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라(엡1:3-14) 2015. 10. 18
신앙생활이란 곧 찬송생활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사43:21)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5장 12절에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한다”고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엡1:3)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4)
이처럼 성경은 찬송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 성경의 곳곳에 이와 같은 내용으로 가득하다.
성경에 처음으로 찬송(讚頌)이란 단어가 나온 곳은 창세기이다. 홍수 심판 이후에 노아는 포도 농사를 하였다. 그런데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잠이 들어 버렸다. 이 현장을 목격한 둘째 아들 함은 밖에 나가서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첫째아들 셈과 셋째아들 야벳은 달랐다. 저들은 아버지의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으로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어 드렸다. 그리고 얼굴을 돌려 현장을 보지도 않고 곧 아버지의 장막을 나왔다.
노아는 술에서 깨어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둘째 아들 함에게 “네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큰 아들 셈에 대하여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며 셈을 축복하고 셈이 믿는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둘째 아들 함은 하나님 안에서 찬송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답지 못한 경솔한 처신을 하였다. 그의 판단이 경솔하고, 그의 언동이 경박하였다.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 앞에 침묵하거나 신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 셈과 동생인 야벳은 달랐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생각과 그 입의 말과 그 출입과 그 범사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찬송의 가치이다.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 화음에 맞게 찬송할 시간에 합창으로 찬송하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와 같은 찬송이 목소리의 찬송에 그치지 말고 찬송의 능력과 찬송의 진실함이 일상적인 삶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만 한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에게 붙잡혀 간 적이 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조카를 찾아오기 위해서 집안의 남자 318명을 불러 모았다. 아브라함은 앞장서 가서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부녀와 친척들을 모두 다 되찾아 왔다. 아브라함의 전공이 대단하였다. 그 때에 사웨 골짜기에서 소돔 왕이 나와서 아브라함의 일행을 맞이하며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자기고 나왔다. 멜기세덱은 당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면서 “너희 대적을 너희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였다. 그 때에 아브라함은 그 얻은 전리품들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주인의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러 떠났던 길에도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라는 고백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다.(창24:27, 48) 야곱의 첫 아내 레아도 넷째 아들을 낳은 후에 그 이름을 짓기를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며 ‘유다’라고 지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송’이란 뜻이다.
출애굽기 21장에는 모세의 노래와 그의 누이 미리암의 노래가 차례대로 나온다. 그 내용도 반복되는 강조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여호와여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여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21:1, 2, 11, 21)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도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모세의 동족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 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기 때문이라.”(출18:10)고 하였다.
시편에 보면 다윗 만한 찬송의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다윗은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35:28)라고 하였다.
다니엘은 찬송의 이유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단2:20)라고 하였다.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욜2:26)고 하였다.
감사의 선지자 하박국은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합3:3)라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누가복음 1장 64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도 찬송의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가랴는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1:68-69)라며 하나님을 찬송한 찬송의 가사가 길게 소개되어 있다.
예수님은 천군 천사의 찬송 소리 가운데 이 땅에 탄생하셨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에 앞에서 가고 뒤를 따르는 무리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찬송하며 예수님을 높여 드렸다.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인 24장 53절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이들의 날마다의 생활은 늘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예수님을 비방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며 기독교인들에게 폭행을 무참하게 계속하던 사울이 어떻게 변화 받았기에 입을 열 때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도로 변화된 것일까.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신학적인 근거, 신앙적인 바탕이 소개되어 있다.
우리도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가.
나는 어떤 때에 하나님께 더욱 찬송하는가.
내게 있어서 찬송이 줄어들고, 찬송이 멈추는 때는 언제인가.
찬송은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면서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하도록 하자.
야고보서 3장 10절에 보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은 마땅한 것이 아니라고 경고하였다. 또한 야고보는 “고난 당할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에 찬송하라.”(약5:13)고 하였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셨음을 찬송.
5절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거기 “예정”(豫定)이란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지 모른다. '예정'(豫定,predestination)이란 '미리 정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시기 전에 미리 정하셔서 자녀의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신 것이다. 이는 어느 것이 먼저냐고 질문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아들딸로 예정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딸을 향하신 예정은 단회적이나 그 결과는 영원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심오한 축복이며 은총인가. 3절에서 말씀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바로 이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4-6절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아들딸로 예정하신 것이다.
예정의 시기는 “창세 전”(4절)이시다.
예정의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4절) 하신 것이다.
예정의 이유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절)하신 것이다.
