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26-38, 골3:1-11) 2014. 12. 21
“도행지이성 물위지이연”(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이란 말이 있다. 4세기에 활동한 중국 장자(莊子)가 자기 이름을 따서 지은 책인 <장자>(莊子)에서 한 말이다. “길은 다녀서 만들어지고 사물은 불러서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그 중에 특별이 “사물은 불러서 그렇게 된다.”는 표현은 성경의 내용과 상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창세기 2장 19절과 20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 세상 만물들 중에서 각종 가축과 들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르도록 하시므로 그것들의 이름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창세기 2장 23절에 보면 돕는 배필로 만들어 주신 아내를 향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하고 그 이름을 ‘여자’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 중에 복을 받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직접 지어 주셨다.
고대 근동에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던 이들은 적지 않았다. 이사야서나 미가서를 통하여 예언되어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을염원하는 이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분이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접한 이들 가운데는 언제나 항상 메시아가 오시기를 고대하는 기다림이 컸다. 그런데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주인공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나 그 어느 고관대작이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그 어떤 권세가의 그 누군가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유대 당 갈릴리의 나사렛 마을에 살던 목수 요셉과 정혼하고 결혼을 기다리던 마리아를 만나게 하셨다. 마리아를 만난 천사는,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고 문안 인사를 전하였다. 마리아는 천사의 방문과 그와 같은 인사말을 듣고는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에 천사가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0-31)
고 말하였다. 천사는 계속하여 장차 마리아를 통하여 태어나게 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예언하여 주었다.
그가 큰 자가 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다.
이런 거창한 예언의 말씀들이 쏟아져 들려 올 때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했다.“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다.”그 때에 천사가 다시 설명해 주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1:35)
그리고 이미 여섯 달 전에 친척인 연세 많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수태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면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그 때에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천사가 그의 곁을 떠나갔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 말씀 가운데 있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말씀을 제목으로 삼고 은혜를 나누기를 원한다. 마침 요즘 날마다 묵상하는 골로새서의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란 표현 대신에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이 세상에 부활을 전하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 밖에는 없다. 이 땅의 모든 종교들은 그 창시자의 무덤을 소중히 여긴다. 여러해 전에 서남아시아 선교 대회에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방문하였던 스리랑카에는 부처의 이빨을 모신 사찰이 있다고 들었다.그 이름이 불치사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처의 이빨을 보기 위해서 먼 다른 나라에서도 그 땅, 스리랑카를 방문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이 없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이 땅에는 예수의 무덤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골로새서 2장 20절 말씀처럼 초등학문을 믿고 따르던 상태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지라도 이 세상에 속한 자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 중에서는 세상의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빠져 지내거나 천사 숭배나 우상 숭배에 빠져 지내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 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도는 땅에 것만 추구하지 말고 위에 것을 찾으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에 것을 찾는 자들의 모습이란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왜 오신 것일까.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게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
는 말을 남겼다. 그는‘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중세시대인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이 나름대로의 자기 생각 즉 자기 사고의 직관(直觀)의 영역에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인간이 아무리 신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진리를 추구할지라도 결국은 진리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고 기독교의 진리를 높여 주창한 철학자였다. 그러나 파스칼이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다’는 주장에 반하여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진리의 발견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을 갖게 한다.’는 의견을 펼쳐 나갔다. 데카르트는 ‘자유의지는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져 있는 신의 임재의 상징이어서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칭찬과 비난을 받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데카르트가 바울을 좀더 자세히 연구했다면 골로새서 말씀처럼 좀더 쉽고 좀 더 분명하게 말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위엣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꾸준히 계속하여 끊임없이 위의 것을 상고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동반하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말은 언제나 마음에 품고 몰두하는 것을 말씀한다. 인간이 매사에 내면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분부이다. 사람은 그 생각하는 바가 곧 그 사람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3장 14절 말씀처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심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같은 심정으로 고백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만 할 것이다.
반면에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 세상을 염세적으로 살고 세상 도피적이요 금욕주의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조는 아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몸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더우면 더위를 느끼고 추우면 추위를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너무 몹시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게 되어 있고 견디기 어렵게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게 마련이다. 인간은 몸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배가 고프면 먹을 것 찾고 목이 마르면 마실 것을 찾게끔 되어 있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잠자고 싶은 본능은 그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런 본능적인 것 자체를 금하여서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명한 것은 아니다.
