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요한1서2:12-17) 2015. 4. 12
어제 연신내 역 지하도에 내려가서 전도지를 건네며 전도하다 보니 어느 70대 중반 쯤 된 노인이 “뭡니까”하고 물어 왔다. “예수 믿으십시오.”하고 대답하였더니 정중하게 전도지 받기를 사양하면서 “난 졸업했어요.”하고 말하며 지나갔다. 뭘 졸업하셨다는 말일까. 우리 인생에 졸업이 어디 있는가.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인생답게 졸업할 수 있는 걸까. 나이가 들수록, 연세가 들어 갈수록 본향 집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 나그네 길이 영원하지 않은데 말이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교훈하였다.
어렸을 적 여름 방학 때에 비 오고 나면 온 마을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놀았다.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넘기 놀이를 하고 남자 아이들은 접는 칙 칼이란 것을 갖고 땅 따 먹기 놀이를 하였다. 열심히 젖은 땅에 칼을 내려꽂아서 칼이 쓰러질 때 까지 땅 따먹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면 여름의 긴긴 해도 서산으로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엄마들이 학교 마당 울타리에 와서 아들 딸 이름을 부른다. “아무개야 어서 집에 와서 손 씻고 저녁 먹어라.” 그러면 너도 나도 손을 비비며 발로 쓱쓱 그 동안 따 먹던 땅에 금 근 줄을 찍찍 다 지워 버리고 “잘 가”하고 인사하고는 서로들 헤어진다. 인생이 그렇지 않나. 다 지나간다. 젊음도 지나가고, 미모도 지나가고, 어깨 넓고 씩씩하던 허리도 휘고, 꼿꼿하던 다리도 휘청거리고, 곱던 얼굴에 기미도 생기고 검버섯도 자라나고 주름지고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이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젊음도 없고, 영원한 권력도 없고, 영원한 재물도 없고, 영원한 인기도 없다. 아침 햇볕에 안개가 사라지듯이 때가 되면 다 사라지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고 태초부터 계신 이를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는 믿음만이 영원한 것이다.
사도 요한이 쓴 세 편의 편지 가운데 첫 편지인 본문에 보면, 요한 1서 2장 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춥고 가물었던 겨울이 지나가듯이 요즘처럼 사방에 각색 꽃이 만발하는 봄도 일장춘몽(一場春夢)처럼 지나갈 것이다. 금방 더운 여름이 오고, 금방 낙엽이 지는 가을이 찾아 올 것이다. 시간과 세월이 쏜 살같이 지나가고 냇물처럼 흘러서 가 버린다.
고려 시대 말기 충선왕 때에 우탁(禹倬, 1263-1342)이란 성리학자가 있었다. 그가 쓴 시조 중에 ‘탄로가’(歎老歌)라는 시가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그렇다. 나이 들어가는 세월과 찾아오는 백발을 막을 길이란 없다. 막대기로도 가시채로도 막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의 영원”을 깨달아 알고 믿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면 그 인생의 끝이 결국은 헛된 탄식만 남고 말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편지하고 있나.
