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스데반(행7:54-8:3) 2015. 6. 21
이 땅에서 오래도록 건강하게 평안하게 잘 살기를 소원하는 바램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부모보다 앞서 가고, 형제자매들보다 앞서 가는 경우가 없지 않다. 아니, 아주 젊은 나이에 타의에 의해서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이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종교적인 목적, 신앙적인 이유로 인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경우 말이다. 우리나라로 하면 1919년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당시 18살의 유관순 열사의 죽음이나 1945년 2월 16일, 해방을 6달 남겨 두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당시 27살의 독립 운동가이며 시인이었던 청년 윤동주 같은 이들의 죽음이 그러하였다.
그러한 죽음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잘 지키며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이심을 부인하지 않고 핍박 자들의 손에 의하여 강제로 죽임을 당하는 죽음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죽음을 ‘순교’(殉敎)라고 한다. 요한 계시록 20장 4절에 보면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은.....살아서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리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 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라고 하셨다.
올해는 6. 25 전쟁이 발발한지 65주년이 되는 해이다. 1950년 6월 25일은 주일날이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전쟁에 참여 하는 군대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하게 된다. 특히 종교적인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하여야 했다. 공산당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는 이유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였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 편에 서 있다가 공산당의 총과 칼에 죽어 갔다. 교회의 역사는 복음을 위하여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죽음을 순교(殉敎)라고 한다.
본문의 스데반 집사는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 최초의 순교자(殉敎者)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12사도의 수에 채워진 맛디아를 비롯한 120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초대교회가 탄생되었다. 그 120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들 중에 있었고 예수님의 아우들도 있었다.
교회의 탄생과 지난 2000년 동안의 교회의 확장은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이며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행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11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하셨다. 그 약속의 말씀을 간직하고 기도하던 120여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이다. 기도와 말씀은 성령 받은 초대 교회 공동체의 바탕이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사도들은 일곱 명의 집사들을 세워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6:4)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렇다면 스데반과 빌립을 비롯한 일곱 집사들이나 12사도 이외의 부흥해 가던 초대 교회의 구성원이었던 수많은 무리들은 기도와 말씀과 동 떨어진 생활을 하여도 괜찮으냐는 질문 앞에서는 ‘아니다’라고 답하여야 한다. 초대 교회의 부흥은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120명에서 시작해서 성령 받은 베드로의 한 번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정도의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었다. 성령 받은 무리들이 복음 전파의 불씨가 되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성령 충만을 받고 한 번의 말씀 선포로 그렇게 큰 무리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기적을 경험한 후에도 정한 기도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일정한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런 생활 중에 성전의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이 40된 걸인, 나면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그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며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그가 걷고 뛰며 성전 안에까지 들어가서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다.
금번 종교 개혁지 성지 순례 길에 프랑스 파리에서 스위스 제네바 까지 가는 TGV 기차를 탔다. 우리는 15량 중에서 맨 마지막 량에 탑승하였다. 그 복잡한 기차 끝 자리에 두 명의 어린 자녀들과 남편과 함께 여행 중인 이슬람 여성이 기차 통로 바닥에 커다란 손수건을 깔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메카 방향을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늘 날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초대 교회의 그렇게도 많은 무리들 중에서 첫 일곱 집사의 택하심 가운데 스데반을 택하셨을까.
스데반은 12사도들보다도 더 먼저 순교자의 반열에 오른 성령 충만한 초대 교회의 구성원이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고 칭찬을 받던 인물이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면 능히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초대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스데반을 미워하던 이들이 모의해서 사람들을 매수하였다. 그리고 악한 소문을 내게 하였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행6:11)하게 하였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렀다. 거짓 증인들도 세웠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고 누명을 씌었다.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들었다고 고발하였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같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고 있었는데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순교자 스데반! 사도행전 7장과 8장이 말씀하고 있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자의 신앙을 조명하며 은혜를 나누자.
복음의 진리를 말하던 스데반.
사도행전 7장 2절부터 53절까지의 내용은 스데반이 대 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 앞에 붙잡혀 나아가서 심문을 받으면서 한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 앞에 답한 신앙의 고백이다. 자신을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거슬리는 자라는 고발 앞에서 담대하게 선포한 복음의 내용이다. 스데반의 그 말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이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사도행전 7장 54절에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과연 스데반이 무슨 말을 저들 앞에 하였기에 그렇게 심한 반응을 보인 것일까.
복음에는 운동력이 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다.
스데반은 저들이 듣기에 귀에 즐거운 말만을 말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7장 51절 이하에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하고 지적하였다. 어느 누가 이런 지적을 받고 편안하게 반응할 자가 있겠는가.
진리를 선포하는 일은 외롭고 고독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면 선포하여야 한다.
