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릇을 빌리라(왕하4:1-7) 2015. 6. 7
고대 중동 사람들은 남의 빚을 갚지 못할 경우에 자식을 종으로 빼앗기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모세의 율법에도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21장이나 레위기 25장에 보면 이런 경우에 종 된 남의 자녀들을 대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종은 종이되 종처럼 부리지 말고 품꾼으로 대하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희년이 되면 풀어주어서 자유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로 채무를 해결하게 하려는 조건으로 남의 자녀를 종으로 삼았을 경우에 인격적으로 대하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강조이다.
엘리야의 대를 이어 선지자로 활동하던 엘리사 때에 선지학교 제자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홀로 된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지내고 있었다. 결국은 채권자에게 두 아들마저 종으로 빼앗겨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여인은 처량하고 안타까운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부르짖어 가며 알리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가 그 가정에 도움을 주는 방법이 특이하였다.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많은 그릇을 빌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을 닫고 그 빈 그릇에 집 안에 남아 있는 그릇의 기름을 옮겨 부으라고 하였다. 두 아들과 함께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였는데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 집 안에 펼쳐 놓은 그릇마다 기름이 넘쳐 났다. 더 이상 담을 그릇이 없게 되자 기적의 기름이 멈췄다. 엘리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두 아들과 함께 잘 살라고 하였다. 막막하던 일이 순식간에 해결된 것이다.
남아 있는 것에 기적의 불을 붙여 주신 하나님의 기적 사건이다. 예수님 때에도 벳세다 광야에서 그런 기적을 보여 주셨다. 어린 아이가 내어 놓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런 기적을 행해 주신 것이다. 마치도 남은 자의 은총을 교훈하시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다. 상수리나무의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 싹이 나게 하시고 그 싹이 다시 큰 나무로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마치도 엘리야 때에 있었던 사르밧 과부의 가정 이야기와 흡사하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가서 거기 머물라고 명령하셨다. 그 때는 온 세상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거 사르밧에 가서 머물라고 하셨다. “그곳에서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노라”고 설명하여 주셨다. 마침 엘리야가 그 사르밧 성문 어귀에 도착할 즈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과부’라는 표현을 자주 설명으로 사용하는 것을 용서하라. 본문 내용이 그러하니 반복하여 사용하는 것뿐이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물을 가지러 가는 그녀에게 엘리야는 다시 청하였다.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녀가 대답하였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입니다.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려고 합니다.” 그 때 엘리야가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해라. 그러나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을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말 후에 엘리야는 하나님이 그 여인과 그 아들을 위하여 극심한 가뭄의 때에 어떤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인지를 알려 주셨다. “다시 비가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준 것이다. 그 여인은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처럼 극심한 가뭄의 때에 그런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게 되었다.
인생은 소유가 아니다. 빌려 쓰고 살다가 떠나가는 것이다. 본문의 이 여인이 그 딱한 형편에 모든 이웃에게서 빌려 온 그릇에 기적의 기름을 채워서 문제를 해결 받고, 난관을 극복한 것처럼 인생은 때때로 그 무엇인가를 빌려 쓰고 빌려 주며 살다가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히 내 소유로 삼을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철저하게 한 생애를 빌려 쓰다가 본향집인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돌아 가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천(昇天)이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요셉과 정혼하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던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인 채로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빌리고 말구유를 빌리셔서 인간의 생을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제자들에 의하여 누울 곳을 빌려야 했고 먹을 한 끼 음식을 마련해야 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곳에 집을 마련하고 주방을 마련하고 잠 자리를 마련하고 한 곳에서 안온하게 지내신 적이 없으셨다. 언제나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회당에서 저 회당으로 동부서주하시는 분주한 나날을 사시다가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실 때에도 그 타신 새끼 나귀를 빌려다가 타고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기를 위하여 마련해 두었던 자기 무덤에 장례함으로 무덤까지도 남의 것을 빌려 누우셔야 했다. 그리고 삼일 만에 그 빌려 누우셨던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신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 주신 우리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시다.
사실은 빌려 쓴다고 설명하는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소유란 없다. 모든 것이 우주와 삼라만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인간을 죄의 빚에서 자유하게 하신 대속사건이다. 로마서 6장 6-7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이 지고 있던 죄의 빚을 청산하시고 속량하셔서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인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빚을 다 해결해 주었다는 뜻이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예수께서 그 죄의 값을 다 치러 주심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사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죄 사함과 생명 즉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이다.
