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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시61:1-8) 2014.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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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12-29 16:52 조회 19,794 댓글 0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시61:1-8)       2014. 12. 28

사람이 평생을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평안한 삶을 살고파 하겠지만 일생동안 그런 삶을 온실같이 살다가 이 땅을 떠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윗은 파란만장한 생을 산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10대 중반의 소년 시절에 전쟁을 목격해야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그 전쟁의 일선에 나서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대결하는 일부터가 평범하질 않았다. 사울 왕의 사위가 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왕의 미움을 받아 이리 쫓기고 저리 피하는 날을 십년이 넘도록 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 죽을 고비도 수 없이 넘겨야 했다. 어디 일정하게 누울 자리도 없이 광야에서 지내고 동굴에서 지내는 들짐승과 같은 생활을 청년기에 10년이 넘도록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어렵게 왕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왕의 자리를 찬탈하는 바람에 왕궁을 벗어나서 신하들과 함께 맨발로 피신하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사무엘하 15장 이하부터 보면 여러 부인들 중에서 태어난 배 다른 왕자들 중에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의 왕위를 욕심내는 장면이 나온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란 누이가 있었다. 다말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공주였다. 그런 다말을 배 다른 왕자인 암논이 연애하였다. 결국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압살롬은 자신의 누이 다말을 욕보인 암논에게 보복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이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압살롬은 양털깎는 날 배 다른 왕자들을 골고루 초청하였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까지도 초청하였다. 다윗 왕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거절하고 말았다. 왕의 허락을 받고 배 다른 왕자들만이 초청을 받게 되었다. 그날 압살롬은 종들에게 명령하여 암논을 죽였다. 왕의 다른 아들들인 배 다른 형제들은 잔치 자리에 초청 받았다가 잔치도 하지 못하고 서로 뿔뿔이 나귀를 타고 도망치고 말았다. 압살롬이 왕의 아들들인 왕자들을 한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죽였다는 헛 소문이 다윗 왕에게 전해졌다. 사무엘하 13장 31절에 보면, 다윗 왕은 일어나서 곧 자기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왕 곁에 둘러 선 신하들도 모조리 옷을 찢고 왕의 곁에 둘러 섰다. 그 때 조카인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와서 상황을 제대로 보고 하였다. 왕자들이 다 죽은 것이 아니라 암논이 죽고 다른 왕자들은 나귀를 타고 도망하여 무사하다고 전했다. 이 사건 이후로 압살롬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가서 그술 나라의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망명하였다. 그 날 이후로 다윗은 날마다 아들 압살롬으로 인하여 슬퍼하며 지냈다. 압살롬은 왕자들 중에서 탁월하고 뛰어난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아버지 다윗 왕에게 가장 큰 슬픔을 안기는 아들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삼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조용히 지낸지도 다시 이년 세월이 지나갔다. 다윗 임금이 왕으로 있은 지 어언 32년째 되는 해가 밝아 왔다. 주전 979년경의 일이다.  
