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가는 길(창31:53-32:2, 히11:13-16) 2015. 9. 27
성경은 인생을 나그네라고 하였다. “땅에서는 외국인이요 나그네”(히11:13)라고 하였다. 우리 노래 중에도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노래가 있지 않나. “인간은 어디서 와서 이 세상에 살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하는 질문은 철학적인 질문이며 종교적인 질문이며 인간 누구나가 품고 있는 질문이다. 금번에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하지’라는 이름의 성지순례를 하던 순례객 717명이 다른 순례객들에 깔려죽는 허망한 참변이 일어났다. 그러한 죽음도 결국은 이와 같은 종교적인 질문을 갖고 그 곳을 찾았던 이들이 당한 일이다. 악마를 상징하는 기둥에 돌을 던지는 행위는 무슬림이라면 평생 반드시 행해야 하는 다섯 가지 의무 중의 하나라고 한다. 뭐 이런 신앙을 갖고 그 곳을 찾아 갔다가 죽는 죽음을 오히려 축복이라고 여기고 알라의 선물이라고 여기며 산다니 참으로 그들의 신앙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평생을 살다가 죽는 이는 거의 없다. 인간은 누구나가 거의 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혹은 농촌과 섬 마을과 산간벽지의 두메산골 정든 집을 떠나서 도시로 향하기도 하고 다른 나라로 이민 가서 살기도 한다. “정 들면 고향”이라고 말하지만 고향이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선조들의 유골이 묻혀 있는 곳이니 고향인가. 늙으신 부모님이 살아 계신 곳이 고향인가. 일제시대와 6. 25의 어려운 시절을 겪은 실향민들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 온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서 타의에 의하여 남한에 혹은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북미주를 비롯한 세계 처처에 흩어져서 살아 왔는가.
유태계 독일인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는 “인간은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해서 타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헤르만 헤세는 “하루가 아침과 밤의 사이를 지나듯이 나는 언제나 여행에로의 충동과 고향에로의 동경 사이를 지난다.”는 말을 남겼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품이 고향이다. 그래서인지 어린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다가도 엄마의 품과 같은 벽장의 이불 속에 들어가서 그만 잠이 들어 버리기도 한다.
본문에서 우리는 고향을 떠나 외삼촌의 집에 장가들어 20여년 긴긴 세월을 지내 온 야곱이 고향을 향하여 가는 장면을 읽었다. 누구나의 생이 거의 다 그러하지만 야곱은 특히 고난 많은 타향살이를 하였다.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31:40)고 말하였다. 야곱은 자매간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까지 14년 동안을 매여서 살아왔다. 그 후에도 장인의 양떼를 돌보는 일을 위해서 6년 세월을 훌쩍 더 보내야 했다. 그 20년 세월 동안 한 번도 품삯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철저한 처가살이를 했을 뿐 자기 몫의 분깃이 없는 고단한 종살이와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다. 야곱의 장인 라반은 교활한 사람이었다. 사위 야곱의 몫을 챙겨 준다고 말 만 했을 뿐 정작은 열 번이나 번 번히 그 약속을 바꾸었고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었다. 야곱은 장인에게 사기 당한 듯한 20년 세월을 처가살이하며 지내었다.
그런 야곱에게는 항상 언젠가 때가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 곁으로 돌아 가리라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가득하였다. 그런 그가 장인의 곁을 떠날 결심을 하였을 때에는 산 허리를 덮을 만큼의 수 없이 많은 양떼와 염소 떼와 나귀 떼와 약대가 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를 이룬 비결은 장인 라반의 배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절히 체험한 주인공이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창31:42)이라는 표현 속에는 장인에 대한 섭섭함이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는 말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겪었던 고난 많은 세월과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십 년 동안을 애쓰고 수고하던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창세기 3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동안 빈털터리로 장인의 집에서 처가살이만 하던 야곱을 축복하신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어느 날부터 야곱의 몫의 소유로 양과 염소와 나귀와 약대가 번성하게 해 주셨다. 야곱의 총애를 받던 라헬이 드디어 어렵게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 이름이 요셉이다. 요셉이 태어나자 용기를 얻은 야곱은 장인 라반에게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야곱은 그 당시에 두 아내와 두 여종들을 통해서 11아들들과 딸 하나를 낳은 상태였다. 그러나 장인 라반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라반은 야곱에게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자기 곁에 그냥 머물러 살라.”고 말하였다.
