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푸신 그의 능력(엡1:15-23) 2015. 10. 25 종교개혁498주년 주일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의 정문에 붙인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문 95개 조항은 본격적으로 종교 개혁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498년 전의 일이다. 종교 개혁이 무엇인가.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불의를 불의라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위선을 위선이라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성경에서 벗어난 것을 그렇다고 지적하고 그 개선과 개혁과 변혁을 주창한 것이다.
마틴 루터 종교 개혁 5가지 강령은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면 그렇게 살 수 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부산 영도의 산자락에 위치한 고신대학교의 정문에 들어서니 큰 돌비에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고 학교의 교훈을 새겨 넣은 것을 보았다. 그런 신앙이 개혁 신앙인 것이다. 밤이나 낮이나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잘 못될 수 있겠나.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제 맘대로 살 수 있겠나.
당시나 오늘 날이나 성경으로 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혜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 바탕인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본문에는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이 나와 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믿는 신앙생활을 하며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소문이 사도 바울에게도 전해졌다. 사도 바울은 그런 기쁘고 감사한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 기도 드렸다. 17-19절의 내용은 평소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기억하며 감사 기도를 드린 내용이다. 그 기도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더 잘 알아 가기를 원하는 기도.
17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기도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성도인 우리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영광의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성도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여기서 ‘지혜’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이해력을 말한다. 그리고 ‘계시’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나타내 보이시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기도 내용의 ‘안다’는 것은 막연하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여 구체적으로 알고, 서로가 알고, 친밀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의 기도는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는 기도이다.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이 큰 답답함 중의 하나이듯이 마음의 눈이 어두운 것은 영적인 형벌이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와 타락 이후 마음과 영이 죄로 인하여 어두워 졌다. 그 어두움을 밝게 하려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임하여야 한다. 인간의 어두워진 마음을 밝히는 빛은 햇빛이나 LED전기 불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비추시는 은혜와 구원의 빛이시다.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진 상태를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혹시 지금 나의 마음이 이러하지는 않나.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이런 허망하고 미련한 생각에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감사하지도 못하며 사는 불쌍한 존재는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임하면 마음의 눈이 밝혀지게 된다. 마음의 눈이 밝혀지면 육신의 얼굴에도 은혜를 받은 자의 기쁨과 감사의 빛이 드러나게 된다. 사십일 동안 시내 산 정상에 머물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산하는 계명의 두 돌 판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성도가 체험하는 마음의 눈을 밝히는 빛의 은혜란 이런 것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닌가.
사도 바울의 기도는 계속된다. 하나님을 점점 더 잘 알기를 원하는 기도의 내용이 일일이 열거된다.
“그 부르심의 소망의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이 모든 비밀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하나님 안에서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제대로 알고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기도이다.
우리나라에도 2억 원짜리 침대가 수입된다고 한다. 영국의 샤브와르 베드 사에서 만들기 시작한 제품이다. 남미의 말꼬리털과 몽골의 캐시미어와 2575미터의 실크로 만들었다. 숙련된 장인의 손길로 700시간이 걸려서 만들어 낸다고 한다. 혹시 열심히 돈 벌어서 그런 침대에서 잠자고, 좋은 집, 좋은 자동차, 좋은 먹을거리, 좋은 옷, 좋은 보석, 좋은 가방, 좋은 보약, 좋은 여행...나 혼자 그런 것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사는 이가 있는가.
사도 바울이 기도한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달라는 기도의 바탕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을 주워서 몸을 가리고 광야에서 지내며 메뚜기와 야생 꿀인 석청을 혀끝에 바르며 지내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외쳤다. 그는 헤롯의 칼 앞에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천년 교회 역사의 그 어떤 누구도 세례 요한의 죽음을 값없이 죽어간 불행한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아는 성도의 삶을 이 세상의 향락을 즐기며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 잡혀 사는 이들의 삶과는 그 차원이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기도하였다. 18절 후반부에서 말씀하는 이 내용은 14절의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라는 말씀의 해석과도 같다. 성도가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업은 무엇인가. 과거에 모세 시대에 광야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가나안이 소망이며 기업으로 주어질 땅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기업의 풍성함이란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그 모든 것을 말한다. 성도가 누릴 이 거룩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그 어떤 영광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영광이다. 로마서 8장 17절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는 내용 그대로이다. 이것이 자녀가 누리는 상속자의 영광인 것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농부요 양을 치던 평범한 목축업자의 여덟 아들들 중의 막내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태어날 때부터 왕인 다윗의 아들인 왕자였다. 그 상속자의 영광이 차원이 다르지 않나. 세상적으로 비교하여도 그러한 것처럼 성도로서 누리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의 정도가 각기 다 다른 것이다. 성도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8:18)을 마음속에 품고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성도가 누리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란 무엇인가.