죄 사함 받은 자녀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은 자녀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 인생들의 아버지이신가를 깨달아 알고 믿고 전하며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요즘 교회 안에 어린 아기들이 계속하여 태어난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신실한 믿음의 엄마 아빠에게서 믿음으로 태어나 양육 받을 만한 아기들이 계속하여 많이 태어나길 소망한다. 그런데 그 어린 아기들이 엄마의 태중에서 자라나는 십 개월 동안 자기들이 죄가 무엇인지 알까. 자기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까. 태어난 후에도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서 최소한 일 년쯤 지나고, 돌이 지나고 그래야 그 어린 아기가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아빠! 아빠!”하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것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라고 말하도록 수 백 번, 수천 번 따라하게 하고 가르쳐서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기가 아빠를 제대로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아빠라고 부르고 의사 표현을 할 뿐이지 그 어린 아기가 아빠가 그 날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온 어떤 인간성을 지닌 어떤 인격의 누구인지를 모른다. 아빠가 무슨 직장 생활을 하고 어떤 사회의 무슨 분야에서 활동하며 경제력을 어떻게 갖고 무슨 소득원을 갖고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는지를 모른다. 또한 아빠가 엄마를 어떻게 위해 주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린 자기에 대하여는 아빠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진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인식하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아빠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갖고 아빠와 아들 혹은 아빠와 딸인 자기 자신과의 혈연관계를 제대로 알고 감사를 표현하고 사랑을 고백하기에도 아직은 이르다. 서로 부모 자식 간의 애정을 나누고 평생토록 아빠와 나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형성하고 살아가기까지에는 젖을 먹는 어린 아기의 단계를 한참 벗어나야 한다. 유치원 단계도 물론 벗어나야 한다. 초등학교의 저학년 단계도 벗어나야 한다. 최소한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시절도 지나야 한다. 아니 사춘기 정도는 지나야 아빠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나에게 있어서 엄마는 어떤 존재인지 아빠는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고 효와 부모 공경에 대한 태도가 정립되게 된다.
사도 요한이 여기 요한의 서신에서 편지하며 강조하는 “자녀들아, 아이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라는 이런 표현을 통하여 교훈하는 바는 그 내용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사죄의 은총을 깨달은 자여야 한다. 그런 정도의 깨달음이나 믿음도 없는 상태라면 아직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상태가 아니다.
요즘 어떤 교회들의 전도 과정 중에 ‘태신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본다. 신자는 신자인데 ‘태신자’란 말이다. 신자는 신자인데 ‘예비 신자’란 말이다. 그 상대방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창조주로 알고, 나의 생을 인도해 가시는 인도자요 나의 범사의 공급자이신 목자이시며 내가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지혜를 덧 입혀 주시는 지혜와 명철의 근원이 하나님 이신 것을 깨달아 알고 믿기까지에는 은혜 받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막연히 개념으로 알거나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알고 체험으로 알고 고백하고 간증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렇기 이 전의 상태는 어머니의 복 중에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의 수준이요 태어 나긴 태어났지만 아직 어른으로 자라나기 이전의 영아기요 유아기요 유치원 정도 수준 밖에는 안 되는 상태인 것이다. 아니,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자연인이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이것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더 먹고 교회 생활하는 햇수만 더해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분명한 산헤드린의 관원이었지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 5)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다.
누가복음 18장 18절 이하에 어떤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고 교훈해 주셨다. 그 부자 관리는 모든 계명을 잘 지키며 사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 부자 관리는 부자인고로 심히 근심하며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았다. 그 부자 관리도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신지 깨달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떠나가 버리고 만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이 재물에 대한 집착 가운데 살아가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어지는 인생으로 살게 될 가능성이 점점 큰 것을 경고하셨다.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재물이 대한 집착과 지나친 탐심을 가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까지 교훈해 주셨다.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 숨어서 저 아래 길로 지나가실 예수님을 지켜보다가 그를 쳐다보시고 말을 걸어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거듭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 뽕나무를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돌무화과나무’라고 번역하였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출세하면 다이고, 많은 재산 모으면 다이고, 성공하면 다이고, 넓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리면 다인 줄 알고 “성공, 성공, 출세, 출세”하고 평생 달려오던 인생이 삭개오였다. 그런 그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뽕나무에서 급하게 내려 와서 예수님을 즐겁게 영접하였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리고의 큰 부자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 가셨다. 세상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같은 시간에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 곁에 서서 말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여리고의 성민들은 서로가 “오늘 예수님이 죄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다” 고 수군거리고 있던 그 시간에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재산을 공개하며 탐심 가운데 치부하며 살아오던 자신의 경제생활을 고백하며 소유의 절반을 정리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남을 속여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자기 소유 삼았거나 부정 축재한 것이 있다면 그 네 배를 피해를 본 상대방에게 갚겠다고 하였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구체적인 것이다. 죄의 문제를 갖고 고민만 하고 있다든지, 괴로워하고만 있다든지, 번민하고 갈등하며 그냥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한다. 그 죄란 것이 세상적인 것들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욕망이다. 강력한 집착이다. 물질세계에 붙잡혀 살아가는 불안이다.
