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다 하리라(말3:7-12, 마23:23) 2015. 1. 11
우린 주변의 그 누군가를 말할 때에 “그 사람은 웬 복이 그렇게 많데요.”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이런 말을 할 때 그‘복’(福)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 상대방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건네고는 한다. 이처럼 상대방에 대하여 그가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이든, 사회생활 중에 만나는 그 누구이든지 ‘복을 많이 받으라’고 말하는 그 복이란 무엇일까. 건강하고 행복하며 하는 일이 잘 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하고 인정을 받기도 하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세상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복된 것이 아닐까. 누구네 집 아들딸이 어떤 대학에 진학했다더라, 누가 어떤 회사에 들어갔다더라, 누가 무슨 국가고시에 합격했다더라, 누가 누구네 누구와 결혼했다더라, 누가 사업을 하는데 그 사업에 잘 된 다더라, 누가 승진했다더라, 누구네 장사가 엄청나게 잘 된다더라, 누가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더라, 누가 예쁜 공주를 낳았다더라. 뭐 이런 이야기들을 끝이 없이 나누며 살아간다. 사실 누가 아들을 낳고 누가 딸을 낳은 것이 아니라 그 가정에 하나님께서 그런 생명을 선물로 보내 주신 것이 아닌가. 공부도 열심히 잘 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남들보다 더 잘 해야 하지만 세상 적인 복의 기준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의 기준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세상만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아닌가. 새옹지마란 고사성어를 아시지 않나. '새옹지마(塞翁之馬)'의 한자를 풀이하면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이다. 세상일은 변화가 무쌍하여 길흉화복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옛날 중국 북쪽 변방의 요새에 한 노인이 살았다. 이 노인에겐 수말 한 마리가 있었는데 당시 말은 귀한 재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들은 노인을 위로했지만 노인은 속상한 기색 없이 "오히려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아나요"라고 말했다. 몇 달 뒤 달아났던 말은 암말 한 마리와 여러 마리의 망아지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에 이웃들은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노인은 시큰둥한 어조로 "축하는 무슨, 이 일이 도리어 화가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 하겠소"라고 대꾸한다. 얼마 후, 노인의 아들이 암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이웃 사람들은 노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위로했다. 이에 노인은 "누가 아오? 이 일이 도리어 복이 될지"라며 태연하게 말했다. 다음해 국경 너머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요새의 병사들과 젊은이를 끌고 갔다. 대부분 전사하거나 행방불명이 됐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절기 때문에 소집에 면제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경은 복된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다. 말라기 3장 10절 후반부에 보면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12절에서는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변에 믿는 사람들이 ‘복되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이방 사람들이 나를 보고 ‘복되다’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의 날을 약속해 주셨다. 왜 주변 사람,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까지도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고 하셨는가. 그 대답은 그 바로 앞 문장에 나온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닌가. 신명기 4장 22절에 보면 장차 들아가서 차지할 가나안의 축복이 그러하다 하셨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33장 29절에 보면,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행복한 인생이 되게 해 주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땅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실제로 삶의 환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원어인 ‘헤페츠’란 뜻은 ‘기쁨’과 ‘즐거움’이란 의미이다. 삶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을 제대로 잘 믿고 섬기며 살아가는 나의 삶을 ‘복되다’하리라는 말씀이다. 우리 모두 이런 복을 받기를 소원하자. 그러면 말라기 3장에서 말씀하는 ‘복되다 하리라’고 약속하시는 그 복이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복.
본문에 보면‘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이 네 번이나 반복된다. 7절, 10절, 11절, 12절에 보면 그렇다.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 앞에 두 손들던 애굽의 바로 왕이 믿던 그런 우상이 아니다. 그런 죽은 신이 아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바알을 숭배하던 바알 숭배자 450명이 ‘바알이여 바알이여’하고 빌던 그런 죽은 신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믿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며 따르고 순종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영어 성경에 보니까 ‘the LORD Almighty'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범사에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능력이 한이 없으신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만군의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고 이삭과 함께 하시고 야곱과 함께 하셨다. 아브라함이 나이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은 것은 아브라함의 선택이나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니었다. 이는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나이 90된 사라에게 간섭하신 일이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되찾기 위하여 가정의 남자 318명과 함께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그 연합군의 왕국에 쳐들어가서 조카 롯과 재물과 부녀와 친척을 되찾아 올 수 있었던 것도 연세 많은 아브라함의 전략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14장 17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 전쟁 후에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십일조를 바친 장면이 나온다. 그 십일조를 바치기 전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말을 하였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왕이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창14:19) 라고 축복하였다. 이 일 후에 아브라함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는 말씀을 해 주셨다. “아브람이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이 후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하여 이어졌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생활이다. 그러므로 모든 만복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645장 가운데 제 1장“만복의 근원 하나님”의 가사가 무엇인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아멘”
그렇다. 우리의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은 태양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 태양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태양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셨고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 낮과 밤, 해와 달과 별들과 이 땅의 바다 속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이 땅에 뛰고 기는 모든 동물들을 모두 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주관하시고 다스리시고 그 모든 것들 가운데 복을 주신다.