삼년 만에 망명지에서 돌아 온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용서를 받고 부자간에 화해의 시간이 왔다. 사무엘하 14장 25절에 보면 압살롬은 외모가 출중하고 잘 생겼고 백성들의 인기도 대단하였다.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다”고 했다. 요압 장군의 주선으로 압살롬이 다시 아버지 왕 다윗을 뵐 기회가 왔고  압지 왕 앞에 절하는 아들 압살롬과 다윗 왕, 부자간에 오랜만에 입을 맞추는 순간이 왔다. 그 후에 압살롬은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명을 세우고 지냈다. 압살롬은 날마다 성문 앞에 앉아서 백성들이 왕 앞에 가지고 나아오는 억울한 송사 건들을 해결하며 백성들의 인기를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삼하15:6)고 하였다. 압살롬은 마음 속에 거사를 꿈 꾸고 있었다. 압살롬은 200명의 특별 조직을 운영하며 왕권을 찬탈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압살롬을 따르는 세력은 점점 많아졌다. 다윗의 왕궁이 피 바다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 왕은 압살롬의 반역 세력과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왕궁을 내어 주고 피신 길에 올랐다. 피신 길에 오른 왕을 따르는 신하들과 무리들은 큰 소리를 내어 울며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 그리고 광야 길로 향해 가고 있었다. 사무엘 하 15장 30절에 보면, 다윗 왕이 감람산 길로 올라 갈 때에 왕은 얼굴을 가리고 맨 발로 울며 가고 있었다. 다윗 왕을 따라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들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따라 가고 있었다. 다윗 왕이 바후림 지역을 지날 때에는 게라의 아들 시므이란 자가 임금 곁에 따라 붙으며 왕을 계속하여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하고 저주하며 왕을 향하여 돌을 던졌다. 그 때에 스루야의 아들이 장군 아비새가 그를 쫓아가서 죽이겠다고 씩씩 거렸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하며 화를 참지 못해하였다. 그 때 다윗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역시 다윗 답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11-12)
이렇게 시작된 다윗 왕의 피신 생활이 계속되었다. 본문인 시편 61편은 그 피난 시절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르짖어 기도한 기도 내용을 담고 있다.
부르짖는 다는 것은 복 받쳐 오르는 눈물과 울음을 곱씹어 가며 격정을 억누루고 절규하는 심정으로 호소하는 기도의 모습을 말한다.
다윗의 남다른 점은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대개가 기도 형식으로 되어 있는 시편 가운데 150편중에서 거의 절반 가까운 73편의 분량이 다윗의 시편인 것은 놀랍지 아니한가. 다윗이 천신만고 끝에 30살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다윗의 신앙 고백은 시편 23편 1절에 잘 나타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의 그 많은 시편들 가운에 한 편이 본문으로 대하는 시편 61편이다. 그 내용은 기도 형식이기도 하지만 평소에 다윗이 갖고 있는 하나님 신앙의 면모를 엿 볼 수 있다. 본문인 시편 61편은 탄식과 간구와 찬양과 서원 등이 담겨 있지만 구분하기는 ‘비탄시’로 구분한다. 다윗은 지금 임금이긴 하지만 왕궁에서 쫓겨난 왕이요 피신하고 있고 도망 중에 있다. 그런데도 그의 기도 가운데 보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자신의 왕권이 끊이지 않고 자손 대대에 보전되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다윗은 주전 1010년에 왕위에 올라 주전 971년까지  40년 동안이나 왕이었다. 그는 신정국가의 중심에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은 신본주의 정통성을 가진 선민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런 그가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 왕궁을 비워주고 피신 길에 오른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왕궁에서 아들의 군대와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우지 않겠다는 다윗의 판단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다윗이 평생을 전쟁으로 나이가 들어 온 왕인데 어찌 싸움을 두려워하겠는가. 이 때가 주전 979년경이니 다윗이 왕으로 있은 지 무려 32년 세월이 흘렀고 다윗의 나이도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그는 전쟁과 정치의 백전노장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 압살롬과 싸우려 하지 않고 왕궁을 벗어나 피신하였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다 같이 시편 61편 1절을 읽자.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부르짖는 기도를 귀 기울여 들어 주시는 하나님.
공동 번역 성경에 보면,
“하나님, 나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기도를 귀담아들으소서.”
(Hear my cry, O God; listen to my prayer.)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부르짖음이란 비탄한 심정으로 피를 토할 듯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절규하는 간절한 호소를 말한다. 다윗이 30년이 넘는 왕의 생활 중에 지금 늘그막에 아들에게 반역을 받아 왕궁을 비워주고 피신 길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처절하게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다.
 
