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20) 2015. 7. 12
‘오스트리아 그라츠’ 라는 잡지사에서 세계 정상들의 연봉을 추적하여 공개하였다. 역시 세계 최고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시다. 그는 2014년 기준으로 일 년에 691억 원을 받는다. 우리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여왕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외모, 그가 즐겨 쓰는 모자 스타일, 그의 나이,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그의 남편은 누구인지, 자녀들은 몇 명인지, 언제 여왕에 등극했는지, 한국 안동에는 언제 다녀갔는지 등등 말이다. 그는 1999년 4월에 안동 하회 마을에 다녀갔다. 그는 1926년생이니까 올해 89살이다. 남편은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다. 26살 때인 1952년에 왕위를 계승 받았으니 올해로 63년째 여왕이다.
우리는 이런 정도를 갖고 여왕에 대하여 무엇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아는 것이 아니다. 정작 내가 그를 만날 기회가 주어지면 누군가는 나에 대하여 소개 하지 않으면 그가 나를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에 대하여 아는 정도를 가지고 안다고 해서는 않된다. 그런 정도의 관계는 관계라고 할 수가 없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도 나름대로 많이 알고, 예수님에 대하여도 많이 안다. 그러나 그 정도를 가지고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 착각이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서 사업하고, 상업적인 목적을 이루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기독교와 관련된 사업이나 상업을 하거나 기독교 관련 상징물을 제작하여 판매하거나 하는 이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기독교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한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어떤 행사장에 가 보면 입구 가득히 기독교 관련 용품이나 책을 판매하려는 상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기독교의 주석이나 서적을 판매하기 위해서 유창한 언변과 박학다식한 정보를 빠른 시간에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총알처럼 빠른 말투로 자신의 제품이나 판매하려는 책을 소개하는 이들도 있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지정의의 인격적인 교제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사야서나 미가서의 메시아 예언의 내용을 알 수 있다. 혹은 복음서에 소개된 예수님의 각종 기사와 이적들 그리고 천국을 비유로 말씀해 주신 비유의 말씀들이나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도 더 되는 벳세다 광야의 무리들을 배 불리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의 부스러기가 남은 기적의 내용을 알 수도 있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신 기적의 장면도 실감 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각종 기사와 이적과 하신 말씀들을 성경의 내용대로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내가 예수님을 잘 안다 혹은 내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2년 전인 2013년 8월에 이 곳 새 성전에서 첫 주일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묵상하였다. 그리고 금강송으로 만든 나무 십자가에다가 대 못을 직접 박으면서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 계셔서 나를 지배하고, 나를 다스리고, 나를 이끄시는 신앙을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런 상태야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할 것이다. 그런 상태여야만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는 신앙 말이다. 예수님에 대한 오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단절과 성령님에 대한 착각이 오늘 날 각종 기독교에서 파생된 이단과 사이비를 발생시키는 요인이다. 물론 이단과 사이비의 문제는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사도의 말기, 요한 사도의 활동기에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이단이 영지주의라는 이단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삶과 죽음을 부인하는 해괴(駭怪)한 주장을 펴는 무리들이었다.
예수님의 활동은 처처에 각종 소문이 파다하게 펴져 나가게 되었다. 앞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되었다더라. 말 못하던 사람이 말도 하고 듣기도 하게 되었다더라.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되었다더라. 손 마른 자의 손이 펴졌다더라, 군대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비탈길의 돼지 떼에게 들어갔는데 2천 마리의 돼지 떼가 몰살 당하였다더라. 38년 된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더라, 12해 동안 부인의 하혈하는 병인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뒤에서 잡았는데 예수님의 능력이 나갔고 그녀가 깨끗함을 받았다더라.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난 외동딸이 죽었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살아났다더라.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장례가 끝난 무덤 앞에서 그를 불러내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베로 동인체로 걸어 나왔다더라.
뭐 이런 소문이 갈릴리와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 고을마다 성마다 입에서 입으로 번져 갔을 것이다. 그런 소문을 들은 정도를 가지고 우리가 예수님께 대하여 안다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안 된다.
마태복음 15장과 16장의 장면으로 하면 이렇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가 내어 놓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일곱 덩어리를 가지고 4,000여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적이 있다. 그 숫자는 여자나 어린 아이를 제외한 숫자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오늘 날이 좋겠다. 혹은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말하듯이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마16:45)는 말씀을 하시고는 저들 곁을 떠나가셨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교훈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신 적이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신 적이 있으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세상 사람들이 예수께 대하여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라고 대답해 드렸다.