정상적인 자녀라면 부모님의 말씀을 귀 담아 듣고 그 잔소리에 담긴 교훈을 새겨 듣고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한 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고 삶에 적용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지난날을 뒤로하고 밝아 온 새해에 하나님의 말씀을‘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경청하고 실천하며 준행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명심보감에서도 ‘순천자는 흥한다’고 하였다. 하늘의 뜻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흥왕하게 되어 있다. 지금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때가 되면 주님께서 그 인생을 존귀하게 하시고 높이실 줄로 믿는다. 반대로 ‘역천자는 망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늘의 뜻에 거슬리면 망한다고 하였다. 시편 제 1편의 말씀이 그런 말씀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 같지만 악인과 의인의 나중은 다르다. 이것이 시편 제 1편의 강조가 아닌가. 복 있는 사람은 그 생각하는 것이나 가는 길이나 앉는 자리가 다르다. 달라야 한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거나 죄인의 길에 서거나 오만한 자의 앉는 자리와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악인은 지금은 비록 번성하는 것 같으나 그 나중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게 되고 만다. 악인은 심판 날이 오면 그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들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악인의 길은 망하고 만다. 이것이 시편 제 1편의 경고가 아니가. 그러나 복이 있는 사람은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 그런 인생은 마치도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도 마르지 않고 그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된다고 하셨다.
송구영신 예배 때 짧게 새해를 맞이하는 말씀으로 묵상한 예레미야31장 10절 이하여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파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였다. 그 복이란 구체적이다. 흩어졌던 땅에서 불러 모이시고 목자가 양떼를 지키시듯이 지켜 주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어떤 강한 자의 손에서라도 구원하시고 속량하시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또한 복을 주시되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고 하셨다. 그리함으로 그 심령이 근심이 없게 하실 뿐만 아니라 ‘물댄 동산’과 같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복은 제사장들에게 흡족함을 주고 백성들에게 복을 주셔서 만족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와 같은 복을 받아 누리고 증거하자.
십일조와 봉헌물 신앙을 회복하는 자의 복.
말라기는 구약 시대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예언서이다. 사실 본문인 말라기 3장 7절 이하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으로부터 말씀이 시작된다. 조상 들 때로부터 언젠가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서 지키지 아니하였노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도 회개한 인생들 곁으로 돌아오시겠노라고 경고하고 계시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고 하셨다. 8절과 9절에 보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십일조 신앙과 봉헌물 신앙의 회복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백성들의모습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자라고 몇 번이나 반복하여 책망하셨다. 9절에 보면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였으므로 저주를 받았노라고 책망하고 계시다. 그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11절에 보면, 토지의 소산을 메뚜기 떼가 먹어 없애 버리는 것이고 포도나무의 열매인 포도송이가 기한 전에 떨어져 버리는 재앙을 말한다. 혹시 내 삶에 그런 헛수고는 없는가. 밤 새워 일하고 남들보다 더 긴 시간 일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일하고 별로 쉬지도 못하며 일하고 날마 일만하고 날마다 돈 말 벌고 내 입 채우기 바쁘고 내 배 채우기 바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쉼도 없고 안식도 없고 일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어 살면서 그렇다고 가정이 엄청 잘 되는 것도 없고 자녀들이 뭐 남들보다 더 잘 되는 것도 없고 밤낮 허구헌날 작년이나 올해나 날마다 개미 챗 바퀴 돌 듯이 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 나의 모습은 아닌가.