본문에 엘리사 선지자와 이 한 여인과의 대화 내용과 기적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집안에 남아 있는 것을 둘러보라.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살아가던 선지학교의 제자 한 사람이 죽었다. 홀로 된 그의 아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많은 빚을 지고 허덕이던 중에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가서 부르짖어 가며 하소연 하게 되었다. 도와주시지 않으면 두 아들마저 채권자에게 종으로 빼앗길 형편이라고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 때에 엘리사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 때에 그녀가,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고 대답하였다.
인생은 언제나 남아 있는 것으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든, 건강의 문제이든, 그 어떤 무엇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당시에 엘리사는 국가적인 선지자였다. 전쟁 중에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에돔의 왕이 연합군을 형성하고 모압과 싸우다 말고 엘리사를 찾아 와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정도의 거국적이고 시대 중심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선지자엘리사였다. 그러나 엘리사는 자신의 그런 거국적인 면모와 상관없이 불행을 당한 한 가정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남편 잃고 두 아들과 함께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힘겨워 하는 한 여인의 부르짖음과 호소에 귀를 기울여 주는 자상하고 섬세한 선지자이기도 하였다. 이는 결코 엘리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귀 기울여 들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사랑 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
우리가 부리는 이러한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은 부르짖으면 응답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집안 형편을 묻는 선지자 엘리사에게 대답한 이 여인의 대답을 보라.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가정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무슨 물건이나 그 무슨 값이 나가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두 아들들이었다. 물론 지금 많은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채권자에게 종으로 빼앗기기 직전의 상황이긴 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집안에 남아 있는 이 두 아들이 저의 큰 희망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들마저 채권자에게 빼앗기게 될 처지가 된 것이다.
요즘 당신의 집안은 어떠한가. 당신의 집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너무 가진 것이 많아서 하나님이 당신의 가정사에 개입하실 공간이 필요 없이 스스로 잘 해결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세상이 그런 만족을 누리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람은 그 무엇에 있어서인가 핍절과 부족을 겪으며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이이다. 뿐만 아니라 그 남아 있는 것으로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15년 전인 2000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중에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라는 영화가 있다.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이다. 주인공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비즈니스에 열을 올리는 페덱스(FedEx)의 간부 척 놀랜드이다. 그는 업무 차 여행을 하다 조난을 당한다. 척 놀랜드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4년을 보내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 무인도에 떠밀려 온 배구 공 하나를 '윌슨‘이라고 이름 지어서 마치도 사람을 대하듯이 대하며 고독과 씨름하며 지냈다. 사경을 헤매며 어렵사리 무인도를 탈출해서 인간 세상에 도착하였지만 바삐 돌아가는 세상은 살아 돌아온 척에게 낯설게만 보였다. 사랑하는 여인 켈리(헬렌 헌트)조차도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척 놀랜드는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문명세계에서 또다시 고독에 빠지고 만다. 마치도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의 내용과 비슷한 장면들이 계속된다.
혹시 요즘 이와 같은 극심한 고독과 외로움과 소외감 가운데 인생의 절망을 겪는 그 누군가가 우리 가운데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내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물어 보고 또한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라. 그리고 그것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내게 남아 있는 경제적인 상황, 내게 남아 있는 지금의 건강 상태, 내게 남아 있는 인간관계, 내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엘리사 선지자의 죽은 제자의 아내는 엘리사 앞에 찾아가서 마치 하나님 앞에 부르짖듯이 부르짖어 가며 자신의 형편을 아뢰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주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신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렇다. 이와 같은 부르짖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그 앞 절에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상황 그대로를 갖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아뢸 때에 자상하신 하님은 우리의 기도 제목을 들으시고 선하고 좋은 길로 해결해 주시는 아버지이신 줄로 믿는다.
밖에 나가서 많은 그릇을 빌리라.
