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위한 수고(빌2:19-30) 2015. 9. 6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무슨 일을 이룩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서로 함께 힘과 지혜를 합해야 한다. 그래야 더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다. 우리 속담에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다. 전도서 기자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고 하였다.
1997년 10월 17일에 미국 메사추세추 주의 메모리얼 병원에서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다. 예정보다 3개월이나 미리 태어나게 된 미숙아였다. 체중이 겨우 1킬로그램 정도였다. 한 아기의 이름은 카이라(Kyrie Jackson) 다른 한 아기의 이름은 브리엘(Brielle Jackson)이라고 지어졌다. 그 중에 브리엘은 심장의 건강과 박동 상태, 혈압, 체온 등이 모두 다 비정상이었다. 살아남고 자라날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따로 인큐베이터에 넣여져서 돌보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 등이 힘을 합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지만 살려 낼 가망성이 점점 적어 졌다. 그 때에 간호사 경력 19년차인 게일 카스페리언(Gayle Kasparian)이 제안하였다. 병약한 아기를 그 나마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다른 쌍둥이 자매의 인큐베이터 안에 함께 같이 지내도록 해 주자는 것이었다. 설왕설래 끝에 그 간호사의 제안이 받아 들여졌고 부모의 동의를 받아 그렇게 하였다. 그 날부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일주일, 이 주일, 그리고 한 달이 지나도록 병약했던 아기는 더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건강하게 자라기 시작하였다. 건강한 아기는 엄마의 태중에서처럼 다른 병약한 아기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지내게 되었다. 기적처럼 심장 박동이 안정되고 혈압도 정상이 되었고 체온도 제 자리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매 시간 아기의 상태를 관찰하던 담당 간호사는 기계의 계측이 잘못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역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의 제목은 “The Rescuing Hug"(생명을 살리는 포옹)이라고 붙여졌다. 그 이후로 병원들마다 쌍둥이가 태어난 경우에 같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쌍둥이가 같이 생활하도록 하는 양육법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의학계에서 발견한 호르몬 중에 ‘엔돌핀’(endorphin)의 효능에 관한 내용은 1970년 이후로 많이 알려져 있다. 엔돌핀은 “포유류의 뇌와 뇌하수체에서 생성되는 통증완하 효과가 있는 단백질”이며 모르핀 효과와 같은 탁월한 효능이 있다. 엔돌핀의 분비체계와 뇌의 '기쁨중추'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연구 결과 밝혀졌다. 그것 말고 ‘다이돌핀’(didorphin)이란 것이 있다. 엔돌핀이 항암 효과가 있어서 통증을 해소하고 암을 치료하는데 큰 효능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엔돌핀도 좋은데 다이돌핀의 효능은 어느 정도일까. 다이돌핀은 엔돌핀의 효능의 4,000배라고 한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사람의 몸 안에서 다이돌핀이 생성되는가. 다이돌핀은 좋은 음악을 듣는다든지, 아름다운 미술을 감상한다든지, 아름다운 자연을 본다든지, 예전에 깨닫지 못하던 새로운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된다든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끔찍이 사랑하며 산다든지, 목표를 달성해서 기뻐진다든지 할 때에 몸 안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 중에 최고는 어떤 경우이든지 마음에 감동을 받고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 순간에 ‘다이돌핀’이 가장 많이 생성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내 마음에 은혜와 감동과 결단과 회개와 용기가 생길 때에 우리 몸 안에서 다이돌핀이 샘솟듯이 솟아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크고 엄청난 것들만 바라지 말고 작은 사랑, 작은 행복, 작은 여유, 작은 배려, 작은 관심, 작은 섬김, 작은 나눔,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작은 감사거리 가운데라도 숨겨져 있는 보화와 같은 감동을 자주 느끼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은 다이돌핀이 계속하여 생산되는 물댄 동산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철학자와 신학자인 존 헨리는 “감사하는 마음은 최고의 해독제와 항암제와 방부제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사람은 감사를 느낄 때 혈류가 뇌로 많이 들어가고 심장파동과 뇌파가 아주 일정하며 안정된다. 반대로 화를 내거나 분노할 때는 혈류가 아주 적게 들어가고 심장파동과 뇌파가 불규칙해진다. 