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받은 구원(엡2:1-10) 2015. 11. 1
<회색벽에 쓴 독백>(이본 목사 저)이란 수기를 써서 세상에 알려진 이가 있다. 저자는 미국에서 살인 사건을 저질렀고 22년 동안 교도소 생활을 하였다. 그는 미국 생활 중에 불법 체류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아내는 결혼 2개월 만에 영주권을 받자마자 남편에게 쪽지 한 장을 남겨 놓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여성은 영주권을 받기 위해 그 남자와 위장 결혼을 하였던 것이다. 남편은 변호사를 통해서 ‘결혼무효소송’ 서류를 접수하고 아내를 찾아 나섰다. ‘결혼무효소송’으로 해야 자기를 이용해서 사기로 결혼하고 영주권만 받아 가지고 도망간 아내에 대한 복수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망간 아내는 LA 시내에서 활동하는 갱들을 매수해서 오히려 남편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갱들의 온갖 협박을 받아가며 날마다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초조한 하루하루를 지냈다. 나중에는 한국에 피신하여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아내는 과거에 시어머니였던 자신의 어머니가 사시는 LA의 아파트에 갱들을 데리고 찾아 와서 온갖 협박을 다하였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걔 어디 갔어요. 어디다 숨겼어요. 한국 갔다고요. 분명하게 전하세요. 결혼무효 소송을 취하하지 않으면 후회할 일 생길 줄 알라고 전해 주세요. 아셨지요.”
어머니도 불안해서 한 순간도 살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다시 LA로 돌아간 그는 권총을 사서 몸에 지니고 다녔다. 총알도 14발씩 갖고 다녔다. 하루는 술을 퍼 마시고 도망간 아내를 찾아 헤매던 중에 LA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낯 설은 남자와 마주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그 아내를 발견하였다. 당황해 하는 아내의 곁으로 다가 서려 하자 그 맞은편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남자가 일어서며 “당신 누구야?”하고 물었고 “응, 나 저 여자의 남편이야”하는 순간에 그 상대편의 남자는 이 남편의 허리춤을 붙잡았고 순간 권총의 총구는 맞은편에서 당황하며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아내의 머리를 향했다. “땅 땅 땅”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아내는 머리에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쓰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경찰이 현장으로 달려 왔고 자신은 체포되고 말았다. 자기의 허리춤을 잡아당기던 그 남자는 어느 순간에 현장에서 도망쳤다. 검사와 변호사의 법정공방이 2년 4개월간 계속된 끝에 결국 무기형을 받고 22년 형을 살다가 출소하였다. 중간에 자살 시도도 하였다. 감기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타이레놀 100알을 모았다가 한 꺼 번에 먹었는데도 죽지 않고 일주일 만에 병원에서 다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또 한 번은 교도소 방 안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려다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 “왜 나를 믿지 못하고 그런 선택을 하느냐”고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을 체험한 이후 그의 믿음은 돈독해지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기수들을 가두는 4급 교도소로 이감 되었다. 죄수들 간의 빈번한 살인, 마약, 동성연애와 성폭행과 극심한 인종 차별이 계속되었다. 그는 수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사방이 꽉 막힌 장벽, 그런 곳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내가 예수를 영접하고 믿음을 가진 순간 막혔던 하늘이 열려 있음을 봤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순간 하늘이 열리며 나는 비록 교도소 안에 갇혀 있었지만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22년 만에 미국 교도소에서 출소한 그는 2007년에 한국으로 돌아 와서 강원도 횡성에 있는 ‘세계 십자가 선교회’에 입소하였다. 인천공항에서 강원도 횡성으로 달려 가는 밴 안에서 그는 시편 39편 말씀이 생각났고 묵상하게 되었다. 시편 39편은 다윗의 시편이다.
13절 분량의 시편 39편 말씀 중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 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39:4),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시39:8),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39:13)라는 말씀이 계속된다.