장인 라반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사위 야곱이 제 곁에 머무는 지난 20년 동안 엄청난 재산이 늘었다. 두 딸들이 일곱 명의 외손자들도 낳아 장성해 가고 있었다. 딸들의 몸종들을 통해서 태어난 손들만도 네 명이나 더 있었다. 장인 라반은 여호와께서 사위 야곱을 통해서 자신의 집안에 복을 내려 주신 것을 언제나 깨달으며 지내던 차였다. 그런 어느 날 사위 야곱이 장인 곁을 떠나겠다고 말하자 이제는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겠구나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는 “네 품삯을 정리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고 제안하였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야곱은 하는 일마다 잘 되었다. 장인 라반의 적은 소유가 지난 20년 만에 많아 졌다. 그 이유를 성경은 야곱으로 인하여 라반의 집에 내려 주신 여호와의 복이라고 말씀하였다. 야곱은 장인 라반에게 제안 하였다. 양떼와 염소 떼 중에서 아롱 진 것과 점이 있는 것과 검은 것이 있으면 자기의 소유가 되게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20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계산하지 않았던 품값을 그것으로 대신 하자고 제안하였다. 평생을 목축업자로 살아 온 장인 라반이 모를 리 없었다. 자기 소유 중에 양이든 염소이든 아롱지고 점이 있고 검은 양이나 염소가 태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장인 라반은 흔쾌하게 그리 하자고 대답하였다.
그날 이후로 야곱은 숫염소와 숫양들 중에서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이 있는 것을 구별하고 암양들 중에서도 검은 것들을 골라내서 자기 소유로 삼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는 개천에 양과 염소가 물을 마시는 물구유 위에다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꺾어다가 그 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내게 해서 세워 놓았다. 그 날 이후로 그 물 구유에 와서 물을 마시고 새끼를 낳는 양과 염소마다 얼룩얼룩하고 점이 있고 아롱진 것들이 계속하여 태어나는 것이었다. 튼튼한 암양이 물구유에 물을 마시러 올 때마다 야곱은 나무 가지 그늘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반대로 연약한 암양이 물을 마시러 올 때에는 나무 가지를 치워 버렸다. 그러기를 얼마의 세월이 지나자 튼튼하게 태어나는 양과 염소 새끼들마다 얼룩얼룩하고 점이 있고 아롱진 것들이 넘쳐 나게 태어났다. 성경은 그 이후의 야곱의 살림살이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30:43)고 하였다.
아무리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 손이 늘어나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이민자들 중에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시 대한민국으로 되돌아 와서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야곱은 양과 염소를 비롯한 짐승들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점점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켜져만 갔다. 더군다나 사위 야곱의 얼룩얼룩한 양과 염소 떼가 점점 번성한다는 소문을 들은 장인 라반의 안색이 좋지를 않았다.
그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Go back to the land of your fathers and to your relatives, and I will be with you.)(창31:3)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서원하던 곳 벧엘,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다. 야곱은 어느 날 레아와 라헬을 들판으로 불러내었다. 그리고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말하였다. 그 후에 낙타에 자식들과 아내들을 태우고 고향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마침 그 때는 장인 라반이 양털을 깎기 위해서 자기가 소유한 양떼가 있는 먼 곳으로 떠나 있던 때였다. 야곱이 자기 소유의 가축과 모든 소유를 챙겨 가지고 출발한지 삼일 만에야 그 사실에 장인 라반의 귀에 전해졌다. 장인 라반은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칠일 길을 뒤 쫓아 가서야 길르앗 산에 진치고 있던 야곱의 가족과 짐승 떼를 만나게 되었다.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장인 라반과 떠나길 원하는 사위 야곱 사이에 길르앗 산에서의 대 타협이 어렵게 이루어졌다. 라반과 야곱은 돌무더기를 쌓아 놓고 밤을 세워 가며 떡을 나누어 먹고 작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의 ‘여갈사하두다’라고 이름하고 또 ‘갈르엣’이라고 서로 이름 하였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라반은 외손자들과 딸들에게 일일이 입을 맞추며 축복하고 작별하였다.
