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들을지어다(잠8:1-21) 2015. 8. 30
멀지 않은 곳의 영어 학원 출입문 위에 “Enter To Wisdom" 즉 ”지혜를 얻기 위해 이 문으로 들어가라.”고 쓴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은 철학을 추구하였다. 국어사전에 보면 “지혜란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을 말한다”고 정의하였다. 성경, 잠언 1장 7절이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는 여호와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멸시한다는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의 선조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른 자들이다. 노아가 그러하고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그러하였다. “노아가...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다는 말이 아닌가.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이 등장한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말씀하셨고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 아브람은 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말씀대로 행동한 것이다.
이는 모세도 마찬가지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듣고 준행하였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 같은 특징이 있다. 들은 말씀대로 행동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손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제 가라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내가 너로 하여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할 것이다.
너와 너의 백성들이 이 산 호렙에서 나 여호와를 섬길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를 애굽에 보낸 증거가 될 것이다.”(출3:4-12)
이와 같이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들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난 후에 일일이 다 이루어졌다. 본문 6절에 “너희는 들을지어다”고 말씀하시는데 과연 하나님의 무슨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인가.
사람이 어려서부터 어머니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들으며 성장하면 그 인격 형성이 올바르게 된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무엇인가. 사람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태교를 받으며 자라나야 할 뿐만 아니라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짐승으로 비유하면 방목하지 말고 사육하여야 한단 말이다. “유태인의 자녀 교육”이란 무엇인가. 어려서부터 그 나이에 적합한 신앙 교육과 인격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와 청년기와 장년기와 노년기를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를 선조들에게 듣고, 부모에게 듣고, 스승에게 듣고 신앙적인 지도자들로부터 계속하여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복이 된다. 잠언 8장 32절에 보면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34절에는 “지혜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다. 그 앞에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라는 것은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 애인의 집 문 곁에서 기다리고, 애인의 집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마치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 애인이 사는 집 문 앞에까지 찾아가서 만나고 싶어서,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듯이 지혜를 그런 태도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하였다.
우리 가곡 중에 “그 집 앞”이란 가곡을 우리가 알지 않나. 이은상 작사 현제명 작곡의 가곡 말이다.
1.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띨까 다시 걸어도
되 오면 그 자리에 서 졌습니다.
2. 오늘도 비 나리는 가을 저녁에
외로이 이 집 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 날일을 잊어버리며
울밑에 빗줄기를 세며 갑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흠모하되 마치 이런 마음으로 사모하며 살아가란 말이다. 왜 지혜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35절에 보면,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하였다.
성경 주석가들은 잠언 8장 35절의 ‘나’를 ‘여호와의 지혜’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렇다. ‘나’라고 의인화 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얻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혜 그 자체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과 여호와의 은총을 얻고 누리게 될 것이다.
잠언 8장의 마지막 절인 36절에 보면 반대의 경우와 상황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고 하였다. 즉 지혜를 잃어버리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어리석은 자이며 지혜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는 자’라고 경고하였다.
이제 본문의 시작을 보라. 솔로몬 당시인 3,000년 전이나 오늘 날이나 지혜는 숨겨져 있지 않다. 아무리 어두운 흑암의 시대라도 빛은 항상 어둠을 밝히며 새벽별처럼 청초하고 영롱하게 그 빛을 밝히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의 소리는 작은 소리가 아니라 길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와 성문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소리를 높여 인생들에게 말한다. 무어라고 말하나. 5절에 보면 “어리석고 미련하게 살지 말고 마음을 밝혀서 명철한 자답게 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는 에덴 동산에도 있었고 에녹의 시대에도 있었고 밧모 섬에 유배 된 사도 요한의 시대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의도적으로 양쪽 뒤를 틀어막고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과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내 맘대로 내 방식대로 살려고 어리석게 고집 부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명령이다.
잠언 8장 6절의 “너희는 들을지어다”는 말씀은 권면이나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 영어 성경에 보면 단 한 단어로 되어 있다. "Listen" 즉 “들으라.”는 명령으로 되어 있다. 여러 말이 필요 없다.
하나님의 무슨 말씀을 들어야 하나.