이런 탐심에 붙들려 살면 어떤 모습이 되나. 어제 지방 장로 자격 과정을 대하는 위원회에 오후 늦게 까지 여러 시간을 다녀왔다. 어느 목사님의 말이다. 그 교회가 몇 해 전에 수해 의연금을 특별 헌금으로 모아서 좋은 일 하자고 특별 헌금을 했는데 어느 장로가 만원을 했더란다. 그 장로님은 강남에 시가 17억 짜리 아파트에 사는 분인데 “왜 이렇게밖에 못하셨느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저 돈 없습니다.”하더란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은 교회 안에 있고 믿는 자 안에 있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 같지만 사실은 그 마음에서 복이 떠난 자의 인생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며 ‘내 것을 도둑질 하였다’고 책망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고 책망하고 계시다. 그래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경고하고 계시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저주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그 스스로 자신의 마음속에 거미줄을 쳐 놓고 복 대신 저주를 택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있다. 말라기 선지지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도 온 나라가 하나님의 저주를 부르듯이 도둑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았다고 지적하고 계시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무엇인가. 인생에 닥치는 저주를 피하는 길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던 십일조 생활과 봉헌 신앙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말씀을 강하게 강조하시다 보니 ‘도둑질’이란 표현을 반복해 가며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지난 3년 반 만에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다섯 해를 지내며 새 해를 맞기까지에는 건축을 위해서 특별히 헌신 하신 가정들도 적지 않지만 십일조 신앙의 힘이다. 십일조 신앙을 제대로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 외에 십의 둘을 드리고 셋을 드리는 신앙에도 앞장 설 수 있다. 그러나 십일조 신앙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경우에는 주신 것 열개 중에서 하나를 드리지 못하는 그 마음, 그 신앙의 덫에 스스로 붙잡혀서 그 인생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된다.
어제 운전 중에 기독교 방송에서 나오는 아주 짧은 1분 메시지를 들었다. 그 내용은 “우리가 닫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법은 강한 힘이 아니라 작은 열쇠를 갖고 잠겨 있는 문을 여는 것이다.”는 말이었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 나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힘쓰고 애 쓰는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완력으로 되는 것은 더욱 더 아니다. 닫혀 있는 그 문의 열쇠만 있으면 그 어떤 인생의 문이라고 열고 새로운 축복의 세계를 향하여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서울에 크고 웅장하고 아름답게 건축된 교회 중의 한 곳이 신길 성결교회이다. 그 교회에는 신원에벤에셀의 회장인 박성철(1940-) 장로의 신앙 미담이 있다. 1973년에 시작된 박성철 회장의 신원 에벤에셀은 국내뿐만 아니라 개성 공단을 비롯하여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등지에 생산 시설을 갖고 있는 세계적인 의류 생산 기업이 되었다. 박성철 장로는 주일마다 자가용 대신에 택시를 타고 교회에 간다. 택시 기사에게 하루 일당을 주겠다고 하고 새 가족으로 초청해서 예배의 경험을 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전도의 기회를 삼으려는 열심을 갖는 것이다. 그런 전도의 열심은 매년 200여명을 전도의 열매로 맺게 하신다. 그는 예배, 기도, 성경,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 생활에 충성과 헌신을 다 하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 신자 시절부터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겨온 대표적인 기독교 신자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와 같은 시대에 같은 도시의 하늘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1975년부터 오늘 날까지 40년 동안 새벽기도를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다. 새벽에 못 일어날 까봐 알람시계를 둘 씩 머리맡에 두고 잔다. 어떤 날 새벽에는 고단한 상태에서 새벽 알람시계 소리에 깨어 일어나 잠결에 바지도 갈아입지 않고 잠옷 바람으로 교회에 가다가 되돌아 와서 옷을 갈아입고 간 적도 있다. 그는 전라남도 신안군 자은면의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집이 너무나 가난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목포로 나가서 고아원에서 지냈다. 아버지는 마약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집안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어렸을 적에 박성철은 배고픈 고생을 너무나 많이 했다. 어찌하다가 그는 국립중앙감화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곳은 소년원과 같은 곳이다. 그 곳에서 만난 선생님이 어린 박성철에게 예수를 전했다. 신문 배달을 해 가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어렵게 공부해서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에 오는 차비가 부족해서 고등학교 졸업식 때 상품으로 받은 영어 사전까지 팔아서 차비를 마련하였다. 잠 자리가 없어서 남산에서 잠을 자면서 고생 끝에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신문사에 취직하였다. 정치 경제부 기자로 국회 취재를 담당하다가 당시 국회의원이던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에게 신임을 받아서 공보비서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그가 섬유 업계의 공장을 차리고 공장의 기계 밑에서 한 달이면 20일 이상을 현장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공장을 일구었다. 오늘 날은 나라 안과 밖의 공장마다 수 천 명의 직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며 생산에 종사한다. 회사 이름도 ‘최고의 믿음’이란 뜻에서 ‘신원’(信元)이라고 정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그는 개성 공단에도 3,500명의 직원을 위해서 천 여 명이 들어가는 큰 예배당을 공장 안에 지었다. 여의도에서 마포 대교를 건너와서 아현 동 언덕을 향해 가다 보면 길 건너편에 신원 에벤에셀 사옥에 ‘주일은 주님과 함께’라는 대형 홍보 간판을 보게 된다.