그 날 그 일 이후 라반은 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야곱은 먼 길을 출발해서 아버지 이삭의 고향을 향하게 되었다. 장인 라반과 작별하고 출발하여 고향을 향하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셨다. 야곱은 그 천사들을 바라다보면서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으로 “마하나임”이라고 하였다. 야곱의 생애에서 대하는 이 한 장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나.
고향을 향하는 나그네.
창세기 28장에는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 기도를 받은 후에 그를 죽이려고 찾아 나서는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다. 지팡이에 봇짐 하나를 메고 출발한 것이 야곱의 피신 길이었다. 얼마를 피하고 달려가다가 루스 들판에서 해가 기울었다. 고단하게 들판에 누워 잠을 청하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환상을 보았다. 꿈에 사닥다리가 하늘에서부터 땅에 내려 닿았다. 그 사닥다리 위로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사닥다리 꼭대기에 서 계셨다. 그 때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야곱은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그리고 날이 밝자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고 있던 돌을 기둥처럼 세워 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하였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여기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하는 내용에 보면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난 직후인데 벌써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갈 날을 꿈꾸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연어의 회귀 현상을 들어서 잘 안다. 연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은 고향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고향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고 고국을 떠나는 이들 중에는 고향의 흙이라도 한 움큼 꾸려가지고 떠나는 이들이 있다. 떠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돌아올 날을 마음에 그리면서 살아가는 법이다. ‘거자필반’(去者必反)이라고 하지 않나.
김소월의 시 중에 ‘고향’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그 첫 소절은 이렇다.
짐승은 모를는지 고향인지라
사람은 못 잊는 것 고향입니다
생시에는 생각도 아니 하던 것
잠들면 어느덧 고향입니다
조상님 뼈 가서 묻힌 곳이라
송아지 동무들과 놀던 곳이라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아아 꿈에서는 항상 고향입니다
사람은 떠나 살면 살수록 고향을 그리게 되어 있다. 못 가면 못 갈수록 더욱 그리운 것이 고향이다. 고향의 추억이 속상한 이들은 “고향은 무슨 고향. 정 들면 고향이지”하며 자조하고 살지만 어찌 인간이 고향을 아주 잊을 수가 있겠는가. 멀어도 찾아 가고 중국 사람들은 일주일이 더 걸려도 기차타고 달리고 달려 찾아 가는 곳 그곳은 고향이기 때문에 찾아 가는 것 아닌가.
야곱은 20년 동안 부모의 곁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장가들어 처가살이 하며 지내는 그 세월 동안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고향을 품고 살았다.
나라가 무너지고 나면 고향은커녕 고국에도 못 간다. 주전 586년에 남 유다가 망하고 예루살렘은 불바다 되었다.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 성전의 금, 은 그릇과 놋 기둥까지 다 부수고 끌어 가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며 고국에 돌아가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슬픈 노래를 부르며 지내야 했다. 예레미야애가에 보면 그런 시절에 부르던 슬픈 노래 가사가 실려 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5:21) 인생은 떠나가 보면 부모가 그립고 떠나가 보면 고향이 그립고 떠나가 보면 고국이 그리운 법이다.
본향을 찾는 나그네.