예정의 근거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5절)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예정의 결과는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이다.
예정의 목적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6절)이다.
창세 전에 나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가.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164번이나 반복하였다. 에베소서에서만도 36번이나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체험하고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는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택하심’은 하나님의 전적인 영역이시다. 하나님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가운데 형 에서를 택하지 않으시고 동생 야곱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모세 시대에 그 수많은 애굽의 히브리 인 중에서 출애굽의 지도자를 선택하지 아니하시고 광야에서 40년간 양을 치던 연세 80살의 모세를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보아스의 마을인 베들레헴 마을 처녀들 중에서 보아스의 아내감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모압 땅에서 남편 잃고 시어머니 따라서 국경을 넘어온 이방의 젊은 과부 룻을 보아스에게 짝 지어 주셨다. 하나님은 이새의 일곱 아들들 중에서 장차 사울 임금의 대를 이을 왕을 택하지 않으시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막내아들인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을 불러다가 기름 부어 사울의 대를 이을 왕으로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의 후손들이나 권력자와 귀족들의 가문에서 12제자들을 택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에 갈릴리의 어부들 중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절반이 넘는 7명의 제자들을 택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은 신묘막측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성도들을 부르셔서 아들딸 삼으시는 것인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아들딸로 선택하신 것이다. 인간은 결코 거룩하지도 못하고 무흠하지도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죄와 악이 많은 이 세상에서 죄를 멀리하고 악을 거부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고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세계에서 교도소에 갇혀 지내는 재소자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다. 무려 230만 명에 이른다. 이는 인구 대비로 해도 가장 많다. 그 다음이 중국, 그 다음이 러시아 등의 순이다. 우리나라는 45,000여명이다. 그 중에 94. 7%가 남자이고 5. 3%가 여성이다. 2012년 통계로 세계 38번째로 재소자가 많다.
우리는 감옥 안에 있든지 감옥 밖에 있든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하였다. 하나님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이 온전히 거룩하고 무흠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아니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살아가는 그 생활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하는 찬송의 가사처럼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 자녀가 잘 되고, 자녀가 잘 하면 그를 낳은 부모에게 기쁨이 되지 않나.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딸인 성도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로마서 12장 1-2절의 말씀이 그런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말씀에 근거해서 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관찰하고 항상 주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 고아와 같이 버려진 인생들을 불러서 아들딸 삼으시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생을 살아가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다윗은 장인 사울에게 늘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 같은 살벌한 위기 가운데 지내야 했다. 다윗은 아둘람 굴로 피신하고 엔게디 광야로 피신하여 생활한지 십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들판과 동굴에서 지내며 더위와 추위와 굶주림과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 내야 했다. 그런 다윗의 생명을 사울 왕의 칼과 창으로부터 보호하신 분은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렇게 다윗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다윗을 죽여 없애려 하던 사울 왕이 나이 80에 세상을 떠났다. 사울 왕과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세 왕자가 모두 다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나갔다가 왕과 세 왕자 모두 다 목숨을 잃고 아무도 이겨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런 위기의 시대에 왕위에 오른 다윗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다윗이 30살에 왕이 되었다. 왕 위에 오른 다윗은 사울의 집의 후손들 중에서 살아남아 있는 자가 누구인가 알아보게 하였다. 다윗은 사울의 아들 왕자 요나단의 우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윗은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살아남아 두 다리를 모두 절며 지내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므비보셋을 만나 보게 된 다윗은 그에게 은총을 베풀리라고 약속하였다. 할아버지 사울 왕의 밭과 재산을 모조리 다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 지니라”(삼하9:7)고 축복해 주었다. 므비보셋은 감격하여 다윗 왕에게 절하며 말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 보시나이까.”(삼하9:8)
금번에 부산 남지방 연합 성회 인도차 부산에 머물면서 그곳의 선교부 총무 목사님을 사귀게 되었다. 그는 낳은 삼 남매 말고 또 다른 세 명의 자녀들을 입양하여 여섯 명의 아들딸을 키웠다고 하였다. 그것도 세 명의 입양한 자녀들은 지능이 부족하거나 건강이 약한 자녀들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만나 보는듯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백 마디 천 마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한들 그것 가지고 그와 같은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분들의 가정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은총을 입을 수 없는 상황에서 권력자의 절대 은총, 누군가의 사랑만 입어도 이러하지 않나.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딸들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 받았음을 찬송.
