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9) 2015. 9. 13
일류의 과학과 문명의 발전은 인간을 통한 변화의 역사이다.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비행기를 발명한 것이다. 인간이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 활동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수함을 발명한 것이다. 인간이 우주 공간에 날 아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달나라에도 다녀오게 만든 것이다. 인간이 우주 공간에 정거장을 만들고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것도 모두 다 생각의 결과이다. 사을 태우지 아니한 무인 우주선이 우주 공간에 날아올라서 일정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오늘 날과 같은 최첨단 우주 공학이 발전한 산물이다.
소박한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부뚜막 앞에 앉아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만 가마솥에다 밥을 해 먹는 것으로 알았는데 언제 부터인가 전기밥솥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전기밥솥이란 것이 생각의 산물이 아닌가. 요즘은 싱글 족이나 여행객이나 여러 다양한 용도를 위하여 햇반이란 것이 만들어져서 판매된다. 햇반을 전자렌지 속에 일분만 데우면 따끈따끈한 밥 한 그릇이 마련된다. 그것도 입맛에 따라서 백반, 잡곡 밥, 현미 밥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 모든 것들이 생각의 작품이다.
그 동안은 화분에 흙을 담고 그 흙 속에 화초와 식물을 옮겨 심어야만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요즘은 멋있는 화분 안에 이미 심겨진 다른 간편한 화분에 심겨진 화초들을 보기 좋게 적당히 배치하면 예쁜 화분이 장식된다.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 아무리 가파른 언덕길이라도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그 언덕을 올라 갈수 있다. 그러나 브레이크를 잡지 않은 상태에서 언덕에 머물러 있기란 불가능하다. 곧 뒤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만다. 반대로 아무리 가파른 내리막길이라도 양 손에 브레이크를 잘 잡으면 안전하게 적당한 속력으로 내리막길을 내려 갈 수 있다. 자전거는 자동차와 달리 내 힘을 직접 자전거에 가해야 움직이는 이동수단이다. 평지에서라도 페달을 밟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핸들을 잡고 방향을 정하여 페달에 힘을 전달하면 원하는 방향의 원하는 거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브레이크를 꼭 잡고 있으면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법이다.
지난여름 방학 동안에 교회의 남자 청년이 남자 친구와 둘이서 자전거 남한 일주를 마쳤다. 1500킬로미터 쯤 달렸다고 한다. 불가마에서 잠을 자면서 전국을 유람한 것이다. 청년 때에 해 볼 만 한 경험이 아닌가. 생각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자전거로 세계를 일주하는 이들의 경험도 결국은 생각의 결과이다. 자전거로 몽골의 고비 사막을 지나고, 실크 로드를 지나고, 세계 처처를 여행하는 이들의 도전도 그 시작은 생각이다. 생각이 곧 그 사람인 것이다.
<바람의 딸 지구 세 바퀴 반>이란 책으로도 세상에 많이 알려진 한비야 씨는 여성의 몸으로 세계를 누비고 다닌 여행 경험담을 처처에 쏟아 놓는다. 죽음의 위기를 수 없이 겪으며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위험에 노출된 수많은 고비들을 넘기 피하고 이기고 견디고 소화해 나간 경험담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이 된다. 그 출발과 결과는 결국은 생각의 열매가 아닌가. 이는 남극이나 북극을 탐험하는 일이나 중세 때에 신대륙을 탐험하기 위하여 나서던 탐험가들의 생각과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향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 이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군대의 훈련 중에 천리 행군이란 것이 있다. 매일 백리 씩 걸어서 열흘 동안 천리 즉 4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것이다. 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날마다 백리씩을 걸어서 열흘 만에 가는 거리이다. 이런 극한에 도전하는 행군을 무거운 완전 무장을 하고 걷는 훈련을 한다. 국군 방송 라디오 대담에 나온 여군 상사가 젊은 병사 시절에 여성 최초로 천리 행군을 성공적으로 마친 경험담을 대담하는 내용으로 들어 보았다. “할 수 있을 때 까지 도전한다는 생각과 각오로 시작했고 결국은 해 낼 수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자동차의 원리도 그러하다. 기어를 중립에 넣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엑세레이터를 밟아도 전혀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기어를 전진 상태에 넣고 엑셀레이터 페달을 밟으면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간다. 반대로 기어를 후진 상태에 넣은 다음에 엑셀레이터를 발로 밟으면 자동차는 그 밟는 힘만큼 뒤로 이동하게 된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 생각이 늘 과거 지향적이고, 뒷걸음질 치는 사고방식에 매여 있는 사람은 매사에 언제나 옛 추억과 옛 사건과 옛 이야기에 매여 산다. 뿐만 아니라 기어의 상태가 정지 상태에서는 아무리 엑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아도 자동차가 단 10센티미터도 앞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고착된 사고방식의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고 정지 상태의 기어에서 전진 기어로 기어의 위치를 옮겨야 한다.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소위 파라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미래 지향적인 사람은 새로운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에 도전하면서 내일을 꿈꾸고 장래를 말하고 앞날을 설계하며 현재라는 시간을 활력과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장수 하지는 못했으나 영원한 명언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간 스티브 잡스의 명언이 무엇인가. “stay hungry” 아무리 이룩한 것이 많다고 하여도 여전히 새로운 일들과 창의적인 일들에 목 말라하는 상태 그것을 말하지 않는가.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그 생각이 어떠하냐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잠언 23장 7절에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하였다. 생각이 곧 그 사람 자신이란 말이다.