2절에 보면 다윗의 마음은 약할 대로 약해져 있다. 예전 성경에 보면, ‘눌릴 때에’라고 했다. 원래의 표현을 보면, ‘상하다, 다치다.’는 뜻이다. 다윗의 마음이 불안과 근심에 쌓여 답답해하고 몹시 쇠약해 져 있는 상태이다.
자신이 있는 곳을 ‘땅 끝’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유대 민족의 자존심과 같은 거룩한 시온 성 예루살렘의 화려한 궁궐에서 지내던 임금 다윗인데 어찌하여 저가 지금 ‘땅 끝’이라고 고백하는 처절하고 긴박한 환경에 도망자가 되었는가. 다윗의 고백하는 ‘땅 끝’이란 지리적인 ‘땅 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멀어져 버린 것과 같은 착잡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막막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고백한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난 지금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고,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고, 아늑하고 좋은 환경에서 잘 살고 있는데 왜 이런 설교를 들어야 하나”하고 반문하는 분이 계시지는 않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웃과 나라와 교회와 시대를 분별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기도자의 부담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다운 것이 아닌가.
 
지금 다윗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왕궁을 경호하는 수많은 파수대의 경비 가운데 안전하게 왕궁에서 눕고 일어나던 평화의 시대를 살던 왕이었다. 그런 그에게 왕궁을 비우고 반역자인 아들 압살롬의 세력의 침략 앞에 무기력할 정도로 왕궁을 떠나서 요단강을 건너 간 피신 길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지금 육신적으로 주리고 고단하고 몸과 마음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다윗은 시시 때때로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수 없이 겪으며 살아 왔다.
시편 57편 2절에도 보면 사울 임금에게서 피신하여 동굴에 지낼 때에 쓴 시인데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라고 하였다. 시편 64편 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라고 하였다. 시편 55편 4절에서 다윗은“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라고 하였다.
멀리서 임금을 바라보는 백성들은 호화로운 왕궁에서 살아가는 왕을 부러워 했을지 모른다. 물론  다윗도 마음이 평온한 날들도 없지 않았겠으나 여러 날을 근심과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와 떨리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착잡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형편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그 기도의 내용을 보면 평소에 그가 얼마나 깊이 있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는지를 알게 한다.
 
2절 후반부에 보면 다윗은,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지금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정국 속에 왕궁을 벗어나 피신하는 신세인데도 다윗은 장차 회복되게 하실 하나님의 역사적인 개입을 희망하면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윗의 믿음의 기도가 아닌가. 지금 역사가 참담하게 기울어 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계속하여 붙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모이든 자기 아들딸이 부르짖어 가면서 엄마 아빠를 부르는데 모르는 척 하는 부모가 있겠는가.
 
우리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안다. 하나님께 제사드린 후에 제사에 실패한 가인이 들에 있을 때에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그 때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아벨이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했겠는가.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았겠나. 아벨은 죽었으나 영원한 의인의 반열에 올려진 믿음의 선진이 되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그 아벨의 믿음과 기도 생활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믿음으로 살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아벨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의 사람이었다.
아벨은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은 사람이었다.
아벨이 드린 예물에 대하여 하나님이 증언하셨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후대에 두고두고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가 아무리 많이 공부하고 많이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권력을 누리고 사회적인 지위를 얻고 아무리 분야마다에서 떵떵거리고 큰 소리를 쳐도 하나님은 나의 그런 세상적인 그 무엇에 대하여 가치 있게 평가하시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젊은이이든 어른이든 그 누구이든 세상에서 그 하는 일이 공부를 하든, 연구를 하든, 공직 생활을 하든, 그 어떤 직장생활을 하든, 무슨 장사를 하든, 무슨 사업을 하든 잘해야 하고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나의 모습은 아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무엇을 보셨는가. 특별히 히브리서의 말씀을 빌리면 하나님이 아벨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이것이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니 바로 나의 그런 모습을 보길 원하신다. 내 학력이 뭔지, 내 연봉이 얼만지, 내가 어떤 집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는지, 주로 무슨 취미 생활을 하는지 그런 것에 대하여 묻지 아니하신다.
 
모세 때에 동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세는 바로 왕의 딸에 의해 왕자로 왕궁생활을 하던 애굽의 왕족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나이 사십 때에 왕궁 밖에 나갔다가 동족과 애굽 사람의 싸움을 말리다가 애굽 사람을 쳐서 죽였다. 그는 다음 날 다시 왕궁 밖에 나갔다가 동족 간의 싸움을 말리던 중에 어제의 살인 사건이 소문 난 것을 알고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어느 날 나이 80이 된 모세가 호렙 산에서 양떼를 몰고 가며 양을 치고 있었다. 처가살이 하던 그가 치는 양들은 장인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였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의 불꽃 가운데 나타났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듯한 신비한 환상을 보았는데 실제로는 그 나무가 불타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불만 타는 희한한 광경이었다. 궁금하게 여긴 모세가 그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갈 때에 여호와께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계셨다. 그리고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그 때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모세가 더 가까이 오는 것을 금하시고 그의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다. 이는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려는 명령이셨다. 계속하여 하나님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며 얼굴을 가리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었다”(출3:7)는 말씀이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우리의 근심을 아시며, 우리가 고난당하는 삶의 현장에 찾아 오셔서 우리를 건지시고 인도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데려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 9장 27절 이하에 보면 앞을 못 보는 두 사람이 예수님의 곁에 가까이 쫓아오며 소리 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그 때 예수님은 저들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 때에 그 두 앞 못 보는 이들이 그 집 안에 까지  예수님을 찾아 들어 갔다. 예수께서 저들에게 물으셨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주여 그러하오이이다.”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 때에 저들 두 사람의 두 눈이 밝아졌다. 예수님은 저들에게 이 사실을 소문 내지 말라고 하셨지만 예수님의 이와 같은 소문은 온 땅에 퍼져 갔다. 부르짖으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에 가나안 여인이 부르짖어 소리 지르며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이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어찌된 영문인지 예수님께서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 여인은 계속하여 부르짖듯 소리 지르고 있었다. 제자들이 말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그를 보내소서”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그 때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간청하였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냉대하셨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런데 그 말씀하시는 그 시간,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 부르짖어 간청하고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부르짖으면 들이신다고 하였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게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고 하셨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도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라는 찬양 가사에 보면,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 합니다. 내 삶을 다해
 
