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의 복(시128:1-6) 2015. 5. 17
성경은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말씀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령 중심으로 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과 반면에 악한 영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최근에 수요일 저녁 마다 다시 묵상하는 로마서의 말씀대로 하면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라 행하며 사는 자로 구분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양자의 영, 살리는 이의 영,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창세기 5장에 보면 969년을 장수한 무드셀라의 아버지가 에녹이다. 그 에녹은 65살에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겼다. 그 후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365살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심으로 죽음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씀이 아닐까.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5절에, 에녹의 믿음을 언급하면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고 경외하며 살아가는 가정과 가족들의 신앙을 노래한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과 아내와 그 자녀들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을 잘 믿고 경외하며 살면 복되고 형통하고 결실하고 번성하고 번영하며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것만 같다. 어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만사가 형통한가.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살아도 평생 질병이 떠나가지 않는 사람도 있고 평생 장애 가운데 지내는 이들도 있다.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며 살지만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 같은데 자주 가정이 뒤숭숭하고 자녀들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는커녕 눈물과 한숨 가운데 지내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전하는 이유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순교 당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복되다는 본문의 말씀을 단순하게 이해하고, 단편적으로 소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란 하박국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만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믿음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이어령 박사의 책에 보면 자랑스럽던 딸 이민아 씨와 외손자에 대한 간증이 실려 있다. 지금부터 8년 전인 2007년까지만 해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아니 불신자였고 심한 기독교 비판론자였다. 그는 평생토록 기독교에 대하여 몹시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알았지만 문학적인 평가를 할 뿐 인격적인 하나님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평생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쳐 왔고 20대 초반부터 교수들에게 주목 받는 문학청년으로 출발해서 평생을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력에 걸 맞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 시대의 학자였다. 그런 그가 달라졌다. 사연인 즉은 시력을 잃었던 딸이 시력을 되찾으면서부터였다. 물론 그의 나중 신앙 고백은 이렇다. “딸이 잃어 버렸던 시력을 되찾은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늘 아름다운 세상을 이처럼 밝게 보며 살아갈 수 있는 이것이 기적이 아닌가요.”
2007년 그 당시에 이어령 교수에게는 48살 된 아주 총명하고 자랑스러운 딸, 이민아 씨가 있었다. 그녀는 미국에 유학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30대 초반에 미국 켈리포니아주의 검사가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약 청소년을 전담하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성공한 한국여성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32살 때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였다. 그녀는 이혼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모 정당의 알려진 머리카락이 하얀 정치인이 그녀의 첫 남편이었다. 그녀가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지 몇 달 후에 갑상선 암이 발견되었다. 수술을 하였으나 4년 뒤에 재발하였다. 다시 수술을 하였으나 3년 뒤에 여전히 재발되었다. 그러던 중에 유치원에 다니던 둘째 아들이 자폐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녀를 키우는 엄마의 심정으로 서는 자신이 암과 투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변호사직과 검사직을 모두 다 사직하고 오직 아들의 자폐증 치료에만 매어 달렸다. 하와이에 자폐증 어린이를 치료하는 유명한 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예 온 가족이 하와이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학교의 교장은 그녀의 어린 아들을 만나 보더니 자폐증 어린이들의 동료들보다 비교하여 상태가 훨씬 심각하기 때문에 자기 학교에 받아 줄 수 없다는 판정을 하였다. 