지난번에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진 남방한계선(GOP)지뢰 폭파 사고로 온 군대와 온 나라가 어수선 했었다. 그 때에 제대를 연기하면서 군 복무에 임한 군인들을 어느 대 기업이 모두 다 채용하겠다고 나섰다. 기업이 저들의 전공이나 능력이나 그 어떤 다른 평가 기준의 잣대를 들여대지 않고 그렇게 수 십대 일, 혹은 수 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도 들어가기 어려운 대기업에 취업 기회를 준 이유는 무엇인가. 비상 상황 앞에서 순간적으로 행동하는 저들의 생각, 그 사고방식, 그 평소의 삶의 철학, 그 태도가 높이 평가 된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은 남다른 생각과 사고방식과 태도는 어느 명문대학을 나왔느냐, 전공이 무엇이냐, 외모가 어떻게 생겼느냐 등등의 소위 스펙의 문제를 훨씬 뛰어 넘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 아닐까.
빌립보서의 사실상의 끝은 4장 7절까지이다. 왜냐하면 ‘끝으로’라는 표현과 더불어 자신의 감옥 안에서의 옥중 생활을 돌보아 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하는 인사와 축복의 말을 남기고 문안하는 형식으로 편지를 맺기 때문이다. 그 중에 8절과 9절의 말씀은 평소에 사도 바울이 마음에 품고 지내던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총 정리한 듯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천 년 전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를 죄와 악에서 구원하실 생각을 성취하셨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며 부활 사건이며 승천 사건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시고 나사렛에서 자라나시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사십일 간 금식하셨다. 그 후에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과 함께 여러 가지 다양한 비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 복음을 교훈하고 전파하시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주시므로 온전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회당장 야이로의 12살된 외동딸이나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무덤 안에서 불러내어 살려 주시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와 악과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길을 열어 놓으실 생각을 하셨고 그 생각을 이루셨다. 이것이 죄 사함 즉 구원의 은총이며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원한 은총이다. 하나님이 성취하신 십자가의 은총과 구원의 길을 의심하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생각이냐고 불신하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인천 국제공항에 가면 400여 명씩 태우는 어마어마한 비행 물체가 있다. 겉보기에는 그냥 기다랗게 생긴 물체일 뿐이다. 가령 A380는 몸체의 길이가 72미터다. 날개 길이가 79미터다. 승객과 짐을 잔뜩 실으면 비행기의 무게가 560톤이다. 그런 무게로 시속 거의 1,000킬로미터를 나는 속도로 13,200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날아간다. 요즘 전투기들은 공중 급유를 받기도 한다. 보잉 최신형 747-8i는 쉬지 않고 14,815킬로미터를 마하 0. 86의 속도로 나를 수 있다고 한다. 마하라는 속도 단위는 1초에 340미터를 가는 속도이다. 한 시간에 1224킬로미터를 가는 속도를 마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 물체 안에 어마 어마한 짐을 싣고 사람 수백 명을 싣고 열 시간 이상씩을 지구의 이 쪽에서 지구의 저쪽으로 날아간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최첨단 비행 물체를 타고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고 생각하고 그런 비행 물체 안에 몸을 싣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가 태어난 땅 이외의 곳에는 단 한 번도 못 날아 가 볼 것이다. 우주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이보다 더 신비하지 않겠나.