이 세상의 고향 집은 막상 찾아 가 보면 그냥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본향집은 다르다. 그래서 인생은 본향 집을 사모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의 믿음을 이야기 하던 중에 이어서 인생은 외국인이요 나그네이며 본향 집을 찾는 자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 히브리서 11장이 언급하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모두 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간 나그네였다. 아브라함을 보라. 그는 연세 75살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100년 세월을 더 살았다. 그런 아브라함의 생애와 그의 아들 이삭과 이삭의 아들 야곱의 생애를 히브리서는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9-10)고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를 이야기하면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죽음을 언급한다. 그렇다. 이 세상에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외국인, 그런 나그네란 없다. 인생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같고, 나그네와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나그네는 권력이 많아도 가고, 재산이 많아도 가고, 인물이 좋아도 가고, 젊었어도 가고, 인기가 대단해도 가고, 목소리 커도 가고, 남들보다 능력과 재주와 역량과 실력이 뛰어나도 때가 되면 다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향을 찾는 마음을 갖고 사는 나그네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칼릴 지브란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그 자체가 지옥이며 천국에 대한 열망은 그 자체가 천국이다.”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멋진 정의인가. F. 포시는 “나는 한 뼘의 생을 누렸다. 이제 바라는 전부는 천국이다.”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많은 비유를 통해서 교훈하고 또 교훈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모든 비유의 말씀은 결국은 본향집을 소개해 주신 비유가 아닌가.
토마스 풀러는 “바보의 천국은 현명한 사람의 지옥이다.”, 윌리엄 세익스피어는 “ 천국은 영원한 기쁨의 보물창고이다.”, 칼튼은 “천국의 가치를 잘 알려면 15분 정도 지옥에 있어 보라.”는 말을 통해서 본향집에 대한 교훈을 말하였다.
해가 지고 어두움이 찾아 온 밤에 돌아갈 자기 집과 가족이 없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불쌍하고 외롭고 고독한가. 인생이 만약에 969년을 살았던 무드셀라만큼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산다고 한들 돌아갈 영원한 본향집이 없다면 그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한 존재이겠는가.
어느 교회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교회의 카페 통유리에 시인 천상병의 ‘귀천’(歸天)을 새겨 넣은 것을 보았다.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렇다. 이 세상 나그네 인생길을 살면서 장차 어느 순간에 소풍을 끝내듯이 세상을 떠나서 돌아갈 본향 집을 준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나그네라면 그 얼마나 어리석고 불행한 인생인가.
본향의 성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는 ‘본향’이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말씀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설명해 주신 천국에 관한 자세한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이 곳, 본향 집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을 갖고 계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여기에 무슨 설명이나 해석이 더 필요한가. 예수께서 친히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천국, 이 본향 집에 대한 그림을 마음속에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가. 히브리서 기자는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이 한 성에 대한 더욱 더 자세한 묘사가 소개되어 있지 않나.
요한 계시록 21장에 묘사된 본향 집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는 모두가 다 이 땅에서 대할 수 있는 각종 보석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장차 성도가 누리게 될 천국 집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이다. 성도의 본향 집은 아름다운 곳이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21:18-23)
모처럼 찾아간 이 세상의 고향 집은 초라한 시골집일 수 있으나 성도가 장차 가서 누리게 될 천국의 본향 집은 이와 같은 곳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27절에 보면 성도의 본향이며 새 예루살렘인 천국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 1위는 인도의 뭄바이에 있는 인도의 최고 부자인 무케시 암바니(Mukesh Ambani,1957-)부부가 사는 집이다. ‘안틸라’라는 집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집의 가격은 10억 달러로 요즘 시세의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하면 약 1조 2000억원이다. 27층 건물이지만 일반 건물 60층 높이다. 그 가족 5명을 위해서 600명이 관리한다. 옥상에 3대의 헬기가 뜨고 내린다. 160대 주차가 가능하다. 피카소의 명화를 비롯해서 황금으로 만든 샹들리에도 있다. 로비에는 9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옥상에는 정원도 있다. 그리고 소극장과 헬스장, 폭포가 있는 수영장, 얼음방 등이 있다. 