큰 빚으로 인해서 두 아들을 종으로 빼앗기게 되었노라고 부르짖고 탄식하며 매어 달리는 이 여인에게 엘리사가 처방한 내용이 무엇인가. 밖에 나가서 이웃에게 그릇을 빌려 오되 몇 개만 빌려 오지 말고 많은 그릇을 빌려 오라고 하였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가 사용한 말 ‘조금 빌리지 말고’라는 이 표현은 ‘적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그릇을 적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나. 아니 지금 이 가정의 경제 사정은 딱하기 그지없다. 아무 것도 없다. 작은 그릇의 기름 한 그릇 밖에는 더 이상 돈이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곁에 있는 두 아들 들마저도 이 어머니의 품에서 떠난 빼앗긴 자식들과 같은 신세이다. 그런 이 가정에 내린 엘리사의 처방은 좀 엉뚱하게 들릴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웃집을 찾아다니며 빈 그릇을 빌려 오라는 것일까. 쉽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 빌려 오는 그릇을 집안에다 수북하게 쌓아 놓고 문을 닫고 그 그릇에다가 집 안에 남아 있는 그 한 그릇의 기름을 옮겨 붓기 시작하면 그릇마다 가득 차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선지자 엘리사의 명령대로 순종하였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크고 작은 그릇들을 빌려 온 것이다. 집 안에 수북하게 그릇들이 쌓였다. 문을 닫고 기름을 빈 그릇에 붓기 시작하였다. 시킨 대로 순종하였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어른들이 하시는 잔소리가 이것이었다. “얘들아 공부해서 남 주냐” 그렇다. 공부하면 언젠가는 그 갈고 닦은 실력이 쓰임 받을 때가 있다. 열심히 어떤 분야에 공부를 해서 실력을 쌓고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일정한 자격을 취득하고 취업의 길이 열리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되는 일도 아니다. 이는 기술을 습득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요리를 만드는 기술이든, 자동차를 고치는 기술이든, 재봉질을 하고 옷을 수선하고 벽돌을 쌓고 배관 기술을 익히고 용접을 하는 일이든 소와 닭을 키우는 일이든, 채소를 가꾸고 나무를 심어 가꾸는 일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비행기를 조종하고 배의 선장이 되어서 큰 배를 몰고 오대양 육대주를 항해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어려운 경쟁을 뚫고 우주 비행사가 되어 우주선을 타고 우주 공간에 날아오르기도 한다. 어마 어마한 사업 자금을 다 준비해서 시작한 사업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맨 바닥에서 맨 땅을 파듯이 잘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시작하였는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기회도 주시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도 하셔서 발전해 나가고 번성해 나가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집안에서 울고만 있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가서 많은 그릇을 빌려 오듯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새로운 신기술을 익히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도 그냥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길거리에서 전도하다가 20대 초반의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나는 불교입니다.’하고 대답하며 전도지 건네받기를 거부하며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고는 지나쳐 갔다. 물론 종교의 선택은 자유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아 알기 시작하면 인생은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것이 얼마나 크나큰 축복이며 신비인지 모른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놀라운 축복이며 신비가 아닐 수 없다.
65년 전인 1950년에 벌어진 동족 간의 남북 전쟁인 6. 25 때에 빌려 오듯이 이 땅에 와서 우리들을 도와 준 16개국의 UN 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미국군을 비롯한 그들 16개국의 군대는 우리가 빌려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빌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웃 나라의 군대를 뽑아서 보내 주신 것이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닌가. 미국군은 전사자 33,665명 비전투 희생자 3,275을 포함하여 총 36,940명이 목숨을 바쳤다. 또한 103,284건의 작전에서 92,134 명의 전상자를 냈다. 미국군 중에 아직도 8,176명의 실종자는 그 시체도 찾지 못하였다. 한국군은 전사자 415,004명을 포함하여 총 1,312,836 명의 희생자를 냈다. 유엔군은 전사자 3,094명을 포함 총 16,532명이 희생되었다.
내일 오전에 홀트 아동 복지회 합정동 사무실에 방문하여 직원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다. 홀트 아동 복지회는 어떤 기관인가. 1955년 10월에 미국인 홀트씨 부부가 6.2.5 전쟁고아 12명을 미국으로 입양시키는 일을 맡아 하였다. 그 12명 중에서 8명은 홀트 씨 부부가 저들의 자녀로 입양하였다. 당시 미국의 법은 2명 이상의 양자녀를 입양 할 수 없도록 제한하였다. 그러나 저들 부부는 워싱턴 DC에 방문하여 의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캠페인을 벌여서 의회 법을 개정 받고 무려 8명의 자녀를 양자녀로 입양 받아 양육하였다. 남편인 해리 홀트(Harry Holt, 1905-1964)씨는 사우스 다코다 주에서 출생하였다. 간호사 출신의 버다 홀트 여사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오레곤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다가 미국 대 공황 때에 목재소를 경영하여 큰 돈을 벌었다. 남편 해리 홀트 씨가 45살 때인 1950년에 심장마비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었다. 그 후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차에 1955년 6·25전쟁으로 고통 받는 한국의 어린이에 대한 영화를 보고 밥 피어슨 선교사의 주선으로 한국의 전쟁고아 8명을 자기 자녀들로 입양하여 기독교 신앙으로 양육하였다. 저들 8명의 한국인 전쟁고아들은 미국에서 저들 양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났고 나중에 사회사업가와 의사와 대학교수 등으로 성장하였다. 1956년 한국 고아들의 해외입양을 위해 대한구세군 본영 안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주로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1960년에는 재단법인 '홀트해외양자회'로 자리 잡았다. 경기도 고양에 일산원(一山院)을 세우고 고아들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였고 일산 공원묘지에 장례 되었다. 오늘 날은 개명하여 '홀트아동복지회'로 이름 하였다. 정부에서는 40년 동안 66,000여 명을 해외에 입양시킨 사랑의 헌신과 그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아내인 버다 홀트(Bertha Marian Holt, 1904-2000)여사에게 1995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다.