성도된 우리들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죄 사함을 받게 해 주신 그 은혜 때문이다. 7절에서 말씀하는 ‘속량’이란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자유자가 되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속량이란 “값으로 산 것이 된 상태”를 말한다. 이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종이 아니다. 해방자요 자유자이다. 모세 때에 바로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육지처럼 가르셔서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의 기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신 속량의 은총이다. 그러나 광야 길에 나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속량의 은총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 가운데 수 없이 죽어 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출애굽 시키신 것이지 ㄷ광야에서 죽게 하시려고 불러내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광야 길에 들어선 백성들은 “목이 마르다 배가 고프다, 애굽의 고기 가마가 생각난다, 파와 마늘이 그립다”며 원망과 불평이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해 주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 불리 먹이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가리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지만 그 은혜와 은총을 감사하며 순종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는 많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광야 길에 날마다 공급 받는 사랑과 은혜, 약속하신 가나안의 축복의 보증이 얼마나 크고 감격스러운 것인가. 그러나 그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누리기는커녕 원망과 불평으로 광야 40년 동안 고생만 많이 하고 결국은 출애굽 백성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가나안에 들어간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 은혜의 풍성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주셨다”
가령 나와 같은 강화도 시골 섬 소년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된 것이 얼마나 풍성한 주님의 은혜인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던 섬 마을에서 학교에 갔다 집에 오면 뒷동산에 올라가서 소에게 풀이나 뜯기던 어린 소년이 이처럼 처처에 부르심을 받아 다니며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는 복음 전도자가 된 것이 얼마나 크고 큰 하나님의 은총이며 선물인가.
이번에 부산에 머물면서 점심 한 끼는 부산 남지방의 목사님 사모님들과 돼지 국밥으로 해결하였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밀면이란 밀가루로 만든 가짜 냉면도 한 그릇 먹어 보았다. 그게 다 6. 25 피난 시절의 음식이란다. 피난 시절 판자 집에서 눕고, 언덕에 앉아 지붕이 없는 집에서 공부하고, 영도다리 밑에서 생선 장사하고 밤을 새어가며 나라가 공산당에서 망하지 않기를 기도하던 곳이 부산이다. 그런 부산이 이제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동쪽에 ‘부산 엘시티 더샵’이란 85층짜리 2채의 펜트 하우스를 짓는다. 그 곁에는 101층 짜리 랜드 마크 빌딩도 짓는다. 그 곳의 펜트 하우스 평당 분양가가 7002만원을 넘어서는 68억 원짜리라고 한다. 6, 25 전쟁 피난민으로 넘쳐나던 가난과 슬픔과 불안에 떨던 도시 부산에 세계적인 항구 도시가 되었다. 그 분양 경쟁률이 68대 1이었다고 한다. 그런 아파트에 살아도 복음을 모르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고,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나 영생과는 상관이 없는 인생이 되고 만다.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탄생할 때에 헤롯은 이러한 역사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 지역 근동의 두 살 미만의 남자 아이들을 모조리 다 죽이는 어리석은 만행을 저질렀다. 예수 그리스도 때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도록 불공평한 판결을 내린 본디오 빌라도는 권력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누구인지 모르는 불행한 자였다. 당시에 제사장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권력과 지위가 높아도 예루살렘 성전의 대 제사장이었어도 예수가 누군지 예수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저들은 몰랐다. 심지어 가롯 유다는 예수의 제자로 3년이나 예수를 따라 다녔으면서도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을 맡아서 지휘하였던 백부장은 예수의 숨지시는 장면을 지켜보고 나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고 고백하는 장면을 보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좌편 강도의 운명과 우편 강도의 선택은 지옥과 천국으로 나뉘지 않았나. 이처럼 신앙은 선택이며 택하심이다.
구원과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세상 지위나 명예나 인기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9절의 “그 뜻의 비밀”, 11절의 “그 뜻의 결정, 그 분의 계획, 그 분의 예정” 13절의 “약속의 성령의 인치심”을 깨달아 알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어야 죄 사함과 영생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구원의 은총이며 축복인지 모른다. 이걸 깨달아 알고 나면 찬송하고 또 찬송하고 경배하고 또 경배하고 충성하고 또 충성하여도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다.