오늘 날의 박성철 장로를 탄생시킨 신앙 고백이 그것이다.
주일은 주님과 함께........
십일조를 주님의 전에.............
여러 나라 생산 현장의 모든 임직원들은 월요일 오전마다 주님께 예배를.........
날마다의 새벽 첫 시간은 하나님의 전에서 주님 앞에.............
이런 철저한 신앙이 오늘 날의 박성철 회장, 박성철 장로를 붙들어 온 힘이었다.
신원 에벤에셀은 패션의 본 고장인 이탈리아의 최고가 명품신사복인 브리오니 생산을 비롯해서 미국 시장에까지 진출해 있다.
‘믿음경영, 정도(正道)경영, 선도(先導)경영’
이런 3가지 경영 철학은 곧 설립자의 신앙 정신과 인생철학이 배어 있는 내용들이다.
약속하신 그런 복을 받도록 삶 속에 실천하는 자의 복.
십일조 신앙은 원래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하여 드리도록 명하셨다. 그러나 그런 십일조 신앙에 따르는 복을 10절에서 말씀하셨다. 십일조를 하나님의 전에 들여서 하나님의 전에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 십일조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는 축복 받는 생활의 시작이라고 하셨다. 십일조 신앙은 살아가는 그 땅을 아름답게 해 주시는 축복을 받게 된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조차도 십일조 신앙의 복을 받는 인생들을 보고 ‘복되다 하리라’고 하셨다.
맨소래담을 아시나. "삔데 타박상, 근육통, 어깨결림, 피부가려움, 벌레물린데 등에 바르는 피부소염진통치료제다. 맨소래담은 6. 25 전쟁 후에 우리나라에도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 되면서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보급된 피부질환 치료약이다. 그 맨소래담의 개발자가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 1848-1935)이다. 미국 메사추세추 주에서 태어난 이 사람은 위기 중에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하여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작은 서점을 운영했다. 미국에 경제공황이 들이 닥쳤을 때 서점이 망하면서 10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되었다. 살 길이 막막했다. 자녀는 아홉 명이나 되었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찾아 간 곳에 교회였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기도를 하던 중에 몇 가지가 생각이 났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예배가 예배를 드리는 등 마는 등 형식적으로 드렸고, 간절하게 기도한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했다. 서점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도 자주 빼 먹고 십일조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회개했다. 그는 나중에 그 때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내가 망한 것은 경제공황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무언가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다음 그는 집을 팔아서 빚부터 갚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둑질한 십의 일조를 구별하여 드렸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빚부터 우선 갚아라. 집을 팔아 십일조부터 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고 위선적인 행동이다”고 비난했다. 이때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는“나는 지금 도둑질한 것을 먼저 상환하려는 것이다. 나는 사업이 망하기 전에 십일조를 무수히 도둑질했다. 훔친 하나님의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이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하고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먼저 청산하고 그는 뉴욕에 가서 의약품 제조회사인 ‘맨소래담’을 세웠는데 크게 성공했다. 그래서 수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십의 이조, 십의 삼조, 십의 사조까지 드리다가 나중에는 십의 구조까지 드렸다. 후에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는 이런 말을 했다. “십일조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다. 우리가 명령에 넘치도록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그는 세상을 떠날 때 회사 경영의 모든 지분을 교회에 기부하였다. 나중에 그의 자녀들 중에서 네 아들들이 아버지의 사업 정신을 이어가고자 사업을 인수하여 경영을 계속해 나갔다. 126년 전인 1889년에 설립된 ‘The Mentholatum Company’는 오늘 날, 중국 상해 등지에 공장을 설립하고 아시아와 세계의 150여개 국가에 100가지가 넘는 의약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분명하게 강조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십일조 생활을 분명하게 교훈하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이시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는 말씀은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정의와 긍휼을 실천하며 믿음 생활(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도 충성스럽게 제대로 잘 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의 말씀 안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균형 있고 질서 있게 복을 받는 그런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