그녀는 목사이며 그 학교의 교장이었던 그이 앞에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아들을 학생으로 받아 달라고 애걸하며 통곡하며 매어 달렸다. 그러나 그 미국인 교장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이 그 학교에 받아들여지기는 하였으나 엄마인 이민아 씨는 아들이 자폐아 판정을 받은 이후로 십여 년을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뼈를 썩게 하는 근심의 결과는 엄마인 그녀에게 망막이 망가지고 시력을 잃게 하는 후유증으로 찾아 왔다. 그녀는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미국의 유명하다는 안과 병원을 다 찾아 다녀 봤지만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을 뿐이었다. 그러던 때에 친정아버지인 이어령 박사가 하와이의 딸집을 방문하였다. 그 당시 딸은 앞이 안 보여서 설거지를 못할 형편이었다. 아버지 이어령 박사는 “미국 의사들이 손이 커서 수술을 잘 할 줄 모르니 한국에 가서 정밀 검사를 다시 해 보자”고 딸의 손을 잡아끌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을 행해 오는 차 안과 비행기 안에서도 딸 이민아 씨는 계속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며 울며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며 한 숨 지었다. 한국의 유명한 안과 병원에서 진료와 수술을 계획하고 정밀 검사를 진행하던 중에 의사로부터 “눈에 전혀 이상이 없는데요. 혹시 미국에서 의사의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은 것 아닙니까.”하는 말을 듣기 까지 하였다. 그녀는 다시 보게 되었다. 몸의 암도 깨끗하게 나았다. 아들의 자폐 증세도 많이 호전되었다. 32 살 때부터 시작된 악몽과 같던 15년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딸과 외손자의 투병 생활을 지켜본 이어령 박사의 마음 문은 열리기 시작하였고 그는 2008년에 신앙을 고백하고 기독교 교리와 성경 말씀을 배우고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내 딸이 다시 보게 되었다든지 암에서 고침을 받았다든지 내 외손자의 자폐증이 좋아 진 것을 기적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적 중의 기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그의 딸 이민아 씨는 나중에 목사가 되었고 국내외를 날아다니며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간증하였다. 그런 그녀에게 2008년에 큰 아들을 앞 세워 하나님 앞으로 보내야 하는 슬픔이 찾아 왔다. 그리고 그녀는 위암으로 고생하기 시작하였다. 몇 해가 지난 2012년에 그녀도 53살의 한창 나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이어령 박사는 “딸과 외손자들로 인한 고난 극복의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가정의 기원은 교회의 역사보다 오래다. 가정은 에덴동산에 혼자 지내던 아담을 외롭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를 돕는 배필로 하와를 그의 곁에 창조하심으로 이루어졌다. “결혼이란 혼자 살면 외롭고 같이 살면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기는 한다. 그러나 독신의 은사를 갖고 사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 세상의 남녀들은 누구나가 결혼을 통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은 누구나 저 푸른 언덕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평생을 걱정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요즘 결혼 하는 것을 보면 결혼식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과 같다. 결혼식이 얼마나 화려한지 모른다. 그러나 결혼식은 덜 화려하여도 결혼생활이 행복하고 희망이 넘치고 단란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은 국가적으로 겪는 외교적인 위기나 경제적인 위기보다 가정이 겪는 가정 해체의 위기가 더욱 심각하다. 병든 가정, 타락한 가정, 금이 간 가정, 회복의 경계선을 넘어선 가정, 방치된 가정,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 가는 가정,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제 각기 돌아가는 가정, 외로움에 젖어 사는 가정, 범죄에 연루되어 피폐화된 가정, 경제적으로 복잡해진 가정, 냉랭하게 사랑이 식어져 버린 가정, 삼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불륜으로 뒤엉켜져 버린 가정, 넓은 아파트와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몇 대씩 타며 살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돈을 물 쓰듯이 쓰며 남들 보기에는 성공한 가정 같은데 집안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 가정, 자녀 교육을 포기한 듯 살아가는 가정도 없지 않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가정다운 가정이란 어떤 가정인가.
가정의 바탕은 사랑이며 교회의 바탕은 은혜이며 국가의 바탕은 질서이다. 사랑이 있으면 흥부네 집처럼 어렵고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하고 희망이 넘친다. 은혜가 있으면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 카타콤과 같은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지내도 복음을 알고 주를 믿고 따르는 자로서의 소망과 감격 가운데서 살 아 갈 수 있다.
살다보면 인생의 별의 별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사는 것이 가정이다.
살다보면 성공할 때도 있지만 실패할 때도 있다.