물의 파동을 연구하는 에모토 마사루 박사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의 연구 결과가 그런 것이다. 감사, 사랑, 축하 등을 말로 하거나 글로 표시한 다음 그 물을 영하 4 ℃에서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형태에서는 물의 육각 결정체가 아름답고 선명해진다. 그러나 반대로 같은 물을 향해서 분노, 욕, 짜증 등의 감정을 말하거나 글로 표시한 다음 위의 조건과 동일하게 촬영하면 결정체가 불안전하게 되는 현상을 사진에 담아내었다. 감사하고 사랑하며 기쁘게 살면 건강해진다는 연구 결과이다. 인도의 간디는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다."라고 말했다. 독일의 신학자이며 순교자인 본회퍼는 "감사를 통해 인간의 마음이 부요해 진다"고 말했다.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며 힘을 합칠 때에 가정, 기업, 사회, 국가가 발전하게 되어 있다. 가정일이든 기업의 발전이든 국가의 번영이든 그 배후에는 함께 더불어 수고하는 남 다른 수고가 쌓여서 좋은 결과를 내고 큰일을 이룩한 것이 아닌가. 가족들 간에 서로 사랑하고 기업의 일꾼들이 노사 간에 밤을 새워 가며 기업 발전에 헌신하고 국가의 안정과 부흥을 위하여 서로 힘을 합하여 수고하고 애쓰며 목숨을 바쳐서 충성한 분들의 숨은 공로가 쌓이고 쌓여서 빛나는 역사를 이룩하는 것이다. 가정이 가정되고 기업이 기업되고 한 나라가 주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힘이 있는 나라로 자리 잡고 발전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 분야에서 헌신하고 희생한 열매를 후손이 누리는 것인가 말이다.
이는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주를 섬겨가는 하나님의 일 즉 교회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모든 복음 전파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이 그러하고 복음의 핍박자였던 사울이 다메섹의 변화 체험 이후에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길을 걸어간 그 모든 고난의 과정들이 그러하다. 예루살렘 교회는 탄생 된지 얼마 만에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는 순교자가 되었고(행 7장) 헤롯 왕의 핍박으로 사도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가 칼로 죽임을 당하는 사도 중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행12장) 야고보를 죽이고 나자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하였다. 실제 베드로는 붙잡혀서 양편에서 두 군인이 함께 쇠고랑을 서로 묶은 채로 보호 감호된 상태로 감옥에 갇혔다. 감옥 밖에서는 파수꾼이 또 따로 지키고 있었다. 그 밤에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연합하고 합심해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그 밤에 감옥 안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천사가 등장하고 베드로의 손목에서 쇠고랑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고 천사는 베드로를 옥 밖으로 이끌어 내었다. 하나님이 천사를 동원하여 행하신 기적인 것을 깨달은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던 기도처를 찾아 갔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집 안에서 웅성거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문 안에서 베드로의 음성을 들었다. 로데는 너무 기뻐서 문을 열어 줄 생각도 못하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서 “문 밖에서 베드로 사도의 음성이 들린다”고 알렸다. 기도하던 성도들은 로데의 말을 듣고 “내가 미쳤다”고 꾸지람했다. 그 때에 로데는 "아니다. 내가 지금 참 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도하던 성도들은 “그러면 그가 천사인가 보다.”라고 반응하였다. 그 때에 문 밖에서 베드로가 계속하여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기도하던 성도들이 문을 열자 문 밖에 베드로가 서 있었다. 베드로는 그 밤에 주께서 천사를 동원해서 감옥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설명해 주고는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과 환난이 계속되었지만 교회는 부흥되어 갔고 믿는 자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헤롯은 죽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여 갔다.”(행12:24)
순교자로 생을 마감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 외롭고 고독한 전도자의 길을 끝까지 달려간 이방을 향한 전도자였다. 그런 그의 사역 중에 쓴 13편의 편지가 신약 성경 중에 삽입되는 영광스러운 사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한 복음 전파의 씨앗들이 처처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 큰 나무처럼 교회다운 교회요 거룩한 무리의 공동체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도우심이며 본문의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동역자의 헌신과 수고가 아닐 수 없다.
바울의 옥중 권면.
