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시는 예수님(요17:9-19) 2015. 3. 8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을 다녀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바탕은 기도였다. 예수님은 40일간의 광야 금식 기도를 시작으로 평생을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기도 생활로 일관하셨다. 요한복음 17장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대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심오한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이다.
성경은 기도의 책이다. 성경 신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쓰신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사무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엘리야와 엘리사 등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을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신약 시대의 세례 요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 디모데, 바나바, 스데반, 빌립 등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야고보서의 기록자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서의 기록자인 유다 등도 모두가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 그리고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 또한 기도 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날마다, 순간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기도의 절정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기도하신 겟세마네의 기도이다.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그 마지막 기도 내용을 훨씬 자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다. 본문은 크게 세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기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이다. 요한복음 17장 6절 끝에서 말씀하는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는 기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즉 하나님께서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그 영혼을 맡겨 주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 자들이다. 물론 그들 중에서 가롯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같은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한 불행한 주인공이지만 말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증거 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그의 그 어떤 소유도 남기신 것이 없다. 예수님에 관련된 유품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예수님이 남기신 유산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서 지난 2천년 동안 육대주의 처처마다 그 복음의 말씀을 들고 나아간 선교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 사랑의 실천이 오늘 날의 기독교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예수님의 곁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은 8절 말씀처럼 두 가지이다.
그 첫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분이심을 알았다.
그 둘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줄도 믿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다. 9절에서 말씀하신 ‘그들’은 물론 제자들을 말씀하는 것이긴 하지만 20절에 ‘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제자들 외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이며 그들의 영혼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를 소유의 개념으로 말씀하셨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그의 소유가 된 백성’(a people belong to God)이라고 하였다. 그의 소유된 백성의 특징은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자들이다.
누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오르신 적이 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형되셨다. 그 옷이 흰 광채가 났다. 그 때에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하였다. 베드로는 너무 감격스러워 하였다. 그 산 꼭대기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였다. 주와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각각 초막을 따로 하나씩 짓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그 때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고 그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오직 예수님과 세 제자들뿐이었다. 신비한 환상을 본 것이다. 그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그 날의 그 신비한 체험을 예수님이 부활 하실 때까지 미리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날 산을 내려오면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서로에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하고 물으며 대화하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 아래 내려 와 보니 아홉 명의 다른 제자들이 말 못하게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찾아 온 아버지와 아들 곁에서 쩔쩔 매고 있었다. 그 아들의 상태는 심각하였다. 귀신이 그 아들을 잡으면 거꾸러지고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고 파리해져 가는 중한 상태였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데려 오라고 하셨다. 그 아이를 데려 오자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구르고 거품을 흘렸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귀신에 들렸고 자주 물과 불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였다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설명하였다. 그리고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요청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If you can'?" said Jesus. "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 )
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이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예수님은 그 더러운 귀신을 책망하셨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다. 그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어 있었다. 그 주변에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며 웅성거렸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벌떡 일어났다. 집 안으로 들어간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그렇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믿음생활이며 동시에 기도생활이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한다.
제자들을 보존(保存)해 주시기를 기도.
요한복음 17장은 1절부터 ‘아버지여’라는 반복된 표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기도의 내요을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 11절에서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여’(Holy Father)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죄와 구별되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님 또한 그런 기도로 기도한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남 유다의 제 10대 임금이었던 웃시야 임금이 죽 던 해에 성전에서 기도하던 선지자 이사야가 높은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목격하였다. 주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 천사인 스랍들의 임재를 체험하는 장면이 자세하게 나온다.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갖고 있었다.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었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었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의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고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스랍들의 임재가 얼마나 영광스럽든지 성전의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이시다. 레위기 11장 44-45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찬가인 누가복음 1장 49절에도 보면,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아버지이시다. 거룩하신 아버지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또한 거룩하신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게 보존해 주시기를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존하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해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11, 12, 15절에 보면 세 번 반복하여 ‘보존’(保存, protect)하여 주시기를 기도한 내용을 보게 된다. 우리가 최근에 보는 ‘개역 개정’ 성경에는 ‘보존’이라고 하였고 쉬운 번역인 ‘공동번역’성경에는 ‘지켜 주시기를’ 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존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죄와 악과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위험과 유혹과 미혹과 불같은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제자들을 보존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이 예수님의 기도이시다. 오늘 날 부모님들이 자녀들이나 가족들을 위하여 비는 기도의 내용이 대개 이런 기도가 아닌가.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총을 덧입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이는 지극히 성경적이다. 시편 23편에 보면 다윗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보존해 주시기를 기도한 장면이 소개되지 않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예수님의 이와 같은 간구는 죄와 악의 오염이 심각한 세상에서 제자들을 말씀으로 굳건하게 보호하여 주시고 안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기도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기도와 가르침 가운데 교훈과 은혜를 받던 제자 요한은 요한 1서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이와 같은 연합은 성도들 간에도 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내용을 이미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말씀하신 바가 있다.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합일과 연합의 교훈은 요한복음 17장 21-23절에서 다시 장황한 말씀으로 반복된다. 무슨 말씀인가. ‘하나 됨’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강조하신 반복적인 강조이다. 같이 차근차근 생각하며 읽자.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이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대와 소원은 제자들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소원하신 것이다. 23절에 보면,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한다.”고 기도하셨다. 이는 이 땅을 다녀 다시기 전의 예수님의 심정이 과연 어떠하셨는가를 엿보아 알게 하는 기도의 내용이 아닌가.