그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반문 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렇다. 예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이나 오해나 착각도 문제는 문제이지만 오늘 날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알고 믿고 따르고 있느냐는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 북쪽으로 약40km 지점으로 헐몬산 기슭 해발 약 345m에 위치한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이다.(막 8:27) 이 마을은 원래 조그마하였으나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빌립(눅 3:1)에 의해 확장되었다. 한편 그는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곳을 ‘가이사랴’라 불렀다. 거기에 자기 이름을 추가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라 불렀다.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이 이방인으로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그중 원주민들은 바알을 섬겼다.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野獸)의 신(神)인 ‘판’(pan)의 산당을 짓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뿐만 아니라 헤롯은 가이사 아우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그곳에 황제를 신격화하는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러한 우상의 소굴에서 예수님은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신앙관을 물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소개하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는 질문 속에 포함된 ‘인자’라는 예수님의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주목하여야 한다. ‘인자’라는 표현은 공관복음에 81번이나 나온다. 그 중에 단 두 번(눅 24:7, 요 12:34)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예수님이 자신을 직접 소개하실 때 말씀하신 표현이었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 표현하신 데에는 자신이 하나님과 똑 같은 위격과 성품을 가지신 분이며(요 5:26),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골 2:9)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완전한 인간이신 것을 강조하신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구약에서 예시하고 있는 구원자이신 메시야이신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셨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키 위해 오신 분임을 스스로 강조하신 것이다.(21절; 20: 18, 28)
예수님 당시에 세상 사람들 중의 적지 않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마귀의 왕이란 뜻으로 ‘바알세불’이라고도 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도 비난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악평하기도 했다. 이미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많이 알고 계셨다. 그런데 제자들의 대답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라고 대답한 것이다. 왜 세례 요한이라 했을까. 왜 엘리야나 예레미야라고 했을까. 왜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을까. 우리도 반문하게 되지 않는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착각한 것은 당시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빌립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과 전파하는 천국 비유의 말씀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갈 때에 헤롯 빌립도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는 자신이 앞장서서 목 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 돌아 온 것이 아니냐고 착각할 정도였다. 마태복음 14장 1절 이하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롯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마14:2)고 말했다. 아마도 헤롯 자신도 막연하게나마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에 대하여 알고 있었는가 보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능력이 넘치는 각양의 기사와 이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랍게 반응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을 선포하며 수많은 무리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까지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당시의 세례 요한의 인기나 지명도는 가히 따를 자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소문내던 이들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구약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백성들의 타락과 불의와 우상 숭배를 꾸짖었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다.(왕상 19:10) 말라기에서는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에 그분의 선지자로서 와서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한다고 했다.(말4:5-6)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에녹처럼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들리움을 받은 선지자가 아닌가.(왕하1:11)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오히려 엘리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마11:14) 그런데 이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를 엘리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을 예레미야라고 하였을까.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며(렘9:1, 14:17, 31:16, 애1:2,16)애통하고 통곡한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예수님과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쉽게 비교할 수 있었을 것이다.(눅 19:41) 또한 유대인의 후기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에 그분의 선구자로 보냄을 받을 선지자라고 알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예레미야가 다시 오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시고 저희를 긍휼히 여기시기까지 장막과 언약궤와 분향단 등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할 선지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주권을 잃고 로마의 압제 가운데 지내던 유대 민족은 언젠가 큰 선지자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고 있었다. 같은 본문을 기록한 누가복음 9장 19절에 보면 세상 사람들 중의 더러는 예수님에 대하여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대하여 여러 가지로 오해와 착각이 분분하던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반응을 물으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WHO DO YOU SAY I AM?)
자,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은 신앙생활의 기간도 서로 다 다르고 믿음의 척도도 서로 다 다르다. 그러면 “과연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알고 믿고 따르고 섬기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하고 스스로 대답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가. 지금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가. 내가 알고 믿고 따르고 섬기고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예수님이 과연 나에게 있어서는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의 대답을 빌려서 말씀을 좀 더 깊이 있게 묵상해 보기로 하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신앙의 고백.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이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기드온, 사무엘, 다윗, 솔로몬,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에스겔, 세례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이 그 시대마다 사용하신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는 점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것이면 족하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조차도 이와 같은 아름답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후에도 얼마나 신앙적으로 흔들리고 방황하고 나약해지고 비겁하게 처신하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도망가고 숨어 지내고 하였는가 말이다.
