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요21:19-25) 2015. 3. 22
기독교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언급된 믿음으로 살았던 신앙인들인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던 순종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로서의 모범을 보인자들이었다. 물론 저들에게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 신앙선조들의 특징은 그 때 그 때마다 회개하고 괘도수정을 잘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믿음의 사람들로서의 삶을 살아갔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장면을 보라.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시몬인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갈릴리 해변에서 부르셨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 현장에서 그 때에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했다. 망설이지 않고 부르심에 응답하고 따라 나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순간에 역사적이고 위대한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다. 가령 베드로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고 성령 충만을 받은 역사적인 복음 전파자요 사도행전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주역이요 순교자의 삶을 살다가 주님 앞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부르심의 시작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셨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끝나는 21장의 맨 마지막 말씀도 다른 사람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개인적인 초청과 사명감의 고취를 마지막 말씀으로 남기셨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시작부터 끝까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이 곧 제자의 길이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인 것이다.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나섰던 베드로이지만 정작 예수님이 붙잡히셔서 심문을 받으시게 되자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떠나 버렸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며 온갖 수치와 고통을 다 겪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실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곁에 없었다. 도망가 버렸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다시 찾아가셨고 만나셔서 갈릴리 해변에서 숯불을 지피고 떡과 생선을 구워 먹이시면서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물으셨다.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사명을 새롭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 포기가 먼저 있어야만 한다. 베드로와 안드레도 그랬고 야고보와 요한도 그랬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물고기 잡던 갈릴리 해변에 버려 둔 채로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제자가 되는 출발은 버려두고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일까. 집도 버리고, 아내나 남편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자식들도 다 버리고, 직장과 사업도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말일까. 아니다. 우리가 가족과 더불어 살고, 집과 자동차와 각종 소유와 재산과 일과 직장과 직업과 사업에 켭켭이 싸여 살지만 나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셔야 한다. 예수님 제일주의로 살고 예수님 우선순위로 살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을 따르는 자요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에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셨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다. 사람들이 각색 병자들과 약한 자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 각종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리뿐만 아니라 주변의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거기 마태복음 4장 25절에서 말씀하는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는 그 무리들은 그냥 무리일 뿐이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들은 아니다. 예수님 곁에 찾아 가면 병이 낳고 약한 자가 강해지고 귀신이 떠나가고 간질병이 사라지고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니까 따라간 것뿐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 정도 따라가는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가지고 따른다고 할 수는 없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고 계신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곁으로 가까이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고 말했다. 누가복음 9장 57절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고 대답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하고 말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교훈해 주셨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혀 않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왔다 갔다 하는 정도를 갖고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정도의 교회 생활을 갖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 취업할 때나, 신상 조사서를 작성할 때에 종교 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정도를 갖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례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가족과 작별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으면서 어정쩡한 회색지대에 머물러서 오락가락하며 지내는 것 가지고는 예수님을 따라 사는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기 포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법이다.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 교훈하신 대로이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예수님의 교훈이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통한 가르침이셨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명쾌하였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를 보아라. 새들이 창고 짓고 모아 쌓아 놓고 살더냐. 들이 백화화가 어떻게 자라더냐. 수고하고 길쌈하여 입고 살더냐.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 한 송이만도 못하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0-3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3-34)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날마다 달마다 열심히 자기 분야에서 일하고 사회생활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생활의 바탕에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육체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삶이 멈춘다면 불행한 일이 아닌가.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을 그 삶의 내용이 달라야 한다. 직업이 소중하고 직장이 필요하고 재화를 마련하기 위한 열심과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일하고 벌어서 자기만족, 자기 향락, 자기 쾌락만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동물적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버릴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 다운 것이다. 신명기 28장의 앞부분은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고 했고 뒷부분에는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피할 수 없게 되리라고 경고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다. 그 경계가 14절과 15절이다. 신명기 28장 14절에 보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이와 같으리라”는 말씀의 내용은 무엇인가. 축복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1-2절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하셨다.
물론 하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을 잘 따르려고 해도 온갖 고난과 질병과 역경과 아픔과 시련과 환란과 곤고함이 그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온갖 고난 속에 숨겨져 있는 변장된 축복의 열매들이 반드시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남들과 비교하면 결코 안 된다.