하나님은 보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이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보존되기를 원하시는 중보자이시다. 12절에 보면,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예수님 곁의 그 어떤 누구의 영혼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셨다. 그런데도 멸망하는 자가 생겨났다. 그 뒤에 이어지는 ‘멸망의 자식’이란 가롯 유다를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데살로니가 후서 2장 3절에 보면,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적그리스도’를 언급하신 내용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영혼을 악으로부터 보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데 까지 이를만한 온전하게 구원 받는 영혼으로 보존되기를 원하시고 기도하셨다.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뒤 돌아보면 보존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시대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으며 결혼하였는가. 결혼 하지 말란 말이 아니다. 아름다운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니다. 다만 당시의 인생들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하고 육신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6:3)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의 마음 속에 육신적인 욕망과 죄악이 가득 차게 되고 그 계획이 악해 지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주기도문’의 내용에도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나. 이것이 곧 보존을 위한 기도인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악이 많은가. 그 파도처럼 밀려오고 바이러스처럼 침투해 들어오는 영적 전쟁터에서 ‘영의 방독면’을 쓰고 살아가야 한다. 요셉은 주인마님의 유혹을 이겨서 나중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모세는 나이 사십에 애굽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살인자였으나 사십 년 후인 나이 팔십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동족 이스라엘을 애굽의 바로의 노예로부터 구출하는 출애굽의 중심 지도자로 쓰임 받았다. 다윗은 사울 임금 죽일 기호를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거룩한 왕이 되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여 자신도 살고 동족 이스라엘도 구하는 기도의 여인이었다. 드보라는 가정주부였다. 그런 그녀의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40년간의 여사사였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폭행자였으나 다메섹 체험과 부르심 후에 역사적인 사도의 삶을 살다가 숭고한 순교자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히면 그 누구라도 한 시대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보존 받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요한복음 17장 16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닮아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제자들을 진리(眞理)로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
우리가 믿는 믿음의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이다. 진리는 성도를 거룩하게 하는 힘이다. 성도는 진리로 거룩해 지는 것이다. 여기서 ‘거룩’이란 말은 사람이나 제물을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하여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하고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신다.”(히1:9) 하나님은 거룩함 그 자체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신 진리는 거룩하신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딤전4:5)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편 기자는,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Your righteousness is everlasting and your law is true.)(시119:142)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Word of the Father is truth)라고 기도하였다. 이것은 기도이며 고백이며 선언하신 선포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사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함을 입기를 원하셨다.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은 부르신 제자들을 이 어둔 세상에 보내시길 원하셨다. 18절 말씀이 그런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보내시는 성부이시다.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뿐만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제자들을 부르셔서 세상을 향하여 다시 보내시는 성자이시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은 지난 2천년 동안 계속하여 그 보내심의 사명을 전수하여 온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나만 겨우 예수님 믿다가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다. 계속하여 그 누군가에게 이 복음이 전파되도록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계속 다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19절에서 말씀하는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는 말씀은 제사를 위하여 성별된 대제사장으로서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주시는 산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보내신 제자들이 제대로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을 죄와 악으로부터 보존하셔서 깨끗하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는 능력이 있으시다.
320장 찬송의 1, 3절에 보면,
“나의 죄를 정케하사 주의 일꾼 삼으신 구세주의 넓은 사랑 항상 찬송합니다.
죄의 짐을 풀어 주신 주의 능력 크도다
나를 피로 사신 예수 내 맘 속에 오소서.“
라고 찬송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하면서 예수님의 이와 같은 구원 사역을 명쾌하게 정의하였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복음의 진리 안에서 거룩해져 가는 제자다운 제자의 삶을 살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