하나님은 조용히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지 않고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지혜의 소리는 온 천지 우주 공간에 가득하다. 1절의 말씀이 그런 강조가 아닌가.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고 하였다. 그렇다. 지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곳마다에서 큰 소리를 높여 인생들을 부른다. 지혜는 인생들을 향하여 외친다. 더 이상 어리석게 살지 말고 더 이상 미련하게 살지 말라고 말한다.
5절의 말씀을 다시 보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더 이상 어리석고 미련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명철하고 마음이 밝아지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의 인생과 미련한 자의 인생에 대하여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천국에 대하여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지 않나.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였다. 열 처녀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처녀였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을 가졌지만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롭고 지혜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 그런데 와야 할 신랑이 약속 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들은 다 같이 졸며 잤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는데 한 밤 중에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졸며 잠을 자고 있던 열 처녀들이 다 같이 깨어났다. 등을 준비하였다. 문제는 등불이 꺼져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깜빡 거리며 꺼져 가고 있었다. 충분한 기름을 따로 준비하여 가지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던 슬기롭고 지혜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하였다. 그 때 지혜로운 처녀들의 반응은 냉정하였다. “이제 와서 우리 기름을 나누어 주면 우리도 기름이 모자랄 것 같으니 차라리 기름을 파는 곳에 찾아 가서 필요한 기름을 사다가 쓰라”고 제안하였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였다. 신랑은 미리 충분하게 준비하였던 기름을 등에 채우고 환하게 불을 밝힌 다섯 명의 슬기롭고 지혜로운 처녀들과 함께 잔치 자리로 들어갔고 문은 굳게 닫혔다. 얼마 시간이 흐른 후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 갔고 와서 문 밖에서 소리쳤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던 예수께서는 이 상황에서 신랑의 대답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슨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나. 잠언 8장 6절에서 13절까지를 ‘공동번역성경’으로 읽어 보자.
“들어라, 나는 곧은 말만 하고 바른 소리만을 입 밖에 낸다. 내 입은 진실만을 말하고 내 혀는 그른 소리를 꺼려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옳은 말뿐, 내 말엔 잘못이나 거짓이 없다. 어진 사람은 내 말을 밝히 알고 지식 있는 사람은 내 말을 옳게 여긴다. 네가 받아야 할 것은 은이 아니라 내 교훈이고 순금이 아니라 지식이다. 지혜는 붉은 산호보다도 값진 것,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을 이에 비하랴. 나 지혜는 예지와 한 집에서 살고 있으니, 지식을 얻어 뜻을 세우려면 나에게 오라. 야훼 두려워하여 그를 섬기면 악을 미워하게 마련, 나는 잘난 체 우쭐대며 악한 길을 가거나 거짓말하는 것을 역겨워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여 잘 못된 인생이 있는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귀 기울여 듣고 순종했던 신앙 선조들의 일화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깔보고 제 멋대로 제 맘대로 제 주장대로 제 고집대로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거나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이들의 일화로 가득하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안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따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죄를 범하였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서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가인의 타락 장면이다. 출애굽기 6장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리까”하고 하나님께 질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애굽의 바로 임금이나 공통점이 무엇이었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가장 선한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의 입술의 정직한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의 의로운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훈계와 지식과 지혜의 말씀은 은이나 정금이나 진주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말씀이라고 하였다. 악과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의 말을 멈추고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하였다.