라고 찬양하지 않나. 다 같이 한번 기도하는 마음을 부르도록 하자.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셔서 자녀 된 우리들이 믿음과 소망을 갖고 부르짖어 간구하면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절은,
땅 끝에서 부르짖는 마음 약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시는 하나님.
2절 후반절은,
마음 약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높은 바위에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
3절은,
원수를 피하는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4절은,
주의 장막에서 영원히 머물며 주의 날개 아래 피하여 안식하게 하시는 하나님

불난 닭장의 불에 탄 어미 품에 안겨 목숨 구한 병아리 몇 마리가 있었다지 않나. 미물도 제 새끼를 보호하거늘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들을 그의 사랑의 날개 깃 아래 숨겨 보호하시지 아니하시겠는가.

5절은,
서원하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5절 후반절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 기업을 주시는 하나님.
6절은,
장수의 복을 주시며 자손의 대에까지 그 복이 미치게 하나님.
7절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인자와 진리로 예비하사 보호하시는 하나님.
8절은,
영원히 찬양 받으실 하나님.
8절 후반절은,
날마다 서원을 이행할 만한 믿음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이 모든 말씀을 더 자세히 묵상하면 종일토록 말씀을 묵상하여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고 살자. 하나님이 반복하여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과 기드온과 드보라와 사무엘과 함께 하신 것처럼 오늘 날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어 간구하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부르짖어 하소연 하고, 부르짖어 매어 달려 기도하는 백성의 기도에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줄로 믿는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평소에 내려 주신 은혜를 아는 자이다.
 
미국 역사의 위대한 설교가요 목회자였던 필립 부룩스(Phillips Brooks, 1835-1893) 목사님은 25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보스턴의 트리니티 교회에서 33살 때에 담임 목회를 시작하여 22년 동안 목회하였다. 그는“인간이 하나님의 더 큰 은혜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적은 은혜에 알맞은 충실한 삶을 사는 길이다.”라고 교훈하였다. 그는 21살에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그 젊은 시절 한때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기를 소망해서 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너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이 더 강하듯이 그는 큰 실망에 빠져서 실패의 쓰라린 상처 때문에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 후에 목사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불러내신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의 이웃에 살던 어느 양복직공이 그의 설교를 듣고 돌아가서 편지를 보냈다.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에는 목사님의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합니다”이는 설교자의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영광스러움이 아닌가. 
 
옥스레이는 “만일 당신이 자신의 평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면 그 무슨 일을 만나고, 그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주께 부르짖어 간구하면 하나님은 들으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고백처럼,
 
높은 바위로 인도하시고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가 되시며
영원히 주의 전에 머물러 주의 날개 깃 아래서 안식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기업을 얻게 하시고
자자손손 하나님을 믿는 자의 왕과 같은 존귀한 삶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시며
인자와 진리로 예비해 주시며 보호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고 찬양하며 경배하고 경배하는 은총과 간증의 주인공 되게 하실 것이다.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가 그런 믿음과 부르짖음의 선지자가 아니었나.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골짜기의 마른 뼈 환상을 보여 주시고 그 마른 뼈에게 명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가 되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의 문지방에 졸졸 흐르는 물 줄기의 환상을 통하여 작게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가 나중 4천척의 강물이 되니 처음에는 발목과 무릎과 허리 정도에 차던 물이 헤엄칠 만한 범람하는 은혜의 강수가 되는 환상을 보여 주셨다. 그 4천척의 강물은 감히 사람이 헤엄쳐서 건널 수 ㅇ없는 큰 물줄기의 강물이었다. 그 강 좌우에는 나무들이 심히 많았다. 그 물이 임한는 곳마다 바다의 물이 되 살아 났다. 그 강물이 임하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들이 살고 고기가 심히 많아졌다.  그 물이 흘러들어 가는 곳에 어부가 그물을 치니 각기 종류대로 큰 물고기들이 넘쳐 났다.  강 좌우에는 각종 먹을 과실 나무가 자라나서 그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끊이질 않게 되리라고 하셨다.  달마다 새 열매를 맺고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흘러나온다고 하셨다.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하셨다.  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가정마다 인생마다 범사에 부르짖어 간구함으로 이와 같은 회복의 은총을 누리며 증거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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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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