우리는 발락 왕과 발람 선지자의 교훈을 잘 기억한다.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발락은 ‘파괴자, 약탈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모압의 왕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을 통과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찍이 아모리 사람들을 쳐부순 소식을 전해 듣고 불안해 진 모압의 왕 발락이 불안해 떨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술사이며 복술가인 발람을 청하여 들였다. 돈을 주고 매수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멸망하도록 해 달라고 계략을 꾸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을 하게 하심으로 모압의 왕 발락의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게 하셨다. 발락 왕이 보낸 고관들은 집요하게 발람 선지자를 매수하려고 힘썼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예언만 말하면 원하는대로 존귀하게 신분을 높여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겠노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발람의 태도는 분명하였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민22:20)
우리는 그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이렇게 처신하여야 한다. 제 생각대로 판단하고, 제 하고 싶은 말이라고 다하고, 제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제 하고 싶은 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무슨 생각인지 발람 선지자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그를 데리러 온 모압의 고관들과 함께 나섰다. 하나님은 그의 그런 행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발람의 행동에 대하여 진노하셨고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그의 가는 길을 막아서게 하셨다. 발람이 나귀를 타고 출발하려하고 두 명의 종들도 그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귀의 눈을 여셔서 길을 막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하셨다. 나귀는 길을 벗어났고 밭으로 들어갔다. 발람은 나귀를 채찍으로 때리며 길 위로 이끌려고 하였다. 여호와의 사자는 좌우로 피할 곳이 없는 좁은 곳으로 나귀를 몰아 세웠다. 나귀는 길을 가다 말고 주저앉아 엎드렸다. 발람은 화가 잔뜩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다.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서 발람에게 말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나귀의 입을 열어서라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발람은 나귀에게 화를 냈다. “지금 내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네 목을 쳤을 것이라”고 말하며 나귀를 위협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셨다.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길을 막고 서 있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발람은 그 길 위에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하나님은 나귀를 세 번이나 때리며 화를 내던 발람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네 가는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네 가는 길을 막으려고 나왔다.”고 말씀하셨다. 발락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민22:34)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이 말을 들은 발람은 발락 왕이 보낸 고관들과 함께 그 길을 갔다.
발람은 세 번의 반복되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고 발락 왕의 기대와 요구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만을 계속하였다. 발락 왕은 몹시 화가 났다. 그러나 발람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예언의 말씀만을 전하는데 쓰임 받았다.
발람은 발락 왕 앞에서도 마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담대하였다. 그리고 분명하게 한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하신 말씀 그대로 전하였다. 발람은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민23:12) 민수기의 발람 선지자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었듯이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을 이야기 하면서 신앙의 조상들 가운데 섭리하시고 간섭하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 삼으시고 땅을 발등상 삼으시는 분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 갇혀 지내시는 여호와가 아니시라”도 선포하였다.
그리고 “너희가 목이 곧다,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린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를 죽인 것처럼 너희가 예수를 죽인 자다.”하고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을 책망할 때에 저들이 이를 갈며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쳐 죽인 것이다.
정의의 편에 서서 살고, 공의를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포하고 증거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의 폴리캅도 순교 당하였고, 체코의 얀 후스도 화형 당한 것이다. 그래서 독일 교회의 본 훼퍼도 순교 당하였고, 일제 식민지 때의 주기철 목사도 죽임 당한 것이다. 엘리야도 아합 임금이 듣기 좋은 말만 하며 지냈다면 사마리아 이스라엘 왕궁에서 왕이 내려 주는 산해진미를 먹으며 임금 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헤롯이 듣기 좋은 말만 하던 선지자였다면 들판에서 눕고 일어나며 낙타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으로 허기를 채우며 지냈겠는가. 세례 요한은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자랑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이 돌들로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 지리라.” “내 뒤에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시리라.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어느 누가 이런 식의 말씀 선포를 즐거워하겠는가.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면, 하나님의 말씀이면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것이 복음 선포인 것이다.
온 나라가 ‘메르스, 메르스’하는데 그 메르스란 바이러스 전염을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감염 되고 이겨 내지 못하면 누구라도 죽을 수도 있단 말이다. 죄와 악이란 그런 것이다. 설마 하던 작은 죄, 설마 하던 별 것 아닌 죄와 악이 나를 사망으로 이끌고, 영원한 죽음과 심판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스데반은 감히 대 제사장과 공회원 들 앞에서 그렇게 담대하게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돌에 맞아 죽었다. 진리는 돌에 맞을 수도 있고, 칼과 창과 톱질과 불길 속에 던져 지는 심판과 굶주린 사자의 먹잇감으로 던져 지는 핍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는 그런 핍박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오늘 설교 후에 부를 586장 찬송의 3절과 4절 가사처럼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전진 하리 언제나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이런 믿음이 순교자 스데반의 믿음이며, 순교한 베드로의 나중 믿음이며, 순교한 사도 바울의 믿음이며, 순교한 사도들의 믿음이 아닌가.
성령 충만하던 스데반.