석유 화학 오일 가스 사업체인 릴라이어스그룹 회장인 그의 전 재산은 220억 달러로 세계 9대 부자이다. 우리 돈으로 환산 하면 23조 정도이다.빌 게이츠는 792억 달러이다. 그런 것만 부러워하면 안 된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대단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부 할 줄 아는 저들의 재물관이 아닌가. 워렌 버핏(Warren Buffett,1930-)은 요즘도 고향에서 검소하게 생활하기로 유명하지 않나. 그는 29조를 기부해 왔다. 그는 재산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기부하고 나누며 베풀며 사는 일에 앞장서고 검소하지 않나. 그는 평생 투자에 관한 책 한권과 그 책을 밝힐 수 있는 그리 밝지도 않은 전구 불빛 하나면 만족해하는 사람이었다. 수줍음도 많아 탔다. 큰 아들 히워드 버핏의 아버지 추억담을 들어 보면 재밌다. “나의 아버지는 잔디 깎는 기계도 다룰 줄 모르시고 팩스조차 제대로 보낼 줄을 모르신다. 무너진 울타리를 고친다든지 자동차 세차 한 번을 제대로 할 줄 모르신다. 그러나 아버지는 숫자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신 천재였다.” 그런 워렌 버핏에 선한 일에는 앞 장 서서 기부하는 것이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된 자이다.
탐심에 가득한 세상의 부자들은 세상의 부와 낙을 누리며 산다. 그러나 본향 집을 향하는 믿음이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대로하면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고 나사로는 거지이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지 않나. 본향의 새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길은 믿음이다. 예수만이 본향 집인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인 본향 집에 갈 수 없다. 이 세상 나그네 인생 길에서 누리는 부귀영화가 다 좋고 다 필요하고 다 귀하나 그 모든 것들은 외국인이 잠시 누리는 낙이요 나그네가 잠시 머물며 누리는 낙과 같은 것이다. 그 모든 영광이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나그네 인생길의 교훈을 깨달은 지혜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왜 예수께서 영생의 길에 관하여 질문해 온 부자 청년에게 재산 기부를 명령하신 것일까. 마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그 부자 청년은 “가서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10:21)는 예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였다. 결국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하였다.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부자인 것, 권력 많은 것, 인기 좋은 것,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 남들이 나를 잘 알아주는 것, 남들보다 힘이 세고, 능력이 더 있고, 더 앞서 가는 것 그런 것만 자랑하며 살면 안 된다.
남을 섬길 줄 알아야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다. 이와 같이 살아간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축복하셨다. 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해 주고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할 줄 알아야 한다.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돌아보아 주어야 한다.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 주어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갖고 남을 섬긴 의인들에게는 영생에 들어가게 하는 은총을 누리게 해 주신다고 하였다. 본향 집을 향하는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믿음만이 믿음이 아닌 것이다. 입의 말과 마음의 고백이 손끝으로 발끝으로 실천되는 사랑이 참 믿음이며 본향 집을 향하고 새 예루살렘 성을 향하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는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영생할 자와 영벌에 처할 자를 구분하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 나그네 인생길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예수를 부인하며 살아가다 보면 불 같은 심판을 피하지 못할 순간이 찾아 올 것이다. 남들이야 살든 죽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된다고 여기며 자기면 누리며 떵떵거리며 자기 배만 신처럼 섬기며 자기만 사랑하면서 살아가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나중 본향 집에 들어가고 싶으나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이런 책망을 받고 이를 갈며 슬퍼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일까.
그렇다. 외국인과 같고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길에서 천국 집, 본향 집,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며 예비 된 아버지의 나라를 흠모하며 살아가는 천국 백성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면 안 된다. 부름 받은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을 씻던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이라고 칭찬 받았다. 그러나 그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을 시비하던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팔아 버리고 뛰쳐나가 불운한 종국을 맞고 말았다. 인생은 선택이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망설일 시간이 없다. 나그네 인생길에서 영원한 영생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천국의 순례자들이 다 되어야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