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을 입으라(엡4:17-24) 2015. 8. 9 광복70주년 기념주일
우리나라가 해방 되던 1945년 8월 15일, 당시의 미국 대통령은 해리 트르먼(Harry S. Truman, 1884-1972)이었다. 미국의 제 33대 대통령을 지낸 해리 트르먼은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 곁에 부통령으로 임명을 받은 지 82일 만인 1945년 4월 12일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대를 이어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한 미국 역사상 유일한 경우의 대통령이다. 누구나 공적을 평가하기에는 명암이 없을 수 없으나 그는 대통령의 직책을 성공적으로 잘 감당한 대통령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독일의 항복을 받아 내었다.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국왕인 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었다. 그는 인류 역사상 세계 최초이자 유일하게 일본에 핵공격 명령을 내린 강력한 대통령이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9일 전인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6일 전인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도록 명령한 대통령이 해리 트루먼이다. 대한민국의 광복은 36년 만에 그렇게 갑자기 찾아 왔다. 바사 왕 고레스가 어느 날 갑자기 명령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도록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중에서 대한민국의 해방에 기여하고 6. 25 전쟁이 휴전선이남 만이라도 공산당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보존하는 일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해리 트르먼 대통령이다. 순간마다 그의 용기 있는 결단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는 소련이 앞장세운 김일성의 북한 공산당 정권에 먹히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가 맥아더 장군의 큰 역할을 말하지만 그 배후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이다.
대한민국에 6. 25 전쟁이 일어난 소식을 보고 받은 해리 트르먼 대통령은 “하나님께 맹세코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도록 해주고야 말겠어.”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한국전을 도울 결심을 하였다. 당시의 국무장관이었던 에치슨 국무장관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대하여 “대통령이란 직책은 결정하는 자리다. 대통령은 그 날 결정하였다.”라고 그의 결단 있는 행동을 극찬하였다. 6. 25 전쟁 소식을 접한 미국 정부의 비상 국무회의는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건의한 정책들을 트루먼 대통령은 승인하였다. “도쿄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최대한 빨리 한국 측에 무기와 보급품을 제공하라, 미 공군력의 엄호 아래 군인이 아닌 駐韓(주한) 미국인을 안전히 철수시키라, 제7함대는 필리핀으로부터 대만 해협으로 전개하여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등의 작전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매년 150만 명의 미국군을 6. 25 전쟁에 파병해 주었다. 6. 25 전쟁 중에 미군만도 5만 4,000명 이상이 죽었다. 10만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6. 25의 전쟁에 16개 나라의 유엔군이 즉각 파병되도록 결정이 된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닐 수 없다.
해리 트르먼은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휴전을 이끌어 내고 현재의 휴전선 이남의 남한 정부가 오늘 날의 세계적인 국가로 발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에 트루먼은 미군을 투입하여 한국을 지켜내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당시 미 군부는, 한국은 미국이 싸워서까지 보호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나라라는 판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미군 파병 결정은 극히 예외적인 조치였다.
그는 미조리의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철도회사 검수원을 지내기도 했다. 직접 남성복을 파는 옷 가게를 운영하다가 대공황 때 부도를 낸 적도 있는 서민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미국의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순박하고 솔직하고 용감하며, 힘 센 사람이 으스대고 뽐내는 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에게 스탈린이 김일성을 앞세워 미국의 뺨을 때린 격이었다. 극동 아시아의 반도 국가인 대한민국을 쳐 내려온 전면 전쟁은 당시 최대강국 미국의 체면과 함께 대통령 트루먼의 그런 기질을 자극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을 믿던 침례교 신자였던 해리 트루먼이 한국을 살린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그를 그 시대에 적절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그는 어려서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 결국은 그가 가길 원했던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말았다. 나중에는 시력검사표를 모조리 외워서 미조리 주의 방위군 훈련을 받고 장교에 임관되었다. 세계 제 1차 대전 때에는 프랑스 지역에 파병된 포병 장교로 근무하고 대위로 예편하였다. 그런 그가 나중에 대한민국 역사의 격동기에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은인 중의 은인으로 부각된 것이다.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을 맞는 이번 2015년에 6· 25전쟁 당시에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에 섰던 미 해병 제1사단의 신임 사단장에 한국계 미국인대니얼 유 준장이 취임했다는 소식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올해 55살인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30년 전에 미국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고 한국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4년 전에 준장에 진급하였다. 그는 30년 만에 병력 23,000명의 세계 최강 부대 중의 하나인 미 해병 제 1사단의 사단장에 임명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는 천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외침을 당하며 살아 왔나. 왕건에 의해 세워진 고려(AD 918-1392)는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세워지기까지 474년 동안 한 반도의 유일한 국가였다. 그 후 1392년에 이태조인 이성계에 의하여 조선(AD 1392-1897)이 건국되었다. 조선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국호로 발표하기까지 505년 동안 한반도와 부속 도서의 유일한 통일국가였다. 그러는 동안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내내 몽골과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침략을 받아야 했다.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은 날들을 수 없이 겪은 민족이다. 구한말에는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 야욕의 각축장이었던 대한제국은 결국 1910년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국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민족으로 고난의 긴긴 세월을 지내야 했던 우리나라에 국권을 되찾는 광복의 기쁨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침략군에 의해서 초토화가 되고 수많은 젊은이들과 지도자들이 포로로 끌려 간 후에 70년 세월이 지나서야 다시 하나님의 땅 예루살렘에 되돌아 올 수 있는 꿈과 같은 날이 주어졌듯이 해방 70년을 맞는 우리 대한민국에 평화로운 통일의 날도 어서 속히 하나님께서 선물해 주시기를 기도하여야만 할 것이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날마다 묵상해 오는 에베소서의 일부를 묵상하며 은혜를 좀 더 나누도록 하자.