가령 우리가 상한 음식을 먹어서 식중독에 걸렸다면 몸 안에 있는 음식물을 모조리 토하여 내 버려야 한다. 토하는 것이 어려우면 의료적으로 억지로라도 토해 내도록 해야 한다. 위장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비워야 한다. 그리고 그 상한 음식으로 인해서 몸 안에 퍼져 있는 해가 되는 독이 몸 안에 더 이상 퍼지지 않고 제독이 되고 깨끗하게 해독이 되도록 치료를 받아야만 한다.
우리의 죄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우리의 삶 전체가 시간 사용, 재물 사용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죄요, 육체의 욕구가 죄요, 이 세상의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이 죄 범벅인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가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꾸준히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청년이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아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가령 우리 가운데 열 가정 중에서 일곱, 여덟 가정은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한다. 그러하다 보니 한 달 수입의 둘이나 셋 혹은 그 이상의 헌신을 하며 생활하는 가정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십일조 생활을 못하는 개인이나 가정은 영적인 상태로 비유하면 모든 것을 제 입으로 집어넣는 구강기 상태의 어린 아기, 어린 젖먹이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배 생활, 기도 생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는 생활, 충성하고 헌신하는 섬김 생활, 전도 생활에 있어서 다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본문에서 말씀하는 죄 사함을 받은 자녀들, 혹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녀들의 상태란 어느 정도 성장하여 인생의 철이 들고 의젓한 청년쯤이 되어 간 상태이다. 최소한 인생의 사춘기 정도는 지났어야 부모에 대한 고마움도 알고 효도가 뭔지도 알고, 부모 공경을 의무가 아닌 진심으로 하는 그런 단계 말이다. 14절의 ‘아이들아’라는 표현은 그 모든 생활 중에 신앙 성장의 정도를 측정하는 잣대의 기본일 수 있다. 아직 어른이 아니고 아이란 말이다.
말씀 안에서 악한 자를 이기는 강한 청년들.
12절의 ‘자녀들아’ 혹은 14절의 ‘아이들아’라는 표현은 의존적이고 연약하고 미성숙한 상태와 단계를 언급한 말씀이라면 ‘청년들아’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강하고 씩씩하고 담대하고 용감하고 의젓하고 믿음직스러운 영적 상태를 일컫는다. 영적으로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긴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므로 흉악한 자를 이긴 자들이다. 여기서 ‘악한 자’ 혹은 ‘흉악한 자’란 마귀, 사탄, 참소하는 자인 악한 영의 세계의 존재를 말한다. 그러므로 청년의 믿음이란 이 같은 악한 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방어하여 보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격하여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사도 요한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와 그 의미들은 일시적으로 강하고, 일시적으로 이기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이기고 언제나 사탄 마귀의 궤계를 정복하여 성령 안에서 전신 갑주 무장하고 영적으로 대결하여 싸워 이기는 영속적인 승리의 삶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므로 영적 승리의 삶을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하여 평생토록 잘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영적 청년인 것이다. 청년의 믿음이란 언제나 강하고, 언제나 담대하여 악한 자를 이기고, 흉악한 자를 이기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의 영적전사(靈的戰士)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청년이란 육체의 나이로 구분하는 청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십대이냐 삼십대이냐의 육체의 나이로 구분하는 청년이 아니란 말이다. 악한 자와 흉악한 자라고 언급된 사탄 마귀를 대적하여 능히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영적 담대함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악하고 흉악한 사탄은 청년의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들을 미혹한다.