천국, 하나님의 나라, 영생, 죄 사함, 구원, 거듭 남, 대속, 구속,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이런 영적 세계에 대한 생각이나 믿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눈 여겨 보고 귀 기울여 보라. 한 반도 같은 작은 땅에서도 어디는 천국이고 어디는 지옥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성도가 되어 주님께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찬송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선을 행하며 날마다의 삶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생활들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끝으로 말한다.’고 언급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몇 가지의 주제 있는 내용들을 꼭꼭 집어서 다시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분부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는 말씀도 그 마음이란 것이 곧 생각이 아닌가. 즉 “너희 안에 이 생각으로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생각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강조는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살까만 궁리하지 말고 하나님스러워지고, 그리스도스러워지는 본 받는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성화의 삶, 거룩한 삶을 추구하자는 말씀이다.
그러면 무엇들을 생각하라고 하였는가. 여덟 가지의 덕목들을 강조하고 있다. 빌립보서 4잘 8절은 공동번역으로는 “형제 여러분, 끝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십시오.”(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 -- 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 -- think about such things.)라고 되어 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whatever is true)
참되며 라는 말씀은 위선과 외식과 가식과 거짓과 허례가 없이 진실한 상태를 말한다. 로마서 3장 4절에 보면,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다 거짓되다고 하였다. 경제력이 약한 남편하고는 살 수 있지만 거짓된 남편하고는 함께 살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음식 잘 못하는 아내하고는 살 수 있을지 모르나 거짓된 아내하고는 함께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는 가족들 간에도 마찬가지, 직장의 동료들 간에도 마찬가지,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 교회 생활은 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성경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라고 인간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신자의 삶을 살아가며 진실하여야 한다.
국민은 국가의 제도와 법 앞에서 진실하여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부름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앞에 진실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앙 양심 앞에 진실하고 자기 스스로 거짓되지 않는 참되고 진실한 삶을 가꾸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한 기관이 조사하였다. 밝은 대 낮에 값 비싼 물건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흘린 것처럼 놓아두었다. 대 낮에 그 물건을 집어 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깜깜한 어둠 가운데 값이 비싼 물건을 일정한 곳에 놓아 놓고 야간 감시 장비로 감시 보았다. 놀라운 것은 값비싼 물건을 놓기가 무섭게 없어지고 또 없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어둡고 한 적한 곳에 위치한 그 값비싼 물건을 계속하여 집어 가 버리는 인간의 양면을 관찰하게 되었다.
어제 밤 폭포동 음악회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한 장면을 성악가가 바리톤의 굵직한 음성으로 노래하였다. “지킬 박사와 하이디”의 내용이 무엇인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주인공은 존경 받는 헨리 지킬 박사이다. 그러나 밤마다 일어나던 낙폭하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사악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행하던 하이드가 낮에 만나는 그 저명하고 존경 받던 헨리 지킬 박사 그 자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만다. 하이드는 하원의원인 댄버스 커루 경을 살해 할 때에도 마치도 어린 아이들이 레고 장난감을 부수어 버리듯이 손쉽게 행하는 악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헨리 지킬박사는 원래 상상력도 풍부하고 여러 가지 실험도 좋아하고 뭐든지 잘 만드는 인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킬박사는 악한 인물 하이드가 되는 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실험을 하려고 자기가 그 약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문제에 휩싸이고 만다.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하는 ‘무엇에든지 참되며’라는 진실이란 무엇이고 그 반대로 거짓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왜 진실하지 못하며 거짓되게 행동하고 마는가. 인간에게 참되지 못한 거짓이 들어오면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하나님 앞에서라도 거짓과 위선과 자기변명의 수렁에 빠지게 되고 만다. 인간이 진실에서 벗어나 거짓에 휩싸이고 말면 그 거짓의 거미줄이 얼굴을 휘 감듯이 휘 감고 만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표현인 ‘참되며’라는 ‘알레데’라는 속성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참되신 영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도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표현의 앞부분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참되시며 오직 한분이시다.”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예레미야 10장 10절을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참된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은 무엇에든지 참되어야 한다.