빌립보서 2장의 전반부는 빌립보서의 보석과 같은 말씀이며 그 어떤 다른 서신서에서 대하기 어려운 깊이 있는 말씀들을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말씀하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기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는 해석은 빌립보서에서 만나 보는 기독론의 백미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지극히 높이셨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다.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전능자이시다. 이와 같은 하나님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갖고 사역해 온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선언과 권면으로 천하 만민이 우상 숭배와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다른 서신서의 내용도 그러하지만 특히 빌립보서에서 대하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권면한 권면의 내용들은 마음을 숙연하게 하고 사명감을 새롭게 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빌립보서 2장 12절 이하에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救援)을 이루라.
하나님 안에서 원망과 시비가 없이 원만한 대인관계를 갖고 원만하게 일을 성취하라.
하나님의 흠이 없고 순전한 자녀의 삶을 가꾸어 가라.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 다운 보람과 긍지를 갖고 살아가라.
고 권면하였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섬김은 사도 바울의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성도의 삶을 더불어 살아가기를 소원하였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삶을 ‘전제’(drink offering)로 드리는 통전적인 헌신의 삶을 살았던 전도자였다. 빌립보서 2장 17절의 ‘전제’란 레위기의 제사법 중에 제물 위에 포도주를 쏟아 붓는 제사법이다. 붓는 다는 것은 다시 되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희생이요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삶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간 사도 바울의 마음가짐은 언제나 진지하고 언제나 철저하고 언제나 엄숙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바울이 날마다 경험하고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 느끼는 기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깊고 심오한 영적 세계의 기쁨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속에 샘처럼 솟아나는 그런 기쁨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공유되는 기쁨이요 즐거움이기를 원하였다. 영어 성경에 보면, “glad and rejoice”라고 하였다. 예수 안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항상 있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는 우울하고 속이 상하고 침울하고 두렵고 놀랍고 충격적인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나.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세상에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선물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이시다.
누가복음 2장 1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탄생하시던 그 밤에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의 가사가 기록되어 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다.
영광과 평화 그 중에서도 이 땅에서의 평화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평화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세상의 대개의 사람들은 거의 가 다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다. 자기 이익에 해가 된다고 여기면 물고 뜯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삶은 달라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고 섬기는 성도라면 그 기쁨의 차원과 평화의 차원이 세상의 그 어떤 평화와는 분명히 달라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이런 선언과 축복의 길을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2장 4절에서는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는 자신의 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겪는 희로애락의 모든 일들을 서로 돌아보는 생활 속에 기쁨이 배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기쁨에 취해 살던 기쁨의 사도였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자신의 기쁨이라고 하였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4:1)고 권면하였다. 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기쁜 일상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였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사람이 누군가를 돕고 섬기고 베풀고 나누고 돌보며 살아가면 늘 받기만 하고 신세만 지는 것과 비교 할 수 없는 기쁨이 마음속에 샘솟게 된다고 한다.
미국의 잡지 <아틀랜틱>이 행복지수가 높은 1만 명의 특징을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남을 웃길 줄 아는 유머감각이 있었고 자신 역시 잘 웃었다.
둘째, 일을 한 만큼 충분히 쉴 때는 쉬면서 지내고 자신을 혹사시키지 않았다.
셋째, 적당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남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넷째,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할 줄 알았고 스트레스를 적게 받았다.
다섯째, 감사한 일에는 감사할 줄 알았다.
여섯째, 남을 위해 한 가지 이상의 봉사를 하고 있었다.
