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뱃속에서 드리는 기도(욘2:1-10) 2015. 6. 28
“누가 바다에 빠졌는데 고래가 그 사람을 삼켰다더라. 그런데 삼일 만에 고래가 그 사람을 해변 가에 토하여 내 놓아서 다시 살아났다더라.” 이런 말을 들으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으려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요나서의 주인공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어찌 말이 되느냐, 그것은 사실일 리가 없다, 꾸며낸 이야기이다, 허구이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구약의 요나서의 주인공인 요나에 관한 일화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예수님도 요나에 대한 일화를 언급하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12장 39절 이하에 보면 어느 날 서기관과 바리새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예수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12:39-41)
예수님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낸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이후에 밤낮 사흘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리고 요나의 사건은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할만한 대표적인 표적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니느웨는 당시에 거대한 강국이었던 앗수르의 수도였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상류 동쪽 연안에 위치해 있던 큰 도시였다. 창세기 10장 12절에 보면 니므롯이란 사람이 나온다. 그는 나중에 바벨탑을 쌓으려 하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니므롯에 의해서 건설된 도시가 니느웨이기도 하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의 니느웨는 성민이 60만 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한다. B. C 1100년경의 디글랏 빌레셋 왕 때로부터 시작해서 살만에셀 3세(BC 858-824)때에 번창하였던 앗수르의 수도였다. 니느웨는 우상 숭배가 심하고 교만하고 성적으로 타락된 생활을 하던 곳으로 하나님이 심판하기로 결심하셨던 도시였다.
구약 성경의 내용 중에 요나서를 아는 이들은 많다.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요나서라는 성경의 선지서의 내용을 대충은 안다. 요나서를 통한 하나님의 교훈은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에 빠져 살고 하나님의 기대에서 멀리 떠나서 타락하게 살던 니느웨 백성들과 같은 이방인들일지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저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라도 용서하시고 그 지은 죄를 사하시며 구원하신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60만 명에 이르는 성민을 심판하여 멸하신단다.”는 요나를 통한 회개 촉구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성민들이 왕으로부터 소나 양과 같은 짐승들에 이르기 까지 다 같이 금식하며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며 회개하였다. 왕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과 심지어는 짐승까지도 베옷을 입히고 힘써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용서를 구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자, 손으로 행하던 강포에서 벗어나자”고 범국민적인 회개 운동을 벌였다. 그 때에 하나님은 심판하시려는 생각을 바꾸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셔서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그와 같은 사역에 쓰임 받은 요나 자신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가 찾아 왔었다. 요나는 회개를 촉구하고 니느웨 성민들이 회개하면 그 지은 악한 모든 죄를 용서하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선지자였다. 그래서 요나는 여호와의 눈길을 피하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치려 하였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라는 항구로 갔다.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50km쯤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다. 그 곳은 수심이 깊지 않아서 좀처럼 큰 배가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큰 배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시간이 딱 맞게 기다리고 있었다. 요나는 이러한 일을 큰 행운으로 여겼던 것이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의 배 삯을 지불하고 승선하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하여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 큰 풍랑을 만난 것이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자연 재해를 일으키신 것이라고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욘1:4)고 하였다. 욥바와 다시스 항을 오가는 작지 않은 큰 배가 큰 바람과 큰 폭풍을 만나서 배가 파선될 위기를 겪게 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큰 바람과 큰 폭풍이 일어나게 하셔서 일어난 자연 재해라고 강조하고 있다.
큰 폭풍을 만나 어려워지자 사공들은 각기 자기기 믿고 섬기는 신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불안에 떨었다. 배를 가볍게 해 보려고 배 안에 싣고 가던 많은 물건들을 바다에 집어 던지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 시간에 선지자 요나는 배 맨 아래 층에 내려가서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요나서 1장 5절의 내용은 요나서의 내용이 전개되는 대단히 심각한 당시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당시나 오늘 날이나,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1장 5절의 “사공들이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아무리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공들이라도 바다의 바람이 거세지고 폭풍이 일어나 바다가 흉용해지면 그 누구라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하게 언급하고 있다. 아무리 백전백승의 전쟁 경험을 가진 용감한 장수라도 전쟁은 전쟁인 것이다. 언제 누가 쏜 화살에 맞을지, 누구의 창에 찔릴지, 누구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말이다.