살다 보면 건강할 때도 있지만 병약할 때도 있다.
살다보면 아름다운 5월의 화창한 봄날처럼 마냥 행복한 날도 있지만 뒤숭숭한 날도 있다.
살다보면 평안하고 좋고 행복하고 기쁜 날도 있지만 속이 상하고 괴롭고 답답하고 슬프고 억울한 날도 있다.
살다보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정으로 살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가족들이 겪는 비보(悲報)를 듣고 당혹스러워하며 슬픔과 괴로움 가운데 지내는 가정도 있다.
살다 보면 남편으로 인하여 기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아내로 인하여 사랑스럽고 행복한 때도 있지만 부부라는 이유 때문에 서로 마음 상해하며 살 때도 있다.
살다 보면 아들 딸 낳아 키우는 행복과 축복도 크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 아들딸로 인하여 한 숨 지으며 괴로워하고 마음 아파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을 하였나 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는 본문인 시편 128편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신 가정의 복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예수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지만 아픔과 질병과 고난과 역경이 끊임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은 어떤 모습이라고 해석 할 수 있을까.
여호와의 말씀의 길을 걷는 자의 복.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가정의 첫째 특징은 “그의 길을 걷는 자”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생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며 실천하며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시편 119편에 보면,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시119:2-3)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인 주의 도를 행하며 말씀의 길을 따라 걷는 자의 복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로다”(갈6:7)는 말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는 마치도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그 받은 달란트를 그냥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 앞에 그 한 달란트를 다시 꺼내 오는 것과 같다.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보면 할머니, 어머니들은 논과 밭에 농사 할 뿐 만 아니라 밭의 둔덕에라도 무엇인가를 심었다. 듬성듬성 콩을 심어 놓으면 때가 되면 콩이 주저리주저리 열린다. 팥을 심으면 팥을, 강낭콩을 심으면 강낭콩을, 덩굴 콩을 심으면 덩굴 콩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
들기름은 오메가 3 함량이 높고 치매예방에 좋다고 해서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서 재배된 들깨 기름을 과거에 비해서 10배 이상 더 수입해 간다고 한다. 일본은 기후적으로 들깨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하다 보니 한국산 들깨가 잘 팔린다.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어른들이 들깨 농사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농사한 들깨로 기름을 짠 것 보면 얼마나 고소하고 얼마나 맛이 있는가. 심으면 거두게 되어 있다. 심은 만큼 거두는 법이다. 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왜 유태인들의 자녀 교육에 대하여 세계가 관심을 갖고 열광하는가.
2010년 서울에서 G-20정상회담 폐막 기자회견 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하였고 한국 기자단에게 질문하라고 하였다. 그 많은 국내외 외신 기자들 가운데 우리나라 각 언론사를 대표하는 기자들이 그 자리에 가득하였으나 긴 시간이 흘러갔다. 아무도 질문하려 하지 않았다. 초조한 시간은 무거운 침묵 가운데 흘러갔고 결국은 그 자리에 함께 섞여 앉았던 중국 CCTV 방송사의 ‘루이청강’이란 이름의 기자가 일어나서 질문하였다. 우리나라 기자들이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기사거리를 받아 적는데 만 익숙할 뿐 질문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딸들에게 “오늘 떠들지 않고 선생님 말씀 잘 들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유태인 어머니 아버지들은 “오늘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무슨 질문을 하였느냐”고 묻는다. 실제로 미국 신학교에서 경험한 일인데 90분 수업이 시작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 학생들 중에 질문하는 내용이 있으면 교수는 그 질문 내용 한 가지를 가지고 그 긴긴 수업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래도 어느 학생 하나 나서서 “그냥 교수님이 준비하신 강의 내용으로 공부합시다.”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이 없었다.
왜 이런 모습이 중요한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스스로 질문하여 보아야 한다. 과연 내가 지금 신앙 생활하는 이 모습이 성경적인가 하고 말이다. 나와 나의 가족들과 나의 자녀들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고 자문하고 스스로 그 대답을 찾아 가야 한다. 질문하면 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문을 두드리면 열리게 마련이다.