“그렇게 꼭 매주일 예배드릴 필요가 뭐 있어. 새벽 기도는 무슨 새벽 기도야. 세상즐거움을 적당히 누리며 살줄 알아야지. 술도 한 잔 하고 세상 재미도 적당히 보며 살 줄 알아야지. 그렇게 답답하게 ‘예수! 예수!’ 하지 말라고. 그렇게 꼭 십일조를 드려야 할 필요가 어디 있어. 어떻게 번 돈인데 십일조를 드려. 얼마나 집안에 돈 쓸 일이 많은데 그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사역을 하든지 꼭 네가 나설 필요가 뭐 있어. 너 아니어도 충성하고 너 아니어도 헌신 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어. 너는 적당히 해도 돼, 너는 눈치 보며 적당히 뒷자리에 물러 나 있어도 돼. 그래도 될 것 다 되고 할 것 다 한다니까. 너는 제발 앞장서서 충성하려고 하지 좀 마라. 세상적으로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어울리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적당히 누리면서 대강 좀 하라고. 그렇게 열심히 나서서 충성하고 헌신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봉사는 무슨 봉사, 전도는 무슨 전도...”이렇게 유혹하면서 청년의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을 병들게 하고 흔들리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여호수아 14장에 보면, 갈렙의 나이가 85살이었다. 그런 저가 청년과 같은 패기와 용감함으로 역사의 중심에 서서 담대하게 선언하는 말이 나온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애굽에서 모세를 따라 광야 생활 사십년을 함께 한 백전노장이다. 그는 45년 전이나 나이 85살이 된 지금이나 여전히 강건하고 여전히 담대한 자기 자신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아무리 이 곳에 거인족인 아낙 자손이 자리 잡고 있고 성읍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고 선전 포고를 하였다. 남들이 주저하고 망설일 때에 갈렙이 앞장서서 헤브론의 산악지역을 점령한 전쟁의 승리는 갈렙이 젊었다거나 그의 전략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성경은 갈렙의 승리의 비결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수14:14)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12사람의 정탐꾼 중의 한 사람으로 일찍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출발해서 가나안 땅을 손금 보듯이 샅샅이 누비며 정탐하였던 정탐꾼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성경은 갈렙의 특징을 “성실한 사람,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하나님께 충성되면 하나님이 그를 주목하시고 상당한 보응을 증거로 나타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요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날이 뜨거운 뙤약볕에 먼 길 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집안에 모셔 들이고 정성스럽게 살진 송아지를 직접 소 떼 중에서 잡아다가 저들을 대접하였다. 저들은 그냥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천사를 선대한 아브라함에게 일 년 후에 아들 이삭이 태어나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청년의 믿음이란 그런 믿음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그 연세 많던 때에도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에서 일하는 남자 318명을 소집하고 전쟁을 벌여서 조카 롯과 부녀자들과 친척과 재물을 모조리 다 되찾아 왔다. 그리고 전리품 중에서 열중의 하나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살렘왕 멜기세덱 앞에 정성스럽게 바쳤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청년과 같은 패기와 담대함을 갖고 살았던 영원한 청년 신앙의 소유자였다.
모세도 그러하지 않나. 실제 모세는 120세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도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신앙의 상태인가. 기저귀 차고 언제나 젖병을 입에 달고 뭐든 지 ‘달라 달라’고만 하며 응석 부리고 칭얼대며 사는 어린 아기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나. 아니면 전신갑주 무장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전쟁의 최 일선에 뛰어 들어가서 담대하게 싸우는 영적 전사와 같은 영적 청년인가. 사도 요한은 “강한 청년이 되라. 영적으로 분별력을 가지고 악한 자와 흉악한 자인 사탄 마귀를 대적하여 넉넉히 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는 말씀 신앙의 승리자가 되라”고 도전한다. 아니 이 편지를 읽는 저들에게 그런 청년이 되면 좋겠다고 기대를 말한 것이 아니다. “너희는 악한 자와 흉악한 자를 이긴 청년들이다.”고 칭찬하고 있다. “너희들은 이미 강한 자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강한 청년들이라”고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고 있다.