무엇에든지 경건(敬虔)하며(whatever is noble)
사도 바울은 ‘경건’이란 표현을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사도 바울만이 사용한 성경의 용어이다. 디모데 전서 3장 8절과 11절에 보면 남녀 집사들에게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respect’ 즉 정중하고 정숙하며 존경 받을 만한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을 분부하였다. 디도서 2장 2절에도 같은 표현을 썼다. 사성도가 기도 생활을 성실히 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래야만 “경건함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강조하였다. 거기에 ‘경건함과 단정함’이란 ‘godliness and holiness’를 말한다. 즉 매사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거룩하고 성화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의 가사처럼 말이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하나님을 닮아서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니 그 얼굴의 표정이나 그 목소리나 그 걸음걸이를 따라 살 수는 없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닮아 사는 삶을 베드로후서에서 강조하였다. “오직 우리 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예수님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그 은혜와 그 깨달음을 삶 속에 경건으로 쌓아 가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에든지 옳으며(whatever is right)
하나님은 옳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영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저울은 항상 수평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잣대는 언제나 모자람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어디서나 옳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병든 사랑, 위선된 사랑, 이기적인 사랑, 편협된 사랑,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욕망에 붙잡힌 사랑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영원히 누구에게나 항상 옳은 사랑이시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래서 좌편 강도의 조롱을 뛰어 넘는 사랑의 죽으심이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옳은 죽으심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옳은 사랑은 로마 병정들의 못 박는 못으로도, 옆구리를 찌르는 창으로도 죽일 수 없는 사랑이셨다. 예수님의 옳은 사랑과 옳은 자비와 옳은 긍휼과 그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그 어떤 힘으로도 짓밟거나 없애 버릴 수 없는 영원한 능력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 옳으신 길과 진리와 생명의 능력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예수님 안에서 살고,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무엇에든지 옳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에든지 옳지 못하다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자기 증거이다.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무엇에든지 옳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옳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에든지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인간 최고의 영광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국가의 훈장을 받거나 대통령 상을 받거나 노벨 상을 받거나 템플턴 상을 받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이다.
사울, 다윗, 솔로몬 이후 남북 이스라엘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에서 최 장수 임금이었던 왕은 55년 동안 왕이었던 남 왕국 유다의 14대 임금이었던 므낫세 왕이다. 므낫세는 12살에 왕이 되어 67살에 이 세상을 떠나기 까지 왕이었다. 그는 젊은 날 한창 때에 하나님을 거역하였던 왕이었다. 여호와의 성전 뜰에다가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왕자들이 불 가운데로 뛰어 지나가도록 하였다. “점 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다.”(대하33:6)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다. 역대하 33장 9절은 므낫세 당시의 타락상을 고발하였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결국 회개하지 않고 계속하여 악을 행하던 므낫세에게 하나님의 옳은 심판이 임하였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군대 지휘관들을 유다 땅에 보내셨다. 앗수르의 군대는 므낫세 왕을 사로잡아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의 임금 므낫세가 그 끌려간 땅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기도하는 므낫세의 회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를 예루살렘으로 되 돌이키셔서 왕위에 다시 앉게 하셨다. 성경은 말씀하였다.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33:13) 그 후에야 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성전에서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므낫세는 나중에 “여호와의 제단을 보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그 제단 위에 드리고 유다를 명령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명령하고 백성들도 나서서 왕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였다.
옳게 살지 못하면 에서처럼 언약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손자라도 그 언약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장자의 권한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며 팟죽 한 그릇과 바꾸는 식으로 처신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성도된 우리는 교회의 직분과 직임도 함부로 여기면 안 된다.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옳게 여기심을 받게 된다. 무엇에든지 옳지 못하면 사사라도 삼손처럼 되고 만다. 임금이라도 사울 왕처럼 되고 만다. 예수님의 제자라도 가롯 사람 유다처럼 되고 만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재고, 하나님의 말씀의 저울로 달아서 옳아야 한다. 시간 사용, 재물 사용, 힘의 사용, 은사와 재주와 역량과 경험과 살아오면서 쌓아온 그 모든 삶의 저력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집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무엇에든지 옳으며’라는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무엇에든지 정결(淨潔)하며(whatever is pure)