어느 마을에 남편이 없이 홀로 살면서 외동딸을 키우는 부인이 살고 있었다. 그 마을의 목사는 그 마을에서 먼저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과 더불어 그 홀로 사는 부인을 전도하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 부인은 완강하게 복음을 거부하였다. 교회에서 믿는 이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려고 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을 사람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내어 쫓았다. “교회가 우리 딸을 출세 시켜 주냐”며 고함을 질러 댔다. 그 부인의 외동딸은 그 어머니의 기대처럼 공부를 잘 하였다. 읍내의 여자 중 고등학교에서 항상 일등을 빼앗기지 않았다. 서울의 그 유명한 명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그 딸 자신과 그 어머니는 자랑스럽고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아버지 없이 남편 없이 가난하게 별 고생 다 해서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장성해서 명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졸업식 날은 그 많은 졸업생들 가운데서 오직 자기 딸만 보이는 것 같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어머니는 딸에게 말하였다. “오늘 뭘 먹고 싶니 그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공부하느라 고생만 많이 했는데 오늘 서울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맛있는 것 사 줄게 어서 가자” 어머니와 딸은 서둘러 학교 정문을 나섰고 무슨 생각인지 무엇에 홀려서 붙잡힌 사람들처럼 신호등도 지키지 않고 8차선 대로를 무단 횡단하기 시작하였다. 저 만치에서 총알같이 달려오던 트럭 운전사가 저들 모녀를 발견하였지만 속도를 줄여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날 거기 아스팔트 위에서 어머니와 딸은 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고 말았다. 허망한 사고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그런 순간을 위해서 그 동안 그렇게 억척같이 살아 온 것인가. 4절의 말씀을 보라.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가 인생들을 불러 세우며 소리를 높여 말한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란 말씀이다. 인생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시나. 이사야 4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말씀하시자 이사야가 “내가 무엇이라고 외치리이까”하고 물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
지혜가 무엇인가. 풀이 마르기 전에 꽃이 시들기 전에 우리 하나님 만군의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누리며 영생과 은총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다시 보자. 잠언 8장 32절에 “하나님의 도(道)를 듣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다. 신구약 성경 곳곳의 강조는 한결 같다. 요한 계시록 1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가 복이 있되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들어 알고 있는 말씀을 생활 속에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임한다. 이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지혜의 말씀을 듣는 자의 축복이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지혜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자에게 임할 축복에 대하여 말씀하는 말씀들이 잠언 8장에 가득하다.
첫째, 공의롭고 존귀한 자의 다스림을 받게 된다.(잠8:15-16)
둘째, 하나님을 사랑을 입게 된다.(잠8:17)
셋째,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잠8:17)
넷째, 정금이나 은보다 귀한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된다.(잠8:18-19)
다섯째, 옳고 바른 정의와 공의의 길을 가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잠8:20-21)
여섯째, 창세전부터 계시던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알고 믿게 하신다.(잠8:22-31)
일곱째,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인생으로 살게 하신다.(잠8:30-31)
여덟째, 여호와께 은총을 얻어 영생하게 하신다.(잠8:35)
그러므로 들은 말씀대로 반드시 행해야 복이 된다. 마태복음 7장의 그 유명한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 바로 그러하지 않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라고 하였다. 그러나 듣기는 들었으나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듣고 행하는 것이 복이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처럼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를 때에 목숨이 안전하고 꼴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되고 영생 또한 얻게 된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를 믿는 우리 모두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하게 하는 구원과 천국을 영원한 선물로 허락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반복하여 강조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말씀이 아닌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와서 계신 동안에 스스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모범적인 삶을 사셨다. 뿐만 아니라 듣고 행하는 삶의 축복을 강조하셨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8:38)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정상적인 자식이라면 아비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않나. 믿음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꾸 반복하여 듣고 그 들은 말씀을 행함으로 구원과 축복이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니라.”(롬10:17)고 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십계명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다. 그래야 복되다는 언약이다. 그것이 복 받는 길이란 말이다.
하나님만 섬겨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겨라.
안식일 즉 주일 신앙을 갖고 거룩한 예배자로 살아가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둘째도 그와 같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해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마22:37-40)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따라 듣고 행하며 살면 어느 누구나 주 안에 잘 되고 형통하며 복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잠언의 지혜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이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무엇인가.
시편 1편의 마지막이 경고의 말씀인 것처럼 잠언 8장의 마지막 말씀도 경고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형통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해서 마지막 6절의 끝은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지 않나. 명심보감에도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고 교훈하지 않았나.
신명기 27장 1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6지파씩 나누어 서게 한 후에 12가지의 저주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이는 저주를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나님의 축복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엄중하게 말씀하신 경고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은 12가지의 위험과 하나님의 저주를 피하지 못할 범죄를 멀리하라고 경고하시면서 반복하여 ‘아멘 할지니라’고 12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아멘하라’는 강조는 반드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염두에 두란 말이다. 반드시 주의하고 조심스럽게 삼가며 실천해서 저주를 피하고 축복을 받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라는 명령이며 강조인 것이다. 그 경고의 내용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 우상을 숭배하지 말아라. 부모를 공경해라. 앞 못 보는 장애인이나 나그네나 고아나 홀로된 여인들을 억울하게 대하지 말아라. 근친상간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라. 이웃을 암살하지 말아라. 죄 없는 자를 죽이려고 뇌물 받지 말아라.”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아멘 하고 대답하고 정신 차리고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신명기 27장 마지막 절인 26절에 보면,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사실 신명기 11장 26절 이하의 말씀을 풀어서 다시 강조한 말씀이다. 그 곳에 보면, “내가 오늘 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노니...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듣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11:26-28)고 복과 저주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말씀해 주셨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게 하고 그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스스로 선택하여 축복의 길을 가든지 혹은 저주의 길을 선택하든지 하게 하라는 것이다.