횡성의 선교회에 들어간 그는 그 곳에서 철저한 신앙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8년 세월이 흘러갔고 피종진 목사가 운영하는 ‘국제 총회 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친 후에 목사가 되었다. 이본 목사에 관한 일화이다. 그는 지금 한국과 미국의 교도소 수감자들의 재활과 기독교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매진하고 있다. 6년 전인 2009년에 믿음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미국의 불법 체류자, 미국에서 불법 체류하다가 한국으로 추방당하는 이들, 마약 사범, 노숙자,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 등을 상대로 재활을 돕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교도소, 구치소 등등 찾아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사람은 백번, 천 번 변화 될 수 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했다. 핍박자 사울도 이런 변화의 은혜를 체험한 이방의 전도자 사도 바울이 되었다.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탕자였다. 일찍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타국에 갔다. 허랑방탕하며 주색잡기를 즐겼다. 돈 있을 때에는 친구도 많고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 많던 돈 다 떨어지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말았다. 남의 나라에서 노숙자가 되고 만 것이다. 돼지우리에 누워 밤하늘을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도 먹게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돼지만도 못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 그가 회개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마을 입구에 나타났다. 그를 먼저 알아 본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환영하였다. 집에 데려다가 목욕시켰다.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지고 송아지를 잡아 동네 사람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출세하고 돌아 온 아들도 아닌데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하였다. 들에서 큰 아들이 돌아 와서 보니 집안에서 풍악 소리가 나고 춤을 추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종을 불러서 영문을 물었다.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니 아버지가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큰 아들은 이 장면을 한심하게 여겼다. 불만이 목구멍에 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가 화가 나서 집 안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아버지가 나와서 큰 아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그러자 큰 아들은 “나는 늘 아버지의 곁에서 여러 해 수고하고 애를 썼지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친구들과 잡아먹게 하신 적이 없던 아버지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니까 그를 위하여 송아지를 잡으셨습니까.”하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 때 아버지가 대답하시기를 “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눅15:31-32) 형편 없이 살던 탕자 인생인 둘째 아들을 아들로 받아들인 것은 전적인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었다. 그렇다.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타락한 인간이 허물과 죄 가운데 죽었던 상태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변화된 모습과 예수를 만난 성도의 사명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
1-3절까지의 내용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던 인간의 상태를 말씀한다.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하였다. 허물과 죄에 빠진 인간은 세상 풍조를 따르며 산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른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산다. 이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다. ‘허물’이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위반(違反) 상태를 말하고, ‘죄’란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난 상태’를 일컫는다. 결국은 같은 상태를 조금 달리 표현한 것뿐이다. 1절에서 말씀하는 ‘죽었던’이란 ‘죽음’의 상태는 죄의 결박, 질병의 고통, 공동체로부터의 소외, 포로 생활 등을 의미하는 영적이며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분명한 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비참한 상태를 말한다. 2절의 “그 가운데서 행하여”라는 상태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모든 모습을 포함하는 것이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는 종교 혼합주의를 비롯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이 세상의 죄악을 가까이 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라는 내용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여 인간에게 불행을 불러 오는 영적 상태를 말한다. 즉 사탄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세 층으로 구분하여 첫 째 층은 인간의 거주지이고 둘째 층은 사탄인 마귀의 거주지이며 셋째 층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믿었다.
마태복음 16장, 마가복음 8장,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동일한 사건이 기록된다. 그 때 예수께“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축복하셨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
이와 같은 대단한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장차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였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공중 권세를 잡은 자”란 마귀 세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마귀의 일이란 하나님의 일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6장 2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였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못하게 하는 모든 일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의 일.”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내용을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다시 언급하였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자녀의 삶을 살아가려면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대적하여 이겨야만 한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또한 이 사탄의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이 세상의 악한 일의 배후에는 마귀의 강력한 역사와 훼방이 분명히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누구나 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1-3절에서 언급하는 영적 결박에서 반드시 벗어나야만 한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으며 허물과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힘은 무엇인가. 그 비결이 무엇인가. 4절이 대답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하심이 아니면 구원 받을 인생이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여기서 말씀하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다. 찬송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의 후렴에 보면,
“그 큰 사랑 내 맘 속에 충만하게 비칠 때에 찬송하네
그 큰 사랑 내 맘 속에 화평함과 기쁨 주네 그 큰 사랑”
이라고 하였다.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은 큰 사랑이다. 그 사랑은 이 세상의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갚을 수도 없는 사랑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그 사랑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큰 사랑이다.
304장 찬송가인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1절 가사는 이렇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 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 찬송가의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이는 목사이다. ‘프레데릭 마틴 레만’(F.M. Lehman,1868-1953)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농촌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교회가 너무 약하고 형편이 어려워서 틈틈이 공장에 가서 일을 하고는 하였다. 1917년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Pasadena)에 있는 치즈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공장에 치즈 주문이 많이 들어와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그는 바쁘게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고, 공장 마당 한쪽에 앉아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 준 도시락을 꺼냈다. 그는 일이 고단하고 힘이 들었지만 도시락을 싸 준 아내에게 감사했고, 가난하지만 굶지 않게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더니 메모지 한 장이 있었다. 그 메모지에는 유대인이 지은 찬양 시 ‘하다무트’(Haddamut)가 적혀 있었다. 이 가사는 독일 봄스(Worms)에 있는 유대인 회당의 찬양대 지휘자였던 마이르 벤 이사크 느호라이(Meir Ben Isaac Nehorai)가 아랍어로 A. D 1050년에 쓴 유대교 찬양시이다.