우리는 신앙 고백을 듣고 물세례도 행하고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교사나 성가대나 속장과 같은 직분과 직임을 맡게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고백한 신앙의 고백과 전혀 상관없이 막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이 자신의 신앙상태를 드러내고 입증하는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중요한 것이다. 부부도 결혼 서약이란 고백을 하지 않는가. 나라의 부름을 받는 각료들도 선서를 하지 않는가. 대통령도 취임식 때에 보면 취임 선서를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서는 오른 손을 든 상태에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은 오른 손을 들되 왼손을 성경책 위에 얹고 “나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최선을 다해 미합중국의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지킬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I do solemnly swear (or affirm) that I will faithfully execute the Office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will to the best of my ability, preserve, protect and defend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미국 대통령 당선자라고 해서 반드시 성경 위에 왼손을 올려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 당선자 중 성경을 사용하지 않은 예는 1901년에 취임한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뿐이다. 사용하는 성경의 종류다 자유다. 워렌 하딩,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조지 W 부시 등 대개의 대통령들은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사용했던 성경 위에다 왼 손을 얹었다. 그러나 빌 클린턴 같은 경우는 자신의 할머니가 애용하던 성경을 사용하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1861년 취임식 당시에 사용했던 성경을 사용하였다. 그 사용 배경을 미국 대통령 취임식 위원회에서는 당시에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연방의 분열로 남북간의 내전을 향해 치닫고 있던 상황에서 취임하게 된 링컨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국가적 단합과 단결을 통해 연방 헌법 아래 보다 완벽한 연방의 결성을 부르짖던 때로부터 벌써 147년이 지났지만 바락 오바마 대통령 역시 최초의 유색 인종 출신 대통령으로서 링컨 성경의 사용은 링컨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앙생활은 고백을 지키는 생활이다. 부부라도 고백을 지켜 가면 위기의 순간과 고난과 시련과 가난과 질병과 어려움의 순간을 뛰어 넘고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신앙생활은 매 순간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유혹과 미혹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리고 복음의 힘으로 절제하며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순례의 과정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고 나서서 세례 문답을 하고, 집사 문답을 하고 그 외에 이러 저러한 직분과 직책을 맡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긴다. 성도의 연합을 통한 신앙생활의 별의 별 과정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그럴 때마다 시시 때때로 신앙의 고백을 재확인하며 살아 갈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붙잡혀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 여자 아이의 묻는 질문 앞에서도 비겁하고 나약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신앙의 고백을 붙들지 않으면 신앙의 고백에 붙잡히지 않으면 누구라도 무너지고 만다. 누구라도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사탄 마귀의 권세 앞에 짓밟히고 깨어지고 실패하고 만다. 별의 별 실수와 실패와 우여 곡절을 다 겪었던 베드로가 신앙이 성숙해지고 세월이 많이 흘러가고 난 후에 베드로 전서 5장 8절 이하에서 권고하지 않았는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전5:8-11)
신앙의 고백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이처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말씀을 매 순간마다 이루어 가도록 손잡아 붙들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영원한 소원의 항구에 이르도록 동행하여 주실 것이다.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
몇 주 전에 한국 철학계의 최고령자인 원로 철학자 한 분이 조선일보 전면 대담 기사의 대담 손님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 연세대의 원로인 김형석 교수 그는 1920년생이니까 올해 96세이다. 그런데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며 활동할 정도로 정정하다고 했다. 지금도 한 달이면 몇 번씩 강연회에 초대 받아 활동한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인임을 자처하였다. 그러나 교회 생활, 예배 생활은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처럼 평생 학문과 철학의 연구 속에 살아 온 사람이 어디 가서 누구의 설교를 듣겠는가...”라는 내용의 대답을 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당신에게 있어서 교회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에클레시아’란 ‘에크’는 ‘∼무엇으로부터’, ‘칼레오’는 ‘부르다’는 뜻이다. 합하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공동체가 곧 교회인 성도인 것이다.
교회가 단지 설교를 듣는 곳만은 아니지 않는가. 교회는 죄인인 인생들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덧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자의 구속의 은총을 입어서 거듭나고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말씀을 통하여 오늘 날 나에게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의미를 찾아 가면서 예물을 봉헌하고 성도의 사귐과 교제를 통하여 이 땅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부름 받은 성도의 거룩한 연합이 아닌가. 교회란 무엇인가를 어찌 몇 마디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날, 교회가 없는 도시, 교회가 없는 마을, 교회가 없는 삶을 상상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교회는 건물이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는 말씀은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닌 것을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물론 베드로라는 이름 ‘페트로스’라는 그 이름의 뜻이 ‘반석에서 떨어져 나온 돌멩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의 고백이지 결코 베드로 자신의 몸이나 뼈나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 베드로를 초대 교황 운운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고린도 전서 3장 11절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도의 연합인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처럼 말이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고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와와아담 그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교회의 바탕과 머리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바탕으로 해서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성령이 이 땅에 부어 짐으로 그 성령을 받은 120여 성도들이 초대 교회 탄생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저들은 한 결 같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신 성령을 기다리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바람과 같고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이 임한 것이다. 교회인 성도들의 연합은 결코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회사는 일정한 자격 조건을 가지면 시험과 면접을 통해서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처럼 귀한 신앙 고백이란 없다. 예수님은 그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죽은 신, 죽은 하나님, 나무나 돌로 깎아 만든 우상의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와 같은 신앙의 고백과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믿음생활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인 나의 주님으로, 나의 남편으로 모시고 주님의 신부되어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예수님은 이 땅의 어른 아이 남자 여자 모든 믿는 자의 영원한 남편이시다. 그 분을 신랑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므로 나와 예수님과의 사이에 그 어떤 비밀도 없고, 크고 작은 대소사에 예수님께 대하여 전인격적인 사귐과 교제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어야만 한다. 교회란 그런 곳이다. 예수님은 성도된 나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신랑이시다. 예수님은 나의 전부이시다. 잘 몰라서 신앙고백 후에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숨어 지내고 하던 베드로가 완전히 변화 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사도가 되어 사도행전 시대의 위대란 사도의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교회인 성도는 그 어떤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반석 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소유된 교회인 성도는 이 세상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존재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딸인 것이다.