옛날에 미국의 어느 소년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5불짜리 종이돈을 주웠다. 그 후로 그 소년을 늘 땅을 내려다보면서 무엇인가를 줍는 생활에 매여 살게 되었다. 결국은 해결되지 않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는 평생 땅만 내려다보면서 무엇인가를 주우며 살았다. 그가 평생토록 주워 모은 것은 단추 29,519개, 머리 핀 54, 172개와 수천 개의 동전들과 그 외의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이었다. 그 소년은 나이가 들어서도 평생을 늘 땅만 내려다보면서 살았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푸른 하늘의 변화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 아름다운 꽃들과 새들과 나무들과 풀과 숲과 산과 강과 바다를 볼 기회가 없이 살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1절가 2절의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물리적인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갖고 살아가라’는 명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사는 성도라면 하나님 안에서 선과 의와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삶이란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계속하여 가져나가는 모습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자는 없다. 그러므로 3절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나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다. 4절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말씀으로 계시면 이미 나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생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신비요, 신앙생활의 신비이다.
인간이 자동차도 발명하고, 바퀴도 만들고 튜브도 만들고 타이어도 만들지만 그 타이어의 속에 공기를 가득 채우고 시속 100km가 훨씬 넘는 쏜 살 같은 속력으로 고속도로를 하루 종일이라도 달려 갈 수 있는 힘은 그 타이어 속에 보이지 않지만 가득 찬 공기의 혜택이 대단한 것이다. 자동차의 모든 기능이 다 좋아도 타이어에 바람을 넣지 않으면 꼼짝을 할 수 없다.
한 달씩 두 달씩 바다 속 깊은 곳에서 활동하는 잠수함 속에도 별의 별 생활 필수품이 다 있고 식량과 물이 있더라고 일정한 산소가 충분하게 공급되지 않으면 다 죽고 말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지만 이 몸에 갇혀 지내는 이 땅에서의 육체가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만 한다.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게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나면 그 생각과 말과 습관과 인격이 변화되게 되어 있다. 예전에 즐기던 옛 습관들을 떨쳐 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하면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게 되어 있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우상 숭배와 같은 탐심”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예전의 악한 습관들을 끊어 버리게 되어 있다. 바울이 언급한 땅에 속한 옛 사람의 행위들이란 성적인 문란, 도덕적인 문란, 감정적인 사욕들과 죄악에 가득 찬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들과 경제적으로 추구하는 끊임없는 욕망들을 언급한 것이다. 인간은 욕망과 탐심에 빠지기 시작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자리에 재물을 섬기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낡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옛 사람의 모습이란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입의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들이라”고 하였다. 분함이란 마음속의 분을 말하며 노여움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분을 말한다. 악의란 타인을 의도적으로 해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비방이란 하나님께 불경스럽게 대하며 사람에 대하여 중상 모략하는 것을 말한다. ‘부끄러운 말’이란 ‘아이스크롤로기아’란 신약성경에 여기만 나오는 표현으로 ‘음란한 말’ 혹은 ‘비방하는 말’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8절의 ‘거짓말’이란 사실과 진리를 왜곡시키는 악한 말을 지적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 44절과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지적하신 바가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는 진리를 떠난 상태에서 살면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점만 고집하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신 예수님의 쓴 소리이시다.
이러한 거짓말에 휩싸여 버리면 정당이라고 해체되고 국회의원직이라도 빼앗기게 되고 정부라고 흔들거리게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서로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 거짓말하는 자리에 함께 있는 이들이 그 거짓말에 오염되어서 서로가 다 불행해 지고 만다. 이는 개인이나 그 어떤 조직이나 단체나 국가라도 다 마찬가지이다. 거짓말은 서로의 관계를 무너트린다. 거짓말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불행하고 참담한 결과를 가져 오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한 십계명 중에서도 제 9 계명으로“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신 것이다. 사탄은 거짓말하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비집고 들어와서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큰 죄악에 휩싸이게 하고 만다. 그러므로 “너희가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은 성도들을 사랑하셔서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주님의 명령이시다. 거짓말하면 불행해지고 정직하고 진실하면 그 나중 상급이 크게 될 것이다.
새 사람을 입게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새 사람의 새 옷을 입게 해 주시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나 할머니가 읍내 시장에 다녀오시면 새 옷이 생겼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여러 가지 색으로 되어 있는 내복이 유행이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죄악에 빠진 백성들을 그 죄와 악에서 건져 낼 뿐만 아니라 죄와 악의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구원 받은 성도의 새 옷을 갈아입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처럼 ‘새 옷을 입으라’는 말씀이시다.