레만 목사 부부는 평소에 은혜로운 말씀이나 좋은 글이 읽으면 메모해 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레만 목사의 아내는 ‘하다무트’ 시를 읽고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 시를 베껴 써서 남편의 도시락 안에 넣어 보낸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하늘 전체를 양피지로 삼고, 땅위의 모든 초목을 펜으로 삼아, 온 세상의 물을 다 잉크로 하여, 온 인류가 필기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쓸 수 없다.”
얼마 후에 이 시는 레만 목사의 찬송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3절 가사로 다시 다듬어져서 불리어지게 되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렇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풍성하신 사랑이며 그 크신 사랑이며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이시다. 성도들이 받아 누리는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려 주신 새 생명의 기쁨과 환희를 누리는 구원이다. 5절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그 은혜는 글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며 은혜인 것이다. 그 은혜를 체험한 성도라야 신앙생활에 활력이 있다. 그냥 누구를 위하여 마지못해 믿어주는 것처럼 신앙 생활하는 차원이 아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그런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은 감사가 다르고, 찬송이 다르고, 기도가 다르고, 헌신이 다르고, 복음 전파의 태도가 다르고, 간증이 다를 수 밖에 없는 법이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발명 왕 중의 한 사람인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는 흑인 노예 출신이다. ‘땅콩 박사’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흑인 노예의 아들로 미주리 중에서 태어났다. 태어 날 때부터 몸이 너무나 허약하였다. 걸핏하면 열병을 앓았고 기침을 달고 살았다. 그가 어렸을 때인 1864년에 미국은 남북 전쟁 중이었다. 노예 납치범들이 그의 집에 습격하여 그의 어머니와 어린 그를 납치해 갔다. 납치범들은 조지 워싱턴 카버'의 엄마를 돈을 받고 팔아 넘겼다. 그러나 허약하게 생기고 병든 어린 아들은 쓸모없다고 여겨서 길 가에 버려 버렸다. 다행히 누군가의 눈길에 띄어서 죽음을 면하고 사람의 손길을 받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났다. 그는 자기 부모는 잃었지만 믿음의 새 양부모를 만나서 사랑을 받고 자라났다.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그는 하나님을 잘 믿으며 열심히 공부하였고 연구에도 몰두 하였다. 그 후 그는 미국 역사에 기록되는 신화적인 식료품 발명왕이 되었다.
그가 발표한 것은 땅콩으로 만든 제품만도 땅콩버터를 비롯하여 145가지이다. 고구마 제품이 100가지이다. 그리고 피칸 제품이 60여 가지이다. 쓰레기처럼 길가에 버려졌던 병든 어린 아이가 커서 역사적인 공헌을 하는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가 된 것이다. 그는 음악, 미술, 요리, 식물학, 수의학 등등 다재 다능한 학자였다.
그가 연구하여 많은 것을 개발하여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되자 한번은 미국 의회에서 그를 초청하였다. 10분간의 연설을 허락 받은 그의 연설은 박수갈채를 계속하여 받았고 결국은 예상 밖의 시간 연장으로 기립 박수를 받으며 1시간 45분간 이어졌다. 한 상원 의원이 “그 많은 것들을 다 어디서 배웠소.”하고 묻자. “책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책 이름이 뭐요”하고 묻자 그는 “성경책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인생의 아름다움은 젊은이에게 애정을 갖고 배려하는 일과 노인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고 인정을 베푸는 일과 힘겨워 하는 이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대하는 것과 약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정도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워싱턴 카버의 생애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조그만 먹을거리인 땅콩 속에도 엄청난 것들을 숨겨 놓으셨다.
둘째, 조지 워싱턴 카버는 노예 납치범들에게 조차 버림받았던 하찮은 존재였다.
셋째, 그는 하나님을 잘 믿는 양부모를 만남으로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었다.
넷째, 하나님은 그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과 같던 인생에서 성전의 모퉁이 돌과 같은 영광스러운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다.
그는 날마다 아침 4시에 일어나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깊은 기도를 드리고는 하였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지혜와 명철의 영으로 덮어 주셔서 놀라운 발명에 발명을 이어 나갔다.
그는 날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외우면서 기도하였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그는 주일이면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교인들에게 농사하는 방법을 비롯하여 하루 종일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은 그 어느 누구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다. 나라를 경영하는 국가 예산을 다 가져도 인간의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 물론 돈이 있으면 위생, 보건, 체력 유지, 영양 상태 등등을 좋게 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다루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질병과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의미 있는 일, 보람 있는 일을 찾게 마련이다.