우리가 아는 시편 1편은 분명하게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되는 시편 제 1편의 말씀 말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밤낮으로 즐겁게 묵상하며 살아가려 한다.
그런 이들의 나중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과 같고 그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못하다. 악인들의 나중은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겨와 같다. 시편 37편에 보면 악인은 풀이 베임을 당하듯이, 푸르던 채소가 쇠잔해지듯이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고 만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은 늙어도 버림을 받지 아니하고 여호와가 손으로 그들을 붙드시며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의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못하다. 악인들의 나중은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겨와 같다. 시편 37편에 보면 악인은 풀이 베임을 당하듯이, 푸르던 채소가 쇠잔해지듯이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고 만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은 늙어도 버림을 받지 아니하고 여호와가 손으로 그들을 붙드시며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의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본문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따라서 걷는 생활이 아닌가.
사도행전 10장에 등장하는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가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았다. 그는 백부장의 일정한 월급을 갖고도 항상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그는 분주한 백부장의 군대 장교 신분으로도 일정한 시간이면 하나님 앞에 깊은 기도생활을 실천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 생활과 구제 생활을 기억하실 정도였다. 욥바에까지 찾아 가서 사도 베드로를 만난 고넬료의 종들은 자기 주인을 베드로에게 소개하였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며 유대 온 족속에게서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정도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걷는 자 답지 않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의 첫째는 말씀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자에게 임하는 복이다. 그 복의 첫 내용이 무엇인가.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당한 수고와 노동의 대가를 받는 축복이다. 이것은 평범한 복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앞에 있는 시편인 127편에 보면 2절에서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고 하였다.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눕는 생활이란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생활 모습을 말하나. 요즘 하루 8시간의 노동법의 테두리 안에서 딱 그 시간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출근 시간은 있지만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직장과 일터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수고하며 살아가는가. 그런 긴 시간의 수고, 하루에 열 서너 시간 씩 뛰며 달리고 애쓰고 수고하여도 “여호와께서 그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고 그 성을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그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그 성을 지키는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고 하였다.
그렇다. 요즘처럼 끔찍한 사고와 사건이 많은 세상에서 하루를 살아도 평안히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평안히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하루 생활 중에 순간 마다 얼마나 어려운 일들이 사방에서 펑펑 터지는가.
이와 같은 세상에서 일정하고 내 손으로 수고한 노동과 수고의 대가를 소득으로 벌어서 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가고 평안하게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는 하루의 생활이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복되고 형통한 일상 생활의 축복인가 말이다. 크게 별일 없이 하루를 살아가며 수고의 떡을 먹는 그런 일상이 그 어떤 기적을 체험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귀하고 감사한 축복의 하루이며 형통한 날인 것이다. 남편과 아내와 아들딸들이 함께 살아가는 가정의 복 중에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고 자녀들은 식탁에 둘러앉은 어린 감람나무와 같은 그런 축복 말이다. 포도나무는 결실이 있으므로 포도나무인 것이다. 감람나무는 베임을 당하여도 그 뿌리에서 또 새롭게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나는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이다. 그러므로 식탁에 둘러앉은 여러 자녀들을 ‘어린 감람나무’에 비유한 것은 얼마나 적절한 비유의 말씀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린 감람나무’란 생명력과 번성을 의미하는 축복 중의 축복된 표현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주시는 복.
시온이란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오늘 날 우리가 이곳에 성전을 건축하고 새벽에도 모이고 밤중에도 모이고 주일마다 먼 곳에서 달려 와서 이곳에서 예배드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말과 주일이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 와서 예배당을 찾아오고 이곳에서 예배하는 생활이란 곧 5절에서 말씀하시는 ‘시온에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은혜 생활의 연속인 것이다.