지난 봄철과 여름철에 전국 곳곳의 고속도로 마다 졸음운전의 위험을 경고하는 대형 현수막과 전광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내 걸렸다. 자료에 보니 도로공사는 지난 3월 27일부터 약 열흘 동안 예산 5억 원을 투입해 전국 고속도로 2700곳에 졸음운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실제 졸음운전 사망자 수는 음주 운전 사망자의 5배가 넘는다고 한다. 고속도로 공중의 대형 애드벌룬에는 “졸음운전을 하면 죽는다.”고 썼다.
도로공사가 선정한 표어는 10개다. “'졸음운전의 종착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겨우 졸음에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졸음운전! 목숨을 건 도박입니다', '단 한 번의 졸음, 모든 것을 잃습니다.', '졸면 죽고 쉬면 안전', '졸음운전 사망자 음주 운전 사망자의 5배', '한 번 두 번 졸음운전! 평생 후회 평생 고통'”이라고 썼다. “전방 ○○㎞에 졸음 쉼터, 졸리면 제발 쉬어가세요”라고 애원하는 포스터 내용도 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졸며 자는 동안에 신랑이 와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손을 잡고 잔치 자리에 들어 가 버리고 문을 꼭꼭 닫아 버리면 어찌할까. 잠언 6장 10절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하는 생활이 얼마나 위험한 생활인가를 경고하는 것처럼 “좀 더 먹자, 좀 더 마시자, 좀 더 피자, 좀 더 놀자, 좀 더 즐기자, 좀 더 벌자, 좀 더 모으자, 좀 더 쌓아 보자, 좀 더 넓히자, 좀 더, 좀 더” 하는 사이에 죽음의 순간과 심판의 순간이 도적같이 오고 말 것이다.
장자의 권한을 팟죽 한 그릇으로 바꾸며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던 야곱의 형인 ‘에서’, 소돔 성을 벗어난 아버지 롯을 술에 취하게 하고 아버지를 통하여 모압이란 아들과 암몬이란 이름의 아들을 낳아 키웠던 롯의 큰 딸과 작은 딸, 아버지 야곱의 침상을 더럽혔던 야곱의 장남 르우벤, 사사로 부름 받은 영광스러운 직임을 소홀히 여겼던 삼손,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의 직임을 경솔히 여기며 악에 악을 반복하던 므낫세, 여로보암, 아합과 같은 수많은 패역했던 왕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통한 시대적인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였던 아합의 왕비 이세벨,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도 그 거룩한 사도의 부르심을 버리고 스승을 은 삼십 냥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의 불행 등은 무엇을 말씀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멸시한 자들의 불행이 아닌가.
요즘 우리나라 서울에도 유기농 농산물을 파는 식료품점이 늘어나고 있다. 생각보다 그 값이 비싸다. 야채나 곡물이나 과일 값이 농약을 뿌리고 화학 비료 주고 재배한 것보다 몇 배씩 비싸게 받는다. 그러나 그런 식료품을 사서 먹으려 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교회에서 멀지 아니한 곳에도 운전하며 지나다 보니 ‘organic food store’라고 쓴 간판을 보았다. ‘organic’이 무엇인가. “화학 비료나 화학 약품을 사용하지 않고 천연적으로 재배한 농산물”이란 뜻이다.
그렇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악을 떠나야 한다.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뚤려 있고 벌레가 먹은 흔적이 있는 배추 잎이 좋은 배추 잎이다. 요즘처럼 교회 안과 밖에 이렇게 악이 하늘로 치 솟는 세상에서 “너희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며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복된 삶을 살아가는 영원한 은총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