시편 39편에 보면 다윗도 몹시 몸이 병약했던 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39:12-13)
한 때 미국 최고의 재벌이었던 존 락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1839-1937)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다. 그는 50살 쯤 되었을 때에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병으로 앓았다. 우유 한 잔을 다 마시기조차 힘들어 하였고 과자 한 쪽을 다 먹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감사 신앙을 회복하면서 새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사업의 모든 관심을 점점 자선사업에 돌렸다. 7년 후에는 전적으로 자선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는 병에서 고침을 받은 12년 후인 1892년 시카고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죽을 때까지 8,000만 달러 이상을 시카고 대학교에 기부했다. 시카고 대학교는 오늘 날 노벨상 수상자만도 85명 이상을 배출한 세계적인 대학교가 되었다. 학교 안에는 1928년에 세워진 아름다운 교회가 있다. 그 교회의 종탑 높이가 67미터이다. 뉴욕의 한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철저한 십일조 신앙과 매사에 절대 순종하는 순종 신앙을 본 받아 미국 역사,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길이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1901년에는 뉴욕 시에 아들인 존 D. 록펠러 2세와 함께 훗날 록펠러대학교로 이름을 바꾼 록펠러 의학 연구소를 세웠다. 록펠러 대학교의 의학 연구소는 오늘 날도 세계 최고의 의학 연구 기관 중의 한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02년에는 일반교육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는 록펠러 재단과 같은 주요 자선기관들을 설립했다. 일생을 통해 그가 희사한 금액은 당시의 화폐로 총 5억 달러를 넘었다. 1955년까지 아들이 대를 이어 희사한 금액을 합하면 총 25억 달러가 넘는 금액이다. 그가 세운 교회와 교회 안에 건축한 파이프 오르간과 도서관의 수를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주께 받은 것을 주께 드렸을 뿐입니다.”
본문은 말씀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그렇다. 우리는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겸손하여야 한다. 자랑할 것이 없다. 성도는 누구나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성도들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핏 값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신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딸인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다.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인 천안 학화 호두과자의 심복순 권사는 살아 계신 동안에 호두과자 팔아 번 돈으로 예배당을 열 곳이나 건축하여 봉헌하였다. 오늘 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천안 명물 호두과자 산업을 이어 가고 있지 않나. 심복순 권사는 <나는 다윗 왕보다 행복합니다>라는 간증 책도 내셨다. 성전 건축하는 기쁨을 위하여 호두과자 만드는 일을 평생 기쁨으로 하셨다. 그 분은 교회 건축 외에도 수많은 목회자를 돕고, 신학생을 양성하고, 장애우들과 불우한 이웃들을 돕는 천안의 10대 부를 누리며 끊임없이 남들을 돕고 섬기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교회 이름이나 출판사 이름이나 의류 생산 회사 이름 중에 ‘포이에마’라는 이름이 있다. 그 ‘포이에마’라는 뜻이 바로 ‘반드신 바’라는 10절의 표현이다. ‘만들어진 것, 작품, 피조물’이란 뜻이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섭리는 분명하다. 성도들은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인 것이다.
내가 벌어 내가 먹고 내가 누리고 내가 잘 살고 내가 세상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내 생의 목표를 삼아서야 되겠나. 물론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과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아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다운 삶의 지경을 넓혀가는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어느 연세 많은 부부에게 자녀가 없었다. 뒤 늦게 어렵사리 아들이 태어났다. 옥이야 금이야 키우다 보니 버릇없는 아들로 자라고 말았다. 그런 어느 날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와 몹시 다투고는 집을 나가 버렸다. 일 년이 지나 이년이 지나도 집에 돌아오질 않았다. 사방으로 찾아 나서고 신문에 광고를 내고 현수막을 내어 걸어도 찾을 길이 없었다. 낙심한 어머니는 병들어 몸져눕게 되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편은 아내의 병든 소식을 신문에 쪽 기사로 실었다. 아들은 우연히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 계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은 병석에 누워 있는 어머니 곁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은 이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가시질 않았고 아버지에게는 눈인사도 하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아들과 남편의 손을 잡아 당겨 자신의 가슴 위에 얹게 하고는 잠이 들 이 숨지고 말았다. 슬픈 장례를 치렀다. 이 후로 아들은 변했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화목한 관계가 되었다.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효자 아들로 장성해 갔다.
우리 믿는 성도들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신 중보자이시다. 예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로 말미암아 막혀 있던 담을 십자가 사랑의 능력으로 허시고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하나 됨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 하셨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 은혜에 감사하자. 그리고 영원히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