중에 청구서가 날아 왔는데 10,000불이었다. 너무 비싸다고 여긴 헨리 포드가 메모를 적어서 보냈다. 청구서의 내역이 과하니 자세하게 보내달라고 하였다. 내용인 즉은 “발전기를 망치로 두드려 본 비용 10불, 어디를 어떻게 두드려 봐야 할지를 안 비용 9990불, 합계 10,000불”이라고 적혀 있었다. 같은 기술자 출신인 헨리 포드는 ‘씨이익’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기쁜 마음으로 10,000불을 송금하였다.
“Coming together is a beginning, keeping together is progress, working together is success."(함께 모이는 것이 시작이고 계속 함께 하는 것이 진보이고 함께 일하는 것이 성공이다.) 이는 헨리 포드가 남긴 유명한 말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말도 남겼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도 하기 마련이고 실패를 하기 마련이다. 실패가 없는 성공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실패에 좌절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헨리 포드가 자명하게 밝히는데 실패란 기회다.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회란 말이다.” 성경적이지 않나.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384장 찬송 “나의 갈길 다가도록”에 보면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게 하리라....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성령 감화 받은 영혼 나라 갈 때까지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라고 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음에 계신 삶을 살아가자. 아멘
사랑으로 말미암아 비는 기도.
계속되는 사도 바울의 기도의 주제는 ‘사랑’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하-19)
그 동안 계속하여 표현해 온 바울의 기도 내용으로 하면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그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렇다.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사랑은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이 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난 외동딸의 죽음을 다시 살리셨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살리셨다. 죽은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무덤에서 불러 내셨다. 죽은 자를 살려 내시는 예수의 능력은 사랑의 능력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게 보여 주신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믿음은 영생하게 하시는 믿음이다.
사랑에는 능력이 있다. 물을 주고 관심을 갖고 사랑해 주면 시들해져 가던 화초도 다시 활력을 되찾는다. 사랑해 주면 개와 고양이도 주인의 사랑을 안다. 사랑해 주면 인간관계에도 기적이 일어난다. 가족에 대하여 직장 선후배 동료들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성도들 간에 서로 서로 사랑해 주어야 한다. 칭찬과 인정과 격려와 배려와 돌봄과 나눔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켄 블랜차드의 책 <칭찬해 주면 고래도 춤을 춘다>의 줄거리가 그런 내용이 아닌가. 칭찬이 무엇인가. 사랑해 주고 인정해 주고 격려 해 주고 알아주는 것이다. 이런 것은 어른이든 아이이든 누구나 다 좋아한다. 조련사가 칭찬해 주면 3톤짜리 돌고래도 기쁜 마음으로 물에서 점프해 가면 온갖 재주를 다 부린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하시는 죽음으로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죄 사함과 영생하는 천국 백성으로 삼으셨다. 예수는 죽임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아들이 아니셨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죽음은 생명을 이기지 못한다. 사망의 쏘는 것으로 생명을 이길 수는 없다. 생명은 영원한 것이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듯이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능력,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다 담겨져 있으시다. 예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그 모든 능력의 근원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는 사도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 사랑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이 은하계의 광대무변한 우주 보다 넓고 이 세상의 저 끝에서 이 끝까지 보다 길다. 하늘 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이루 다 측량할 수가 없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제 1절)
그렇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랑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역사하시는 능력이시다. 우리를 향하신 그 크신 사랑, 그 크신 능력, 그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한 것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부활의 그 능력, 승천하신 그 영광,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언약은 영원불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그 영광을 영원무궁하게” 찬송하고 감사하고 높여 드려야만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