일곱 번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덟 번째, 모두 현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고난과 질병과 사고와 시련과 아픔과 슬픔과 역경과 도전과 실수와 실패와 두려움과 공포와 위협과 시기와 시비가 끊임이 없는 세상에서 기쁨과 행복을 스스로 가꾸며 살자. 기쁨과 행복, 행복과 기쁨은 같이 가는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행복과 소망과 은혜가 넘쳐흐르는 날마다의 삶을 가꾸며 살자.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서고 찾아 헤매어도 못 찾던 파랑새가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도착하여 보니 내가 사는 집 처마 끝에 와서 앉아 있었다고 하지 않나. 멀리서 행복이나 기쁨을 찾으려 하지 말고 내 삶의 주변에서 작은 기쁨과 작은 행복 가운데 만족과 보람을 찾아 가는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
바울 곁에는 바울에 버금가는 믿음 좋은 동역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디모데가 아닌가.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처럼 여기고 아끼고 신뢰하고 사랑하였다. 디모데에게 편지한 첫 편지인 디모데전서 1장 2절에 보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말하였다. 디모데 후서 1장 2절에서는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밤낮 없이 기도를 많이 하던 기도의 사람이었는데 늘 기도시간마다 생각나고 감사하게 여기는 기도의 동지요 복음 전파 사역의 동지요 온갖 고난을 같이 이겨 나가던 고난 극복의 동지였다. 디모데는 눈물이 있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요 그 마음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식지 않는 은사가 불 일 듯 일어났던 복음 전파의 열정가였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만난 이후로는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그의 곁에는 항상 디모데가 있었다. 바울과 디모데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그 어떤 고난이라도 극복해 나가는 복음의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 곁의 디모데는 안위의 사람이요, 뜻을 같이하던 동지요, 바울의 모든 생활을 낱낱이 알고 그 기도의 자세한 제목들과 사정들을 알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사전도 진실한 마음으로 생각하며 지냈던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 고난과 연단이 적지 않았던 것처럼 디모데 또한 온갖 연단을 감당하고 극복해 나가야 했던 주인공이었다. 사도 바울 자신이 항상 디모데를 아들처럼 따뜻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디모데 또한 사도 바울을 대할 때에 아들이 아버지께 하듯이 정성을 다하였다. 빌립보서 2장 22절에 보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하였다. 또한 바울은 어디에 바울을 대신하여 누군가를 보내고자 할 때에 디모데를 자주 보내고는 하였다. 디모데는 그처럼 바울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에게 ‘안위’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우리말로 ‘안위’(安慰)라고 하였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cheer'라고 하였다. 이는 물론 ’안위‘라는 뜻도 있지만 “갈채, 환호, 만세, 성원, 격려, 위안, 안위, 즐거움, 기쁨, 활기, 생기”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운동 경기 장에서 응원하는 응원단장과 응원대원들의 역할이 그러하다. 선수들과 관람객들의 응원 분위기를 돋우는 치어 리더(cheer leader) 혹은 치어걸(cheer girl)들의 역할이 바로 그러하지 않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가족들과 성도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곁에서 언제나 그런 안위의 사람이요, 격려와 활력과 즐거움과 기쁨과 활력을 불어 넣어 주던 다양한 은사와 넓은 마음을 갖고 있던 바울 사도의 젊고 든든한 동역자였다.
요즘이야 별의 별 청량음료, 탄산음료가 많지만 칠성 사이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청량음료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1950년 6. 25 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5월에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칠성사이다’이다. 그 이전 까지는 1930년 이후로 한국 땅에 들어 온 일본 제품의 청량음료뿐이었다. 일곱 명의 성(姓)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7명의 창립 주주가 되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일곱 성이란 뜻의 칠성이라고 시작하였다가 북두칠성처럼 국내 청량음료 시장의 일곱별이 되자는 취지에서 일곱별의 의미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칠성 사이다는 속이 답답할 때 한 모금 마시는 국민 음료 중의 하나로 자리 잡은 지가 65년이다. 여러 회사 제품이 적지 않지만 칠성 사이다는 사이다의 대명사처럼 자리 잡았다. 옛날에는 어려서 소풍 갈 때 소풍 가방 속에 칠성사이다 한 병을 넣고 가고 선생님께 사이다 한 병을 선물하면 어깨가 펴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사이다의 첫 맛이 무엇인가. 톡 쏘는 맛이 아닌가. 그런 것이 영적으로 하면 ‘cheer up' 하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 서로에게 얼음을 동동 띄운 사이다의 톡 쏘는 시원한 맛처럼 맛깔스러운 그런 인간관계를 가꾸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디모데는 또한 바울과 함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더불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복음 전파의 열정가였다. ‘함께’라는 단어보다 힘이 되고 좋은 단어는 없다.
요즘 서울특별시가 사용하는 로고와 구호가 “함께 서울”이다. 양 손을 펴서 서로 잡은 로고 위에 ‘함께 서울’이라고 써 넣었고 그 로고 아래에 “시민과 함께 세계와 함께”라고 설명 되어 있었다.
디모데는 언제나 바울 곁에서 즐거움과 기쁨과 고난과 아픔과 역경을 늘 같이 함께 하던 복음의 동역자였다. 본문에 22절과 25절에 보면, 디모데와 에바브라디도의 한결 같은 특징이 늘 사도 바울 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동역자들이란 점이다.
사람이 어떤 경우에 서로가 함께 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디모데와 에바브라디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함께 복음을 위하여ㅑ 수고한 자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라고 하였다. 사람이 누군가와 늘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뜻이 같아야 한다. 빌립보서 2장 2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귀하게 여기고”라고 하였다.