가령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큰 소리 치던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이지만 그의 용맹도 영원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30살에 구데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제 1통령이 되었다. 5년 후 프랑스 원로원은 그에게 황제의 칭호를 부여 하였다. 그는 1804년, 그의 나이 35살에 프랑스 황제에 등극하였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지자 그는 자신 만만하게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1804년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가 황제로 등극하는데 찬성표를 몰아주었다. 그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였다. 자신은 이전에 부패하였던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니라 과거 위대한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권력자임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자랑하고 기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직접 황제의 관을 자신의 머리에 썼다.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의 머리에 황제의 관을 얹을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교황 비오 7세는 마지막 시간에 축복기도를 하고 그를 포옹해주는 것으로 예식을 마쳐야 했다. 그 후 11년간 나폴레옹은 황제였다. 그를 대신할 만한 권력은 세상에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유럽의 주변 전 지역을 통합하는 절대 권력자였고 싸우는 전쟁마다 승리하였다. 그는 제국 군주제를 통합한 절대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장 시민을 다스리는 일은 쉽지를 않았고 무리한 러시아 침략을 위한 원정으로 더 이상 전세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202년 전인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대프랑스 동맹군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결국 동맹군은 파리를 점령해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붙잡혔고 엘바 섬에 유배 당 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 다음 해에 섬에서 탈출하여 도망 나왔고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1815년 6월의 워털루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영국 군대에 붙잡혀 세인트헬레나 섬에 갇히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46살이었다. 그 후 6년 동안 갇혀 지내다가 거기서 죽음을 맞고 말았다. 그가 죽음을 맞을 때의 나이가 52살이었다. 그런 그도 두려움과 고독 속에 쓸쓸히 세인트 헬레나 섬의 유배지에서 죽음의 순간을 맞아야 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권불 십년이라 하지 않았나. 이 땅에 영원한 힘, 영원한 권력이란 없다. 지난 주중에 묵상한 열왕기 하에 보면 바알을 숭배하며 금송아지를 신이라고 섬기며 영원히 갈 것 같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과 그의 칠십 명의 왕자들이 아람의 군대와 예후의 칼에 의해서 역사에서 모조리 사라져 버리는 장면을 보았다. 심지어는 아합의 딸 아댤랴가 남 왕국 유다의 왕 여호람에게 출가해서 낳은 왕자가 나중에 왕이 된 그 왕 아하시야에 이르기 까지 아합의 씨가 멸족되어 가는 참담한 장면을 본다. 교만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물론 오늘 날에도 프랑스 파리에는 나폴레옹 당시에 추진했던 건축물들과 다리를 놓는 등의 거대한 토목 공사를 이룩한 현장과 수많은 치적들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호화롭고 교만하던 황제 등극식의 장면은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역사 속에 지나간 영광의 순간이 되고 말았다.