이는 도덕적인 순결을 명령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적 순결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정결하다' 는 말은 '하그노스' 로서,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쓸 수 있는 깨끗한 제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구약시대에는 흠이 있는 짐승을 제물로 드릴 수 없었다. 오직 깨끗하고 흠 없는 짐승만 드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럽고 추한 생각을 버리고 깨끗하고 정결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시편 24편 3∼5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께 복을 받을 사람은 언제나 깨끗한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 몸도 깨끗해야 하지만 생각인 정결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씻고 몸을 씻듯이 마음을 씻고 영혼을 맑게 씻어야 한다. 시시 때때로 일어나는 더럽고 추한 생각을 회개하여야 한다.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부끄럽고 하나님이 실망하실 생각들을 떨치고 회개하여야만 한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 보면,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육체적인 생각들을 생각 속에서 순간순간마다 지워 버려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생각으로 가득 차게 채워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성도는 성령의 생각을 갖고 살아야 무엇에든지 정결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법이다.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셨다. 내 마음에서 내어 쫓긴 마귀가 나의 마음에 다시 와서 들여다보고 내 마음이 성령으로, 정결한 영으로 가득하지 않고 비어 있으면 일곱 명의 친구 마귀들을 데리고 와서 거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마음의 형편이 이전보다 더욱 악하고 형편없어 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에든지 정결한 삶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whatever is lovely)
‘프로스필레’prosfilh라는 이 표현은 신약성경 전체에 이곳에 단 한번 만 나오는 유일한 표현이다. 사도 바울은 “즐겁고 유쾌하며 사랑스러운 삶”의 모습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사랑 받을 만 하며 라는 말씀은 사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오늘 날 북한 주민의 한 달 부식비가 쌀과 반찬을 포함해서 9000원쯤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은 애완용 돌고래를 한 마리에 33억 원 씩 주고 사들였다고 한다. 가령 개성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나 기술자들이 한 달에 월급 130불을 받으면 그 중에 50불은 당국에서 가져가고 나머지 80불을 자기 손에 받는 다는 것이 통일부 ㄷ관계자의 말이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사회 보장비와 출퇴근 비등을 떼어 내고 이것저것 떼어 가고 나면 2불정도 밖에는 손에 쥐는 돈이 없어서 한 달 일해 봐야 쌀 2-3키로 그램 살 수 있는 돈 밖에는 안 생긴다고 한다.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만하며”라는 말씀은 모든 면에, 매사에 영육 간에 사랑 받는 그 자체를 말한다. 우리나라에 애완견 즉 반려견의 수가 일천만 마리를 넘어섰다고 한다. 대통령도 청와대에 들어 갈 때에 사저 이웃의 주민들이 선물한 진돗개 한 쌍인 ‘희망이와 새롬이’가 최근에 강아지를 5마리나 나았다고 하지 않나. 애완견이 주인을 잘 만나면 만족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처럼 성도들은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세상을 악하게 살지 말고 무엇에든지 서로 서로 풍성한 사랑 받을 만한 삶을 가꾸어 가야 할 것이다.
무엇에든지 칭찬(稱讚) 받을 만하며(whatever is admirable)
세상을 함부로 막 살지 않고 고상하게, 칭찬 받을 만하게, 좋은 평판이 있도록 근신하고 삼가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말한다.
무슨 덕(德)이 있든지(anything is excellent)
“무슨 덕이 있든지”라는 말씀의 ‘덕’(아레테)은 앞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의 자세한 덕목 들 중에 혹시라도 빠진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묶어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인정받고 존경 받는 삶의 모습을 말씀하는 것이다.
무슨 기림이 있든지(anything is praiseworthy)
거의 다 비슷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은 신자로서 도덕적으로 높고 고상한 삶을 살아서 대대로 칭찬 받는 것을 말씀한다. 성경의 인물들이든,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서 성 어거스틴이나 아시시의 성인 프란시스코나 토마스 아켐피스와 같은 인물들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Franciscus. Assisiensis, 1182?∼1226)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설자이다. 12-13세기 때의 인물이다. 너그러움과 단순하고 순결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인간을 향한 헌신과 자연에 대한 사랑과 진실한 겸손 등으로 인하여 800년 전에 감동적인 신앙인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교황 비오(Pius) 11세는 그를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 불렀다(1926년). 부유한 직물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분방하고 야심 많은 청년기를 보내던 중 일련의 계시와 나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23살 때에 개종하였다. 2년 뒤 아시시 근처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 있는 십자가상(像)으로부터 “가서 무너지려고 하는 나의 집을 돌봐라” 하는 목소리를 듣고 부르심을 받아 1209년에는 마태오 복음 10장 5-14절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작은 형제회’를 창설하였다. 형제들은 복음정신을 따라 세상에서 이방인과 순례자로 살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수도회의 창립 후 그 회의 영성적 성장을 위해 편지와 훈시를 보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교를 위해 시리아(1212년)와 스페인(1213∼1214년), 심지어는 근동(1219년)에까지 여행하였지만 틈이 날 때마다 외딴 곳에서 혼자 기도하며 명상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말년은 아시시 근방에서 보냈는데 나중에는 눈이 먼데다가 중병을 앓았다. 영면 뒤 아시시의 성 지오르지오(St.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보여지고 들려 지는 탐심의 세계에 매여 살지 말고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고, 덕이 있고, 기림이 있는 삶을 가꾸어 가는 모범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