5절에 보면,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2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자기의 우편에 앉히신다고 하였다.
21절에 보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다.”고 하였다.
능력이 지극히 크시고 많으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그 모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그를 믿는 성도된 모든 자들에게 공급되는 한결 같은 영광의 풍성함인 것이다.
이 세상으로 하여도 국민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세계 최고의 부강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과 물 문제, 식량 문제, 의료, 보건 문제 등 전혀 혜택을 상상할 수 없는 몹시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차원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같은 시대에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란 그 풍성함의 정도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풍성함이며 믿음의 풍성함으며 소망의 풍성함이고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풍성함인 것이다. 그 풍성함을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2-3)고 설명해 주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께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만에 부활 하셨다. 예수는 하나님 곁으로 승천하셨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히셨다. 이것은 이 땅의 그 어떤 왕족이나 그 어떤 대 부호의 아들딸이라도 감히 누릴 수 없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된 우리들에게 주시는 그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살아가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비교 할 수 없는 그런 영광스러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말씀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놀랍고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고 알게 된 사도 바울은 본문의 기도 가운데 그 ‘하나님의 능력’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19절에 ‘그의 힘의 위력’,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라고 하였다. 20절에 ‘그의 능력’이라고 했다. 다시 21절에서 ‘능력’이란 표현을 또 사용하고 있다. 이 표현이 우리 말 성경에서는 ‘위력’ 혹은 ‘능력’이라고 하고 말았지만 사도 바울이 사용한 그 표현은 서로 다 다르며 그 내용이 심오하다. 19절의 ‘힘의 위력’이란 ‘타고난 힘을 보여 주는 본질적이며 생동감이 넘치는 능력’을 말한다. 이 힘의 위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공급되는 능력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다시 한 번 더 사용하였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 9절에서는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벧전4:11)이라고 하였다.
아침마다 붉은 해가 떠오르게 하시는 그 힘, 밤마다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의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 분의 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공급하셔서 오곡백과가 자라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힘,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고 200만의 무리들에게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 주시던 분,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서 풍성한 물을 먹고 마시게 하시던 그 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가리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밝히시던 그 분, 여호수아 때에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던 그 분, 여리고 성을 말씀대로 순종하여 돌게 하시고 난공불락의 그 성을 무너트리시던 그 분, 그 분이 바로 ’힘의 위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 힘의 위력으로 십자가에 죽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살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불러 올리셔서 그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이 능력은 누구에게나 역사하는 힘이 아니다. ‘믿는 우리’(엡1:19)들 가운데에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바울은 이 ‘능력’에 대하여 3장 7절에서 다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하였다.
이천 년 전에 사도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 498년 전 인 1517년 이 계절에 독일의 수도사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통하여 개입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 어떤 힘으로도 이길 수가 없었다. 종교 개혁 당시에 마틴 루터의 나이는 34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
성경의 바탕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부활 후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한 모든 현상들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이 천하 만방에 전파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이셨다. 다시 반복하여 보자. 19절에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 20절의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라고 하였다. ‘힘의 위력, 베푸신 능력, 그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열매가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다. 20절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우편에 앉히사”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복음의 바탕이다. 복음서의 마지막은 모두가 다 한 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다룬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도행전의 시작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신 장면을 다룬다. 이것이 성경의 기둥과 같은 것이다.
모세 시대에 말씀하신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비둘기를 잡아서 제사하는 그 제사로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이 짐승의 피 비린내가 진동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다 해결할 수 없고 다 이룰 수 없는 속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역사이다. 우리는 신앙고백으로 고백하지 않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믿어야 한다. 거룩한 공교회인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는 성도의 교제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능력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용서하시고 믿는 우리들인 성도들에게 몸의 부활을 선물하셨으며 영생을 약속해 주셨다. 이것이 사도 신경의 마지막 고백이 아닌가.
성도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에베소서 1장 5절의 내용이 그러하지 않나.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나.”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은혜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핵심이며 성도가 믿는 믿음의 바탕이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 날 우리가 믿는 믿음도 헛것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6-19)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의 열매이다. 베드로는 성령 받고 나서 전파한 사도행전 2장의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라고 하였다. “예수는 사망에 메여 있을 수 없는 분”이라고 설교하였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비유 말씀 말미에 스스로는 자신의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찾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를 미워하는 자들에 의해서 자신의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10:18)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살아 계신 동안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능동적으로 미리 말씀하신 말씀들 가운데 하나이다.