철저한 유대주의자요 바리새인이요 모세의 율법 지키기에 철저한 삶을 살아가려 하던 율법학자인 사울이 변화된 것은 다메섹을 향하여 가던 중에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체험 이후로 사도 바울은 옛 사람에서 전혀 새로운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옛 사람이 율법의 사람이라면 새 사람이란 복음의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문제는 그 이상의 차원을 다룬다. 옛 사람이란 마음의 허망한 것에 생각이 붙잡혀서 육체의 요구를 따라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옛 사람이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의 인간을 가리킨다. 19절의 표현을 보면, 옛사람이란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상태의 사람을 말한다. 그와 같은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려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하듯 편지한 것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엡4:22)
자, 그러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는 자의 신앙생활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가를 묵상하도록 하자.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
우리가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옛 옷을 먼저 벗어야 하지 않나. 땀 냄새 나는 헌 옷을 벗어 버린 후에 새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그 옛 사람 상태에서 아무리 새 사람의 옷으로 자신을 가려 봤자 그는 여전히 옛 사람일 뿐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에게 일찍이 유산을 분배 받아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주색잡기를 즐기며 지내던 중에 빈털터리가 된 둘째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그 둘째 아들이 돼지 우리에 누워서 돼지나 먹는 열매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워 보려 하지만 그나마도 주는 사람이 없어 굶주리던 차에 어떻게 노자를 마련하여 제 나라로 돌아 오고 제 아버지가 계신 집을 찾아 돌아 왔다. 아버지가 먼저 그 아들을 알아보고 마을 입구의 먼 거리를 달려가서 보고 측은히 여겨 목을 안고 입을 맟추고 환영해 주었다.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새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하였기 때문에 그 아들이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그 본문에 보면 두 번 반복되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강조하신 표현이 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눅15:18, 21)라는 죄에 대한 시인과 죄에 대한 고백과 죄의 용서를 구하는 그 마음가짐이 곧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이 되고자 하는 출발이었다.
잔 칼뱅은 “옛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다.”라고 해석해 주었다. 그렇다. ‘옛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의 행실과 성격과 태도 그대로를 가지고 옛 생활을 반복하는 죄 된 인간의 모습을 일컫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의 말씀처럼 세상 풍조를 따라 살고 사탄과 마귀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하나님의 화와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상태의 죄를 반복하는 인간상을 말한다.
열왕기상 16장 이하에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7대 임금으로 22년 동안 악한 왕노릇을 하였던 아합과 이세벨에 관한 기사가 장황하게 나온다. 아합 임금 부부는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악을 반복하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합이 왕으로 있던 22년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지만 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 나중이 어떠한가.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악을 심어 악을 거두고 선을 심어 선을 거두는 법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새 사람이 되려면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결단과 회개의 과정이 먼저다. 22절에 말씀하는 ‘유혹의 욕심’,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의 속성을 벗어 버리는 회개와 결단의 순간을 먼저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리고 삶에 변화가 와야 한다. 노름에 빠진 사람들은 손가락을 끊는 결심을 하고도 다시 옛 습관이 불처럼 일어나면 손목으로라도 화투장을 잡으려 한다고 하지 않나.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다. 몸은 교회 안에 와서 있는데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썩어져 갈 구습을 따르기를 계속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인가.