다윗의 시편인 시편 20편에 보면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시20:2)라고 하였다. 그렇다. 시온의 복이란 성도를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예루살렘의 복이며 오늘 날 성전 중심의 복을 말씀하는 것이다. 다윗의 다른 시편인 시편 65편에 보면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65:1)라고 하였다. 이처럼 시온의 복이란 찬송이 끊임 없이 울려 퍼지며 하나님 앞에서 서원하며 기도한 기도의 내용들이 응답되고 생활 속에 준행되는 처소인 것이다.
요즘 교회 옥상에 올라가 보면 아침은 아침대로, 낮은 낮대로, 저녁은 저녁대로, 밤중은 밤중대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지난 금요일 심야 기도회 전에 예배당 옥상에 올라갔다가 모처럼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눈여겨 쳐다 볼 기회를 가졌다. 맑은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바라다 보였다. 교회 주변에 아카시아 향기가 얼마나 짙고 향기로운가. 낮에는 사방에 푸르러진 자연과 이 앞에 있는 인공 폭포 앞의 연못에 핀 연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비가 내려서 물도 많이 맑아지고 크고 작은 비단 잉어들이 헤엄치는 광경도 장관이다. 새벽 기도회에 교회를 향하여 걷다가 보면 새벽 5시가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개구리들이 울어 대는 분위기가 마치도 깊은 산골의 산간 마을에 와서 사는 착각을 갖게 할 정도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주시는 복이란 그런 것이다. 이것을 다윗은 시편 65편 4절에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인 시편 134편을 쓴 시편기자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시온의 성전 생활의 복을 노래한 길지 않고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이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이처럼 시온에서 주시는 여호와의 복이란 분주한 일상생활 중에서일지라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성전 중심, 교회 중심, 예배 중심, 하나님 중심, 성도 중심, 예배당 중심의 복을 말씀하는 것이다.
항상 마음속에 성막 중심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왕이 살아가는 왕궁보다 훨씬 웅장하고 아름답고 귀한 성전을 건축하기를 소원하였던 다윗의 후손이 받은 복을 보라. 인류 역사에 최초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 드린 미국은 개척 초기부터 동서부의 처처마다 도시마다 골목마다 마을마다 예배당을 건축하고 시온의 복을 사모하던 예배자들이 넘쳐 나던 땅이었다. 오늘 날 미국이란 나라도 복잡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여전히 미국은 기독교의 저력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이 받아 누리는 시온의 복과 평생토록 보는 예루살렘의 번영의 복이 분명히 있다. 오늘 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의 고향 마을 교회인 강화도의 흥천 교회는 1907년에 설립되었다. 그 설립에 참여한 이들 중에 김용하 권사의 가정이 있다. 나의 고조할머니는 그 분의 여형제이다. 그 집안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우리 집으로 출가해 오셨다. 그 같은 해에 나의 고조할아버지도 1907년에 49살에 세례를 받으셨다. 그 김씨 가정이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자손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 그 후손들 가운데 손자인 김종우는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동대문교회, 정동제일교회, 상동교회, 수표교 교회서 목회하였다. 그 아들 중에 김은우(金恩雨)는 연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입교대학 철학과를 마치고 미국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한국기독교신문사 기자로 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국제 펜클럽대회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경향신문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훈장도 받았다. 1950년대 중반 미국 유학 중 접한 시청각 교육이론과 방법을 국내에 도입하여 소개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내에 국내 최초의 시청각교육과를 탄생시키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삼남매의 자손들 중에서 인회(仁會, 교육학자, 연세대 교수), 혜영(惠英, 식물육종학자, 동국대 교수), 철회(哲會, 재미 법정 동시통역사, 남가주대 교수) 등의 자손들이 하나님 중심, 예배당 중심, 성경 중심으로 살아가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은우 교수의 형제인 김용우(金用雨, 1912-1985)는 배재 학당에서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그 후 배재중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서울기독청년연맹 총무를 지냈다.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국방부장관과 초대 영국 대사를 거쳐 제17차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하였다.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지냈고 대한적십자가 총재도 지냈고 1975년까지 남북적십자 회담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 유공자 묘역에 장례되었다.