이 세상에 두려움이 없이 살 수 있는 이가 그 누구인가. 부자인가. 학자인가. 권력가인가. 군대의 장군인가. 미인인가. 젊은이인가. 인기가 많은 연예인인가. 아니다. 이 세상에 두려움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바다를 삶의 근거지로 삼고 바다를 육지처럼 드나들던 선원들이지만 큰 바람이 불고 큰 폭풍이 몰아치자 두려움 가운데 휩싸였다. 그리고 제 각각 자기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배를 가볍게 해서 그 폭풍의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그 아까운 짐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런 불안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요나 선지자는 배의 맨 아래 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욘1:5)고 하였다. 이 상황은 단지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던 그 상황 자체를 언급하는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면에 당시에 요나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어떤 영적 상태였는지를 지적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는 어쩌면 요나 자신이 시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외면하고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망각한 채로 영적인 무감각 상태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고 제 갈 길로 가 버리려는 도망자의 태도이고 무책임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요즘 당신은 어떠한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혹은 가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혹은 교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결국 저들 뱃사람들의 풍습대로 풍랑의 원인은 배에 탄 그 누군가의 죄라고 여겨서 서로를 탓하기 시작하였다. 저들은 제비를 뽑게 되었고 요나가 뽑혔다. 저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져 버리기 전에 힘써 노를 젓고 육지를 행해 보려고 안간 힘을 다해 보았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 오히려 바다는 잔잔해지지 않았고 점점 더 흉용해져만 갔다. 저들 배에 탄 사람들은 선장과 선원과 손님들 모두 불안에 떨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요나서 1장 14절에 나오는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다 같이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저들은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고 말았다. 그런데 꿈처럼 바다가 잔잔해 진 것이다.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각자의 신앙을 떠나서 한 결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 하였다. 아마도 안전히 육지에 도착하게 해 주시면 더 많은 제물을 드려서 여호와께 제사 하겠노라는 서원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에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그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삼일 밤낮을 그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본문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일 동안 갇혀 지내는 동안에 하나님께 기도드린 회개 기도의 내용이다.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
요나는 무어라고 기도하였는가.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요나는 큰 물고기의 뱃속에 던져 진 후에 자신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생각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고난(苦難)이란 것이 무엇인가. 당신에게 있어서 고난이란 무엇인가. 질병인가. 가난인가. 가족 간의 불화인가. 내외간의 불화인가. 부모 자식 간의 불화인가. 동서 간의 불화인가. 친정 형제들 간의 불화인가. 직장 상사나 동료 간의 불화인가. 원인과 이유를 찾을 수 없이 마음이 허전하고 삶에 의욕이 없이 공허해 지는 무기력증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무엇이 요즘 당신이 겪고 있는 고난의 원인인가.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었나. 그런 그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저 버리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이런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요나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스올의 뱃속’이라고 하였다. 성경이 말씀하는 ‘스올’이란 인간이 죽은 다음에 가는 심판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는 요나가 고난 중에 기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난 중에서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간증을 하고 있다.
물론 이 기도의 내용은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 갇혀 있는 삼일 동안에 드린 기도이지만 요나서의 기록형식은 이런 고난을 다 겪고 난 후에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게 하셨고 다시 새 생명을 얻은 기쁨을 가지고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전하게 된 나중 일 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중에 기도하면 들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다. “저 사람은 참 좋겠다.” 이렇게 내가 부러워 할 만한 사람도 그 살아가는 내막을 자세히 들여 다 보면 다 제 나름대로의 고난이 있다.
이 세상에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 질병, 사고 이런 것들이 전혀 없이 흠 하나 없고 티 하나 없이 이 세상을 꿈처럼 행복하게만 살다가 저 천국으로 돌아 가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스트레스’는 유치원에 다니고 어린이집에 다니는 대 여섯 살 된 어린이에게도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인생이 너무 순조롭고, 너무 편안하고, 자신의 일이든 자녀들의 일이든 너무 형통해서 하나님 없이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지내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영적으로 오히려 더욱 문제가 심각하고 위태한 영혼인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336장에 보면 “환난과 핍박 중에도”라고 시작되는 찬송가 가사가 있다. 그렇다. 환난과 핍박이 없는 세상,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없는 인생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환난과 핍박을 어떻게 감당하고 이겨 내느냐의 문제이다. 찬송은 이렇게 계속되지 않나.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이 찬송가의 2절은 이렇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그런데 이 요나라는 이름의 이 선지자는 도대체가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제 멋대로 도망 치려했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이 분부하신 사명을 버리고 제 맘대로 살아 보려고 했던 이름뿐인 선지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고난당할 때 무엇 하여야 하나. 고난당할 때 어떻게 하여야 하나.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고난 중에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베드로 전서 5장에 보면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면서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삼켜 버리려고 달려드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대적하라고 분부하였다. 성도는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찾으면서 그 고난을 잘 극복해 나가면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고 약속해 주셨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도 바울은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5:3-4)고 하였다.
환난과 고난은 믿음의 사람의 믿음을 점점 더 견고하게 하는 방편이 된다. 욥은 그런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서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고 고백하였다.
물론 고난 중에는 자신이 잘 못하여 당하는 고난이나 자신이 죄를 범하여 당하는 고난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교훈처럼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벧전3:14)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서 건지셔서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시고 사십일 만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게 하셔서 영원히 그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 중에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응답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이시며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주의 성전을 바라보며 드리는 기도.