옛사람을 벗어 버리지 못한 사람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악을 반복하면서도 무감각해지고 만다. 500년씩 된 나무라고 해서 썩지 않는 것이 아니다. 썩고 썩으면 어느 날 어느 순간에 거대한 거목이며 천년의 절반을 생명을 이어 가던 고목나무라도 쓰러지고 만다. 썩는다는 것은 무서운 심판이다.
베드로는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잘 믿고 따르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벧전1:4)을 잇게 하신다고 약속해 주었다.
옛사람의 상태를 벗어 버리지 못한 사람은 에베소서 2장 3절의 ‘육체의 욕심’, 에베소서 4장 22절의 ‘유혹의 욕심’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그 욕심의 감옥에 갇혀 사는 자들이다. ‘유혹’이란 ‘진리의 말씀인 복음에서 멀어진 영적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런 상태의 사람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인생이다. 그런 인생들은 어쩌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가졌을지라도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마13:22)와 같은 모습을 말한다. 마가복음 4장 19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런 상태의 사람들은 ‘염려와 유혹과 욕심’이 말씀을 막아서 결실하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진단해 주셨다. 그렇다. ‘염려’와 ‘유혹’과 ‘욕심’이란 것이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고 얼마나 옛사람의 모습으로 주저앉아 버리도록 붙잡고 있나 모른다. 히브리서 3장 13절에 보면 죄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그 마음의 상태가 완고해진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옛사람의 옷을 벗지 못하고 사는 인생들은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헛된 것을 쫓게 된다.(골2:18)
사도 바울은 이처럼 옛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라고 진단하였다. 자, 그러면 새 사람을 입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생각과 태도를 새롭게 하여야 한다.
23절의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는 말씀의 원 뜻은 ‘생각’(thought)과 ‘태도’(attitude)를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심령으로’라고 번역하고 말았으나 그 원 뜻은 ‘생각’과 ‘태도’로 구분하여 언급하고 강조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된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생각이 먼저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이는 심리학과 상담학과 인간 개발론 분야에서 무척 강조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긍정과 부정의 차이와 능동과 수동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큰 것이다. 같은 바람이 불어도 배의 돛을 어느 방향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배가 동쪽으로 갈 수도 있고 정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나는 절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는 선언은 얼마나 신앙적인 선언이며 고백인가.
그 어떤 누구이든지 ‘생각’이 먼저 새롭게 바뀌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삶의 태도가 새롭게 바뀔 수란 없다. ‘새롭게 되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이나 결심이나 수고나 열심만으로 해결되고 변화되고 달라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는 철저히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이 새롭게 되려면 철저히 성령을 의지하여야 만 한다.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바람과 같은 성령,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이 내 심령에 임하여야만 한다. 성령 안에서라야만 항상 새로워 질 수 있고 언제나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는 고백을 하였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몸 즉 육체는 세월이 지나면서 나이도 들고 늙어가지만 주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 즉 속사람은 항상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또한 그러하지 않나.
이사야 40장의 말씀처럼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하고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앙망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자신의 심령으로 하여금 새 힘을 얻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한”(사40:31) 삶을 날마다 매 순간마다 살아가게 될 것이다.
참으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24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번역해 주었다. 그렇다. 새 사람을 입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는 것”을 말한다.
요즘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아기 때부터 옷도 얼마나 예쁘고 좋고 신발도 모자도 얼마나 고급스럽게 좋은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옷이란 것이 별 것 없었다. 특히 여름에는 그냥 대강 입고 지냈다. 겨울에도 추위를 이길 정도로 싸매고 살면 그것으로 족했다. 여름에는 반바지 하나에 위에는 특별힌 옷이란 것이 없었다. 무지개 색으로 되어 있는 땀도 흡수되지 않는 소위 나이롱 난닝구 한 벌이면 족했다. 그건 ‘런닝셔츠’라고 하면 실감이 덜 난다. 난닝구라고 해야 실감이 난다. 그런게 다 일본 지배를 받은 일본말의 부스러기이지만 말이다. 밤에 빨아서 툭툭 털어 빨래 줄에 걸어 두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입을 수 있었다.
구정이나 추석 때 등에 명절 옷이라도 선물로 받는 날에는 머리맡에 그 새 옷을 차곡차곡 개어서 접어 두고 문고리에 걸어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 옷이란 그처럼 좋은 것이다. 새 옷이란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과거에는 몰라서, 어리석어서 옛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지낸 적이 있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변화 받기 이전에는 오직 모세의 율법의 옷이 최고인 줄로만 알고 지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붙잡아 눈을 가리고 삼일 동안 세상을 못 보게 하셨다. 다메섹 성의 아나니아라는 선지자를 통하여 안수 받게 하셨을 때에 그의 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옛사람 사울이 변하여 새 사람 바울로 변한 것이다.