본문의 교훈이 그러하지 않나. 사도 요한의 생을 예수님이 다시 재림 하실 때까지 살아남도록 살아남게 하실지라도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의 고유권한이요 그것은 요한이 받을 몫의 자기 삶이지 결코 베드로의 몫은 아니란 말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내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대신에 내 안에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다스리고 주장하시도록 주님께 나의 삶을 위임하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의 자기 포기인 것이다. 포기라는 단어, 포기라는 표현에 대하여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자포자기하는 뜻에서의 포기가 아니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버리기 싫지만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아니, 반드시 버려야만 한다. 스스로 버릴 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권리요 특권이요 혜택이지만 포기할 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삶이 가능한 것이다. 고린도 전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네 가지 권리들을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로서의 삶을 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들을 절제하고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노라고 했다.
고린도 전서 9장에 보면,
4절에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절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절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11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정리하면 무슨 말인가. 정상적인 식욕을 만족시킬 권리,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결혼 생활할 권리, 정상적인 여가나 휴가를 즐길 권리 그리고 정상적인 보수와 댓가를 받아 누릴 권리가 없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린도 전서 9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요 사도로서의 삶을 사는 중에 자기 포기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하고 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그렇다. 성도의 삶을 달라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면 세상 사람들과 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어떻게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시고, 입을 것 다 입고, 할 것 다하고, 갈 곳에 다 가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요 제자요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절제력 있는 사명자의 삶을 달라야 한다. 아니, 달라져야만 한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기 사명.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로서의 자기 십자가가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한 자가 아니라고 하셨다. 이는 결코 부모님을 공경하지 말고 자녀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지 않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 아내를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아들딸을 노엽게 하지 않고 사랑으로 잘 양육해야 한다.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자라나도록 아들딸을 잘 돌보고 가르치고 교훈하고 역량 있는 시민이요 국민이요 열방의 일꾼이 되도록 키워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믿고 순종하며 예수님을 제대로 잘 따르는 신앙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자기 만의 자기 몫의 십자기를 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자기 십자기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 심령이 가난하여야 한다. 그래야 천국 백성답게 살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애통할 줄 알아야 한다. 온유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할 때에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받고 땅을 기업으로 누리고,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답게 배부르게 하시는 영적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청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며,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아가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잘 이겨 내는 자로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사명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사명자의 삶을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며 살아가는 사명자라면 당연히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딸이란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요5:11-12)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로 인하여 남들이 성도된 우리들을 욕하거나 박해하거나 거짓으로 거슬러서 악한 말을 할 때에 저들을 함부로 대적하지 말자. 오히려 “아! 이제부터 주님의 또 다른 복이 내게 임하겠구나”하고 참고 견디고 이겨내며 그 어떤 그 무엇이라고 이겨내야만 할 것이다. 오히려 그러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다. 왜인가. 하늘의 상이 크다고 하셨다. 이 땅을 살아간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그러하였고 수많은 선지자들의 삶이 그러하지 아니하였나.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님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신앙생활은 누구를 바라보느냐, 누구를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떠한가. 밤낮 바라보는 것이 무엇이고, 밤낮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밤낮 세종대왕과 신사임당만 바라도 보이고 생각나는가. 물론 물질 세상에 살면서 육체에 갇혀 지내는 이 세상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동안에는 그런 필요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장차 있을 기쁨을 위하여 지금의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예수님의 인내를 배우자.
나중 상급을 받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자.
피곤과 낙심을 극복하자.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자.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아닌가.
0.7 미리짜리 모나미 153 볼펜을 만든 정동제일감리교회 송삼석 장로를 보라.
송삼석 장로는 젊은 날 사업이 한창 어려울 시기에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를 했다.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니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게 너무 많았다.
첫째, 주일 성수를 하지 않았던 것.
둘째, 돈을 많이 벌고도 십일조를 제대로 못한 것.
셋째, 새벽기도 생활 제대로 못한 것.
철저하게 회개하며 기도한 후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서원하였다.
“모나미 볼펜이 50억 자루가 팔리게 해주세요!” 그런데 오늘 날 그런 회사가 되었다.
주변의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아라.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면 그 삶의 열매가 달라진다. 심령이 복되고 삶이 복되고 자손이 복되고 영혼육이 복되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기 상급.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부르심에 순종하고 말씀을 준행하며 사는 삶이다. 구약 시대로 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여 홍수 시대에 여덟 가족이 역사적인 가족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살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출발하였을 때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는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섰을 때에 큰 민족을 이루는 복을 받았다. 그 이름이 창대하여 졌다. 창세기 12장 4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하였다. 롯은 삼촌 따라 간 것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따라 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따라 가고, 부르심을 따라 가고, 사명 따라 간 인생들 중에 복되지 않은 인생이 있는가. 따라 가던 말씀과 부르심을 벗어 났을 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아간은 가나안을 공략해 들어가는 아이성 전투에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때에 불행하게 죽고 말았지 않나. 요즘 육해공군에 계속하여 터지는 군사 비리를 보라. 해군의 참모총장이 법의 조사를 받는 것을 보라. 이런 장면을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다면 어떻게 여기겠는가. 장군이라고 같은 장군이 아니다. 군인이라고 다 군인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다 기독교인이 아니다. 제자 중에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도 있고 가롯 유다 같은 제자도 있다.