욥은 큰 물고기의 밥으로 던져진 자신의 상태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라고 탄식하듯 애원하면서 기도하였다. 이런 표현은 욥의 고백 중에도 나온다. 욥의 탄식은 훨씬 절망적이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 희망이 없노라”(욥13:15)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요나는 그런 탄식조의 기도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 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욘2:4)는 고백은 무엇인가. 병원에 누워서 주일을 맞아 보면 평소에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당에 나와서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던 일상의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절감하게 된다. 물론 병원에서도 예배할 수 있고, 감옥 안에서도 예배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요나의 처지는 깊은 물속의 큰 물고기 뱃속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로 하면 일제 36년이란 세월이 큰 물고기 뱃속과 같은 기간이었다. 6. 25 전쟁 또한 큰 물고기 뱃속과 같은 기간이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해도 “나는 그 때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 갇혀 있던 기간이었다.”고 간증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혹은 “지금 내 형편과 내 가족들의 형편이 큰 물고기의 뱃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불안하고 답답하고 한 순간도, 한 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사면초가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하여야 할까. 요나는 주의 성전을 바라보는 예배자의 모습을 회복하고 싶어 하였다.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하는 고백의 그 바로 앞에 보면 원어에는 ‘반드시’(surely)라는 뜻의 ‘아크’라는 단어가 포함 되어 있다. 그렇다. 우리가 성전 중심으로 살고, 교회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예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와 같은 일상생활이 별 것 아닌 것 같이 여겨질 지라도 평소에 성전 중심, 예배 중심,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철저히 해 나가는 신앙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올해도 벌써 절반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오늘이 지나고 이틀이 더 지나면 7월이다. 우리는 해마다 칠월 첫 날부터 헐몬산 새벽 기도회를 열흘씩 계속하여 왔다. 올해의 헐몬산 기도회가 우리 각 사람에게 기도 응답의 기도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다니엘서 6장 10절에 보면, 다니엘은 다리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은 사실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을 사용하신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성전을 생각하며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기도자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씨름하였던 것처럼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절기가 되기를 소원한다.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인간의 화와 복, 생명과 죽음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신명기 30장 1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생명과 사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범사를 관리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 앉아 기도하는 이 기도의 장면을 보라. 어려움이 닥쳐오기 시작하자 요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바다 속이나 큰 물고기 뱃속을 요나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지 않나. 그는 바다에 던져졌고 큰 물고기 뱃속에 삼켜졌다. 그런데 요나서 1장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에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고 했다. 피할 수 없고, 더 이상 도망 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이 이미 예비하신 섭리가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있다.
인간의 생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면 한 순간도 제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 갈 수가 없다. 우리가 호흡하고 맥박이 뛰고 맑은 피가 생산되고 지구를 두 바퀴 돌리고도 남는다는 125,000km에 이르는 사람의 몸 안에 있는 혈관이 동맥, 정맥, 모세 혈관에 이르도록 문제가 생기지 않고 칠십년 혹은 팔십년을 건강하게 살수 있다면 이는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사람이 스스로 건강 관리를 하고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며 살아간다고 하여도 그렇다. 이처럼 섬세하게 지음 받은 인간이 이렇게 질병도 많고 사고도 많은 험한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 뱃속에 삼킴을 받은 요나가 어떻게 다시 살아 이 세상 육지에 오를 수 있었을까.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면 못 하실 일이 없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라고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요나서 2장 7, 8, 9절의 말씀에 보면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신앙의 철이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요나는 고백하였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그렇다.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란 없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으로도,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 기업이라도 그 재산이나 금과 은이나 그 어떤 보석을 동원하더라고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인간은 죄 가운데 나서 죄 가운데 죽어 간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고 영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누가 요나를 구원하였나. 물이 둘러싸고 깊음이 에워싸고 바다풀이 머리를 감싸고 산이 뿌리까지 내려가고 땅이 빗장으로 막아서는 큰 물고기 뱃속의 흑암으로부터 그 어느 누가 요나를 구원하였나.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