1956년 부모와 함께 한국에 온 둘째 딸 말리 홀트(Molly Holt, 1935-)는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이다. 미국 간호학교에서 공부한 시기를 빼고도 스물한 살부터 55년간 한국 고아나 기아를 돌본 말리 홀트 여사. 한국살이의 절반이 넘는 기간을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보냈다. 해외로 입양 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백 번 비행기를 탔고, 입양절차에 필요한 통역을 도맡았다. 그동안 말리 홀트의 품을 거친 입양아는 대략 10만 명에 이른다. 수십 년째 경기도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그이는 2013년 2월에 골수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지내던 땅에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저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 왔다. 그 복음을 핍박하고 거부하던 초기 선교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받아들인 인생과 가정과 마을과 도시가 복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의 그릇, 믿음의 그릇, 사랑의 그릇, 소망의 그릇, 평화의 그릇, 화평의 그릇, 기쁨과 즐거움의 그릇, 인내의 그릇, 자비의 그릇, 양선의 그릇, 충성의 그릇, 온유의 그릇, 절제의 그릇을 빌려서 집안 가득히 쌓아 놓고 믿음으로 기름을 부어 가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남아 있는 가족이 연합하여 기적을 이루어 가라.
이 세상에 가족처럼 귀한 공동체는 없다. 이 여인은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였다. 온 마을의 이웃집에서 빌려 온 그릇을 집안에 잔뜩 쌓아 놓고 문을 닫은 채로 한 그릇 남아 있던 가름 그릇의 기름을 두 아들들과 함께 그 다른 그릇에 붓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그릇에까지 기름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멈추었다. 여인은 이 기적의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서 알렸다. 선지자는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왕하4:7)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여인과 두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으로 보았다.
마을과 도시와 회사와 기업이 다 귀하지만 가정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한 나라도 가정과 가정이 연합하여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조선 시대 500년을 보라. 왕도 그가 속한 가정을 통해서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가정사에 시기와 질투와 지나친 경쟁과 음모와 살인과 지나친 권력 욕 등이 밀고 들어오면 왕궁에 사는 왕이라고 불행해 지고 왕비라고 그 운명이 비참해 지는 경우를 수 없이 보게 되지 않나.
요즘 열왕기 상하에서 계속되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정기가 그러하지 않나.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절대 권력자인 왕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으로 살아가냐 혹은 악한 왕으로 살아가느냐를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 묵상한 말씀 가운데 보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인 바알과 앗세라를 숭배하며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교만하게 살던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비참한 최후를 맞앗다. 아합의 대를 이은 아들 아하시야는 왕이 된지 2년 만에 왕궁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고생하다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하시야는 병이 든 후에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에그론의 우상인 바알세불에게 가서 “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고 하였다.
2절은 엘리사의 상담 내용이고 3절과 4절은 엘리사의 명령이다. 그리고 5절과 6절은 이 여인이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지팡이 하나를 들고 홍해를 향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홍해가 육지처럼 갈라지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여호수아 때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 홍해처럼 요단강이 갈라서는 기적을 보았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날마다 엿새 동안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 일곱 바퀴를 돌았을 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던 중에 물매 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가서 던진 물매 돌 한 개로 불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전쟁을 끝내는 주인공이 되지 않나. “만군의 주 여호와”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이런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이와 같은 환경에서 예배드리는 이 생활도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보여 주신 기적의 현장이 아닌가. 하나님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르는 이들을 통하여 또 다시 새로운 기적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면 기적이 일어난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대를 잇는 지도자로 세우신 후에 분명하게 강조하여 명령하셨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Do not let this Book of the Law depart from your mouth; meditate on it day and night, so that you may be careful to do everything written in it. Then you will be prosperous and successful.)
야고보서 1장 25절에 보면 들어 깨달아 아는 말씀을 실천(實踐)하는 자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찬도 마찬가지이다. 이 떡과 이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 이 떡과 포도주 자체에 영생의 신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포도주와 떡을 가져다가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26:26), “이것은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믿고 순종하면 성령을 받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영생할 뿐만 아니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의 넘쳐흐르는 풍성한 구원의 은혜와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게 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