천국 열쇠를 가진 자.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과 특권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고 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이사야 22장 22절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수 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자가 없으리라.”고 하였다. 이는 다윗 왕의 곁에서 다윗 집의 열쇠를 관장하던 엘리야김의 권세를 인용한 말씀일 수 있다. 예수께서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들에 대한 복음 전파자의 권한 위임인 것이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고 큰 환란을 겪을 때에 사도들 이외의 수많은 성도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그 중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고 그 곳에 예수 믿는 자들이 생겨나서 세례도 주었다. 그러나 성령 받지 못한 상태에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방문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할 때에 성령이 임하였다. 그 후에 베드로는 이방 땅인 욥바 지역에 선교 여행을 하고 있었다. 정오기도 시간에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 하늘로부터 온갖 더러운 짐승과 기는 동물과 새들이 큰 보자기 같은 그릇에 담겨서 내려 왔다. 그리고 소리가 났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나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번이나 똑 같은 환상을 보여주셨다. 그 후에 그 그릇이 하늘로 다시 올려져 갔다. 그 후에 가이사랴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환들이 욥바의 베드로가 기거하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도착해서 베드로를 찾고 있었다. 저들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 때에 그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물로 세례도 받았다. 이와 같은 사역의 중심에 쓰임 받은 인물이 베드로 사도이다. 자, 그러면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 맨다는 것은 불법적인 것을 금하는 것이고 푼다는 것은 합법적인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가령 사도행전 8장에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사마리아에 도착해 보니 그 곳의 부자인 마술사 시몬이 예수를 영접하고 빌립에서 세례도 받고 빌립을 열심히 따라 다니고 있었다. 성령을 받은 적이 없는 저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하여 성령 받는 이들이 늘어나자 마술사 시몬이 성령 임하는 것을 돈을 줄테니 자기에게도 그런 권한을 얻게 해 달라고 흥정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가 몹시 마술사 시몬을 책망하였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그 때 마술사 시몬이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고 빌면서 용서를 구했다. 매고 푸는 권한이라는 것인 마치도 베드로의 이런 모습과 같은 것을 일컫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 되고 진리가 진리 되고 복음이 복음 되게 하기 위해서 매고 푸는 권한을 잘 사용할 때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제대로 잘 전파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제도에게 사법부가 있어서 판사, 검사, 변호사의 제도에 의해서 죄를 판단하고 벌하기고 하고 질서 유지와 안전한 사회 기강 유지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령 어느 조직의 열쇠를 맡았다는 것은 권한이라기보다는 기능이고 직능이고 역할인 것처럼 말이다. 내가 열쇠를 맡았다고 해서 그 열쇠를 맡긴 주인의 권한에 대하여 월권하거나 자기가 주인인양 착각하면 되겠나. 교회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의 전부이시다. 예수님이 “내 교회”(My Church)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천국 열쇠의 소유자이시다.
요한 계시록 3장 7절 이하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그렇다. 교회의 영원한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 전파자로서의 권한을 사명으로 위임하신 것이지 결코 베드로 자신이 천국 열쇠의 소유자는 아니다. 천국 열쇠의 원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를 믿는 성도인 우리들은 복음을 영접하고 복음 안에 살면서 그 복음을 천한 만방의 그 누군가에게 전파하는 사명을 위임 받았을 뿐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결코 그의 혈육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런 축복을 주신 것뿐이다. 그러니 오직 감사할 뿐이다. 오늘 날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이다. 천국의 열쇠, 부활 신앙과 천국의 복음을 영접한 자 다운 삶을 살아가자.
이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고 영접하고 따르고 순종하며 주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란 결코 나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그의 정결한 신부로 택해 주신 절대 은총이며 축복이고 놀랍고 영원한 혜택인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