우리가 여러 해째 후원하고 있는 ‘교정선교회’는 교도소 수형자들을 교화하는 사역을 하는 선교기관이다. 이번 연말 보고회에서 들어 보니 수형생활을 마치고 죄수의 옷을 벗고 새 사람의 사회 시민으로 다시 돌아 와서 교도소 안에서 배운 기술을 갖고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일자를 찾아 정착해 가는 이들에 대한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자그마하게 제빵가게를 낸 이도 있었다. 양복, 수선, 미장, 벽돌공, 배관 수리공 등 각종 자격증을 따 가지고 세상에 나와서 새 사람의 옷을 갈아입고 새 삶을 출발하는 이들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에 마음이 뭉클해 졌다.
우리가 새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그 동안 입던 땀 내나고 더럽고 낡은 옷을 벗어 버려야 하지 않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가 그러하였듯이 본문에서도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7절에서는 ‘전에는’이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이제는’이라고 하였다. 9절에서는 ‘옛사람’이라고 하였고 10절에서는 ‘새 사람’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새 사람’이란 죄와 의문에 대하여 죽고 의와 생명에 대하여 다시 산 거듭난 신분을 말씀하는 것이다. 2000년 전이나 오늘 날이나 옷이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군인의 옷이 있다. 운동선수의 옷이 따로 있다. 왕의 옷이 따로 있고 평민의 옷이 따로 있다. 남자와 여자의 옷이 구별 된다. 그 어느 시대나 죄인이 입는 옷이 따로 있다. 자기 회사를 드러내는 그 회사만의 사원 복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옷이란 그 사람의 신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옛 사람의 옷을 벗고 새 사람의 옷을 입듯이 악인의 옷을 벗고 선인의 옷을 갈아입어야만 한다. 거짓의 옷을 벗고 진실의 옷을 갈아입어야만 한다. 악의 옷을 벗고 선한 사람의 착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 대통령은 정의와 공의의 편에 섰다가 불의 한 정권의 압제에 밀려 감옥의 독방에 갇힌 채 27년간이나 죄수의 옷을 입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입고 있던 남루한 죄수의 옷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 갇힌 자였으나 그의 마음의 옷은 언제나 새사람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27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오히려 담대하였다. 44살에 감옥에 갇힌 그는 27년 만인 72살에 세상에 나아와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4년 후에 그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남아공의 템프 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4살에 변호사가 되었다. 흑인의 인권 회복 운동에 평생 앞장서던 그가 감옥에서 나온 후에 그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아프리카 국민회의 전국 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지도력은 350년 만에 백인들의 압제로부터 인종 분규의 갈등을 종식시키는 선언을 이끌어 냈고 협상을 성사시켰다. 소수 백인의 힘에 의해서 다수 유색인종이 정치, 경제적인 불이익과 차별 대우를 받도록 만든‘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킨 공로가 인정되어 감옥에서 나온 지 3년 후에 노벨 평화상을 탔다. 그 다음 해에는 남아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넬슨 만델라! 그는 평범한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과 진리와 자유를 아는 자의 새 사람의 옷을 입고 평생을 살려고 씨름했던 시대적인 인물이요 거장의 삶을 95년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지금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이 입고 살아가는 옷이 신앙적으로 새로운 옷이라면 언제라도 담대하여야만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도된 우리들의 인격과 신앙양심이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새 사람이란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를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첫 인간인 아담을 통하여 인간 세상에 들어온 불순종으로 인한 죄악을 해결하시려고 둘째 아담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을 재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도들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로 다시 빚어진 영광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감사하고 경배하는 것은 동방 박사들이나 베들레헴의 목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오늘 날 천하 만민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경배하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재창조의 은총을 넉넉히 새 옷을 입듯이 덧입는 자들이다.
우리 성도들을 구속하시고 지명하여 불러 내신 하나님 아버지는 스스로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그렇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창조의 주님이시다. 그 창조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이 좋은 계절,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기에 나를 향하신 주님의 이 같은 부르심을 감사하며 구원 받고 거듭나고 영생의 소망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우리의 영과 혼과 육에 새 사람의 의와 진리의 새 옷을 입고 살아가는 은총과 평화가 넘쳐 나기를 소망한다. 아멘