요한 1서 1, 2, 3장을 단숨에 읽어보면 사도 요한은 죄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당시나 오늘 날이나 죄가 가득한 세상이다. 이 죄된 세상에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여 적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이기는 승리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도전한다. 요한 1서 2장 18절과 22절에 보면, 거짓되고 속이는 적그리스도의 악한 궤계와 미혹으로부터 분별력을 갖고 승리하라고 권고하였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1서2:20)고 영적 분별력과 영적 지식을 갖고 거룩한 기름 부으심의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악한 자요 흉악한 자인 적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이기는 길이 무엇인가. 4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5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로서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5장 5절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 아니면 어찌 세상을 이기는 자기 되겠느냐”고 질문하였다. 5장 6절에서는 “그러므로 물과 피와 성령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하며 성령은 진리니라”고 하였다. 5장 8절에서는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은 합하여 하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님이 그 마음속에 있는 자는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없는 자는 영생이 없는 것이다.(요1서 5:12)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삶에 영원한 구주로 모시고 사는 신자는 그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강하고 담대한 영원한 청년들인 것이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
본문에서 ‘자녀들아’ 혹은 ‘아이들아’ 혹은 ‘청년들아’ 하는 표현과 상대적으로 ‘아비들아’라는 표현은 신앙이 무르익어 성숙한 신앙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은 단지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참으로 성숙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아비들아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고 말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지금 장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처럼 당대의 성숙한 신앙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믿음이 강한 젊은이들과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던 어린이와 같은 이들과 장차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대의 성도들에게 편지 한 것이다.
요한 1서 1장 1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을 만진 바라”고 하였다. 2절에 보면, “이 생명은 나타내신 바 된 생명이며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초부터 계시던 영원한 생명의 본체이신 그 분이 이 땅에 와서 계셨던 분이시다. 지금 사도 요한이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평소에 만나 뵙고 제자로 부름을 받아 곁에서 뫼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도 요한은 그 예수님을 보았고 증언하였고 편지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태초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계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나타내신바 된 분이시다. 그러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고 믿는 자들의 신앙을 가진 이들을 사도 요한은 ‘아비들아, 아비들아’하고 부른 것이다.
우리 모두 청년의 믿음과 아비의 믿음을 갖고 살아가자. 그리함으로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이기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사도 요한은 청년의 믿음과 아비의 성숙한 믿음을 위하여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계속하여 자세하게 충고하고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이런 것들은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간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1서 2:17)고 하였다.
창세기의 요셉을 보라. 그는 28살 청년의 때에도 젊은이의 불같은 유혹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갔다. 여주인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누명을 쓴 채 애굽의 바로 왕의 측근들을 가두는 감옥에 쳐 넣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옥 안에 있는 요셉에게도 함께 하셨다. 때가 되어 요셉은 바로 임금의 꿈을 해석하는 자리에 불려 나갔다. 바로 왕은 자기의 꾼 꿈을 속 시원하게 해석해 주는 히브리 노예 청년 요셉에게 자기가 입는 옷에 버금가는 옷을 입혀 주었다. 임금의 반지인 어인을 요셉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임금이 타는 수레와 버금가는 좋은 수레에 요셉을 태웠다. 그날 이후로 요셉은 바로 임금의 왕권을 대신하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30살에 총리가 되어 110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까지 애굽의 총리였다. 요셉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신앙으로 꽉 차 있었다.
편지를 쓰는 사도 요한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었다. “태초부터 계신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이것이 아비의 믿음인 것이다. 믿음의 충만함으로 적그리스도가 처처에서 출현하는 극심한 미혹의 시대에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영원히 행하며 살아가는 영적 승리자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