바울의 옛사람의 모습이 교회를 핍박하던 핍박자의 모습이라면 새 사람을 옷 입은 바울의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주님의 그릇이었다. 예수님은 사울의 눈을 다시 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순간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다. 사울은 눈을 떠 다시 보게 되자마자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다메섹 거리에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바울이 자신의 옛사람의 모습과 새 사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이처럼 편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는 새사람의 삶이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씀하는 것이다. '의‘(義)는 모든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답게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모습을 의미한다. '거룩함'이란 세상의 세속적이고 미혹과 유혹과 욕심이 많은 삶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을 살아가는 성결한 삶의 모습을 말한다. 세상의 그 어떤 악에도 물들지 않는 구별된 삶을 말한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쓴 책 중에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책이 있다. 그 책에서 다룬 여러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 미국의 제 6대 대통령을 지낸 존 큔시 아담스 대통령이다. 그의 아버지 존 아담스는 미국의 제 2대 대통령이었다. 부시 가문처럼 부자간에 대통령을 지낸 또 하나의 가문이다. 그 아들 대통령인 존 큔시 아담스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메사추세츠 주의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던 당시에 어느 한 당원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의 내용은 그를 사탄이라고 욕하면서 그의 타락의 오래 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등 그가 추진하고 있는 정당의 정책에 대하여 비난하는 글이었다. 그 날 밤 그는 일기문에 이렇게 썼다.
“이 임기가 끝나면 나는 한 명의 시민의 입장으로 돌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 일에 대하여 나는 충분한 각오를 해야만 한다. 우선 나는 모든 선과 완전한 능력의 근원이신 성령님을 의지하여 기도한다. 아무쪼록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나로 하여금 일하게 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드리는 바이다.”
존 에프 케네디는 그의 책에서 존 큔시 아담스 대통령을 비롯한 그 당시의 시대 흐름을 이렇게 평하였다. “당시의 엄격한 불굴의 정신을 가진 청교도들은 초기의 아메리카 공화국에 깊은 의미, 일관성, 그리고 한 개의 뚜렷한 성격을 새겨 주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엄격한 책임감을 일상생활의 여러 면에 걸쳐서 스며들게 하였다. 그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자유와 법을 사랑하였다.
존 큔시 아담스 대통령은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자 힘썼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개화 초기를 거치며 일제 36년 그리고 해방과 정부 수립과 6. 25의 폐허와 민주화의 격동기를 거쳐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 발전을 위하여 공헌한 선조들이 어찌 한 두 사람이랴.
서재필, 이승만, 김구,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이상재, 남궁억, 안중근, 이준, 김규식, 유관순, 윤동주, 조병옥, 김활난, 윤치호, 신홍식, 신석구, 길선주, 전덕기, 주기철, 손양원 등 어찌 그 이름과 치적을 다 언급할 수 있으랴. 저들이 모두 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나. 가령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이들 중에 불교의 한용운, 천도교의 손병희 같은 이들 외에 33명 중에 기독교인이 16명이고 그 중에 감리교인이 9명이라지 않나. 우연한 일인가. 그 당시 기독교 인구는 1. 3%였던 것을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 아닌가.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자료에 따르면 3. 1독립 운동 때에 죽은 대한민국 국민의 수가 7509명이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인 희생자 수가 553명이라고 엉터리로 거짓 발표하였다. 200만 명 이상이 독립 운동에 나섰다. 전국 211곳에서 1542번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16,000여명이 부상당하고 47,000여명의 감옥에 갇혔다. 수원 제암리 교회를 비롯하여 47곳의 교회가 불태워졌거나 파괴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한글도 빼앗기고, 자신의 한글 이름조차도 빼앗겨야 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사참배의 강요는 그 얼마나 큰 영적 도전이요 위기였나. 전쟁 성 노예제도였던 정신대 할머니들의 희생을 언급하는 일은 얼마나 역사적으로 여전한 숙제인가. 일제가 이 땅에서 얼마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 땅을 수탈하고 우리 민족을 짓밟았는가.
일제의 압박은 점점 거세어 갔다. 해방과 독립과 광복의 날은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광복의 순간이 찾아 왔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엣 사람을 벗어 버리자. 새 사람의 새 옷을 입고 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을 바꾸고 삶의 태도를 새롭게 하고 진실하게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자.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인생으로 살자. 개인도 살고 가정도 살고 나라도 살고 민족도 살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다. 예배를 통하여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을 분별하며 교회다운 교회로 섬겨 나가고, 성도 다운 성도의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자. 우리 각 사람의 영혼을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복되게 하시리라고 믿는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