성령 또한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 8장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이는 예수의 부활 안에 믿는 우리들인 성도의 부활도 선물로 주어졌음을 선포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정죄할 수 있는 힘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능력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시편 2편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권세 위에 두셨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시2:6)고 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을 다 복이 있도다.”고 하셨다. “그의 아들에게 입맟추라”고 하셨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며 믿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능력.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은 없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각 나라의 모든 왕들의 권세를 다 합친 것보다 훨씬 크고 놀라우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21절의 말씀처럼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권세”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엡1:22)로 삼으신 권세이시다.
22절과 23절에 교회(敎會)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하여 나온다. 교회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23절에서 정의하였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있는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다. 교회가 만물의 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의 머리이시며 모든 믿는 자의 구주이시다.
성도들은 복음의 능력을 믿고 살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거의가 다 돈의 능력에 사로 잡혀 있다. 돈이 우상이다. 돈이 무엇인가. 1943년 어느 날 미술가 파블로 피카소가 길거리를 지나가다 고물상 쓰레기장에 버려진 몹시 낡은 자전거 한 대를 발견하였다. 그는 그 버려진 자전거를 주어다가 안장을 거꾸로 매어 달고 양쪽 핸들을 분리해서 안장의 양쪽 위에다가 황소의 뿔처럼 붙여서 ‘황소 머리’라는 제목의 작품을 만들었다. 오늘 날 프랑스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이 런던의 경매장에서 293억에 경매 되었다.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던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작가의 손길을 거치니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 가치를 먹이는 작품이 된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결코 자기 자신을 비하하거나 무시하거나 하찮은 존재라고 실망하며 낙심하며 살면 안 된다. 인생을 돈으로만 평가하면 안 된다. 각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구원 하시리 만큼 존귀하고 영원한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은 믿는 자로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사랑 받게 하시고,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신 아들딸들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다. 이는 믿는 자가 곧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를 다스리시는 영원한 통치자이시며 구원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의 공급자이시며 영존하시는 평강의 왕이시다.
이사야 선지자가 일찍이 예언하지 않았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사9:6)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당 즉 예배당의 크기에 상관없이 영광스러운 곳이며 존귀한 곳이고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따르고 섬기는 모든 성도들의 연합체인 믿는 무리가 곧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곧 하나이다. 분리해서 설명할 수가 없다. 성도의 연합이 거룩한 교회로서 하나여야만 하듯이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몸된 교회 안에 충만하신 충만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예수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 충만으로 교회 안에 충만하게 임하시며 믿는 성도들 안에 충만하게 임재 하신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이며 믿는 자의 영광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살아가는 교회인 성도들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계속하여 영원히 역사하신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사도 바울의 끊임이 없이 지치지 않고 계속하여 순교자의 길을 다 달려가기 까지 힘을 다하여 수고할 수 있었던 그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라는 고백은 그가 지치지 않던 이방 전도자로 쓰임 받던 하나님의 능력의 절대 수혜자였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아닌가.
올해는 엄청나게 가문 한해였다. 도시 생활이라 실감을 덜 하지만 농민들의 마음은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봄과 여름을 지냈고 가을을 맞았다. 강화도는 124년 만에 최악의 가믐이었다고 한다.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갈라 터졌다. 물고기들이 다 말라 죽어 버렸다. 어제 뉴스에 보면 올 2015년 대한민국 전국의 강수량은 전년도에 비해서 63%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추워지는 계절과 겨울 동안에도 예년보다 비다 더 많이 올 확률은 매우 적다고 한다. 겨울도 가물 것이란 예보이다. 엘리야 때에 비가 오기를 기도하던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3년 6개월 만에 하늘의 문을 열어 비를 내리셨듯이 비가 내려야 한다. 엘리뇨 현상으로 적도 부근 태평양 바닷물의 온도가 0.5도 높아진 영향이라고 한다. 우주와 지구의 현상을 다루시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한다. 우주 삼라만상의 조화를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말이다. 이 땅에 비가 와야 하듯이 교회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그래야 성도의 삶이 풍성해 진다.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힘의 위력을 날마다 실감하며 살아야 한다. 그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찬송이 달라지고, 기도가 달라지고, 봉사가 달라지고, 섬김이 달라지고, 복음 전파의 힘이 달라지고, 성도의 사귐이 달라지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주창한 것은 교회다운 교회로의 회복이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회복되는 말씀 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마틴 루터의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란 다섯 가지 강령의 근거가 그러하지 않나.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살고 도시가 살고 가정이 살고 개인이 산다.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시기 때문이다. 이 크고 오묘하고 비밀스러운 말씀의 진리와 교훈이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믿는 우리’로 살아가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