신앙생활의 힘은 성령의 힘이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였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과 돌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유대교의 교권주의자들 앞에서 성령 충만하였다. 성령 충만함이 아니라면 체코의 얀 후스 신부가 당시 교황 요한23세의 타락한 교권 앞에 항거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로마 교황청에 속한 신부였다. 그는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교수요 학장이요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었다. 프라하 베들레헴 성당에서 시실은 교회라고 하여야 한다. 그곳에서 주일이면 프라하 대학의 교수들과 왕족들과 고관들을 비롯한 30000명이 넘는 예배자들 앞에서 교황의 죄악이나 타락이라도지적하고 오직 복음, 오직 진리,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회복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던 성령 충만한 설교자요 예언자였다. 결국 그는교황이 나서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심판을 받아 파문되고 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고 1415년 6월 7일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6살이었다. 600년 세월이 흘러갔다. 올해가 얀 후스가 화형 당하여 순교한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체코와 도시 프라하에는 그의 600년 전 6월 7일 화형 당하여 순교한 죽음을 기리며 이미 그 날을 국가가 제정한 국가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면죄부를 발행하며 하나님 위에 굴림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교황의 자리만 지키려 하던 당시의 요한 23세를 기리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악은 멸망하는 것이다. 악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진리와 의는 불에 태워도 영원하고 옥에 가두어도 영원하고 칼로 죽여도 영원하고 맹수의 밥으로 던져도 영원한 것이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순교자였다. 사도행전 6장 3, 5, 10절과 7장 55절에 보면 반복해서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다가 순교자의 반열에 오른 하나님의 사람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던 믿음의 선진인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서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우리나라는 건져 내었고 6.25와 같은 전쟁의 위기와 폐허를 딛고 오늘 날의 나라를 건설하였다. 그 배후에는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으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 해방을 위하여 노심초사 할 때에 그의 마음에 감동을 준 책 한 권이 있었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은 미국의 사실주의 작가이자 노예제 반대자인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 1811년-1896년)가 1852년에 발표한 대표작이다. 즉 “엉클 아저씨의 오두막”이란 책이다. 그녀는 미국 코네디켓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자라났다. 나중에 목사요 신학교 교수인 남편과 결혼한 그녀는 밤마다 어린 아이들을 잠 재워 놓고 작품을 써 내려갔다. 39살의 성령 충만한 마음과 시선으로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던 가정주부 헤리엇 비쳐 스토우 부인을 통하여 “National Era"라는 잡지에 연재 되었던 그 소설의 힘은 천지를 뒤 흔드는 진동이 되었다. 그를 칭찬하는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앞에서 그녀는 “아닙니다. 이 소설은 제가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통하여 쓰신 것입니다. 저는 단지 하나님의 하시려는 말씀을 받아 적고 성령의 이끄시는 대로 따라서 쓴 것뿐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헤리엇 비쳐 스토우 부인! 그녀는 작은 체구에 온화한 미소를 지닌 가정주부이며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녀의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는 진리에 불타는 마음과 성령의 충만함이 흑인 노예를 짐승처럼 학대하고 마구 취급하던 당시의 세상에 도전장이 되게 한 것이다.
얀 후스는 성령 충만함으로 체코 땅에 종교 개혁의 불을 붙였다. 마틴 루터는 성령 충만함으로 독일이 낳은 종교 개혁가요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잔 칼뱅도 성령 충만함으로 프랑스와 스위스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종교 개혁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평생토록 헌신한 말씀의 사람이었다. 요한 웨슬리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오늘 날의 감리교 신앙을 탄생 시킨 교회 개혁가요 말씀과 기도와 성령 충만한 사랑의 실천자의 삶을 살았다.
거룩한 죽음을 맞이한 스데반.
인간은 때가 되면 누구나 죽음의 순간을 맞을 것이다. 그 순간의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 올 줄을 우리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고, 돌과 창과 칼과 불과 맹수 앞에서라도 부활 신앙을 담대하게 선포하며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고 순교자의 길을 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과 죽음은 달라야만 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이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선포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하나님의 자녀라면 비겁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담대한 신앙으로 세상과 죄악을 이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민수기의 발람을 통하여 예언하시고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민24:5-9)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 길이길이 살아남아서 영원한 생명과 부활 승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초대 교회의 집사요 감히 그를 당할 자 없는 담대한 말씀의 사람으로 성도들 가운데 영원히 살아 있다.
호국의 달 6월, 이 땅을 지켜 가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살아 갈 수 있었을까. 스데반과 같은, 영국의 쟌 위클리프나 얀 후스나 마틴 루터와 쟌 칼뱅과 쟌 낙스나 요한 웨슬리나 주기철, 손양원과 같은 기도와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전제와 같이 부어 드리는 삶을 살았던 신앙의 선진들이 아니었다면 오늘 날의 세계 교회가 존재 할 수 있었겠는가.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살아 계신다. 주님이 시작과 끝이시다. 주님이 알파와 오메가 이시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고 어떻게 살까만 궁리하지 말고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