이번에 대한민국 정부와 중국 전승절 행사와 관련한 언론의 시각 다양하지만 정치적인 견해 말고 그 전승절에 중국 국가 주석인 시진핑 주석이 중국 최고의 의전 차량에 혼자 탑승해서 일만 이천 명의 넘는 육해공군 열병대원을 사열하면서 서로 주고받은 표현이 언론에 소개 되지 않았나.
동지(同志)들 안녕하시오
수장(首長)님 안녕하십니까
동지(同志)들 수고가 많소
인민(人民)을 위하여 복무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열병식 중의 인사 교환은 65년 전에 모택동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지 않나. 동지가 무엇인가. 동지가 누구인가. 저들의 동지 의식이 지금은 우방의 우정을 나누지만 1951년 1월 4일의 1. 4후퇴 때에는 인해전술이라고 이름 붙은 무서운 침략군이 아니었나. 역사에는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다.
성경이 말하는 동지(同志)란 누구인가. 빌립보서 2장 20절의 “뜻을 같이 하여” 이것이 동지(同志)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힘을 합하여 영원한 복음의 동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로디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천거하는 에바브로디도는 디모데처럼 바울을 대신하여 보냄을 받던 사람이다. 그는 바울 곁에서 형제와 같던 사람이요 함께 수고 하고 함께 군사 된 자란 극찬을 받던 선교의 동역자였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바울의 쓸 것을 돕던 사람이요 빌립보 교회를 떠나 있는 동안에는 늘 빌립보의 성도들을 사모하던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에바브로디도는 병약하였다. 바울을 통한 질병 치유의 기적이 그렇게 자주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에바브로디도의 병은 쉽게 낫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나. 질병의 치유가 사도 바울이나 그 어떤 누구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지 않나. 바울 사도가 자기 곁에서 병으로 고생하고 병으로 죽어가던 에바브로디도를 위하여 기도를 하지 않았겠나. 얼마나 간절히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기도하였겠나. 성경은 당시에 에바브로디도가 앓던 병명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 병은 27절에 보면 죽게 된 병이었고, 30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일을 하다가 얻은 죽기에 이를 정도의 심각한 병이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 자신은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 할 정도로 복음이 전파되는 일과 그리스도의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던 희생적인 성품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27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렇게 병약하고 병으로 죽게 될 지경의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의 감옥 안에서 갇힌 자의 생활을 돌보기 위하여 헌신 하던 중에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나았다. 그러한 사실은 에바브로디도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 결과이며 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으로 근심하며 기도하던 사도 바울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주신 은혜로운 간증거리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도 이와 같은 은혜로운 간증거리들을 새롭게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병약하게 죽음의 그늘이 가리우던 에바브로디도가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얼마나 큰 기쁨인가. 이는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도 큰 기쁨의 소식이었다. 병들고 연약했던 에바브로디도가 건강을 회복하고 나니 사도 바울은 서둘러서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까지의 먼길을 어서 보내기를 원하였다. 왜냐 하면 회복된 에바브로디도의 건강한 모습은 그를 만나 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의 큰 기쁨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28절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나.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게 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다. 우리도 서로에게 이런 기쁨이 되는 인간관계를 살뜰하게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의 강조는 편지마다 한결 같듯이 빌립보서 2장 29절에도 돋보인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학생이든 청년이든 어른들 중의 어떤 누구이든지 우리 모두는 ‘주 안에서’(in the LORD) 살아가는 자기 점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주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라면 “모든 기쁨”의 차원이 달라야 할 것이다. 기쁘니 기뻐하고 슬프니 슬퍼하고 즐거우니 즐거워하고 괴로우니 괴로워하는 것은 물론 건강하고 정상적인 감정 표현이긴 하지만 성도들의 모습은 다르지 않아야 하겠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며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겪을 수 없는 처절한 슬픔과 비통함을 뼈 속 깊이 겪었던 육신의 어머니가 아니었나.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서 말하듯이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은 태장으로 맞고 한 번은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였다. 수고하고 애 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늘 마음속에 눌리는 것이 있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그와 같은 이들을 대할 때에 존귀히 여기라고 분부하였다. 우리들의 교회 생활도 서로 서로 남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고, 존귀하게 대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는 성숙한 성도의 사귐이 되어야 만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