5절은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가정 마다 이런 번영의 복이 임하는 가정되기를 소망한다.
자자손손 누리게 하시는 번영(繁榮)과 평강(平康)의 복.
우리 조상들은 복된 가정은 집안에서 담장 밖으로 다듬이 방망이 소리와 아기 우는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나는 집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6절의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라는 말씀은 얼마나 귀한 축복의 말씀인가.
늘 소개하지만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영국의 요한 웨슬리는 19남매 중에 15번째로 태어난 아들이다. 그 동생 찰스 웨슬리는 18번째로 태어 났다. 19남매 중에 10명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3명의 아들과 7명의 딸들 중에 15번째와 18번째로 태어난 요한과 찰스가 영국 역사와 교회사에 알려진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낳은 열두 아들들 중에서 라헬을 통해서 태어난 요셉이 나중에 70명이 넘는 가족 모두를 살려 내지 않았나. 가나안은 가뭄과 흉년이 극심하였고 애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애굽에는 7년간의 풍년의 때에 다가 올 7년간의 전국적인 흉년을 예배란 뛰어난 총리 요셉이 있었다.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이 열 명의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리어 갔으나 그 동생 요셉이 애굽을 난세에 구하고, 연세 많은 아버지 야곱과 그의 70명의 가족들을 모두 다 고센 땅에 정착시키고 먹여 살릴 뿐만 아니라 번성하게 하고 복되게 할 주인공일 줄은 그 형제들 중에서 아무도 예견하지 못하였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하나님은 노예였던 요셉으로 인하여 그가 섬기던 우리아의 집에까지 복을 주셨다. 이는 결국 요셉을 위하여 베푼 복이시며 그 복은 주인의 집과 밭에 골고루 임하였다.(창39:5) 요셉은 주인마님의 유혹을 피하다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불행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3)고 하였다.
감옥에서 요셉을 불러낸 임금 바로는 요셉의 꿈 해석을 듣고 그를 극찬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창41:38),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41:39)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온 나라 애굽을 다스리도록 임금의 권한을 대한하여 어인은 그의 손가락에 끼워 주고 요셉을 온 나라 안에 존귀하게 높여 주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자식의 자식을 보며 누리게 하시는 번영과 평강의 복이란 무엇인가. 자손들이 하나님 잘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령 충만한 모습이 아닌가. 아무리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가 좋다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갈대 상자에 담겨 떠내려가던 태어난 지 삼 개월 된 히브리의 아기 모세의 삶을 평생토록 하나님이 추적하여 붙들어 사용하시지 않나.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고 선언하지 않나. 여기서 말씀하는 ‘내 집’이란 자식의 자식을 보는 후손을 포함하는 고백이며 소원이며 선언이 아닌가.
여호수아서의 후반부에 보면 23장 이하에서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며 살아가는 생활에 대하여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우상을 섬기거나 절하지 말라.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섬기라.
너희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라.
이런 신앙으로 살아 갈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와 같은 자의 자손들을 주께서 번영하게 하시고 복 되게 하시며 평강하게 하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항상 만사가 형통한 것은 아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지만 사자 굴에 던져졌다. 사드락과 메삭과 에벳느고는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았지만 풀무불 속에 던져졌다. 세례 요한은 성령 충만한 선지자였으나 헤롯의 손에 의해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자체로 복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그 어떤 시련을 겪든지, 그 어떤 누명을 쓰던지, 그 어떤 사고와 사건을 만나든지, 그 어떤 불과 같은 시험을 당하든지 화와 복과 사망과 생명을 다스리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복음은 생명을 바쳐서 따라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행한 길을 걸은 가롯 유다 말고는 나중 모두가 다 순교자의 길을 갔다. 물론 오래도록 장수하며 복음서를 쓰고 1, 2, 3서의 서신을 쓰고 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 같은 제자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항상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