283장 “나 속죄함을 받은 후”라는 찬송은 그런 구원의 감격과 죄 사함의 은총을 경험한 믿음의 사람의 고백인 것이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한 없는 기쁨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내 맘이 새로워 주 뜻을 준행하면서 죄 길을 버리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 자녀된 것을 곧 증언합니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보혈의 공로로 내 주의 은혜 입으니 늘 평안합니다
(후렴)
나 속죄 받은 후 나 속죄 받은 후 주를 찬미하겠네
나 속죄 받은 후 주의 이름 찬미하겠네
이 찬송가의 가사를 쓰고 작곡한 에드윈 엑셀(Edwin Othello Excell, 1851-1921)은 독일 개혁 교회 목사의 아들이다. 천부적인 아름다운 목소리에 음악성까지 타고났다. 초등학교를 나와 낮에는 시멘트가 아닌 석고를 벽에 바르는 석고사, 벽돌공 등 잡일을 하며 밤에는 마을 성악학교에서 성악 레슨을 받았다. 어느 감리교회의 부흥집회에서 진정한 회개를 경험 한 후에 열심히 교회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신앙을 키워나갔다. 조지 루트(George Frederick Root, 1820-1895) 부자에게서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한 그는 복음 찬송가 작사자와 작곡가와 찬양 사역자로 활동하였다. 미국에 건너간 그는 부흥사 샘 존스(Sam P. Jones) 목사와 스미스(Gypsy Smith, 1860-1947) 부흥사의 캠프 집회에서 독창 사역자로 20여 년 간 봉사하였다. 평생 2,000여 곡을 작곡하여 50여권의 음악 책으로 발표하였다. 우리 찬송가에 있는 그의 작곡 찬송만도 “나 속죄함을 받은 후(작사, 작곡, 238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편곡․305장), 내 주 예수 주신 은혜(317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429장), 세상 모두 사랑 없어(작사, 작곡, 503장)”다섯 곡이다. 놀랍지 않나.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속량 즉 죄 사함의 은총을 입고 나면 후대의 역사에 이와 같은 크고 놀라운 은총과 혜택이 찬송의 강물이 되어 흐르게 하는 것이 신비하지 않나.
본문은 그 내용이 심오하고 방대하다. 일일이 구절마다 해석할 시간이 없다. 9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때’란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며 돌아가신 그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원 완성의 그 순간을 말씀한다. 그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 우리는 그 골고다 언덕의 구원의 은총, 속량의 은혜, 죄 사함의 축복의 영광스러운 능력 안에서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음을 찬송.
인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문서의 진실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인봉할 때에 인친다. 에스더 3장 12절에 보면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르 왕 때에 왕비가 된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를 하만이 나무 꼭대기에 달아 죽이려는 음모를 계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만은 유대인을 모조리 다 말살하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 때에 하만은 아하수에르 왕을 설득해서 유대인을 말살하는 조서를 각 지방의 문자와 언어로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 조서에 왕의 반지인 어인으로 인치는 장면이 나온다. 문서에 인친다는 뜻은 그 내용을 어떤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보증인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66절에도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넣고 돌로 무덤 입구를 막고 인봉하였다.
또 하나는 자기의 소유를 삼을 때에 인친다. 본문의 경우는 이 나중의 경우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인쳐서 이 세상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딸을 구별하신다. 13절의 말씀 그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기쁨과 그 감사와 그 비밀이 오묘한 것이다. 성도는 그 구원의 복음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다. 에베소서 1장 14절을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이 성령은 우리의 유업의 보증이 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구속하기 위함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남산에 가 본지 여러 해가 되었다. 기억에 그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전망대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 ‘서로를 사랑하는 고백과 약속을 적어 꼬리표를 단 수 만 개의 자물쇠를 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사랑 고백의 자물쇠가 자물쇠 트리를 이룬 곳도 있다. 청춘 남녀들이 서로 평생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자고 약속하면서 자물쇠를 거기에 상징으로 걸어 놓은 것이다. 그것도 서로의 사랑을 인치는 약속의 한 상징물일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인 아들딸에게 성령으로 인하여 기업의 보증, 즉 유업의 보증이 되신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축복의 약속인가. 물론 열심히 살아야 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고 부지런히 살아야 하고 무한 경쟁 사회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가만히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복음이며 진리의 말씀인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라고 하였다. 이는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완전한 구원의 보증을 말씀하는 것이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구원, 온전하게 선물로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구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구원의 은총이며 자녀에게 유업으로 주시는 기업의 보증인 것이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하는 찬송의 고백처럼 말이다.
성도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무리들이다. 이는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음과 같다. 이처럼 신약 시대 성도들은 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세례 받고 불로 세례 받아야 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라고 하였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인치심을 받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베드로도 이걸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라고 하였다.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도의 본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고 또 찬송하는 영원한 찬송의 사람들로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