여호수아도 군인이었고 아간도 군인이었다.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모세와 함께 히브리 청년이었다. 광야 생활 중에 하나님을 따르는 모세 곁에서 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 출애굽기 17장 8절 이하에 보면 광야에서 아말렉의 세력을 만나서 르비딤에서 전쟁하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을 따라서 택한 군대를 동원하고 르비딤 광야에 나가서 아말렉과 전쟁하였다. 모세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고 말하였다. 모세 곁에 아론과 홀도 동행하였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겼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여 내려가자 아론과 홀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로 하여금 그 돌 위에 앉게 하고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말렉을 무찔러 이길 수 있었다. 두 손을 높이 치켜드는 기도도 전쟁이다. 기도가 전쟁이다. 사순절 새벽 기도가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이다. 한명의 남성이라도 더 깨어 일어나 새벽 기도의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가정이 되길 소망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대로 행하였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성경적인 복이 임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대를 잇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가 되지 않았나.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아이 성 전투를 진두지휘하고 헤브론 산지가 점령되던 때에도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갈렙을 곁에 두셔서 존구하게 하시던 위대한 지도자였다. 제대로 따르고, 제대로 믿으면 상급이 다르다. 여호수아가 임의로 가나안을 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요단강을 건넌 것이다. 이처럼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행하면서 살아가면 그 인생이 평탄해지고 형통해 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주님을 따르며 살다 보면 복되게 되고 형통하게 되는 은총이 골고루 균형 있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적인 부자나 권력자나 힘 있는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 세상 부자들이 돈 없고 재산 없어서 불행해 지는 것 아니다. 세상 권력자들이 군대와 마병과 칼과 창과 방패가 없어서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기준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성령님을 따라야 한다.
어제 연신내 사거리 전도하다 보니까 어느 60대 부인 둘이 지나가면서 “목사님이세요. 할렐루야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하면서 전도지를 받아 갔다. 예수님을 믿는 부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미국의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1918-2009)목사가 늘 그렇게 말하고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도록 하였다. “주 안에서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의 신앙 부흥 운동은 미국 오클라호마 주에 털사라는 도시의 오랄 로버츠 대학교가 세워지고 발전할 정도의 큰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두 손을 상징한 기도하는 손(Praying Hands) 탑은 그 학교의 상징이며 자랑이다. 높이가 18미터, 무게가 30톤이다. 하나님은 오랄 로버츠 목사를 통하여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 <내 안에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란 책을 비롯해서 90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오순절 교회의 목사요 인디안 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눌증으로 어려서는 말을 더듬었고 17살 때에 결핵으로 죽음의 위기를 경험하였고 주님의 치유 은총을 입고 건강을 되 찾았다. 그가 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였을 때에 150만 명이 이상이 그를 통한 신유의 기적을 체험하였다. 12000명이 모일 수 있는 천막을 30군데나 옮겨 지어 가며 미국 전역에서 30년이 넘도록 신유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의 씨앗의 믿음“(seed faith)강조는 믿음으로 심은 씨앗은 때가 되면 반드시 풍성하게 보상을 받아 거두게 된다는 강조였고 그는 실제 그런 수많은 체험 가운데 91년을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부르심과 사명(使命)이 먼저다. 주님을 따르려면 고난과 고통이 있다. 그러나 사명자의 뒤에는 반드시 상급이 따른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이와 같은 영적 질서를 잘 깨달아 알고 믿으며 30살에 왕이 되어 70살에 하나님 앞으로 가기 까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 인물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라고 고백하였다. 인생이 이처럼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주님의 말씀과 명령을 따르고 준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주님의 온갖 좋고 영광스러운 은혜와 선물이 공급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날 이후 예수님 다시 버리지 않고 잘 따르고 준행하여 성령 받고 사도행전 초대교회의 뛰어난 사도가 되지 않았나. 그는 남은 평생 성령 충만하게 복음을 전파하다가 나중에 순교자의 영광스러운 반열에 오르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초청하신다. 주를 따르는 자들 앞에 놀라운 간증이 넘쳐 나게 하실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